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인생 40주년을 맞은 그녀가 연극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전설의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의 열정을 자신의 예술혼 속에 담아내려 한다
요즘 연습 때문에 바쁘시죠?
일상에서 다시 전쟁터로 온 것 같아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연습에만 집중하고 있죠. 너무나 힘든데 왜 이리도 행복한 건지.(웃음)
그래서 40년을 걸어올 수 있었나 봐요.
제게 연극은 단순히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는 직장이 아니라, 직업이고 소명이었기에 행복하게 이 길을 걸을 수 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래서 더 어려움도 있지 않았나 싶고요. 신념을 갖고 선택한 길이어서 의미 있었고, 힘들어도 앞으로 나갈 수 있었죠.
무대 인생 4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으로 특별히 마리아 칼라스의 삶을 담은 ‘마스터 클래스’를 올리는 이유가 있나요?
무대 인생 20주년을 맞았을 때는 ‘빛, 바람, 하늘, 꽃 콘서트’를 가졌어요. 그때는 특별한 의미보다는 다양한 노래를 무대에서 자유롭게 전하고 싶은 제 꿈을 청중과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 무대 인생 30주년 땐 30명의 친구와 함께 30회의 공연을 하면서 꾸준히 해 왔던 자선 행사의 수익금을 좀더 많이 기부할 수 있었죠. 그런데 무대 인생 40주년을 맞는 지금의 마음은 그때와는 또 많이 다르네요. 이번 무대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보다는 제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의 의미가 깊어요. 그리고 이렇게 방점을 찍어야 앞으로 더 나아갈 힘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번 무대를 마련했어요. 이 무대가 제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새 힘을 얻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마스터 클래스’를 선택한 건 이 작품이 대사가 무척 많고 여러 면에서 무대에 올리기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18년 전 슬럼프에 빠졌던 저를 구해준 작품이었고, 이번에도 그녀의 삶이 저를 이 작품으로 이끌어주었어요.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마리아 칼라스가 나이가 들어 어느 강의실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러면서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신이 교차해요. 아름다운 음악과 대사가 어우러져 배우도 관객도 점점 극 속으로 빠져들게 되죠. 예술가로서는 노래의 여신이었지만 한 여자로서는 파란만장했던 삶의 이야기가 마음 아프게 다가오네요.
마리아 칼라스는 어떤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노래를 듣다보면, 뛰어난 실력이 주는 감동을 넘어 가슴을 파고드는 어떤 전율같은 것이 느껴져요. 노래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사랑 앞에서는 또 한없이 약하고 순수하잖아요. 그런 면들이 참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돼요.
20년 전에도 연극 ‘마리아 칼라스’로 무대에 섰는데,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있나요?
몸이 달라졌죠.(웃음) 그땐 훨씬 젊었으니까요. 하루 종일 하이힐을 신어야 해서 다리에 무리가 많이 가고, 대사가 많아 목 관리에도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해요. 얼마 전부터는 체력을 다지기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렇게 몸은 힘들지만 감사하게도 작품에 대한 이해는 좀 더 깊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요즘 연습하면서 느끼는 점은, 그때는 보이지 않던 행간이 보인다는 거예요. 좀 더 편안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어요.
마리아 칼라스가 마스터 클래스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혹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전 두 가지를 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돼요. 제가 갖고 있는 모든 걸 쏟을 수 있었던 분야가 그래서 연기 말고는 연출이었어요. 연출은 배우를 가장 배우답게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거쳐 후배들에게 제가 가르칠 수 있는 것들을 전할 수 있었죠.
이번에 함께 무대에 서는 분들을 보니 반가운 이름이 많네요.
모두 인연이 깊은 분들이에요. 임영웅 선생님과는 작년 산울림 소극장 30주년 개관 기념작으로 ‘먼 그대’를 함께 올렸고, 특히 음악이 중요한 이번 무대에서 제가 아끼고 존경하는 지휘자 구자범 씨가 음악감독을 맡아주었어요.
그동안 무대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텐데요.
배우만큼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이도 없을 거예요. 40년의 시간동안 무대와 객석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죠. 사람을 참 좋아해요.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변하죠. 사람은 가장 아름다운 존재이면서 또 가장 추한 존재이기도 해요. 그래도 다행히 제 곁에 지금까지 좋은 사람이 많이 남아 있는 건 우리가 서로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연극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만난 이들은 같은 나무의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고, 그래서 더 오래갈 수 있었겠죠.
가장 인상 깊은 무대가 있다면요?
배우로서 대중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연극 ‘신의 아그네스’와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제게도 여러 면에서 의미가 깊어요. 연극을 사랑했지만 전 한 번도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그래도 무대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던 건, 제게 잘 맞는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 인연들이 모여 지금의 저를 있게 했죠.
그러면서 여러 시련도 있었는데요.
연극 ‘신의 아그네스’로 주목받으며 소위 ‘스타’가 되고 나서부터 제 삶은 고난의 시작이었어요. 그 작품을 하면서 감기가 기관지염이 되고 결국 후두염으로 악화되어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죠. 생각지도 않은 오해도 받았고, 억울한 일, 가슴 아픈 일들도 많이 겪었어요. 생각해보면 늘 인생의 절정에 오르는 순간 마다 큰 고난이 왔던 것 같아요.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한건가요?
