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류재준

파격보다 중요한 것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2월 1일 12:00 오전

유럽 무대에서 인정받는 작곡가 류재준. 그의 삶 그 자체로서의 음악

유럽 무대에서 인정받는 작곡가 류재준. 그의 삶 그 자체로서의 음악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작곡가 류재준의 음악.

“형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기가 있고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 이렇게 전개되는 형식요. 현대에 오면서 더 많이 파괴된 음악이 좋은 음악인 것처럼 여겨졌잖아요.”

“똑같은 질문을 제가 예전에 펜데레츠키한테 했어요. 뉴욕에서요. Structure(구조)와 Form(형식)은 어떻게 다른 거냐고 물었죠. 아침에 물어봤는데 하루 종일 대답이 없더라고요. 그러다 오후 4시쯤인가, 그가 제 방문을 막 두드렸어요. 여권 들고 나오래요. 존 F. 케네디 공항에 가서 비행기 타고 파리로 갔어요. 굉장히 오래된 유서 깊은 레스토랑에 가서 두 시간 동안 정찬을 했어요. 뭔지 알겠냐고 하더군요. 그 순간에 알아듣긴 했는데 완전히 이해하는 데는 20년이 걸렸어요. 지금 설명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정확히는 모르더라도 뉘앙스는 알고 싶은데요.”

“일단 기본적으로 프랑스 음식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해요. 와인의 종류, 향신료들도요. 레스토랑의 역사, 테이블에 놓인 꽃의 꽃말, 벽에 걸린 장식품, 웨이터가 서빙하는 방법… 어떤 건 전통에 따라, 어떤 건 멋으로, 어떤 건 격식에 맞추기 위해 그곳에 존재했어요. 형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면 그걸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근데 모르면서 무조건 해체만 하려고 든다면, 그건 잔혹한 파괴일 뿐이죠.”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한 류재준은 1994년 폴란드로 유학을 떠나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에게 배웠다. 세계무대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건 2006년부터다. 이때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과 2007년에 작곡한 ‘진혼 교향곡’이 레코딩되어 낙소스 레이블로 전 세계에 발매되었고, 2008년에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 ‘봄’은 텔로스 레이블로 유럽에 발매되었다. 이외에도 폴란드의 둑스와 영국의 RPO 레이블에서 지속적으로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핀란드 난탈리 페스티벌·독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페스티벌과 폴란드 고주프 필하모닉의 상주 작곡가를 역임했으며, 로열 필하모닉·헬싱키 필하모닉·바르샤바 필하모닉·서울바로크합주단(코리안체임버오케스트라) 등 세계의 여러 오케스트라가 그의 작품을 연주했다. 지난 10월에는 펜데레츠키·불레즈·게르기예프에 이어 폴란드의 1급 훈장인 글로리아 아르티스를 수상했다.

류재준의 현을 위한 신포니에타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세계 초연된 후 이틀이 지나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의 인터뷰는 마치 취조하듯 이루어졌다. 류재준과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기자는 그의 음악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보기 위해 질문공세를 폈다. 오가는 대화는 뜬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당연했다. 음악은 원래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 현을 위한 신포니에타 초연 장면

이틀 전 세상에 나온 현을 위한 신포니에타에 대해 먼저 얘기하죠. 정말 잘 들었습니다. 다른 인터뷰에서 환희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싶다고 했던데, 어떤 작곡 기법으로 이러한 메시지를 반영했는지요?

우리나라 상황이 좋지 않잖아요. 있는 사람들은 더 가지려 하고, 없는 사람들은 용기를 다 잃었고요. 젊은이들은 너무 힘들고, 어르신들도 휴지 줍고 있고, 집에 아픈 사람 하나 있으면 망하는 건 시간문제죠. 삶이 너무 어두우니까 공연장에 와서라도 희망을 가져라, 그거였어요. 행복한 감정을 느낄 일이 별로 없으니까. 이걸 어떤 방법으로 곡에 넣었는지, 그건 설명이 불가능하죠.

