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EKSUK’S EY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11월 9일 9:00 오전

GAEKSUK’S EYE

from GERMANY

 

 

 

‘라 조콘다’ & ‘영매’

관객을 향한 최선의 무대

 

무대와 관객석 모두 ‘거리두기’로 시행된 ‘라 조콘다’ 공연 ©Jina Oh

 

 

 

 

 

 

 

 

 

 

 

 

지난 9월 말, 비스바덴 극장에서는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졌다. 코로나 사태로 예민해진 극장 경영진과 비스바덴 시 보건부의 첨예한 갈등은 급기야 26일에 개막하기로 한 공연이 취소되는 초유의 사태로 번졌다.

양측은 서로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극장은 주말 공연을 모두 취소했다. 원래 비스바덴이 속한 헤센 주의 코로나 바이러스 위생 방침은 1.5미터의 거리두기 수칙을 지키면서 당국의 특별한 허가가 있을 경우 250명 이상의 관객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9월 중순에 극장 측은 코로나 이전 약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에 최대 500명까지 관객을 입장시킬 목표를 갖고 있었다.

갈등의 핵심은 ‘거리두기’에 관한 서로 다른 해석이었다. 28일 열린 극장과 보건부 그리고 헤센 주 문화부 사이의 긴급 조정회의 이후 극장 운영진과 보건부 사이에 ‘오해’가 있었다고 밝혔다. 새로운 조정 결과 대극장에서는 298명까지 수용할 수 있게 되었고, 29일부터 공연이 재개되면서 갈등은 일단 봉합됐다. 하지만 시즌 초에 벌어진 이례적인 개막공연 취소 사태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문화계의 압박과 분쟁을 적나라하게 노출했다.

 

프랑크푸르트 여성합창단 ©Barbara Aumüller

흥미진진한 진행의 ‘라 조콘다’

그랜드 오페라를 올리기 힘든 요즘 같은 시기에 베를린 도이치 오퍼는 ‘아이다’ ‘라 조콘다’ ‘발퀴레’ 등 대형 오케스트라 편성이 필요한 작품을 올렸다.

그 중 아밀카레 폰키엘리(1834~1886)의 오페라 ‘라 조콘다(La Gioconda)’는 1876년 밀라노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베르디의 ‘아이다’(1871)와 ‘오텔로’(1887) 사이에 가장 성공한 오페라이며, 이탈리아 그랜드 오페라의 대표작이다. 베를린 도이치 오퍼는 이 대작을 콘체르탄테 형식을 빌려 선보였다. 오페라의 배경인 17세기 베네치아는 간단한 무대 장치로 분위기를 냈고, 60명이 넘는 오케스트라는 거리두기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 무대 뒤편까지 널찍이 자리 잡았다. 관객도 연주자도 입·퇴장 시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지만, 공연 중에는 마스크 없이 관람할 수 있었다.

4막으로 구성되어 연주 시간만 약 3시간에 달하는 작품이지만, 코로나 상황에 맞춰 인터미션 없이 1시간 45분으로 축소됐다. 줄어든 시간만큼 생기는 공백은 사회를 맡은 테너 외르크 쇠르너가 채웠다. 그는 무성영화의 변사를 연상시키는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선보였다. 주역 가수들과 함께 전진 배치된 겨우 7명의 합창단원은 신통할 정도로 이 그랜드 오페라의 합창의 효과를 살려냈다. 이반 레푸시치(1978~)가 이끄는 도이치 오퍼 오케스트라가 ‘시간의 춤’을 연주할 때는 객석에서 반가움을 표현하는 작은 환호와 함께 탄식도 들렸다. 아마도 현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리라.

이 날의 스타는 엔조 지말도 역을 맡은 테너 조셉 칼레야(1978~)였다. 그는 열정적이면서도 섬세한 가창으로 큰 환호를 받았다. 주역인 조콘

조셉 칼레야

다로 분한 소프라노 후이 헤(1972~)에게선 연륜이 느껴졌지만, 과거 그녀가 들려줬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화려한 음색은 다소 빛이 바랬고, 고음부에서도 불안한 음정을 노출했다.