어떤 상황에서도 제겐 공연이 최우선이었어요. 연극을 하겠다는 저를 집안에서 많이 반대했지만, 그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더 열심히 해야 했고, 제겐 오직 이 길뿐이었어요. 연극 작품에서 전하는 진실한 메시지가 좋았고, 그걸 전하면서 느끼는 희열이 컸으니까요.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어요. 연극을 선택하던 그 첫 마음을 기억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상처도 조용히 가라앉힐 수 있었죠. 그래서 그 힘듦이 이별이든 아픔이든 이제는 온전히 삶에 감사할 수 있어요.
연기할 때 그런 생각들이 드러나나요?
배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무대라는 허구의 땅, 그리고 진실의 땅에 전하는 휴먼 악기죠. 그 공간에는 이야기와 관객, 그리고 내 자신의 우주가 함께 있어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내 삶의 이야기 역시 그 안에 녹아 전해지겠죠. 그게 예술이고요.
우리 삶에 예술이 왜 필요할까요?
만약 오페라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세요. 물론 살 수 없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세상이 더 풍요롭고 아름답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선물을 놓치고 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이번 설날에 배우들과 교외에 나가 연습을 했는데, 가는 중에 자동차 안에서 함께 먹을 만두를 빚으며 갔어요. 바흐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를 들으면서 말이죠.(웃음) 그런데 그 순간이 전 참 행복했어요. 소중한 사람들이 먹을 만두를 빚으면서 창밖으론 겨울 풍경이 펼쳐지고, 바흐의 음악이 흐르던 그 순간이요. 우리가 그렇게도 열망하는 행복은 어쩌면 그런 찰나의 순간 속에 있는지도 몰라요.
예술 속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요소가 있단 의미인가요?
어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도 있고 잠을 잘 수도 있겠죠. 그런데 만약 책을 보거나 그림을 보거나 공연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면 그때와는 좀 다른 차이가 있어요. 뭔가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죠. 예술은 생각의 근원이에요. 나무의 뿌리죠. 생각 없는 사람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나’라는 정체성이 없어요. 결국 예술은 나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예술가는 창조하는 사람이죠. 큰 보상도 없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뤄내는, 하지만 가장 파워풀한 사람들. 그래서 이 길이 더 가치 있게 느껴져요.
좀 전에 ‘나다운 것’에 대해 얘기하셨는데, ‘윤석화’다운 것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자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죽기 전까지 미리 죽지 않는’, 무슨 일 앞에서든 두려움이 있어도 하기로 했으면 긍정과 사랑의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요.
40주년 기념 공연이 끝난 후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
무대에서 40년 시간을 보낸 지금, 남은 인생을 또 어떻게 이끌어갈지 요즘 많이 기도하며 계획하고 있어요. 배우로서는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연극계의 밀알이 될 수 있도록 부단히 서포트해주고 싶고, 앞으로는 연극 무대를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도 좋은 작품이 있다면 자유롭게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배우가 아닌 인간 윤석화로서의 꿈도 있을 것 같은데요.
무엇보다 환갑을 맞았으니 이제 앞으로는 예쁜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웃음) 내면이 아름다워서 더 예쁜 그런 할머니요. 그리고 작은 실천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일에 더 헌신하고 싶어요.
이번 무대는 한 배우의 ‘연극 40주년 기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문화는 세대와 공간을 넘어 계속 이어져야 하는데 요즘 우리 사회의 문화는 세대 간 소통이 끊겨 각각의 문화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몇 십 년 전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젊은 시절에 본 분들이 이제 나이 지긋한 기성세대가 되었겠지만 그들이 그때 느끼던 감동과 메시지는 현재도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배우는 평생 배우는 사람이죠. 한 배우가 40년 동안 한길을 걸어왔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메시지이기를 바라세요?
희망과 위로가 되었으면 해요.
무대 인생 40년 동안 자신에게 연극은 무엇이었나요?
생명의 나무요. 나무가 잎이 나고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를 나누는 행복으로 살아왔어요.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찾아온 관객들에게 삶의 뿌리를 선물해 주고 싶었고요. 연극은 저에게 생명이었어요.
대학에 입학하던 해 어느 봄날, 산울림 소극장에서 엄마와 함께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본 적이 있다. 따뜻하고 경쾌한 모노드라마 속 윤석화는 유혹적인 춤과 노래, 매력적인 표정과 움직임, 넘치는 끼로 관객을 압도했다. 그 연극을 본 지도 이미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느끼던 그 감동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걸 보면 그녀의 말처럼 그날의 대사가, 그날의 노래가 내 마음속에도 뿌리내렸던 것일까? 윤석화의 연극 인생 40년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시간들. 꽃이 지고 꽃이 다시 피는 사이 더 많은 이야기가 우리 마음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2016년 새봄, 이제 그녀가 걸어온 길 위에 새로운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