작곡의 목적이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뭔가를 일깨우기 위함인가요?

아뇨. 음악으로 변혁을 일으킨다는 건 어림없는 소리죠. 제가 곡에 쓰는 건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그걸 메시지라고 할 수 있죠. 근데 혁명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기록하는 거예요. 사회에서 저는 기록자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을 들으면서도 느꼈지만 선생님은 음악적으로 난해하고 감상이 고단한(?) 곡을 쓰는 작곡가는 아니죠. 동시대 작곡가 중에는 자신만의 지적인 세계에 갇혀 어렵고 복잡하게 곡을 쓰는 사람도 있잖아요. 청중과 소통하기 위해 쉬운 방법을 취하는 건가요?

저는 제 곡이 쉽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쉽게 쓴 곡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이 제 곡을 듣고 쉽다는 표현을 많이 써요. 근데 악보를 들여다보면 굉장히 어려워요. 제가 20년 동안 쌓아올린 모든 게 녹아 있죠.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많은 음악가가 제 곡을 조성 분석하려다 실패했어요. 이번에도 연주자들이랑 하루 여섯 시간씩 나흘 동안 연습했어요. 오케스트라 풀 편성 곡보다 리허설도 더 많이 했고요.

작곡을 쉽게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작품을 쓸 때 작곡가의 메시지를 듣는 청중의 입장을 고려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어요.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연주자들이에요. 연주자들이 연주하고 싶어 할 곡을 써요. 때때로 연주자들은 한 달 동안 하나의 패시지만 연습하기도 하거든요. 듣는 사람들은 연주자가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치는지 모르죠. 그러니까 연주자를 먼저 납득시켜야 해요. 고통스럽게 연습해서라도 연주할 가치가 있는 곡을 갖다 줘야죠. 연주자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관객들은 두말할 나위가 없어요.

어쨌든 작품이 존재하는 최종 목적은 청중이잖아요.

최종 목적은 저예요. 속에 있는 걸 잘 말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할 뿐이에요.

그렇군요. 그럼 ‘작곡’ 말고 ‘음악’에 대한 질문을 할게요. 좋은 음악이란 뭘까요?

자신의 이야기가 뚜렷하고, 그걸 정말 매력 있게 잘 풀어놓으면 그게 좋은 음악 같아요. 나쁜 음악은 일단 거칠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장자’에서 나온 말인데, 옛날에 대부분의 사람은 돌을 쪼고 깎으면서 뭔가를 얻었대요. 근데 장인들은 돌 안에 있는 형상을 끄집어냈다는 거죠. 음악은 완벽해야 하고, 또 자연스러워야 해요. 이상하게 들리는 음악은 부족해서 그런 거예요. 솔직히 타고나야 하는 것 같아요. 멘델스존 8중주, 그거 작곡가가 열여섯 살에 쓴 건데 지금 들어도 너무 좋잖아요. 브람스 피아노 5중주도 거의 초기 작품이거든요. 선물 받은 재능이 있으니까 가능한 이야기죠.

노력을 통해 발전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재능은 재능인데, 노력을 해야 꺼내지는 거예요. 저도 20년 걸렸어요. 유학 갔다가 한국 와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작곡가로서는 완전히 은둔했어요. 아무 활동도 안 하고 공부만 했죠. 외국의 어떤 학교 졸업장 땄다, 이건 정말 확인서일 뿐 예술가로서 증명을 받은 건 아니잖아요. 우리나라 음악가들은 공부를 너무 안 해요.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신경 쓸 게 너무 많으니 그렇겠죠. 저는 지금도 매일 오전 6시부터 11시까지 무조건 학습의 시간을 갖거든요. 음악 듣고, 피아노 치고, 악보 베끼고. 바흐 코랄 371개를 모든 조로 전조하는 걸 일 년에 끝냈어요. 베토벤 교향곡은 1번부터 9번까지 전부 외웠고요. 오페라는 지금도 7개를 외우고 있어요. 암기를 한다는 건 굉장히 고생스러운 작업이지만 그걸 통해 배운 게 너무 많아요. 지금도 물론 쌓이고 있고.