 

반면 조콘다의 연적인 라우라 역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쥬디트 쿠타시(1986~)는 탄탄한 볼륨과 당당한 음악적 표현으로 관록의 동료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베르디 ‘오텔로’의 이아고를 연상시키는 절대 악역 바르바나를 노래한 게오르게 가니제(1970~)도 큰 박수를 받았다.

 

입체감을 안은 인물 등장, ‘영매’

한편 독일의 권위 있는 오페라 전문지 ‘오펀벨트’가 또 다시 ‘올해의 오페라극장’으로 선정한(이미 다섯 번째다!) 프랑크푸르트 오퍼에서는 다른 형태의 공연을 선보였다. 현재 실정 하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최선의 프로그램이었다. 2막으로 된 1시간짜리 메노티의 오페라 ‘영매’와 남성·여성 합창단을 위한 작품,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막이 오르면 이미 무대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성 합창단이 보인다. 마치 체스판의 말처럼 서로 거리를 뒀다.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로 슈베르트의 합창곡 ‘물 위의 영혼가’를 현악 4중주의 반주로 들려줬다.

이어지는 무대는 브람스가 함부르크 여성 합창단을 위해 작곡한 ‘4개의 노래’였다. 오케스트라 피트에서는 두 대의 호른과 한 대의 하프가 지휘자 제바스티안 바이글레(1961~)의 지휘에 따라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했다. 하지만 멀어진 서로 간의 거리 때문이었을까? 저 멀리 있는 단원까지 포옹하려는 지휘자 팔의 커다란 포물선에도 불구하고 합창단의 통일되지 않은 음정은 매우 아쉬웠다.

이어지는 비톨드 루토스와프스키(1913~

1994)의 ‘장송곡’은 현악 오케스트라만을 위한 곡이었다. 오케스트라 피트에 모두 자리할 수 없기에 단원들은 무대 위에서 각자 보면대를 두고, 첼로와 더블베이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서 연주했다. 현 상황에 대한 선곡인 것일까. 지휘자(바이글레)가 완벽하게 장악한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저 장송곡과 함께 이 비정상의 시대가 저물길 소망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작곡가 메노티(1911

~2007)는 평생 거친 비판에 직면했다. 그의 오페라를 “너무 단순하고 감상적이며, 푸치니 흉내를 낸다”고 폄하하는 비평도 있었다. 하지만 메노티의 ‘영매’를 연출한 한스 발터 리히터는 이 오페라의 작품성을 극찬하며 “다른 차원으로 향한 문을 열어주는 질문을 항상 던져준다”고 말했다.

드라마의 중심을 이루는 3명의 결핍된 인물인 바바와 모니카, 토비가 서로의 결핍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면서 겪는 혼란은 파국의 결말로 이어진다. 모니카의 방치된 성장은 ‘여동생’을 여자로 느끼게 되는 토비에게 혼란을 가져오고, 토비가 가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장애는 바바의 트라우마와 두려움을 깨운다. 집안의 평화를 중재하고 실제로 엄마 역할을 하는 모니카는 결국 점차 목소리를 잃어가며 결국 자신의 무력함만 깨닫게 될 뿐이다.

리히터의 명확하고 영리한 연출에 바이글레의 오케스트라는 치밀한 호흡으로 탄탄하게 음악을 이끌었다. 모든 출연진이 훌륭했지만, 특히 바바 역의 메조소프라노 드샤밀랴 카이저의 활약은 눈이 부셨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떠는 여린 면과 그것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살고자 하는 카이저의 바바는 그저 나쁜 새엄마, 혹은 가학적인 악인으로 자칫 단순하게 그려질 법한 바바 역에 입체감을 불어넣었다.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 무대였다.

