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 강신일·김도빈

연극이란 팔레트 위에서 덧발라지는 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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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월 7일 9:00 오전

INTERVIEW

인물에 다가서기 위한 소리 없는 아우성

 

 

배우와 캐릭터 사이 간격은 어느 정도가 적절할까. 자신은 없어진 채 온전히 캐릭터의 모습으로만 존재해야 할까, 본인의 개성을 더해 인물의 새로운 면을 끌어낼 줄 알아야 할까. 그렇다면 자신과 닮아있는 캐릭터를 표현하기가 더 쉬울까. 만약 본인과 상반된 성향의 인물을 표현해야 할 때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극 ‘레드’에서 색면 추상의 대가인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역을 맡은 배우 강신일은 로스코와 묘한 교차점을 갖고 있었다. 본인이 펼치는 예술에 대한 강인한 신념은 둘 사이의 교집합을 이루고 있었으나, 여집합의 여백도 꽤 넓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비주류가 되는 것과 같다는 강신일은 인터뷰 내내 자신을 겸손하게 낮췄고, 자신이 펼치는 연기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극 중 로스코의 조수이자 끊임없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켄 역할의 배우 김도빈은 그와는 다른 자신의 모습 때문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모든 무대는 캐릭터와 나 사이의 필연적인 간격을 갖가지 색깔로 채워가는 시도이리라. 배우 강신일과 김도빈은 생전의 로스코가 강한 애착을 보였던 ‘레드’로, ‘레드’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강한 생명력으로, 그 간격을 조금씩 메워가고 있었다.

 

강신일

비주류, 주류, 다시 비주류

마크 로스코가 그림을 통해 예술을 말했다면, 배우는 연기로서 예술을 표현한다. 당신은 왜 연기하나? 처음 극단 연우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던 건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이 사회에 작게라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당시 연우무대는 창작극만을 고집하고 있었고, 나 역시 우리 이야기를 우리 식으로 풀어내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당대 불합리했던 제도나 주류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경우가 생겼다. 연극을 포함해 다양한 매체에 출연하고 있는 지금도 1년에 1편씩은 꼭 연극에 참여하려고 한다. 달라진 외부 환경으로 인해 연극을 시작했을 때 가졌던 목표 의식이나 열정이 사그라진 것은 아닐까 자신을 되돌아보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연극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 매일 무대에 서는 배우들은 어제와는 또 다른 오늘의 무대를 보여주려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새로운 공연을 올리는 것이고, 공연 내내 깨닫지 못했던 아주 사소하고 작은 지점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순간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낀다.

극단 연우무대에서 맡았던 역할들과는 다르게 최근 국립극단 ‘록앤롤’의 막스나 연극 ‘레드’의 마크 로스코는 기성세대를 대변하는 역할인데. 기성세대를 대변하는 역할이기는 한데,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신진세대들에게 밀려나는 이들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는 비주류가 되는 것이다. 막스나 마크 로스코는 한 시대를 풍미한 담론을 제시했던 인물들이지만, 세월을 겪으면서 신주류, 신세대, 새로운 가치관으로부터 조금씩 떠밀려간다는 점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다.

먼저 ‘록앤롤’의 막스는 대단한 공산주의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공산주의 이념을 지켜내던 사람인데, 막상 소련이 프라하를 침공하자 자신의 제자였던 체코의 한 청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공산주의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대신 소련이 탱크를 이끌고 프라하를 침공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며 공산주의자로서 사과를 표한다. 그러나 아내의 죽음 등을 거치며 막스는 결국 공산당을 탈퇴하게 되는데, 이것이 ‘레드’의 마크 로스코와는 다른 지점이다. 로스코는 피카소의 입체파를 물리치고 추상표현주의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를 펼쳐 보인 인물이었다. 그가 젊었을 땐 그가 추구하는 바가 신주류였을 거란 말이다. 이후 앤디 워홀이나 리히텐슈타인을 필두로 한 팝아트가 등장하게 되고, 그의 벽화 작업을 돕기 위해 고용된 조수 켄은 닥쳐오는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끊임없이 로스코를 종용한다. 그러나 로스코는 끝까지 자신의 예술 세계를 지켜낸다. 대신 켄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한다. 막스가 새로운 물결에 적응하고 만 것이라면 로스코는 자신을 버리는 선택을 하면서까지 신념을 지켜낸 것이다.

2011년 한국 초연 이후 벌써 네 번째로 마크 로스코 역할을 연기한다. 이번 시즌 출연이 망설여지진 않았나? 이미 2013년 두 번째 공연에서부터 망설임이 있었다. 어떤 역할이 ‘반드시 이 사람이 해야 해’라거나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라며 특정인을 위한 것처럼 굳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희곡은 다양하게 공유되어야 하는데, 다양한 관객이 와서 봐야 하는 것도 있지만 연기하는 배우들도 다양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초연에 참여해 작품을 잘 소화해냈다는 자부심은 있다. 망설임 끝에 결국 출연을 결심한 이유는 스스로 반성하는 계기를 다시 한번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마크 로스코라는 대단한 예술가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로도 영광이지만, 기성세대와 신진세대 간의 갈등은 미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네 인생의 이야기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반복될 숙명이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것을 고집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대 간 소통과 교류가 있어야만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되뇌는 중이다.