음악을 잘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는 거죠?

그거밖에 없죠. 삶 자체가 음악이어야 해요.

혹시 작곡을 가르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요?

아뇨.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그럼 작곡을 가르치는 모든 학교와 사제 관계는 전부 무의미한 건가요?

그렇지는 않죠. 펜데레츠키한테 2년 동안 엄청 많이 배웠으니까.

작곡 레슨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요.

맞아요. 펜데레츠키는 항상 저를 데리고 다녔어요. 그냥 계속 봤어요, 이것저것. 제가 첼로를 배우고 싶다고 하면 로스트로포비치한테 보냈고,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아이작 스턴한테 보냈어요. 작곡을 가르친다는 건 불가능해요. 가능성 없는 이야기에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꾸미도록 도울 수는 있겠죠. 근데 가르치는 건 안 돼요. 가르쳐서도 안 되고요.

한국 음악 교육이 어떻게 개선되길 바라요?

일단 음악을 왜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입시 레슨을 받고 학교에 들어가죠. 뭐가 좋은지 안 좋은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새로운 걸 쓰라고 배워요. 근데 새로운 걸 찾는 게 목표다, 이건 너무 비상식적이지 않아요? 음악이 새롭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물론 뭔가 다른 가능성을 찾는 건 중요하죠. 거기에 매진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의 노력도 존중해요. 시작 단계에서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앙상블 오푸스에 대한 질문입니다. 2006년에 설립해 내년이면 10주년인데요. 작곡가와 연주자가 오랜 시간 관계하며 함께 발전했을 것 같아요.

처음 앙상블 오푸스를 만든 이유도 ‘관계성’을 갖기 위함이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큰 세계가 있잖아요. 그걸 같이 나누면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연주자들이 필요했어요. 요하임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기에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나온 거잖아요. 프로코피예프한테는 오이스트라흐가 있었고요. 작곡가는 연주자의 조언을 무서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다른 건 몰라도 음악 앞에서는 언제나 겸손해야죠. 내 생각보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해요. 연주자가 하는 말을 전부 들을 필요는 없지만 ‘아예 안 들을 거야’ 하는 거랑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니까요. 다행히 앙상블 오푸스 단원들은 제가 완전히 신뢰할 만한 훌륭한 연주자들이에요.

벌써 마지막 질문이네요. 2009년부터 개최한 서울국제음악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제를 만들기 위함이라고요.

네. 세 가지를 지키려고 해요. 일단 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하고, 음악적으로 아무렇게나 믹스되지 않아야 하고, 마지막으로는 친절해야 해요. 음악인들만의 축제가 아닌, 한국 청중과 진정으로 교감할 수 있는 음악제를 만들고 싶어요. 급하게 생각하지는 않고요. 10년, 20년 후에 제 의도대로 인정받을 수 있게 차근차근 발전시키고 있어요.


▲ 2013 서울국제음악제에서 류재준과 아르토 노라스

11월 6일부터 12일까지 브르타뉴 심포니의 초청으로 프랑스 투어 공연을 다녀온 류재준은 11월 29일, 서울바로크합주단과 핀란드의 타피올라 신포니에타의 공동 위촉곡인 마림바 협주곡을 한국에서 초연한다. 이 곡과 그의 첼로 협주곡이 내년 3월 그제고시 노박/로열 필하모닉의 연주(협연 아르토 노라스(첼로)·한문경(마림바))로 녹음되어 9월경 음반(RPO)으로 발매될 예정이다. 지난 11월 1일 한국에서 초연한 현을 위한 신포니에타는 현재까지 유럽의 30개 오케스트라가 연주 의사를 밝혔다. 이외에도 2019년까지 작품 위촉을 받은 상태다.

“욕심나는 데 못하고 있는 일도 있어요?” 하고 물으니 “그런 거 없어요. 곡만 잘 쓰면 되는데요, 뭘”이라고 대답한다. 한국 무대에서 그의 음악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사진 심규태·오푸스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