조셉 칼레야

 

 

 

 

 

글 오주영(성악가·독일 통신원)

 

 

 

from FRANCE

엑토랄 페스티벌 제20회

 

뜨거운 충돌의 현장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은 마르세유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활기차고 자유로운 도시, ‘인터-액티브’한 도시이지만 한편으론 ‘하이퍼-액티브’해 시끄럽기도 한 곳. 프랑스식 세계화로 진통을 앓는 곳이자 그로 인해 새로운 예술이 꽃 피는 도시, 마르세유. 하지만 그곳의 모습은 우리가 ‘프랑스’하면 떠올릴 이미지와 대척점을 이룬다. 이민자 문화가 주류 문화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지중해 최대 규모의 항구를 가진 마르세유는 지리적으로나 기능적으로 문화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마르세유 항은 로마 제국의 교역 거점이었고 십자군 원정과 아프리카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일찍이 타 문화와 섞였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식민지 무역과 공업의 전진 기지로 많은 북아프리카인들이 정착했다. 이민은 1세대, 2세대를 지나 현재까지 이어진다. 현재 마르세유는 올드포트를 중심으로 한 관광지 및 부촌을 제외하고는 아라비아 도시의 모습에 가깝다. 800km 떨어진 파리의 영향은 이곳에서 미미하다.

이질적인 문화가 부딪히는 긴장 속에서 새로운 문화가 태동했다. 그래피티와 춤과 음악, 동시대 창조적인 작업들이 거리와 빈 공장에서 일어났다. 전통적인 오페라 극장보다 거리가 선호됐다. 안무가 롤랑 프티(1924~2011)에 의해 1972년 설립된 마르세유 발레의 첫 작품도 32,000명 군중 앞에 선보인 ‘핑크 플로이드 발레’였다.

 

슬럼가가 현대예술의 집결지로

이러한 동시대의 산발적인 움직임이 정책적으로 후원받기 시작한 것은 1995년부터다. 마르세유는 낡은 항구와 슬럼가 이미지를 벗고 현대예술의 도시가 되고자 했다. 유로메디테라네 사업을 통해 옛 도심에 현대적 건축의 박물관(MuCem)을 짓고, 버려진 공장을 문화 기지로 바꾸는 등 도시재생 사업을 시작했으며, 현대예술 지역기금을 만들어 예술가들을 후원해 왔다. 그 결과 2013년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되며 새로운 문화적 이미지를 입었다.

마르세유에서는 매년 ‘현대예술의 봄’이 열리며 가을에는 다원예술 ‘아트페어 아트오라마’와 컨템퍼러리 공연예술 ‘페스티벌 엑토랄(Festival actoral)’이 열린다. 올해는 2년마다 열리는 유럽 현대예술 비엔날레 ‘마니페스타’(8.28~11.29)도 함께 열리고 있다.

엑토랄 페스티벌은 2001년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위베르 콜라스가 설립했다. 연극·무용·시각예술·음악·영화·문학 등 모든 영역에 걸쳐 혼합된 작품들이 공유 공간 몬테비데오와 크리에 극장 등 여러 문화 장소에서 펼쳐진다. 엑토랄 페스티벌은 예술 공유와 후원 부분에 있어 파트너십이 약했던 마르세유에 지역 내 공동체들의 공유, 협력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았다.

올 페스티벌은 9월 1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열렸고 필자는 10월 3·4일 방문했다. 마르세유로 가기 며칠 전 코로나19로 인해 프랑스 정부가 마르세유 지역 레스토랑의 영업을 금지했다. 레스토랑 셰프들은 마르세유만 통제되는 것에 대해 형평성 의문을 제기하며 거리에서 그릇을 부수었다. 도시 곳곳이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진행 중이던 엑토랄 페스티벌은 끝까지 열렸다. 축제는 검열을 거부하며 프랑스 정책, 페미니즘, 성소수자, 빅데이터, 누드 등 현대적 이슈에 대한 강한 수위의 실험과 비판적 시각의 ‘충돌적’ 작품을 이어갔다.

