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크 사티 ②

시대를 앞선 음악 발명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9월 1일 12:00 오전

1866 프랑스 옹플뢰르에서 출생
1905 파리 스콜라 칸토룸 입학
1913 ‘메두사의 함정’ 작곡
1915 장 콕토와 만남
1917 발레곡 ‘파라드’ 작곡 작곡가 모임 ‘새로운 젊은이’ 결성
1917·1923 ‘가구 음악’ 작곡 1924 발레곡 ‘메르퀴르’ ‘휴관’ 작곡
1925 프랑스 아르쾨이에서 사망

에리크 사티(1866~1925)는 갈수록 궁핍해졌고, 더 이상 몽마르트르에서 버틸 수 없었다. 결국 1898년 파리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아르쾨이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고는 풀을 먹여 빳빳하게 옷깃을 세운 셔츠에 말쑥한 정장을 입었고, 높고 끝이 둥근 중산모를 썼으며, 겨드랑이에는 항상 우산을 끼고 다녔다. 우산은 비가 오는 날에도 절대 펴지 않았다. 종교와 신비에 대한 관심도 거의 사라졌다. 동생 콩라드와는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현실적인 사안과 돈에 대한 내용이었다.
사티는 여전히 카페와 카바레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대중음악에 가까운 곡들을 작곡했다.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나는 당신을 원해요’(Je Te Veux)를 비롯해 ‘사랑스럽게’ ‘엠파이어 극장의 여가수’ 등의 노래와 ‘금가루’ ‘피커딜리’ 같은 관현악 소품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가볍고 달콤하면서도 해학 가득한 음악들은 곧 인기를 얻었고, 사티에게 실질적인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진지한 무대를 위한 작곡도 병행했다. 팬터마임 음악 ‘상자 속의 잭’(1899), 희가극 ‘준비에브 드 브라방’(1899~1900), 피아노곡 ‘꿈꾸는 물고기’(1901) 등이 아르쾨이 초기 작품들이다. 카페 음악과 재즈 등 대중적 요소가 가미됐지만, 카페를 위해 쓴 것은 아니었다. 사티는 이 곡들의 악보를 분실했다고 말했는데, 황당하게도 악보는 사후 그의 집 구석구석에서 발견되어 초연됐다. 음악학자 오르넬라 볼타는 이 작품들이 드뷔시적 요소가 많다고 지적하며, 사티가 드뷔시의 아류로 비칠 것을 우려해 일부러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했다. 진지한 음악을 쓸 때면 자신도 모르게 드뷔시화되는 당시 프랑스 작곡가들의 경향에서 사티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고전주의자 또는 아방가르드 예술가
사티의 특이한 결정 중 하나는 39세였던 1905년 가을, 파리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한 것이다. 아마 파리 음악원을 졸업하지 못한 열등감과 드뷔시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티는 이 학교에서 당대의 거장 뱅상 댕디와 알베르 루셀의 제자가 되어 착실히 고전 대위법을 공부했고, 1908년 그렇게도 원하던 음악원 졸업장을 받았다(사실 그에게 졸업장은 작곡을 계속해도 좋다는 중간 점검 차원의 디플롬이었다). 이후에도 공부를 계속하여 5년이 넘는 기간을 스콜라 칸토룸에서 수학했다.
이러한 행보에 따르면 분명 사티는 과거 음악의 연장선에 있었다. 낭만적인 주제나 바그너적 화음뿐 아니라, 고전적인 대위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드뷔시는 사티를 ‘대위법 씨’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심지어 ‘5개의 녹턴’(1919)은 ‘포레로의 회귀’라는 평가를 받았다. 스트라빈스키는 사티의 신고전주의적 모습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오페라 ‘마브라’(1922)의 서곡을 “사티의 스타일을 모방하여 작곡”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티의 음악은 전통적 주제 발전 방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또 화음이 복잡하고 두터워지던 당시의 경향과 정반대로 가볍고 투명한 텍스처를 지닌다는 점에서 새로운 음악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긴 음악을 작곡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3분 만에 6곡을 완주하는 작품인 ‘메두사의 함정’(1913)까지 등장했다. 이는 훗날 신빈악파의 무조음악에서도 나타나는, (드뷔시가 지적했듯) 형식의 부재에서 연유한, 당시의 새로운 음악이 지닌 과도기적 모습이었다. 이후 그는 장 콕토와 여러 다다이즘 예술가들과 조우하면서 ‘최초의 아방가르드 음악가’라고 불리게 된다.

