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손민수, 운명적으로 뿌리 내려온 음악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10월 11일 9:00 오전

Tell The Classic

 

피아니스트 손민수

운명적으로
뿌리내려온 음악

스승 러셀 셔먼부터 그를 거쳐 임윤찬까지
리스트의 기교와 서정이 흐른다

 

지난 9월, 여수를 시작으로 손민수의 전국 투어 독주회가 시작됐다. 레퍼토리는 난곡으로 익히 알려진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 첫 연주를 마치고 며칠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실에서 그를 만났다. 소감을 묻자 “연주자로서 느낀 건 딱 하나다. 아, 무사히 살아남았구나”라며 웃었다.
“이 연습곡은 하나하나가 시와 같습니다. 작품을 연주하는 동안만이라도 이를 낭송하는 시인이 되길 바랐습니다.”
그의 스승, 러셀 셔먼의 책 ‘피아노 이야기’에 나오는 리스트에 대한 묘사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사랑과 무(無)의 시인이었다. 너그럽고 차별 없는 사랑의 시인이며, 야만성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무너뜨리는 무의 시인이었다.”

 

희로애락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인간의 음악
손민수의 마음에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이 뿌리 내린 것도 러셀 셔먼(1930~)의 영향이다. 2년 전 마무리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도 마찬가지다. 두 작곡가 모두, 자신의 스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
“음악가로 살아간다는 게, 스스로 계획하는 것 같아 보여도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빨려 들어가는 듯하죠. 2000년대 초, 러셀 셔먼 선생님께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녹음하셨을 때 함께 밤을 새우며 곁에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70대 이후 다양한 작곡가의 전곡 연주를 하셨습니다. 그 곁에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많이 받았죠.”
인터뷰 내내 그는 작품을 ‘연구한다’ 혹은 ‘해석한다’는 말 대신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고 이야기했다. 한 작곡가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이 말 한마디에서도 엿보였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가 끝나갈 무렵, 음악학자 앨런 워커가 남긴 리스트 전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리스트의 삶을 새롭게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리스트는 화려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모습이 많이 부각되어있지만, 실제로는 서른다섯 살에 거의 모든 연주 활동을 끝냈습니다. 말년에 종교에 귀의한 것치고는 일상에서 오히려 신에 대한 혼란으로 우울함에 빠진 시간도 있었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들에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모습이죠. 무엇보다는 이번에 저는 리스트가 일평생 사회의 약자를 돕고, 많은 자선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인간의 희로애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 인간이었고, 동시에 사회에서 음악가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몸부림쳤다는 것이요.”

상상과 은유, 초절기교 너머의 환상
작곡가 리스트에 대한 오해가 조금 풀렸다면, 이번엔 ‘초절기교’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에 대한 오해를 풀 차례다. 러셀 셔먼의 음반(Vanguard Everyman Classics)을 들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짧은 ‘프렐류디오’를 지나 2번과 3번곡을 거쳐 4번 ‘마제파’의 옥타브를 듣게 된다면, 종전에 알던 화려함에 대한 감탄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대신 끝없이 파고드는 옥타브의 소용돌이가 고요한 심장에 돌을 던진다. 들어야 할 것은 ‘기교’가 아니라 곡이 끝난 후 불협화음처럼 뒤섞인 잔향의 울림.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음표는 몰라도 쉼표는 다른 피아니스트들보다 더 잘 연주한다”고.
“‘연습곡’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이 작품은 때로는 시적이고 상징적이며 종교적이고 또 인간적입니다. 리스트는 평생에 거쳐 이 작품을 개작했죠. 사랑과 갈등, 신념과 고뇌 등 삶에서 가치를 두는 것들에 대한 노래가 가득 차 있습니다. 흔히 학생들이 리스트의 작품을 ‘손가락 공부’, 즉 뛰어넘어야 하는 테크닉으로 처음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한 사람이 리스트를 ‘교향시’나, ‘단테 교향곡’과 같은 작품으로 처음 접한다면! 그 방대한 색채감과 신비로운 하모니에 먼저 매료되겠죠.”
쇼팽도 12개의 조성으로 ‘연습곡’을 남겼지만, 리스트의 작품은 그 표현의 범위가 다르다. 쇼팽이 “구체적인 손가락의 독립성과 피아노에서 가능한 표현의 역할”을 써 내려갔다면, 리스트는 “큰 붓으로 그린 회화”와 같다. 악기의 한계를 넘어 피아노가 표현할 수 있는 물감의 팔레트를 확장한다.
“이 작품을 연주하면서, ‘빛’을 느낍니다. 구름 사이에 새어 나온 광명의 빛이요. 제가 하는 작업은, 매일 이 작품들에 새롭게 들어가는 것밖엔 없는 것 같아요. 5번 ‘도깨비불’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운 빛들은 어느 저녁 호숫가 위에 피어올라 사람을 유혹해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빛일까요, 아니면 나를 설레게 하는 빛일까요? 답을 얻기는 힘들어요. 내일은 또 어떤 관점으로 이 음악을 연습하게 될지 저도 모릅니다.”