루이 14세 때 지어진 생 장 요새와 2013년 유럽문화수도에 맞춰 개장한 지중해 문명 박물관 뮤셈. 400년 시차의 건물을 미니멀한 다리가 잇고 있다. 이곳 오른쪽으로 마르세유 항이, 왼쪽으로는 부두와 창고가 펼쳐진다. 부두 창고들은 현재 상업문화시설로 쓰인다.

 

 

 

 

 

 

 

주체적 여성들의 현대 서사시

3일 저녁의 무용극 ‘빅 시스터스’는 비주얼 아티스트 테오 메르시에(1984~)와 안무가 스티븐 미셸(1986~)의 두 번째 협업으로, 올 페스티벌을 위해 지난해 몬테비데오에 상주하며 만든 작품이다.

“몬테비데오는 저희 작업의 거점 같은 곳이에요. 아티스트가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공유하기 아주 좋은 환경입니다. 2017년 첫 협업인 ‘더 나은 삶을 위한 솔루션(Affordable Solution for Better Living)’도 여기서 만들었죠.”(스티븐 미셸)

두 사람은 이곳을 비롯해 에르메스 재단의 후원을 받고 있다. 이케아 가구를 현대인의 토템으로 묘사하며 아름다움의 일반화와 소비주의적 삶을 비판한 ‘더 나은 삶을 위한 솔루션’은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받았다.

‘빅 시스터스’는 20세기 후반 활동했던 프랑스 작가 모니크 위티그(1935~2003)의 소설 ‘레 게리에르(여전사들)’를 바탕으로 한다. ‘레 게리에르’는 남성적 시스템에 대한 여성의 무력 반란을 다룬 신화적 이야기다. 이전까지의 페미니즘 소설들이 억압된 여성과 불평등을 풍자했다면, ‘레 게리에르’는 여성의 직접적인 공격을 그려 ‘여성 해방의 첫 소설’이라고 불린다.

“‘레 게리에르’에는 페미니스트 이론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있습니다. 고대 서사시들이 남성적 미덕을 그리며 여성을 전리품으로 여겨온 데 비해 이 책은 한 편의 현대적인 서사시입니다. 여성들은 ‘연합’하지만 주체를 여성만으로 고립하지 않습니다. 뜻있는 남성들과 함께 가부장제에 맞서 싸우고 시스템을 붕괴시키죠.”(스티븐 미셸)

원작은 사건에 따른 내러티브보다 멀티미디어 설치물처럼 작동한다. 처음에는 평범한 문장을 쓰다 이후에는 규칙과 단어를 버리고 추상적인 표현을 쓴다. 남성적 사고가 언어로부터 비롯된다고 보고 언어의 형태를 바꾼 것이다. 주체는 언제나 3인칭의 집단 ‘여전사들’로 표현된다.(단어에 성별이 있는 프랑스어에서는 3인칭 표현에서 남성형을 여성형에 우선한다.) 사회적 규범 속에서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보지 않기 위해 ‘보편’을 재정의한다. 이러한 문학적 시도들이 어떻게 행위로 녹아날까 기대가 됐다.

극은 암전 가운데 지도자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애도하던 소녀들은 회색 옷을 입고 원 안을 맴돌다 밖으로 나오고, 곧 여성으로서 성적 정체성을 발견하고 즐기며, 복수를 위한 훈련을 받고 전사로 거듭난다. “여성에 대한 표현이 만화경처럼 펼쳐지며” “공상 과학과 역사적 재구성이 번갈아 나온다”는 연출 노트에 비해 실제 연출은 ‘소라’로 여성성을 상징하거나 전쟁을 피 묻은 카펫 위의 격렬한 안무로 구성하는 등 신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스트 스타하우크(1951~)의 ‘나선무’를 차용하거나, 스크린 속 커다란 등장인물의 얼굴이 스스로를 지켜보는 주체이자 감시자로서 모호하면서도 엄격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몇몇 방식은 흥미로웠다.

