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계의 비상한 존재, 피아니스트·작곡가 파질세이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9월 4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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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작곡가 파질 사이

클래식 음악계의 비상한 존재

동·서양과 근·현대를 가로지르는 그의 음악어법의 매력

Fazil Say 2016
Photo: Marco Borggreve

 

 

1970년 튀르키예의 앙카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한 파질 사이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신동으로 주목받았으며, 1987년에 독일 뒤셀도르프, 1992년에 베를린에서 유학했다. 독일 유학 중에 그를 가르친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러바인(1949 ~1993)은 그의 연주를 두고 “악마와 같이 연주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94년에 뉴욕에서 열린 영 콘서트 아티스트 콩쿠르에 우승하면서 전문 피아니스트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1996년부터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2002년부터 이스탄불에 거주하며 튀르키예인이자 유럽인으로서 살고 있다.

파질 사이는 13살 때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했으며, 뒤셀도르프 시절에 ‘작품번호 1번’을 내놓으며 작곡가로서도 출사표를 던졌다. 그의 음악은 서구 유럽 근·현대 음악언어에 기반하는 동시에 민족주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즉, 이국적인 정취를 들려주는 복합성을 지닌 것이다. 무슬림의 나라에서 성장하고 기독교의 나라에서 공부했으나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밝히는 등, 문화적 다양성의 교차점에서 여러 경험을 쌓은 것이 이러한 특징에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연주자이자 작곡가로서 낭만·근대·현대의 유산을 한 몸에 지니며, 동양과 서양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그는, 과연 클래식 음악계의 비상한 존재이다.

 

피아니스트가 빈 오선지를 채워나갈 때

작곡가인 파질 사이가 KBS교향악단과 함께하는 9월 공연에는 자작곡인 피아노 협주곡 ‘물’ Op.45(2012)의 한국 초연이 예정돼 있다. 2015년 통영국제음악제 등 여러 차례 내한하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애호가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그가 이번 공연에서도 명성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그의 다섯 번째 피아노 협주곡 ‘물’은 2012년에 작곡돼 2013년 8월에 스위스 그슈타트에서 열리는 메뉴힌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그의 음악에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이정표이다. 초기 피아노 협주곡들이 독주 악기로써 피아노의 음향적 효과에 집중했다면, 피아노 협주곡 4번 ‘아인슈타인을 생각하며’(2005) 이후 7년 만에 작곡된 ‘물’은 극적인 시나리오를 전개보다 정성적인 표현에 중점을 뒀다. 이것은 ‘물’이라는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에 집중하다가 2006년부터 다양한 편성의 실내악과 관현악에 시선을 넓히면서 나타난 변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피아노는 돋보이는 독주라기보다 앙상블의 일원으로 함께한다.

바다를 표현하는 1악장은 쉼 없이 움직이면서 조각난 선율을 연주하며, 드뷔시와 존 케이지의 작품 그리고 재즈의 환영이 아른거린다. 2악장은 밤의 호숫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감상적 정취를 그린다. 이 악장에는 로맨틱한 포스트 클래식 양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아마존의 강물을 묘사한 3악장은 피아노의 음들이 아르페지오에 실려 물이 흐르듯 넘실대고, 그 위에서 뱃놀이하듯 민속풍 선율이 들린다. 여기에 더하여 일부 현악기 연주자는 물소리 효과를 내는 여러 타악기를 연주하며, 남미의 춤 리듬과 원주민 타악기 리듬도 함께 들려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치 물이 우리에게 속삭이듯 연주자들이 주제를 직접 읊조리며 메시지를 전한다.

그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여러 질문을 했지만, 아쉽게도 그중 일부의 답변만을 받았다. 그러나 각 답변은 충실하게 작성되어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음악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 기억이나 혹은 관련된 일화가 있나요? 또한 피아니스트로서 음악을 한 뒤, 작곡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어릴 때부터 장난감 악기로 연주를 시작했어요. 레코드와 라디오에서 들은 음악을 적어, 그걸 연주하곤 했습니다. 다섯 살 때 처음으로 피아노 선생님인 미트하트 펜멘(1916~1982)을 사사하기 시작했죠. 그는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알프레드 코르토(1877 ~1962)의 제자였습니다. 펜멘은 튀르키예의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한 매우 귀중한 피아니스트이자 피아노 교사, 작곡가였어요. 그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을 때면 그는 저에게 즉흥 연주를 시키곤 했습니다. 그날 제가 경험한 것이 무엇이든, 제가 본 것이 무엇이든 피아노 연주를 통해 전달하길 원하셨죠. 그리고 작곡가가 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항상 레슨의 5~10분은 즉흥 연주로 시작했어요.

아, 그리고 피아노 레슨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색으로 음을 배웠어요. C는 파란색, D는 녹색, E는 빨간색…. 여전히 색으로 작업하는 것을 좋아해서 색연필을 사용하기도 하죠.

