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클래식’ 조르디 사발 & 르 콩세르 데 나시옹 내한 공연

내밀하지만 강렬한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7월 31일 11:14 오후

REVIEW

 

6월 22·23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조용하고 내밀한 울림, 그러나 영혼에 궤적을 남길만한 이 강렬함은 무엇인가. 나는 올랜도(Orlando, 1928년 발표된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 장편 소설 ‘올랜도’의 주인공. 이 소설은 남성과 여성으로 번갈아가며 수 백년을 살아온 올랜도의 의식과 심리를 섬세하게 피력하고 있다)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16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경험했던 올랜도의 400년 동안의 기억 속으로. 나는 17세기 어느 저택 입구에 걸려있는 카라바조의 그림과 마주한다. 그리고 긴 복도를 따라 들어가다 ‘라 폴리아’에 맞춰 춤을 추고 있던 어느 소녀를 발견한다. 조르디 사발이 나의 기억을 조정하고 있다. 마치 내가 올랜도가 되어 17세기와 18세기를 살아왔던 것처럼. 나의 몸과 마음을 온통 내밀하면서도 강렬한 소리로 휘감아 그 시대의 공간으로 데려가 버렸다.

고음악 연주의 대가 조르디 사발은 그가 창단한 연주 단체 르 콩세르 데 나시옹, 그리고 합창단 라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와 함께 한화클래식 초청으로 내한했다. 연주 첫 날은 우리에게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으로 익숙한 기악 음악을 선사했고, 둘째 날은 바로크 성악 음악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둘째 날에 들려 주었던 그들의 ‘소리’에 천착하려 한다.

페르골레지의 ‘서 계신 성모(Stabat Mater, P77)’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비통함을 그린 노래로, 26살에 요절한 페르골레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사실마저 이 곡을 더욱더 성스럽게 만든다. 전체 12곡은 독창과 2중창이 번갈아 불려지는 형식으로 성악과 기악, 콘티누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성악과 기악이 빚어낸 소리는 균형과 절제의 결정체다. 그 소리의 빛은 다이아몬드만큼 화려하고 기교적이진 않지만 진주처럼 알차고 자연스럽다. 특히 마지막 ‘내 육신이 다할 때’에서의 2중창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름답고 우아한 슬픔의 소리다. 특히 카운터테너 필리포 미네치아는 아주 작은 소리의 피아니시모에서부터 매우 큰 소리의 포르티시모까지 길고 가는 실을 하늘 높이 뽑아내는 듯한 음향의 스펙트럼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페르골레지의 ‘서 계신 성모’보다 먼저 작곡된 헨델의 ‘주께서 말씀하시길(Dixit Dominus, HWV232’은 두 작곡가 모두 각각의 곡들을 20대 초반에 작곡했지만 그 울림의 결이 사뭇 다르다. ‘주께서 말씀하시길’에서는 기악과 콘티누오 반주가 더욱 역동적이다. 또한 합창이 더해지면서 음향은 풍성해지고, 성악과 성악, 성악과 기악 사이의 대위법적 진행과, 화성에서의 협화와 불협화는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더욱 극적인 울림을 선사한다.

이 곡은 시편 110편(라틴어 시편 109편)에 곡을 붙인 것으로 헨델이 이탈리아 체류 시절에 쓴 최초의 교회음악이다. 전체가 10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6번째(Dominus a dextris tuis)와 9번째(De torrente in via) 악장에서 두 명의 소프라노의 음색은 매우 인상적이다. 마르타 마테우는 맑고 곧은 바로크 발성의 소리로, 하나 베요디 히르트는 둥글고 포용하는 목소리로서 그 대비와 조화가 온 몸을 감싸며 전율케 한다. 이 날 공연도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고음악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제되고 품격있는 그들의 말과 소리가 ‘잘 살아내고 있다’고 우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 주는 것 같다.

이소연(음악·춤 칼럼니스트) 사진 제이에스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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