“여전사들은 의식적으로 보는 주체이기 때문에 그 대가로 자신을 보도록 허용합니다. 화면은 ‘증강된’ 초상화, 바로 여성의 시선

빅 시스터스 ©ErwanFichou

입니다.”(스티븐 미셸)

 

 

빅 시스터스 ©ErwanFichou

 

 

 

 

 

 

 

 

 

 

데이터에 따라 춤추는 시대

4일 저녁의 ‘스테레오’ 속 리즈는 혼자 춤추고 있었다. 그러나 작품은 묻는다. ‘그녀는 혼자일까?’

‘스테레오’는 뉴욕의 언어공학자 피에르 고다르가 실시간으로 텍스트를 구성하면 안무가 리즈 산토로가 마르세유에서 춤을 추는, 독특한 방식의 현대무용이었다. 반대로 리즈의 움직임에 따라 그때그때 단어나 아이디어가 텍스트가 전송되기도 했다. 벽과 바닥의 하얀 스크린으로 커서가 움직이고 그 위로 독무가 유연하게 흘렀다. 타이핑 소리는 곧 리듬이 되었다. 텍스트는 점점 도상적인 형태를 띠며 무보(舞譜)화 됐다.

이제 텍스트와 데이터에 따라 춤을 추는 시대가 온 것일까? 그동안 개인은 다중적인 사회적 관계로 얽혀 있었다. 이제는 텍스트도 움직이는 하나의 개체로서 다중적 관계의 일부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유대가 어떻게 실제에 영향을 미치고 상호작용을 이끌어내는지, 새로운 생각을 던져주는 작품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프리슈 라 벨 드 메(Friche la Belle de Mai)를 들렸다. 19세기에 세워진 이 담배공장은 현재 아티스트들의 작업실이 되었고 그래피티 가득한 곳곳에서 십대들이 농구를 하거나 춤 연습을 했다. 전날 공연이 끝나고 만난 한 파리 출신 아티스트의 말이 떠올랐다.

“마르세유는 자유롭습니다. 파리 역시 문화에 관대하고 많은 부분이 열려 있지만, 강력한 전통 위에 세워진 도시라 그 위에 보이지 않는 규율이 많습니다. 예술적으로 포화된 도시죠. 반면 마르세유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어요. 뼛속부터 오픈마인드랄까요.”

 

 

스테레오 ©Antoine Billet

 

 

 

 

 

 

 

글 전윤혜(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엑토랄 페스티벌

 

 

from AUSTRIA

새로운 ‘피델리오’

 

다른 작품과 엮으며 진화시킨 고전

 

올해 코로나19의 발생으로 가장 큰 손해를 본 음악가는 베토벤(1770~1827)일 것이다. 그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대부분이 취소됐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잠시 진정되자 이를 아쉬워한 런던과 오스트리아 그라츠 등의 오페라극장들이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로 가을 시즌을 오픈했고, 그중 린츠 주립극장의 ‘피델리오’가 많은 호평을 받았다.

린츠 주립극장

9월 19일 린츠 주립극장에서 개막한 이번 프로덕션은 극장장 헤르만 슈나이더의 연출과 린츠 브루크너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이루어졌다. ‘자유’라는 주제 아래 두 오페라를 접목해 제작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색이었다.

‘피델리오’는 레오노레가 남편에 대한 사랑과 용기의 힘으로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자유를 얻는 이야기다. 여기에 영국 작곡가 마크 앤서니 터니지(1960~)의 오페라 ‘Twice Through The Heart’가 접목됐다. 이 작품은 1987년 자신을 목 졸라 죽이려던 남편을 정당방위로 죽게 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아멜리아 로시터의 이야기에서 착안해 스코틀랜드 계관시인이자 샐퍼드 대학의 총장인 재키 케이(1961~)가 쓴 대본을 가지고 작곡된 것이다. 173년 전, 런던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으면서도 묵언했던 아멜리다 로시터. 재키 케이는 그녀의 묵언을 대본으로 대신 썼고, 터니지는 이 대본에 감동해 30분짜리 오페라로 작곡했다.

