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정치

송현민의 CULTURE COD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3월 1일 12:00 오전

음악의 ‘음(音)’과 정치의 ‘치(治)’. 잘 결합되면 ‘화음’이, 그렇지 못하면 ‘음치’가 나온다

음악 | 소리를 매체로 박자·선율·화성·음색 등을 일정한 법칙과 형식으로 종합해 사상과 감정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건드리는 예술

정치 | 권력을 획득·유지·행사하는 활동. 국민들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

정의와 도덕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정치철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는 플라톤의 ‘국가론’에는 시인 추방론이 언급되어 있고, 시나 연극에 대한 비난이 일관되게 드러나 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언급이 압도적으로 많다. 왜냐하면 ‘음악적으로 새로운 것은 전체 국가에 대한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마땅히 금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상의 공동체’를 위한 음악

음악에 대한 언급이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시인과 음악가들에게 관심을 쏟게 했던 당시의 타락적인 징표가 조각가나 건축가에게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각이나 건축은 한 공간에 고정된다는 제약 여건이, 시나 연극은 각 개인의 독해력에 따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 진입 장벽이 된다.

하지만 음악은 대중적인 접근성이 훨씬 뛰어나다. 그런 음악의 성질에 노출되었을 때, 애통하거나 술에 취한 듯한 음률은 국민을 유약하고 나태하게 하는가 하면, 전투적인 음악은 청소년들에게 용기와 담력을 불어넣고, 평화로운 음악은 위안과 안정을 준다. 정치로 세운 기강을 흐트러뜨리기도 하고, 기강을 세우는 정치에 동원될 수 있는 것이 ‘음악’이었던 것이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말한 이는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이었다. 하지만 국가를 운용하는 정치의 힘은 일사불란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플라톤에게, 정확한 박자·음정으로 질서 의식을 배양하는 음악가만이 ‘정치’라는 장에 진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정치가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 사람의 정치관을 읽을 수도 있다.

정치(政治). 이에 대한 정의에 의견은 분분하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의견 차이나 이해관계를 둘러싼 다툼을 해결하는 과정’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윤이상은 음악이 ‘차이’를 해결하고 ‘이해’의 과정을 이끌어내는 데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뜻으로 앞의 말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핀란디아’와 스메타나가 만든 ‘나의 조국’은 나라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한데 묶는 구실을 했다. 국가마다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애국가를 만드는 이유도 여기 있다.


▲ 파데레프스키

정치가가 된 음악가

이처럼 음악에는 정치적 기능이 있지만, 실제로 음악가가 정치를 한 사례도 있다. 작곡가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1860~1941). 그는 쇼팽의 고국 폴란드가 낳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31세에 미국무대에 데뷔한 그는 죽을 때까지 미국에서만 1,500회 이상의 연주회를 열고, 500만 명의 청중의 심금을 울리며 무려 1,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치면 그야말로 천문학적 숫자라고 할 것이다. 빼어난 피아노 실력 외에 세련된 사교술을 갖추었고, 폴란드어를 비롯하여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를 구사했으며 격조 높은 지적인 화술로 지식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인기는 극장을 뻗어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파리에 본부를 둔 폴란드 국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18년에 독립을 선언한 폴란드 신정권의 수상 겸 외상에 취임했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에서 폴란드 최고의 정치 지도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정치적 각축 때문에 그가 수상의 자리에 있은 것은 1년에 지나지 않았다. 파데레프스키의 이야기는 ‘총리가 된 피아니스트’(2013)라는 다큐멘터리로도 나와 있다. 폴란드의 비에스와프 동브로프스키가 감독을 맡은 다큐멘터리로, 미국의 전 대통령 고 로널드 레이건과 존 F. 케네디, 조지 부시, 전 폴란드 대통령 레흐 바웬사 등 역사적인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파데레프스키의 위대한 행보를 읽을 수 있다.

무대 위의 음악가나 정치가나 ‘인기(人氣)’를 먹고 산다. 인기란 대상과 인물에 쏠리는 대중의 높은 관심이다. 이러한 인간의 기운은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고 지지하는 사람을 향하게 마련이다. 베르디도 음악가로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의회에 입성한 작곡가다. 그가 작곡을 왕성하게 진행하던 무렵은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베르디도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부코’를 작곡했는데, 1842년 초연 당시 베르디는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 민중의 처지를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에 투영했다. 이런 경력이 후일 이탈리아가 독립을 하고 첫 의회가 결성됐을 때 베르디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하는 데 큰 발판이 되었고, 그는 오페라 극장에 정부의 재정을 보조하도록 하는 문화정책을 주장하기도 했다.


▲ 헬무트 슈미트

무대에 선 정치가

정치는 ‘권력’과 ‘힘’으로, 음악과 예술은 ‘자유’와 ‘유연함’으로 상징되고는 한다. 둘은 반대 영역이다. 그래서 현직 정치가들이 악기연주를 하거나 음악을 전공했던 경력은 늘 화제가 되기도 한다.

1993년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빌 클린턴이 대선 운동을 펼칠 때, 그의 색소폰 연주가 주가와 명성을 급속도로 높여준 일화는 유명하다. 독일의 국방장관, 재무장관, 총리를 역임한 헬무트 슈미트(1918~2015)는 유능한 ‘정치적 인간’이자 빼어난 ‘음악적 인간’이었다. 얼마 전에 사임한 지휘자 정명훈을 대신하여 서울시향의 무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지휘자·피아니스트 크리스토프 에셴바흐를 비롯하여 유스투스 프란츠, 게르하르트 오피츠 등 독일의 내로라하는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바흐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이즘 되면 2007년에 일본의 나루히토 황태자와 정명훈의 협연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아도 좋을 듯싶다. 긴장된 표정으로 비올라를 켜고 있는 나루히토, 그와는 대조적으로 편안하게 피아노건반을 두드리는 정명훈의 모습이 클로즈업 된 신문기사는 화제를 낳았다.

한국에서도 정치가들이 무대에 선 적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고문을 비롯해 제29·30대 전북도지사를 역임한 유종근은 1999년에 서울바로크합주단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느린 악장을 협연했고, 뉴서울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주자로 올랐을 때, 그의 이러한 경력은 단연 화제를 낳았다. 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인호도 2001년 KBS교향악단 신년음악회에서 차이콥스키의 ‘슬라브 행진곡’을 지휘하기도 했다. 첼로를 공부했던 노희찬의 경력은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 출신의 국회의원 이종걸이 예원중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던 경력은 최근 화제를 낳기도 했다.

정치는 남성의, 음악은 여성의 영역으로 인식되곤 한다. 그래서 음악은 여성 유권자와 민심을 잡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알고 보면 나도 부드러운 남자야’라면서. 어쨌건 음악과 정치는 생리가 다르다. 하지만 음악에서 중요한 선율(旋律)이나 정치가들이 지켜야 할 법률(法律)에는 ‘법’을 뜻하는 ‘율(律)’자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음악이든 정치든 ‘삑사리’ 나지 않게끔 ‘율(律)’로 선율을, 정사(政事)를 잘 다스려야 한다. 음악의 ‘음(音)’과 정치의 ‘치(治)’는 공통적으로 ‘화음’을 지향하지만, 잘못 결합되면 ‘음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을 그들이 알게 될 때 흔히 말하는 ‘살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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