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바그네리안의 죽음
그가 휘말린 반유대주의
지난 3월 6일, 독일 바이에른 주 안의 작은 도시 슈반도르프의 한 교회에서 장례미사가 있었다. 피아니스트 슈테판 미키슈(1962~2021)의 때 이른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2월 20일 지역 신문 ‘미텔바이어리체’(MZ)지는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보도했고, 이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다른 언론 매체들도 비보를 전하며 그의 인생을 재조명했다. 그의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올해 4월 말부터 핀란드 헬싱키 시벨리우스 아카데미에서 바그너를 가르칠 예정이었다. 지난 1월 ‘오버팔츠 메디언’(OM)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시벨리우스의 열혈한 팬”이라며 “시벨리우스 아카데미에서 바그너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꿈같은 일”이라고 말한 바 있어 그의 죽음은 많은 이를 놀라게 했다.
시작부터 다른 신동
슈테판 미키슈는 천재 피아니스트로 불린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그를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바그너 전문가’ ‘음악학자’라고 소개한다. 미키슈는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자였던 아버지와 아마추어 성악가인 어머니 밑에서 음악적 교육을 받았다. 여느 ‘분더킨트(신동)’와 달랐던 점은 13세 즈음부터 철학·역사·문학·미술을 독학했다는 점이다.
이미 20세에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콘서바토리움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및 음악사를 수학하고 하노버에서 피아노와 오페라사를 전공했다. 이후 빈에서 학업을 이어가며 29세에 출판사 ‘파프너폰’을 설립해 총 65개의 CD와 DVD를 발매했다.
바그너(1813~1883)는 30대에 접어든 그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준 ‘빛’이었다. 미키슈는 30대 초반 놀라운 연주 실력으로 바그너 오페라를 피아노로 편곡해 연주했고, 이는 세계 각지의 초청연주로 이어졌다.
36세에는 ‘바그너 성지’로 불리는 바이로이트에 입성했다.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무려 450회의 마티네 콘서트를 진행하며 ‘바그너 전도사’로서 그의 영향력은 커져만 갔다. 미키슈의 해설은 풍부한 지식과 더불어 재치와 유머가 있었다. 덕분에 바그너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초보자들조차 쉽게 입문할 수 있었다. 철학·문학·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관점과 해석은 오로지 미키슈만의 전유물이었다. 스위스의 취리히신문(NZZ)은 이렇게 언급했다. “미키슈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연주회에 올 것이며, 그를 모른다면 반드시 와야 한다!” 그의 토크콘서트는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바이로이트뿐 아니라,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도 정기적인 연주로 이어질 만큼, 흥행 또한 대단했다. 관객은 그가 곁들인 설명과 연주를 들으며, 음악을 더 깊이 이해했다. 모차르트·베토벤·차이콥스키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로엔그린’ 속에서 발견하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중 파미나와 파파게노의 2중창이 슈베르트의 ‘들장미’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철학에도 정통했던 그는, 니체(1844~ 1900)·쇼펜하우어(1788~1860)·프로이트(1856~1939)의 철학이 오페라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입체적으로 설명했다. 또한 R. 슈트라우스(1864~1949)·코른골트(1897~1957) 등 독일 작곡가에 대해 정통했지만, 그중에서도 바그너를 ‘완전히’ 알고 있는 전문가였다. 그는 어려운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가 현란한 해설을 마친 뒤, 피아노에 앉아 오페라의 모든 사운드를 구현해 낼 때면, 청중은 넋이 나간 것처럼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뜻밖의 스캔들
그를 성장시킨 것도 바그너였고, 그의 발목을 잡은 것도 바그너였다. 2013년 11월 오스트리아의 ‘쿠리어’ 지는 그가 바그너를 옹호한 것을 두고 신랄한 비판을 실었다. 바그너는 ‘음악 속의 유대주의’라는 저술을 남길 정도로 ‘반유대주의자’였지만, 미키슈는 이는 바그너 전체 저작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고 두둔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을 통해 ‘유대인 증오의 진정한 원천은 2000년 전의 기독교에서 출발했다’ ‘히틀러는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석하기 이전부터 이미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했었다’ ‘(나치에 부역했던) 폭스바겐이나 아우디를 모는 운전자들은 무지한 대가리를 쳐들고 지나가는데, 왜 바그너 팬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야 하는가?’ ‘바그너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촉발했다는 비난은 부당하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음악계 지인은 그가 바그너 신봉자일 뿐,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라며 변호했지만, 바그너를 두둔하느라 유대인 학살의 심각성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이듬해부터 바이로이트에서 마티네 콘서트를 진행하지 못하게 됐다. 바이로이트는 이미 2012년 개막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성악가가 나치 문신으로 하차해 ‘나치 스캔들’로 큰 홍역을 치른 바 있었다. 하지만 미키슈의 거침없는 주장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4월, 독일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정책을 두고 나치와 같은 ‘코로나 파시즘’이라고 비판했다. 동시에 “GEZ(방송수신료) 납부를 거부하고 경찰을 존중하지 말자”라고 선동해 논란이 됐다. 바이로이트는 그가 스스로를 나치에 저항한 한스 숄에 비유한 것을 두고 “원하지 않는 이”라고 공개적으로 낙인찍었다.
이후 미키슈는 2017년 극심한 우울증으로 7개월간 피아노를 치지 못하고, 모든 공연을 취소해야 했다. 우리는 사회화에 실패하고 불우했던 수많은 예술가를 알고 있다. 고흐가 생전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 명성을 사후에 얻은 것처럼, 미키슈도 훗날 재평가 될 날이 있을까? 아니면 역사 속 수많은 무명 예술가들처럼 잊혀질까?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19년 그는 부인을 두고 떠났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자신을 빈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마도 그는 자신에게 가장 따뜻했던 청중이 있었던 장소를 그리워한 듯하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의 묘소에 그를 기리는 꽃이 계속 놓일 것이다.
미키슈의 홈페이지에는 그가 지난 2월 17일에 남긴 글이 있다. “전 세계의 수많은 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영원히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 연주할 것입니다!”
글 오주영(성악가·독일 통신원) 사진 슈테판 미키슈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