헤르만 슈나이더(1962~)는 2막짜리 오페라 ‘피델리오’의 구성과 내용, 작품성은 유지하되 ‘Twice Through The Heart’를 더해 3막으로 연결했다. 1막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름 없는 한 여인이 비밀 지하 교도소로 안내된다. 휴식 후 막이 열리면 그 여인이 감옥에 갇힌 채 자신이 왜 남편을 죽였는가를 노래한다. 영상이 무대 전체를 채우고, 그녀는 학대와 폭력을 일삼는 남편이 있는 감옥 같은 집에서 처음으로 자유롭고 싶었던 심정을 노래한다. 그리고 이젠 실제 감옥에 갇힌 그녀는 두 번째 자유를 갈망하며 아리아 ‘출구가 없구나’를 부른다. 여인이 갇힌 사각형 감옥이 무대 중앙으로 높이 올라가 정지하고, ‘피델리오’의 2막이 진행된다.

이번 무대는 두 개의 작품과 두 명의 여성이 오버랩되며 나타나는 형상미를 실험한 듯 보였다. 남성우위와 가정폭력, 성희롱에서 여전히 부자유한 아멜리아 로시터, 2년 반 동안 고문당한 남편 플로레스탄과 환희의 재회를 하고 그를 무릎에 앉힌 모습에서 피에타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레오노레. 하수구에서 터져 나온 물로 가득 찬 지하 천막 감방은 여전히 부자유와 속박에 놓인 오늘의 디스토피아를 절감케 했다.

이번 무대에는 특히 한국인 성악가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바리톤 김태현(Adam Kim)이 교도소장 돈 피사로 역으로 분하고, 베이스 김용철, 테너 이진훈, 테너 변장익이 정치범 1·2 역을 맡아 눈에 띄는 연기를 펼쳤다. 공연이 끝난 뒤, 김태현과 인터뷰를 나누었다.

글 김운하(재 오스트리아 한인원로회장·‘새로운 한국’ 발행인·‘재오한인’ 편집고문)

 

©Herwig Prammer

©Herwig Prammer

 

 

 

활약이 돋보였던 한국인 성악가들(왼쪽에서 김용철, 김태현, 이진훈)

INTERVIEW | 바리톤 김태현

“지금처럼 어려운 코로나 시대에 히말라야의 새처럼 노래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와 하루를 바꾸어 살아볼 수 있다면, 오스카상을 수상한 배우 호아킨 피닉스를 택하고 싶고요. 투명 인간으로 하루를 산다면, CIA와 FBI에 들려 모든 X파일을 복사해보고 싶습니다.(웃음)”

‘피델리오’가 오른 린츠 주립극장 가을 시즌 개막식 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말이다. 그의 답변은 극장을 진동시키는 우람한 목소리와 명 연기력의 소유자이자 스릴과 서스펜스를 지닌 오페라 주인공들을 좋아하는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2019년 브레겐츠 주립극장에서 ‘피델리오’에 처음 출연한 데 이어 린츠 주립극장의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 무대에 같은 역으로 출연하며 더욱 인기를 높이고 있는 김태현은 서울 태생이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군고구마 장수, 제일모직 남성복 판매원을 거쳐 연세대 음대를 졸업한 그는 은사인 김관동 교수의 추천으로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이후 함부르크 음대에서 석사를 마쳤다. 고학으로 예후디 메뉴인 장학금 등 각종 장학금 오디션을 치러야 했고, 콩쿠르에 우승해야 했다.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열린 페루치오 탈리아비니 콩쿠르(2000년)에서 1위에 오르며 오페라 데뷔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유학 생활은 어렵게 했지만, 그 덕분에 오페라 데뷔는 쉽게 했어요. 함부르크 음대 졸업과 함께 2003년 하노버 슈타츠오퍼의 전속 솔리스트가 됐고, 2006년 슈투트가르트 슈타츠오퍼로 거취를 옮겨 5년간 주역을 맡았습니다. 2011년부터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지난 9년간 많은 극장에서, 다양한 역할을 노래했고요.”