기성세대와 신진세대의 갈등이 연극 ‘레드’를 이끄는 중심축이겠지만, 혹여 예술성과 대중성 간 갈등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로스코의 작품이 대중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그가 경계하는 것은 예술이 너무 상업주의로 가고 있다는 것과 대중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밝고 일시적이며, 그쪽으로만 내디디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는 로스코의 방을 따로 마련해두고 있으며, 매년 수많은 사람이 그의 그림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나 또한 예술에도 대중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관객이 보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켄이 로스코와 충돌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어렵거나 대중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로스코 당신은 끊임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다.

슬픈 이야기지만, 로스코처럼 배우로서 ‘한물갔다’고 느끼게 될 때가 분명히 올 텐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생각인가? 이것이 마크 로스코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그 지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는 로스코와 같은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해볼 작정이다. 가치관이 바뀜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등장할 것이고,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기성세대는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버려진 예술 형태라 하더라도 계속해나갈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내 연기를 봐주는 관객이 있다면 말이다.

 

김도빈

여유로움과 만난 패기는 더욱 강하다

연극배우 김도빈은 2006년 극단 인혁에서부터 2010년 서울예술단 입단을 거치며 탄탄한 작품 경력을 쌓아왔다. 2017년 예술단 퇴단 이후 ‘더 헬멧’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등의 작품을 거치며 더욱 단단해진 그가 ‘레드’에서는 마크 로스코의 조수이자 가상 인물인 켄을 연기한다.

마치 켄처럼, 연기할 때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편인가? 여태 다양한 캐릭터를 맡았었는데, 늘 이번엔 어떻게 좀 다르게 해볼까 생각한다. 배우가 연기할 땐 어쩔 수 없이 ‘나’로부터 출발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김도빈의 색깔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볼 때는 ‘레드’라는 작품 속 켄을 바라보는 것이지만, 그래도 배우는 너무 김도빈스럽진 않을까 늘 걱정이 된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켄과 내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켄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노력하고 있다.

켄과 어떤 면이 다른가? 우선 켄은 패기가 넘치고 치기 어린 친구인데, 나는 20대일 때도 패기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약간 물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강신일 선배님과 함께 로스코 선생님 역할을 맡으신 정보석 선배님도 며칠 전에 “쟤는 왜 저렇게 여유가 넘치냐”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했다. 켄이란 인물은 그러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을 했고, 극단 인혁에 들어가면서부터 선배님들을 모셔왔기 때문에 예의 있는 행동들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배우로서는 좋지 않다. 무대 위에서는 동년배든 나이가 많든 ‘배우 대 배우’로 강렬하게 부딪혀야 하는 건데, 배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거다. 특히 켄이란 역할은 로스코 선생님과 충돌해야 하는 역할이라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먼저 선배님들과 좀 더 친해지면 싸우는 것도 편해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웃음)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실제로 본 적이 있나? 어제 일본에서 ‘슈또풍 콘서트’를 하고 돌아왔다. 슈또풍은 서울예술단에서부터 같이 활동했던 박영수·김도빈·조풍래를 부르는 이름이다. 콘서트도 목적이었지만, 일본에 간 목적 중 하나가 마크 로스코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자 했던 거였다. 지바현에 위치한 근·현대 미술관인 DIC 카와무라 기념 미술관을 찾아갔다. 극 중 로스코 선생님 대사 중에 “나와 같이 등단했던 잭슨 폴록, 내 위에 피카소, 내 밑에 앤디 워홀과 리히텐슈타인”이라는 대사가 있는데, 이들의 그림이 모두 있어서 너무 신기했다. 따로 마련되어 있던 로스코 선생님의 어두컴컴한 방에는 웅장하면서도 시뻘건 그림인 ‘무제’가 놓여 있었다. 대본에서는 “그림이 말을 걸어온다”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말을 거는 것까진 느끼진 못했지만 정말 웅웅웅 하는 것 같은 기(氣)가 느껴졌다. 굉장히 거친 마감도 괴기스러웠다. 로스코 선생님과 켄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같은 색의 물감을 수도 없이 덧발랐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림들을 실제로 보고 와서 대본을 다시 읽으니 새롭게 느껴지더라.

인터뷰 내내 계속 마크 로스코 ‘선생님’이라고 말한 것 알고 있나? 일본 여행 중에 보고 왔다는 또 다른 디지털 아트 전시인 ‘팀랩 보더리스’에 대해 말할 때도 마치 새로운 물결을 좇아 세상으로 떠나는 켄의 모습처럼 설레 보였다. 내가 그랬나? 켄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처럼 보여서 기분이 꽤 좋다!

권하영 기자 사진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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