이해갈등의 산물, 트랜스크립션 디스크와 V-디스크 그리고 패츠 월러

황덕호의 JAZZ RECORDING HISTORY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5월 1일 12:00 오전

‘라디오 시대’가 도래하며 방송사나 음반사, 연주자 사이의 갈등은 새로운 음반 산물을 만들어냈다

전기 녹음이 시작되고 4년 뒤인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은 음악 시장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공황 이전이던 1927년 연간 1억 장 팔리던 음반이 공황 이후인 1932년에에는 판매 600만 장으로 줄어들었다. 축음기 판매 역시 연간 100만 대(1927년)에서 4만 대(1932년)로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런 불황의 한파 탓인지 셸락 재질의 지름 10인치 원반 양면에 음악을 담은 78회전 디스크(표준음반, SP)라는 음반의 포맷은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변화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바로 라디오의 탄생과 대중화였다. 1920년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 후 이 매체는 급락한 음반 시장을 대신해 미국인들에게 음악뿐 아니라 각종 정보를 전달해줬다. 1929년 파산한 빅터 레코드를 방송사인 RCA가 인수했고, 1938년 CBS 방송도 컬럼비아 레코드를 인수하면서 바야흐로 ‘라디오 시대’가 문을 연 것이다. 애초 축음기 제작으로 시작해 음반 제작으로 손을 뻗은 빅터와 컬럼비아가 어느새 축음기와 결별하고 방송사와 손을 잡은 것은 대략 30여 년의 시간 속에서 음반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방송사와 음반사의 결합은 당연했다. 방송이 음반 판매를 촉진시킨다는 점은 이미 명백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빅터와 컬럼비아는 고민에 빠졌다. 만약 그들에게 방송사가 없었다면 그들은 다른 라디오 방송에서 자신들의 음반을 방송하는 것을 그저 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매사인 방송사가 있었고, 더욱이 그들의 음반은 데카 레코드의 음반을 포함해 1930년대 미국 음반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빅터와 컬럼비아는 다른 방송사에게 그들 음반의 사용권 지불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방송사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여타 방송사에서는 아티스트들이 방송에 출연했을 때 그 연주를 직접 녹음해 음반으로 제작, 계속 방송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하게 됐다. 아울러 랭 워스 레코드, 월드 레코드 같은 몇몇 군소 회사는 일반 소비자가 아닌 방송국을 대상으로 판매할 음반을 제작하려는 아이디어를 갖게 됐다. 소위 ‘트랜스크립션’(transcription, 녹취 기록) 레코드라 불리던 음반이었다.

이 음반이 오로지 방송용으로만 쓰여야 한다는 것은 아티스트와 방송사 모두에게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일반 가정과 업소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특수한 방송 장비에서만 재생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1935년 처음 만들어진 이 음반은 결과적으로 10여 년 뒤 탄생할 LP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었다. 음반의 직경은 16인치로 78회전 음반(10인치)은 물론이고 LP(12인치)보다도 컸으며, 1분당 33과 3분의 1 회전하는 턴테이블에 1면당 수록 시간은 (아직 마이크로그루브가 고안되기 전이었으므로) 15분 정도에 이르렀다. 아울러 음반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정보를 읽어 들어가는 78회전 음반과는 달리 안쪽에서부터 바깥쪽으로 정보를 읽어가는 소위 ‘센터 스타트’ 방식을 취했다.

방송사와 음반사 간 이해갈등이 트랜스크립션 디스크를 만들어냈다면, 아티스트와 음반사 간 이해갈등은 결과적으로 1943년부터 1949년까지 발매되었던 V-디스크에게 역사적 가치를 부여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개입을 결정한 미 정부는 전시 물량 확보를 위해 연주자들이 출연하는 업소에 중과세를 부과하자 업소들은 그 부담으로 일급 연주자들을 무대에 출연시키지 못했고, 그러자 수입이 줄어든 연주자들은 그들의 단체인 AFM(미국 연주자 연합)을 통해 당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음반 판매당 인세를 음반사들에게 요구하며 1942년부터 빅터·컬럼비아·데카 레코드를 상대로 녹음 파업에 들어갔다. 1944년 인세 지불에 합의하면서 이 파업은 끝났지만 주요 아티스트들은 이 기간 동안 음반사와 거의 녹음을 남기지 못했다. 단지 예외가 있다면 미 정부에서 해외 파병 미군들을 위해 제작한 V-디스크가 유일했다.

육군과 해군에서 장병들을 위해 제작한 비매품인 V-디스크는 셸락 재질이 쉽게 깨진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훗날 LP에서 일반화되는 바이닐 재질을 처음 사용했으며, 78회전 턴테이블에서 한 면당 6분 30초 정도를 수록할 수 있는 직경 12인치 크기의 음반이었다. 거의 모든 음악인이 파업에 동참했던 기간에도 미 정부로부터 부름을 받은 유명 음악인들은 전쟁 시기에 V-디스크 제작에만은 기꺼이 참여했다.
방송사, 음반사, 연주자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고 전쟁도 끝나면서 트랜스트립션 디스크와 V-디스크는 사라졌지만, 한 면당 3분 안팎을 수록하던 78회전 SP와는 달리 6~15분씩 수록할 수 있는 두 음반은 재즈 연주자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즉흥연주는 실제로 훨씬 더 길게 연주되었음에도 기존의 SP는 오로지 3분 내외로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음반 제작자를 설득해 3분의 벽을 넘어 녹음하려는 연주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밴드는 SP 녹음 때 사용한 편곡을 그대로 사용해 3분 안팎에서 녹음을 마쳤고, 트랜스크립션 디스크 한 면에 다섯 곡을, V-디스크에는 두 곡을 담았다. 마치 새장 문이 열려도 날지 않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 피아니스트로 불리던 패츠 월러는 두 종류의 음반을 모두 녹음하면서 3분의 벽을 과감하게 깨뜨린 선구자다. 1939년 피아노 독주로 녹음한 ‘Tea for Two’에서 그는 트랜스크립션 디스크의 러닝 타임을 이용해 이전에 없었던 환성적인 전주곡을 붙여놨다. 1943년 9월 V-디스크 녹음에서 패츠 월러는 전대미문의 해먼드 오르간 B3 독주를 남겼는데, 특히 ‘Some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의 엄숙함과 완벽한 기교는 상업용 음반들이 굳이 담으려고 하지 않았던 패츠의 진지한 예술성이 농축돼 있다. 재즈를 단순한 실용음악으로 여기던 시절, 재즈는 단명한 음반 포맷을 통해 자신의 본 모습을 슬쩍 남겼던 것이다.

이 달의 추천 재즈음반

1. 패츠 월러‘The Definitive Fats Waller’
JZCL 5004|1935년 3월 11일 녹음|패츠 월러(피아노·보컬)/루디 파웰(클라리넷·알토 색소폰)|1939년 8월 7일 녹음|패츠 월러(피아노·보컬)/진 세드릭(클라리넷·테너 색소폰)/존 해밀턴(트럼펫)/존 스미스(기타)/슬릭 존스(드럼)]

2. ‌패츠 월러‘V Disc’
Collectors’ Choice/17742 66722|1943년 9월 녹음|패츠 월러(피아노·오르간·보컬)/진 세드릭(클라리넷·테너 색소폰)/존 해밀턴(트럼펫)/존 스미스(기타)/슬릭 존스(드럼)]

글 황덕호
KBS 1FM ‘재즈 수첩’을 17년 동안 진행하고 있다. ‘평론가’보다는 ‘애호가’가 되기 위해 오늘도 쓰고, 듣고, 틀고, 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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