튀르키예의 음악은 당신의 음악어법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음악적인 요소뿐 아니라 민속악기를 사용하며 튀르키예의 색을 들려주죠. 20세기 후반 이후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작곡가들은 지역색이 없는 음악어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태생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반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튀르키예의 음악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선, 리듬 구조가 유럽 및 서양 음악과 달라요. 5/8박자, 7/8박자, 9/8박자 등의 박자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박자는 중동과 발칸 음악에서도 사용하죠. 리듬에 있어서는 종합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튀르키예는 많은 문화와 민속을 함께 품고 있는 나라입니다. 흑해·지중해·남동부 아나톨리아·에게해 지역의 민속 음악, 종교적 모티브가 있는 음악 그리고 예술 음악이 있습니다.

이 모든 문화적 다양성은 음악적 DNA로서 당연히 제 작품들, 교향곡과 피아노곡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저는 이를 활용해 저만의 자유로운 음악을 만든 것이죠. 튀르키예에서 일어난 사건을 비롯하여 시인, 작가, 정치가와 같은 인물들을 종종 제 작품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20세기 이후 연주자와 작곡가는 대체로 분리됐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정상급 피아니스트이자 인정받은 작곡가로서 활동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활동은 어떻게 조화하나요?

말씀대로 연주자와 작곡가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1990년대 경력이 시작될 때부터 저는 콘서트에서 연주자로서 제 자작곡과 클래식 음악 레퍼토리의 작품을 모두 연주해 왔고, 이는 정말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많은 관현악단과 협연했어요. 수년 동안 유럽, 미국, 극동의 주요 교향악단이 저에게 관현악곡을 의뢰했습니다. 저는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연주하고, 관현악단은 제 관현악곡을 연주하죠. 서울에서는 제 작품 중 하나인 피아노 협주곡 ‘물’을 연주할 예정이고, 이는 한국 초연이에요.

 

2013년의 ‘물’. 그로부터 10년 뒤인 지금

피아노 협주곡 ‘물’의 세 악장은 각각 바다의 움직임과 밤에 호수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을 표현합니다. 물을 작품의 소재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2013년은 ‘세계 물의 해’로 선포됐습니다. 그래서 수자원 보호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았어요. 메뉴힌 페스티벌은 저에게 피아노 협주곡 ‘물’을 작곡할 기회도 주었습니다(필자 주_이 작품은 페스티벌 한 해 전에 위촉된 것으로 보이며, 초연은 앞서 언급한 대로 2013년 메뉴힌 페스티벌에서 이루어졌다). ‘물’이 연주된 콘서트에는 드뷔시의 ‘바다’와 스메타나의 ‘몰다우’도 포함됐습니다. ‘물’을 위해 특별한 악기를 많이 준비했는데요. 물, 파도, 갈매기, 비둘기 등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다양한 악기들입니다. 이 악기들을 한국으로 가져갈 거예요. 이 작품은 튀르키예는 물론 국제적으로 매우 인기 있는 작품이 됐어요.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이 초연이니, 관객의 사랑을 많이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내한에서도 작곡가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의 모습도 선보일 예정입니다. 이번 한국 방문에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신가요?

한국에서의 연주는 항상 저에게 큰 영광이었습니다. 독일에서 학생 시절부터 많은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었어요. 그들은 매우 훌륭한 음악가입니다. 한국은 음악적으로 매우 성공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음악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서도 한국은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시각 예술에서도 매우 창의적이죠. 튀르키예에서는 한국의 예술가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KBS교향악단

Fazil Say 2016
Photo: Marco Borggreve

작곡 노트 살펴보기

파질 사이가 직접 작성한 작품에 대한 설명이다. 작품의 악장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1악장 ‘파란 물’은 바다를, 2악장 ‘검은 물’은 밤과 호수를, 3악장 ‘초록 물’은 강을 주제로 한다.

 

 

 

1악장 파란 물

광활하고 무한한 바다의 파란 물을 명상적으로 묘사한 곡이다. 파란 물결의 밀물과 썰물, 이국적인 소리, 바다와 하늘의 순수함에서 느끼는 소박한 기쁨 등 바다의 경쾌한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모든 노래를 통해 우리가 느끼는 감동을 표현한 즐거운 음악이다.

2악장 검은 물

모든 일은 밤에 작은 호수와 그 주변에서 일어난다. 개구리와 새 소리가 들리고, 호수, 고요함, 달과 달빛을 위해 쓰인 작품이다. 색소폰과 기묘한 소리를 내는 악기인 워터폰이 놀라운 분위기를 더한다. 중간부의 빠른 악곡은 마치 요정의 춤 같다.

3악장 초록 물

끝없이 흐르는 초록빛 물의 모습을 보면 ‘강은 언제나 같은 강이지만 물은 결코 같은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떠오른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하는 타악기 ‘비브라톤’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진동음과 같다. 이 악장의 마지막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들의 언어로 다음의 말을 속삭인다. “물은 생명을 준다. 생명은 물에서 비롯되고 결국 물로 돌아간다. 물은 생명을 의미한다. 생명은 물에서 비롯된다.”

Performance information
성시연/KBS교향악단(협연 파질 사이)

9월 19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닐센 헬리오스 서곡 Op.17, 파질 사이 피아노 협주곡 ‘물’ Op.45,

힌데미트 교향곡 ‘화가 마티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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