‘아르쾨이 악파’의 탄생
사티의 새로운 시도는 젊은 작곡가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1910년 라벨과 그의 추종자로 구성된 ‘젊은 라벨파’는 사티를 드뷔시보다 선구적인 작곡가로 선언했고, 이들은 사티가 무명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인정하는 작품은 스콜라 칸토룸 이전의 것임을 주지해야 한다(라벨은 사티의 칸토룸 입학을 실수라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녜스가 ‘(개를 위한) 4개의 엉성한 전주곡’(1912)을 초연하는 등 사티의 신작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줄 사람을 찾아야 했다.
1915년 4월 사티는 드디어 그 인물을 만났다. 바로 장 콕토였다. 콕토는 ‘배 모양의 3개의 소품’에 감동하여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의 음악을 맡기는 등 사티를 알리기 위해 힘썼다. 사티-콕토 간 협업의 정점은 발레곡 ‘파라드’(1917)로,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위촉하고 콕토가 대본을 썼다. 1917년 초연은 안무에 레오니드 먀신, 무대미술과 의상에 파블로 피카소 등 호화 군단으로 이뤄졌다.
사티는 ‘파라드’로 단숨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던 당시 청중은 그의 작품을 독일 스타일이라고 비난했고, 전쟁 가운데 해학적인 작품을 선보인 것을 불쾌하게 받아들인 일부가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작품에 사이렌·타자기·권총 등의 소음을 이용한 사티는 진정한 다다이스트로 불렸다(이는 조지 앤타일의 ‘기계적 발레’보다 7년이나 앞섰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초연 프로그램 해설에서 ‘초현실주의’를 언급했다.
사티와 콕토를 중심으로 ‘새로운 젊은이’(Les Nouveaux Jeunes)라는 작곡가 모임도 결성됐다. 훗날 프랑스 6인조(Les Six)로 불리게 된 이들은 드뷔시의 인상주의와 바그너의 복잡한 음악을 거부하면서 사티를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6인조의 일원인 조르주 오리크는 “우리는 (사티에게서) 단순함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새로운 젊은이’를 탈퇴한 사티는 다다이스트였던 트리스탕 차라를 만났다. 1919년의 첫 만남 이후 마르셀 뒤샹·만 레이·앙드레 드랭 등과 함께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활동했으며 차라와 갈등을 일으킨 미래주의자 앙드레 브르통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전방위적 활동을 펼친 사티는 파리의 예술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앙리 소게·막스 자코브와 같이 사티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젊은 작곡가들도 나타났다. 그들은 사티를 ‘아르쾨이의 위대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며 1923년에는 스스로를 ‘아르쾨이 악파’라 칭했다.
1923년 사티는 평소 싫어하던 평론가와 콕토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콕토와 결별을 선언했다. 이듬해엔 ‘파라드’의 공신이었던 피카소, 먀신, 발레 뤼스가 다시 뭉쳐 피카소의 무대미술을 음악적으로 해석한 ‘메르퀴르’(1924)를 작곡했다. 사티의 마지막 작품이 된 발레곡 ‘휴관’(1924)은 디아길레프의 거절로 발레 쉬에두아(파리를 중심으로 한 스웨덴 발레단)가 초연을 맡았다. ‘휴관’은 공연이 취소될 때 포스터에 적혀 있는 문구를 패러디한 것이었는데, 초연 당일 주역이었던 예안 뵐린의 건강 악화로 실제로 공연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프랑시스 피카비아는 ‘휴관’의 중간 휴식 시간을 위해 영화감독인 르네 클레르에게 영화 ‘막간극’을 의뢰했으며, 클레르는 사티에게 출연을 요청했다. 영화에서 검은 정장에 중산모를 쓰고 우산을 들고 있는 사티 생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산티아고 루시뇰 ‘사티의 방'(1891)

