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여왕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11월 9일 9:00 오전

오페라 속 여인의 삶과 사랑_2

 

엘리자베스 여왕

여왕의 비밀스러운 사생활

권력이 무색하게도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사랑은 죽을 때까지 허락되지 않았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상대로 거둔 대승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화

 

“엘리자베스 여왕이 대관식을 위해 런던 탑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갈 때, 그녀는 25세였다. 그녀의 얼굴은 매우 굳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위엄이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빨갛고, 코는 여자치고 너무 길고 뾰족했다. 그녀는 궁중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창조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둡고 음침했던 메리 여왕의 시대보다는 확실히 더 나아 보였다. 그녀는 교양이 높았지만 욕설과 거친 말을 서슴지 않았고, 영리했지만 교활했으며, 또 부친의 폭력적 성향을 많이 물려받았다. 한쪽에서는 지나치게 찬양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지나치게 폄하되기 때문에, 그녀가 진정 어떤 여인인지를 먼저 이해하지 않고는 그녀의 통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

– 찰스 디킨스(1812~1870)

 

1815년 10월 4일, 이탈리아 남쪽의 아름답고 부유한 항구도시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은 분주했다. 극장의 시즌 개막작이 오르는 날은 온 도시의 관심과 설렘이 쏠리기 때문이다. 마침 이 날이 프란체스코 왕자의 명명 축일이기도 해서 페르디난트 1세와 궁중 사람들이 대거 극장으로 입장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사에 손꼽히는 극장장이었던 도메니코 바르바이아(1778~

1841)가 데려온, 페사로 출신의 떠오르는 젊은 작곡가 로시니(1792~1868)에 대한 기대는 높았다. 바르바이아와 매 시즌 오페라를 한 개씩 올리기로 계약을 체결한 이 23세의 젊은 작곡가는 나폴리 데뷔작으로 엘리자베스 1세를 다룬 오페라 ‘영국여왕 엘리사베타’를 야심차게 내놓았다.

 

로시니의 야심작 ‘영국여왕 엘리사베타’

엘리사베타 역을 맡은 이사벨라 콜브란을 비롯하여, 안드레아 노차리, 마누엘 가르시아 등 최고 수준의 가수진에 힘입어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페라의 대본은 카를로 페드리치의 희곡 ‘레스터의 시종’을 바탕으로 조반니 슈미트(1775~1839)가 썼다. ‘레스터의 시종’의 원작은 영국 소설가인 소피아 리의 소설 ‘더 리세스’로 엘리자베스 여왕과 레스터 백작의 이야기를 다뤘다. 19세기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인기 있는 소재였기에, 작가들은 실제 역사에 자신들의 상상력을 첨가해서 많은 창작물을 생산했고, 이는 희곡에서 오페라로 가지를 뻗었다. 그 결과 엘리자베스라는 한 여인의 드라마틱한 삶은 다양한 색깔로 채색되었다. 특히 대중에게 많이 소비됐던 부분은 대영제국의 기틀을 닦은 그녀의 위대한 치세가 아니라 ‘처녀 여왕’의 사생활이었다.

실제로 오랜 기간 엘리자베스 여왕의 은밀한 애인이었던 로버트 더들리(이하 레스터 백작)➊는 당대 여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정치인으로서 승승장구했지만, 오만했고 사생활에서도 추문이 많아서 당시 악명이 꽤 높았다. 하지만 로시니의 오페라 ‘영국여왕 엘리사베타’는 레스터 백작을 근사한 남자로 미화했다.

오페라 1막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레스터 백작을 만날 생각에 가슴 뛰는 기쁨을 노래한다. 그가 비밀리에 마틸다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여왕은 질투에 휩싸인다. 여기서 등장하는 마틸다는 작가 소피아 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인물인데, 엘리자베스 여왕의 평생 라이벌이었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드의 숨겨진 딸로 그려진다.

20년간 왕위를 두고 라이벌 관계를 펼쳤던 메리의 소생이라는 점도 용서할 수 없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레스터와 몰래 결혼한 사이라니!

여왕은 레스터에게 왕비의 부군 자리를 제안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그 대가로 반역죄를 물어 사형이 선고되지만 마틸다가 왕비를 암살하려는

➊ 로버트 더들리

시도를 온몸을 던져 막은 덕분에 두 사람은 복권되고 해피엔딩을 맞게 된다.

극 중 군중이 레스터의 처형을 안타까워하고, 피날레에서 그를 보고자 달려오지만 실제 역사에서 레스터는 ‘왕의 남자’로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그 정도로 이 작품은 등장인물과 배경만 역사에서 빌려왔을 뿐 허구성이 짙다. 마틸다가 희생을 감내하지 않았으면 두 사람은 처형될 운명이라는 것도 엘리자베스를 성군보다는 질투심에 휩싸인 제멋대로의 여왕이라는 걸 더욱 부각시킨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왜곡에 살짝 눈감아준다면, 당대 명가수들의 기량에 맞춰 작곡된 화려한 벨칸토 오페라의 정수를 즐길 수 있다.