슈투트가르트에서는 예명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는 올리버 크레슈머 극장장의 권고로 ‘아담(Adam)’을 택했다는 김태현은 하노버와 슈투트가르트의 극장에서 20대 청년 가수로 일찍부터 다양한 오페라 속의 역할을 마스터할 수 있었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베르디의 ‘리골레토’입니다. 이 무대에만 70회 이상 올랐죠.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피가로 역), 베르디의 ‘멕베드’(멕베드 역), 푸치니의 ‘라 보엠’(마르첼로 역)도 많이 불렀습니다. 차이콥스키의 ‘유진 오네긴’은 어려운 러시아어를 공부하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항상 아련하게 그리워지는 역입니다.”

2016년 서울시오페라단 초청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멕베드 역을 노래한 그는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우렁찬 소리를 지닌 가수로 정평이 나 있다. “베르디를 하나님이 보낸 작곡가, 아니 하나님 자신이 작곡가로 내려오신 분으로 믿는 이탈리아인들처럼 그를 가장 존경한다”는 그는 그동안 이탈리아 오페라로 인정받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바그너의 작품으로도 관심을 넓히며 다음 시즌 ‘로엔그린’의 텔라문트 백작 역으로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제 이름 ‘태현’에는 큰 가마솥으로 황금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며 환경 개선과 절대 빈곤의 어려움에 부닥친 이웃에게 노래로 황금을 만들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현재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합창단원으로 활동 중인 아내와 아들, 딸의 가장으로 살아가는 김태현은 날마다 철저한 채식으로 정신과 몸을 단련하며 이 소망을 키워나간다고 말했다.

 

from America

고통 속 희망

 

2021년으로 향하는 메트 오페라

이용훈 @Metropolitan Opera

‘뉴욕타임스’는 137년 전통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내년 9월까지 어둠 속에 갇히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표현으로 그 충격을 전한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공연예술의 바로미터와도 같은 메트의 이번 결정이 미칠 파급력이 지대할 것으로 내다봤다.

10월 말인 현재 뉴욕에서는 영화 상영관을 포함한 공연개최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주 정부는 공연 재개에 관한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보건 당국자의 말을 빌려, 백신이 상용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함에 따라 연간 3억 달러가량의 재정 규모를 자랑하던 메트 오페라가 2020/21 시즌 취소를 발표한 것이다. 이로써 지난 3월부터 내년 9월 중순까지 총 18개월간 공연을 중단하게 된다.

메트 오페라의 피터 겔브 단장은 이번 사태가 엄청난 손실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련의 공연 취소 사태는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는 단체의 인건비 지출을 막아주는 정당성을 제공한다. 메트 오페라는 천백 명에 달하는 소속 아티스트와 스태프를 보유하고 있다. 거대 단체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원이 필요하다. 출연자의 수나 작품의 길이, 그리고 편성의 크기와 상관없이 한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대 장치·촬영·조명·의상·메이크업·리허설 등과 관련된 수많은 요소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메트 오페라는 가장 적극적으로 온라인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는데, CNN의 보도에 의하면 메트가 보유하고 있는 공연 실황은 약 700여 편에 달한다. 내년 9월 말 대면 공연이 재개될 때까지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관객들을 만날 충분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CNN.com

 

 

일자리 잃은 예술가

피터 겔브 단장은 팬데믹 이후 메트 오페라의 운영 계획과 관련해 관객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예전보다 공연 시작 시각을 앞당기고, 3시간 이상 넘어가는 긴 공연의 상연 시간을 단축하는 것을 포함하는 새로운 계획을 소개했다. 이는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관객 수가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염려와도 연결된다. 그는 내년 시즌의 화려한 청사진을 소개하고 설명하는데 큰 비중을 뒀지만, ‘뉴욕타임스’의 비평가 앤서니 토마시니가 던진 질문처럼, “내년 가을이 되어서도 연주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도 동반되어야 한다. 공연 중단으로 인한 천문학적인 손실을 고스란히 떠받치고 있는 주체는 음악가들을 포함한 공연예술계 종사자들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재작년 메트 오페라 오케스트라에 입단한 단원은 연주가 줄줄이 취소되자, 가족들과 함께 미국을 떠나기도 하였다. 자녀 교육을 위해 학군이 좋은 지역으로 이사할 계획이었지만, 집 계약을 파기하고 아예 휴직을 신청했다. 십수 년 이상 활동해온 한 베테랑 단원은 지난 2월 이후로 급여 지급이 중단되었다며 모아둔 여유 자금도 떨어졌다고 난감함을 토로했다. 그는 구제기금을 받을 만한 곳을 수소문하면서 시간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부닥쳐있다.

