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혁, 작곡가는 살아있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8월 12일 1:16 오후

작곡가는 살아있다 작곡가·지휘자 최재혁

바이올리니스트·피아니스트·첼리스트·지휘자… 우리에게 익숙한 전형적인 음악가의 상이다. 간단하다는 듯 화려한 기교를 펼치는 하이페츠의 바이올린 연주, 파격적인 드레스와 함께하는 강렬한 유자 왕의 피아노 연주, 저음의 매력을 한껏 보여주는 감동적인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연주, 그리고 멋진 외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카라얀의 지휘. 클래식 음악 전공자나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세계적인 음악가들이다. 그러나 작곡가는? 모차르트나 베토벤, 중학교 음악 수업을 열심히 들은 이에겐 차이콥스키라는 이름까지 기대해 볼 수 있겠다.

살아있는 작곡가

사람들은 대개 ‘클래식 음악 작곡가’라는 직업이 지금도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클래식 음악은 옛날 음악이며, 클래식 음악가는 오로지 옛것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는 선입견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내가 사람들에게 작곡가라고 밝히면, 이루마나 방시혁의 이름을 나열하곤 한다. 최대한 그들의 이야기에 동조하고 맞장구치며 거들어 보려고 노력해보지만 아뿔싸. 그들이 나보다 이루마나 케이팝에 대해 아는 것이 훨씬 많다! 그들은 의기소침해진 나를 두고, 본인도 대학 동아리에서 키보드로 작곡을 해봤다든지, 싸이의 곡은 어떻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들의 질문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가라지밴드(Garage Band)보다 더 최신의 음악 만들기 애플리케이션이 있느냐고. 더욱 난감해진 나는 “책상에서 종이 오선지와 펜을 가지고 작곡한다”라고 고백한다. 그들은 눈빛으로 답한다, ‘얘 지금 뭐라는 거니?’ 의기소침해진 채 작업실로 돌아온 나는 빈 오선지를 마주한다. 오늘따라 빈 오선지가 외롭게 보인다.

빈 오선지

나는 작곡가인 동시에 지휘자다.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나 앙상블과의 공연을 앞두고는 선배 작곡가의 악보를 들여다보며 공부하고 파헤친다. 그 악보가 300년 묵은 작품일 수도, 작곡된 지 20년이 채 안 된 작품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 역시 곡을 쓰기 전 빈 오선지를 바라보며 기나긴 명상을 했을 테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시대를 초월한 동질감을 느낀다. 그들도 아마 오선지에게 물었을 것이다. “너는 과연 어떤 소리를 가지게 될까?” “무슨 소리를 원하니?” 아니면 “넌 무슨 소리를 숨기고 있는 것이냐” 같은 질문들 말이다. 물론 오선지는 답이 없다. 과연 수수께끼 그 자체다. 막막하고 답답하여 숨이 막힌다. 스마트폰을 들어 작품의 마감 날짜를 확인한다. 오늘 반드시 시작해야 한다. 단 한 음만이라도. 마치 작가가 소설을 쓰기 전 바라보는 빈 원고지, 화백이 붓을 들기 전 마주하는 새하얀 캔버스 같은 느낌이 이와 같지 않을까. 내 앞에 놓인 이 빈 오선지를 향해 퍼붓는 질문들은 스스로 묻는 것이다. 나는 과연 어떤 소리를 품은 잉크로 이 종이를 채워 나가야 할까. 오선지에서 시선을 돌려 모나미 플러스펜을 응시한다. 시간이 멈춘다.

환상의 소리

그런데 마법은 여기에 있다. 어느새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뇌의 뉴런에 의해 답답했던 작곡가의 가슴이 가빠진다. 이것은 마치 내일 아침 가게 될 소풍을 기대하며 잠 못 이루는 어느 꼬마의 마음과도 같다. 눈을 감고 소리를 상상한다. 황홀하게도 음악은 내 머릿속에서 아주 얇은 커튼으로 가려진 것처럼 희미하게, 그렇지만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 실루엣을 보여준다. 찰나의 순간, 그 환상적인 상상의 소리는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눈을 뜬다. 오선지는 아직 비어있다. 작곡가는 상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상상만으로는 작곡가가 되지 못한다. 작곡가는 그 상상을, 그러니까 그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환상적인 소리의 불꽃놀이를 붙잡지 못한다. 책상에 앉아 차분하게 적어 내려가야만 한다. 경이로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상상이 현실 속 세상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니까. 나 혼자 은밀하게 경험했던 아름다움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순간이니까. 가슴이 부푼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다.

얼마쯤 지났을까. 한 음 한 음 소리를 조각하다가 잠시 등을 펴 기지개를 켜고 다시금 악보를 내려다본다. 빈 오선지 한 부분에 신중하게 적혀 있는 세 마디의 음악이 보인다. 세 마디라… 환상이 현실 세계를 비집고 들어오는 과정은 과연 험난하기만 하다. 선배 작곡가들이 써 놓은 악보들을 다시 펼쳐본다. 빼곡히 적혀 있는 음표와 지시어들. 화려한 소리의 그 악보들이 왜 이렇게 쓸쓸해 보일까.

하반기 일정 • 최재혁/앙상블블랭크(협연 김유빈)
8월 6일 오후 7시 30분 대전예술의전당 앙상블홀 • 최재혁/앙상블블랭크
8월 17일 오후 7시 30분 일신홀

최재혁 작품

Ⓐ 앙상블을 위한 ‘Dust of Light’(2019)

Ⓑ 첼로 독주를 위한 ‘Self in Mind III’(2018)

Ⓒ 클라리넷 협주곡 ‘NOCTURNE III’(2018)

 

 

 

 

 

 

 

최재혁 최재혁(1994~)은 제네바 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최연소 우승(2017)했다. 메뉴힌 콩쿠르·밴프 음악제·TIMF앙상블·앙상블앵테르콩탕포랭 등으로부터 위촉받아 초연했다. 2015년 앙상블블랭크를 결성하고, 루체른 페스티벌(2018)에 지휘자로 서는 등 작곡가 겸 지휘자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일러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2000~)는 장형준·신수정·강충모를 사사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취미로 그리는 그림을 SNS에 올리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젊은 연주자다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