기행에 숨어 있는 이중성
사티의 음악이 기이해 보이는 데에는 ‘바싹 마른’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머릿속을 여시오’ ‘치통을 앓는 꾀꼬리처럼’ 같은 비음악적 지시도 한몫했다. 특히 연주자는 이러한 표현 앞에서 공감각적 해석과 전달을 시도한다. 이것은 음악을 통해 다른 감각을 돋우는, 즉 실용적인 마인드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의 극단을 달리는 작품이 ‘가구 음악’(1917·1923)이다. 가구처럼 옆에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 음악이라는 의미로, 사티는 청중이 이 작품에 절대로 집중해서는 안 되며 꼭 다른 무언가를 하면서 흘려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구 음악’은 앙상블을 위한 작품으로 악보에 그려 있는 단 4마디를 끝없이 반복한다. ‘짜증’의 확대증보판이자, 40년 후 뉴욕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킬 미니멀리즘 음악의 원형이다.
사티가 음악에서 보여준 기이한 행동들은 자신의 하루 일과에 대한 설명에서 절정에 이른다.
오전 7시 18분 기상, 10시 23분~11시 47분 영감을 얻음, 오후 12시 11분 점심식사 시작, 12시 14분 식탁에서 일어남, 점심은 흰색 음식만 먹음, 1시 19분~2시 53분 말을 타고 나의 땅을 돌아봄, 3시 12분~4시 7분 영감을 얻음, 4시 21분~6시 47분 다양한 활동, 밖을 걸을 때는 뒤를 조심하고 주의하여 숨을 쉼, 오랜 시간 패션 잡지를 보고 흰색 모자와 흰색 양말, 흰색 조끼를 입음, 7시 16분 저녁식사 시작, 7시 20분 식사 끝, 8시 9분~9시 59분 큰 소리로 교향적 독서, 10시 37분 피곤을 느낌, 침대는 원형이고 머리를 위한 구멍이 있음, 오직 한 눈으로 취침, 시종은 매시간 체온을 측정, 화요일은 3시 19분에 기상.
사티의 재정 상태나 대외 활동을 미루어보아 며칠이나 이 일과를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삶과 예술이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이 점에서 플럭서스와도 연결된다) 사티는 이 지킬 수 없는 일과로부터 예술가이지만 예술가일 수 없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그는 경건한 종교 생활을 하면서 유흥업소에서 일했고, 교외에 살았지만 도시를 매일 방문했으며, 작곡가면서도 악보보다 일러스트와 캘리그라피를 더욱 많이 남겼다.
작곡가로서 명성을 누리기 시작할 즈음 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됐다. 술 때문이었다. 결국 60세를 한 해 남겨둔 1925년 7월 1일, 사티는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6인조 가운데 사티와 절친하던 다리우스 미요와 동생 콩라드, 그리고 젊은 친구들이 사티의 집을 찾았다. 그곳은 사티 이외에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오직 (‘엉성한 전주곡’의 주인공인) 길 잃은 개들만이 방문할 수 있었던 성역이었다.


▲ ‘가구 음악’ 중 ‘강철 태피스트리’의 악보

방문을 열자 그들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한 번도 입지 않은 듯한 12벌의 동일한 회색 벨벳 정장과 모자들, 상당한 수의 우산들, 중세풍 캘리그라피와 일러스트가 그려 있는 종이들…. 가장 기가 막혔던 것은 위아래로 놓인 두 대의 그랜드 피아노였다. 위에 놓인 피아노에는 현이 없었으며, 개봉되지 않은 편지와 소포로 가득했다. 곳곳에서 여러 음악 작품도 발견됐다. 사티가 잃어버렸다던 ‘상자 속의 잭’은 피아노 뒤와 벨벳 정장의 주머니 등 다양한 장소에서 나왔다. ‘짜증’ ‘준비에브 드 브라방’ ‘꿈꾸는 물고기’ ‘그노시엔느’의 일부, ‘차가운 작품’ ‘가구 음악’ 그리고 스콜라 칸토룸 시절의 습작들도 발견됐다.
미국에서 사티의 음악을 알린 사람 중에 존 케이지가 있다. 쇤베르크가 “작곡가라기보다 발명가”라 수식한 이였다. 특이하게도 1928년 라벨은 미국 라이스 대학의 강연에서 사티를 “특이한 것을 탐구하는 발명가”라고 표현했다. 발명가는 발명가를 알아본 모양이다.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빛을 본, 시대를 앞선 천재 ‘발명가’는 자화상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아주 늙은 시대에 너무 젊게 태어났다.”

글 송주호 클래식 음악에 대한 기고와 강의를 하고 있으며, 음악회 프로그램을 짜거나 해설자로 무대에 서기도 한다. 현재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자문위원이자 현대음악앙상블 소리의 프로그래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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