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와 톱을 들고 하루를 보내는 정형외과 교수 김태균에게 음악은
의사의 거친 삶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멋진 동력이자 더없는 위로다
“메스 주시고, 음악 틀어주세요.”
수술실에서는 늘 음악을 듣는다. 오전에는 고전음악을, 이른 오후에는 내가 좋아하는 조금은 세월이 지난 대중음악을, 늦은 오후에는 젊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밝고 빠른 요즘 대중음악을 듣는다. 오전은 대체로 이 무지치가 연주한 비발디의 ‘사계’로 시작해 모차르트·베토벤·바흐·라흐마니노프 등으로 나아간다. 이른 오후부터는 국내외 대중음악 100여 곡 모음을 듣는데, 수술 팀이 좋아하는 요즘 노래 중에서 환자분이 불편해 하지 않을 곡 위주로 선곡한다.
수술실에서의 하루를 이 무지치 연주의 비발디 ‘사계’로 시작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여러 가지 현악기가 만들어내는 밝고 다채로운 음의 조화가 수술실에 밝은 기운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루 열 개가 넘는 수술을 마쳐야 되는 것은 수술 팀에게는 큰 부담인데, ‘사계’의 밝은 기운은 극도로 부담이 심한 월요일 오전의 무거운 공기를 슬며시 날려버린다.
개인적으로도 ‘사계’는 특별하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고전음악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나는 1988년 의과대학 졸업 후 인턴 봉급으로 오디오를 마련하겠다고 세운상가를 방문했다. 그때 가게 직원이 들려준 곡이 바로 이 무지치의 ‘사계’였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다채롭고 신선한 선율은 비싸지 않은 그 오디오를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만들어줬다. 이후 세월이 지나 2000년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연수 시절, 가족들과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와 캐나다를 여행했는데, 여행을 출발하며 당시 초등학교·유치원에 다니는 가혜·윤식이에게 이 곡을 들려줬다. 하루에 300킬로미터가 넘는 긴 거리를 차량으로 이동해야 되는 어려운 여정이었다.
“가혜야, 윤식아, 이 음악은 비발디가 작곡하고 이 무지치 악단이 연주한 ‘사계’라는 음악이란다. 봄·여름·가을·겨울, 각 계절마다 특징적인 곡으로 이루어졌단다. 우리 삶과 비슷하지. 이제 우리는 여행을 시작한다. ‘사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도 이 여행에서 봄의 설렘과 여름의 강렬함, 가을의 풍성함, 그리고 겨울의 쓸쓸함을 느끼게 될 것이란다. 우리는 그런 마음들을 간절하게 지켜보고, 여행이 끝났을 때 새로운 봄·여름·가을·겨울이 시작됨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중음악을 수술실 레퍼토리에 포함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수술 방에서 종일 고전음악만 들었다. 2년 전 단기 연수로 인공관절 분야에 명망이 높은 필라델피아 파르비지(Parvizi) 교수를 방문하였을 때의 경험이 계기가 됐다. 그는 수술실에서 대단히 소란스러운 기계음악(techno music)을 듣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수술실 방송 오류라 생각하고, 당혹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레 수술실 음악으로는 조금 소란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재밌는 대답을 했다. 처음에는 고전음악을 들었는데, 차분한 음악이 수술 팀의 정신을 느슨하게 해 근무 속도를 늦추는 것 같아서 몇 년 전부터 기계음악으로 바꿨다고. 그리고 그 이후 수술실 효율성이 높아진 듯하다고.
이와 비슷한 경험을 미용실에서도 했다. 사실 나는 아직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것을 어색하게 느끼는 세련(?)되지 못한 사람이라, 아들의 강권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사람을 피해 근무가 거의 끝날 무렵으로 예약해서 가곤 한다. 그런데 갈 때마다 대단히 활기찬 음악이 매장을 채우고 있다. 지점장에게 물어보니 직원들이 지칠 시간이라 저녁으로 갈수록 리듬이 빠른 활기찬 음악을 튼다고 했다. 대중음악을 수술실 레퍼토리로 넣고 나서 업무의 효율성이 높아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수술 도중 아는 노래가 나오면 가끔은 속으로 따라서 흥얼거리기도 하고, 익숙한 음악들이 내 긴 하루의 늦은 오후 시간을 즐겁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수술실에서의 하루를 이 무지치의 ‘사계’로 시작한다면, 수술이 없는 날은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비탈리의 ‘샤콘’이 들어있는 야샤 하이페츠의 음반으로 시작한다. 1996년 정형외과 전임의를 마치고 전일제 박사연구생으로 서러운 봉급 없는 정형외과 전문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동숭동 대학로 거리를 걷다 지금은 사라진 음반판매업소 ‘바로크’의 쇼윈도에 붙어있는 음반 광고 글귀에 홀리듯 가게에 들어갔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짙은 밤색의 음반 표지에서 바이올린을 비스듬히 잡고 있는 큰 눈, 큰 코의 야샤 하이페츠를 만났다. 얄팍한 지갑을 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구한 음반이었다. 연주자의 이름도 특별하고, 앨범의 광고 글귀도 특별하고, 음반에서 나오는 선율은 더욱 특별한, 흘러나오는 음률 외에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듯 어쩌면 너무도 도도한 당당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18년의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아침마다, 그리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위로가 되어주는, 울고 있는 친구 옆에 가만히 서서 손수건을 건네주는 듯한, 내게는 그런 음반이다.
나는 명작을 남긴 예술가의 뜻과 삶을 늘 동경하고 흠모하며 살아왔다. 망치와 톱으로 살아야 하는 정형외과 의사로서의 삶은 우아한 예술가의 삶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무릎 질환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다시 본래의 삶의 여정으로 돌아가는 걸 돕는 일도 어떤 면에서는 멋진 예술이다. 잘 살아낸 삶의 자취만큼 훌륭한 명작은 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으로 내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대학을 졸업하고 진학하는 가혜와 윤식이가 비발디 ‘사계’를 들려준 나의 뜻을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지, 내 수술을 돕는 젊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침마다 ‘사계’로 시작하는 내 뜻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더도 말고 덜도 아닌 그 완벽한 현악기의 어울림에 대한 기대가 월요일이 다가오는 일요일 오후의 무거움을 달래기에 충분한 기쁨을 주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할 뿐이다.
김태균은 현재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정형외과 교수, 국제학술지 CORR 부편집인이다. 2013년 독일계 의료기기 회사 비브라운 사와 함께 무릎인공관절을 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