레스터 백작을 미화한 오페라는 로시니의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나폴리 극장장 바르바이아가 로시니의 뒤를 이어(로시니는 바르바이아의 애인이었던 이사벨라 콜브란과 사랑에 빠져 나폴리를 떠났다.) 나폴리에 데려온 작곡가는 도니체티(1797~1848)였다.

 

 

 

튜더 왕가를 파헤친 도니체티

사실 도니체티는 영국 튜더 가문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여왕 3부작 ‘안나 볼레나(1830)’ ‘마리아 스투아르다(1835)’ ‘로베르토 데브뢰(1837)’는 잘 부를 수 있는 가수를 섭외하는 고충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타이틀로 언급된 세 사람이 다 튜더 왕

➋ 로베르토 데브뢰

가에 의해 참수됐다는 점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친인 안나 볼레나는 남편 헨리 8세에 의해, 마리아 스투아르다와 로베르토 데브뢰➋는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처형됐다. 역사 속에서 패자였던 인물들이 도니체티 오페라에서는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니체티의 튜더 가문에 대한 열정은 ‘여왕 3부작’ 이전에 이미 시작됐다.

1829년 7월 6일 ‘케닐워스 성의 엘리사베타’라는 도니체티 오페라가 초연됐고 1년 뒤 ‘케닐워스 성’이라는 이름의 개정판으로 올려졌다. 원작은 스코틀랜드 문호 월터 스콧(1771~1832)의 소설 ‘케닐워스(1821)’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오페라로 만든 작곡가는 도니체티가 처음이 아니다. 베르디와 마이어베어 등의 오페라 대본을 쓴 외젠 스크리브(1791~1861)가 쓴 대본에 다니엘 오베르(1782~1871)가 곡을 붙여 1823년에 초연된 오페라 ‘레스터 혹은 케닐워스 성’도 지금은 완전히 잊혔지만 당시 프랑스에서는 쏠쏠한 흥행을 거뒀다.

케닐워스 성은 레스터 백작과 엘리자베스 여왕 둘 다에게 잊을

➌ 케닐워스 성

수 없는 장소이다. 레스터는 1575년 케닐워스 성➌에서 여왕을 위해 축제를 연다. 이를 위해 레스터가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졌다는 여담도 있다. 동년배로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지켜봤고, 사랑과 우정 사이를 줄타기한 두 사람이었다. 40줄에 들어선 레스터는 여왕에게 마지막으로 청혼을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거절당했다. 그리고 3년 뒤 레스터는 레티스 놀리스와 결혼하고 이 일로 분노한 여왕은 그녀를 궁에서 쫓아낸다. 여기까지가 역사적 사실이다.

도니체티 오페라에서는 레스터가 다른 여성을 사랑하고 있다. 아멜리아 롭사트(에이미 롭사트)와 레스터는 서로 사랑하고 결혼을 약속했지만, 레스터는 여왕의 호의를 이용해 권력을 가지려는 야망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여왕이 성을 방문하는 동안 아멜리아를 성 안 구석에 가두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레스터보다 더 악한 워니라는 인물이 아멜리아를 탐해 둘 사이를 이간질한다. 자신을 거부하는 아멜리아를 살해하려는 악당 워니 덕에 레스터의 부정이 상당 부분 희석된다. 진실을 알게 된 여왕은 레스터에게 분노하고, 이어서 처음으로 자신의 배우자가 될 것을 제안하지만 레스터는 아멜리아를 선택한다. 결국 여왕이 그를 용서하고 아멜리아와의 약혼을 인정하면서 오페라는 막을 내린다. 월터 스콧의 원작은 조금 더 치명적이다. 워니가 기어코 에이미를 죽이고 만다.

에이미 롭사트라는 실존인물은 레스터 백작의 첫 번째 부인이었고 1560년 계단에서 굴러떨어져서 사망했다. 이때 항간에는 레스터가 여왕과 결혼하려고 에이미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어 에이미가 죽은 지 15년이 지났건만 케닐워스 성의 지고지순한 로맨스로 각색됐다.

 

 

니컬러스 힐리어드가 그린 엘리자베스 여왕(1573)

 

여왕의 쓸쓸한 만년을 담은, 도니체티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Good Queen Beth’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받고 있었지만, 도니체티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케닐워스 성’에서도 질투심과 소유욕이 강한 여인으로 그려졌고, 그의 여왕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로베르토 데브뢰’에서도 그녀는 원하는 것을 끝내 가지지 못하는 여인으로 그려진다. 특히 이 작품에서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더욱 처연하다. 말년의 쓸쓸한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도니체티는 인생에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1년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아내는 아이를 사산했다. 1837년 6월에는 뒤이은 아이가 출생 중 사망했고, 그 후유증으로 아내도 7월 30일에 28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하지만 오페라는 10월에 올려져야 했고 도니체티가 작곡에 몰두한 것은 8월부터다.