스승부터 제자까지, ‘음악에만 절실하다’는 전통
한창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는데, 교수실 문이 열린다. 들어온 사람은 손민수의 제자. “제가 없는 줄 알고 왔나 봅니다”라며 그가 중단된 인터뷰에 양해를 구했다. “학생들한테 제 방에 와서도 연습할 수 있게 말해놨거든요.” 결국, 세간의 화제가 된 제자에 대해 ‘묻지 아니할 수 없겠다’는 조금 우스운 표현으로 질문의 운을 띄웠다.
“제가 윤찬이의 음악에 대해 표현하긴 어렵습니다. 저도 윤찬이를 다 몰라요. 선생이라는 이유로 제가 ‘윤찬이의 음악은 이렇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한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도 되잖아요? 저도 처음에는 워낙 큰 관심을 받아 걱정했는데, 이젠 우려하는 것이 없습니다. 대범하게 하나하나의 일을 결정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되려 ‘이런 모습이 장점이었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죠.”
한국예술종합학교는 내년으로 개교 30주년을 맞는다.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을 위시해 계속되는 콩쿠르의 성과에 대한 질문에 그는 “비밀은 없다. 오로지 절실하게 음악만을 향해서 살아나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저절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답했다.
“제일 가르치기 힘든 것은 음악적 취향(taste)과 자신만의 분위기입니다. 아무리 잘 치는 연주자라도 특유의 분위기가 없다면, 그 음악은 관객의 가슴 깊이에 닿지 않죠. 어릴 때부터 선후배와 동료, 선생님들을 통해 ‘좋은 음악이 무엇이냐’를 질문하는 힘 있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베토벤에서부터 리스트까지. 깊은 연구로 연결되는 손민수의 다음 프로젝트가 궁금했다. 그가 귀띔해준 소식들은 다가올 음악에 대한 기대를 채우기에 충분하다.
“제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는 부소니의 말이 있습니다. “바흐는 피아니스트들에게 기초이며, 리스트가 도달해야 할 정점이라면 그 둘이 합쳐져야 베토벤이 가능하다” 순서가 반대이긴 하지만, 베토벤·리스트를 거쳐, 바흐의 평균율로 들어가 볼까 합니다. 더불어 내년에는 부산시향의 상주 음악가로 함께 하게 되면서 브람스의 두 협주곡을 모두 연주합니다. 바흐와 브람스로 들어가는 한 해가 되겠네요.”

허서현 기자 사진 목프로덕션

 

손민수(1976~)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김대진을,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러셀 셔먼과 변화경을 사사했다. 부소니·클리블랜드 등 다수의 콩쿠르에서 수상했으며 유럽과 한국, 그리고 북미의 주요 극장 및 언론에서 조명받았다.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5년간 역임 후, 2015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직 중이다. 2020년을 기념해 발매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앨범(SONY) 포함 다수의 음반을 발매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손민수 피아노 독주회
10.16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1.6 대구 아양아트센터 아양홀
11.13 서귀포예술의전당 11.17 부산문화회관 챔버홀
11.26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 12.2 광주 유·스퀘어문화관 금호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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