이러한 가운데 메트 오페라에 이어 지난 10월 13일에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시즌 업데이트가 발표됐다. CEO인 데버라 보르다는 시즌 전체를 취소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며, 이는 178년 역사상 처음으로 겪는 어려움이라고 밝혔다. 세계 상업 공연예술의 상징과도 같은 브로드웨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타임아웃 뉴욕’은 내년 6월까지 브로드웨이 모든 극장의 문이 닫힐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며, 2018/19 시즌에만 1천5백만 명에 가까운 관객 동원으로 18억 3천만 달러의 수입을 올린 브로드웨이가 올 시즌은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메트 오페라 2021/22 시즌

2020/21 시즌 취소를 발표한 메트 오페라의 피터 겔브 단장은 내년 시즌에 대한 소식도 비중 있게 전했다. 그중 2021년 9월 27일에 열리는 시즌 첫 공연을 장식할 ‘Fire Shut Up in My Bones’(2019)가 단연 눈에 띈다. 저명한 재즈 음악가인 테렌스 블랜처드(1962~)가 작곡한 이 오페라는 세인트루이스 오페라단과 재즈 세인트루이스가 공동 위촉했고, 지난 2019년 6월 세인트루이스 오페라의 연주로 초연됐다. ‘Fire Shut Up in My Bones’는 메트 오페라가 처음으로 소개하는 흑인 작곡가의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인종차별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루이지애나 남부의 가난한 도시에서 자란 흑인 소년이 어떻게 상처를 딛고 성장하는지를 그린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찰스 블로(1970~)의 자서전을, 영화감독 카시 레몬스(1961~)가 각본으로 옮겼다. 테렌스 블랜처드는 그의 첫 오페라 작곡을 통해 오케스트라와 재즈를 효과적으로 접목해야 한다는 즐거운 부담을 갖고 작품을 완성했다고 밝혔다.

메트 오페라는 작년 9월 거슈윈(1898~1937)의 ‘포기와 베스’로 시즌을 시작했다. 이 작품 역시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흑인들의 애환을 담은 내용이다. 내년 시즌 개막 작품도 작년에 이어 흑인들의 삶을 다루는 작품을 선택한 메트의 결정은 미국 사회에 큰 시사점을 던졌다. 공연계에 불고 있는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은 새로운 시점에서 작품과 예술가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예전과 다른 선택을 했을 때 만나게 되는 변화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길을 열어낸다.

내년 시즌에는 총 4명의 한국 음악가들이 메트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발탁된 지휘자 김은선(1980~)이 푸치니의 ‘라 보엠’으로 데뷔한다. 이 작품에서 마르첼로 역을 맡을 바리톤 강주원 역시 메트 데뷔이다. ‘투란도트’에 출연하는 테너 이용훈(1973~)은 칼라프 왕자 역을 맡았다. 3년 만에 그를 메트에서 보게 된다. 투란도트 역의 안나 네트렙코가 그와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12월 중순부터 1월 초까지 연말 공연으로 열리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는 소프라노 박혜상(1988~)이 파미나로 출연할 예정이다.

글 김동민(뉴욕 클래시컬 플레이어스 음악감독)

2019년 세인트루이스 오페라가 초연한 ‘Fire Shut Up in My Bones’ ©Eric Woolsey

테렌스 블랜처드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