잇따른 죽음의 경험은 오페라 속 말년의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투영됐다. 세상을 호령하는 권력도 무상하고, 그토록 원했던 한 여자로서 평범한 사랑은 죽을 때까지 허락되지 않았다. 노쇠한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었다. 사형은 데브뢰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협박이었고, 언제든 그를 지켜준다고 한 약속의 증표인 반지도 있었지만, 결국 그 반지는 여왕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자신이 내린 명령 때문에 데브뢰가 처형당했다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녀는 광란의 상태가 되어 왕좌에서 내려온다.

로베르토 데브뢰(1565~1601)는 엘리자베스 여왕 말년에 총애를 받았던 실존인물이다. 어머니 레티스 놀리스가 레스터 백작과 재혼하는 바람에 데브뢰는 레스터 백작의 양자가 된다. 그는 여왕의 총애 덕에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아일랜드 총독이 됐으나 반란 진압에 실패해서 관직이 박탈됐다. 이에 앙심을 품고 추종자들과 반란을 꾀했으나 발각되어 36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도 우울증과 각종 노인성 질환으로 고통받다가 1603년 7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후사를 남기지 않은 그녀의 뒤를 이은 왕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죽인 메리 스튜어드의 아들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였다.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의 원작은 자크 프랑수아 앙슬로(1794~1854)가 쓴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인데 작곡가 사베리오 메르카단테(1795~1870)가 도니체티보다 4년 먼저 ’에섹스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초연했다. 메르카단테는 19세기에는 로시니·도니체티 못지않게 인기 있는 작곡가였고 그의 작품은 베르디에게 영향을 줄 정도였으며, 대본을 쓴 펠리체 로마니(1788~1865) 역시 벨리니의 ‘노르마’, 도니체티의 ‘안나 볼레나’ ‘사랑의 묘약’을 쓸 정도로 이탈리아 오페라사에 손꼽히는 대본가 중 한 명이다.

19세기 전반이 벨칸토 오페라의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작품들은 로시니·도니체티·벨리니의 소수의 대표적인 오페라뿐이다. 이런 오페라들이 발굴되어 벨칸토 오페라 레퍼토리가 더욱 풍성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엘리자베스 여왕(1601)

 

 

 

 

 

 

 

 

 

 

 

추천 음반

 

 

로시니 ‘영국여왕 엘리사베타’

몽세라 카바예(소프라노)/호세 카레라스(테너)/지안프랑코 마시니(지휘)/런던 심포니 외

전성기의 명가수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이른바 고전이고 그래서 벨칸토 오페라, 로시니 음악 구현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카바예의 완벽한 가창으로 이 귀한 오페라의 명반을 남겨준 것이 고마울 정도다.

 

로시니 ‘영국여왕 엘리사베타’

제니퍼 라모어(소프라노)/브루스 포드(테너)/줄리아노 카렐라(지휘)/런던 필 외

잊혀진 걸작 오페라를 발굴하는 데 주력하는 영국 레이블 ‘Opera Rara’의 음반. 카바예의 엘리사베타가 따뜻한 음색에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인다면, 라모어는 치열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또 다른 엘리사베타를 들려준다.

 

도니체티 ‘케닐워스 성’

제시카 프랫·카르멜라 레미조(소프라노)/리카르도 프리차(지휘)/도니체티 오페라 오케스트라 외

2018년 도니체티의 고향인 베르가모에서 열린 도니체티 페스티벌 실황 녹음. 지워진 작품을 부활시키려는 아티스트의 노력에 관객은 열광적인 환호로 답한다. 테너 스테판 폽이 부르는 워니 역은 너무나 선량한 음성과 훌륭한 가창 때문에 악역에 몰입이 안 된다는 게 단점이다.

 

도니체티 ‘로베르토 데브뢰’

마리엘라 데비아(소프라노)/스테판 폽(테너)/프란체스코 란칠로타(지휘)/제노바 카를로 펠리체 극장 오케스트라 외

벨칸토의 여왕 마리엘라 데비아의 단점은 어떤 음원도 극장 안에서 울리는 그녀의 실제 공명을 다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영상이 그녀 나이 67세에 녹음됐다는 걸 감안하고, 또 극중 여왕의 나이와 비슷하다는 걸 염두하고 감상하길. 벨칸토 오페라 콤비처럼 함께하는 메조소프라노 소냐 가나시의 활약도 인상적이다.

 

 

 

 

글 오주영(성악가·독일통신원)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 쾰른과 마인츠에서 오페라를 전공했다. 마인츠 극장에서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로 데뷔한 후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며 오페라와 종교음악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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