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음악계와 시계를 맞추기 위한 노력
일제강점기, 조선에 유입된 서양음악은 일본을 통해서였다. 1950년 해방 후 그 자리를 미국이 대신했고, 1960년대에 들어서며 본고장인 유럽에 눈뜨기 시작했다.
1960년대 한국의 피아노를 둘러싼 환경은 안팎으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국내 음악계의 시계는 클래식 음악 본고장의 시간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다. 1960년 마우리치오 폴리니, 1965년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시기였다. 문교부 국어심의회와 한글학회가 외국어 발음을 통일하며 외래 음악 용어가 정립되기 시작했다. 1960년 국민음악연구회와 호락사에서 전문교재가 출판됐고, 금수현의 ‘표준음악사전’, 이성삼의 ‘오페라해설집’, 최영환의 ‘세계의 음악가 70인’ 등이 출간됐으며, 이호연의 ‘현대피아노 연주법’ 등이 번역됐다.
음악 전문 잡지와 신문은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는 데 일조했다. 고전·낭만파 등의 사조와 작곡가·연주가에 대한 정보, 외국 음악학자가 쓴 장문이 일간지에 번역 소개됐다.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전봉초(첼로·서울대 교수)는 런던·파리·브뤼셀·본·빈 등을 돌며 해외 음악계의 근황을 경향신문에 소개했다. 1961년 주간 ‘음악한국’, 1974년 수도피아노사에서 월간 ‘음악세계’가 발행됐다. 하지만 반년 혹은 1년을 넘기지는 못했다. 한편 해외 음악계를 동경하던 이들은 유학을 떠났다.
이처럼 한국 음악계가 세계 음악계와 ‘동시성’을 형성하려는 의지에 사로잡힌 시대가 1960년대였다.
외국 피아니스트들의 내한
1960년대의 큰 변화는 해외 연주자들의 내한이었다. 1960년 임원식(지휘)은 “서울도 점점 외국의 유명한 음악가들이 찾아오게 되어 많은 음악애호자들을 즐겁게 하고 한편 우리나라 악단에도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동아일보 10월 19일)이라고 했다. 이는 기악 분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피아노에도 해당했다.
1960년 10월 22·23일에 이화여대 강당에서 루돌프 제르킨이 공연했다. 당시의 비평문을 보면 ‘아르페지오’ ‘콘트라스트’ 등의 외래어가 다른 기사에 비해 많이 쓰였다. 범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한 문맹퇴치사업은 해방 당시 78%에 달했던 문맹률을 1960년대 들어 28%로 낮추는 놀랄 만한 성과를 보여주었지만, 외래어에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의 클래식 음악에 관한 기사들은 대중보다는 소수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언론은 부지런히 해외 소식을 날랐다. 1961년 루빈스타인의 카네기홀 공연과 인터뷰를 실음으로써, 1966년 그의 내한에 앞서 전초 지식을 제공했다. 1962년 게르트 켐퍼가 김만복/서울시향과 서울시민회관에서 협연하기도 했다.
1962년 5월 1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된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는 해외의 유명 연주가를 국내에서 만날 수 있게 한 ‘국제’음악제였다. 5일 서울시민회관에서 피아니스트 오라치오 푸르고니가 서울시향과 협연했고, 2부에서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했다. 이듬해 제2회 서울국제음악제에는 한스 그라프가 내한했다. 근래 서울시향의 객원 지휘자로 내한하기도 한 그는 당시 8일 서울시민회관에서 리카르도 오드노포소프(바이올린)와 리사이틀을 가졌고, 9일 같은 장소에서 안용구관현악단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했다. 세계적 수준의 콩쿠르가 배출한 젊은 연주자를 초청하는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초청 연주자들은 해외 음악대학에 재직하는 중견 연주자가 많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국내 음악계의 지도층과 연령대가 비슷하거나 동문수학하던 이들인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 한국음악계에 해외의 기운을 불어넣었던 서울국제음악제는 보릿고개를 넘기기도 어려운 실정에서 경제적 고려 없이 음악가들의 인맥에 따라 개최되어 불만을 사기도 했다. 음악제 전문 인력마저 부족하던 서울국제음악제는 결국 음악제의 핵심 인물이던 안익태와의 마찰 등을 이유로 제3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1964년 피아니스트이자 줄리아드 음악원 교수 조셉 블로흐가 내한했다. 1954년 한동일의 줄리아드 유학을 계기로, 1960년대 김영욱·정경화(바이올린), 정명화(첼로) 등이 줄리아드행 티켓을 끊었다. 1960년대 중반이 되면서 한국은 줄리아드에 많은 유학생을 보내는 나라가 되었고, 학교 측에서 유학생 선발을 목적으로 교수들이 내한하여 리사이틀을 갖기도 했다. 1964년 내한한 블로흐는 줄리아드에서 백낙호·오정주·한동일·윤기선·김정자 등을 가르쳤다.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가 줄리어드에서 최선의 랭킹 속에 낀다”(동아일보 1964년 6월 6일자)고 말했던 그는 2주 동안 한국에 머물며 내한을 후원한 이화여대에서 리사이틀과 강의를 가졌다.
피아노의 하이틴·틴에이저·로우 틴 파워
1960년대 한동일의 인기는 지금의 조성진과 맞먹었다. 최고 스타였다. 피아노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모두들 ‘한동일’을 꿈꿨다. 미국에서 활동한 그는 끊임없이 국내 음악계에 희보를 날렸다. 그를 통해 피아노라는 악기를 처음 접한 이들도 있었다. 줄리아드에서 로지나 레빈을 사사 중이던 한동일은 미국 교향악단들과 협연하며 “한국 정부가 세계에 내보낸 음악대사”라는 격찬을 받았고, 1960년 미국 방송사 NBC홀의 독주회를 놓고 ‘뉴욕 타임스’지는 “기술적 완성 이상의 것”이라고 극찬했다.
한동일을 꿈꾸며 공부한 10대의 학생들은 ‘하이틴’ ‘틴에이저’ ‘로우 틴’으로 불렸다. 1959년 오화섭(음악평론·연대 영문과 교수)은 “기악에 있어 젊은 세대의 출현과 그들의 우수한 질은 예술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과시했다”며, “중견의 퇴보와 소년소녀의 비약”이 눈에 띄고 “틴에이저들의 놀라운 테크닉”을 칭찬하며 1960년대를 예고했다(동아일보 12월 18일). 김형주(음악평론)도 “기성세대를 능가하는 자신과 기술적인 안정도를 이미 체득”한 이들로 평했다(동아일보 1964년 4월 9일).
그러나 이러한 이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음악교육은 교과목 중 비중이 작았고,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1961년 동아일보(4월 30일)는 음악 재교육을 받지 않은 교사가 3분의 2에 해당하며, 음악교육을 그대로 할 수 있는 학교는 1~18%, 음악교실과 강당을 보유한 학교는 36%, 피아노나 오르간을 보유했으나 조율하지 않아 못 쓰는 학교는 16~18%, 비교적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갖춘 학교가 17%에 머물렀다고 보도했다. 따라서 전문적 교육을 통해 성장한 연주자는 극소수였고, 그들의 교육수준도 부모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질이 달랐다.
피아노계의 도미(渡美) 열풍과 꿈
1960년 서울예고 1학년 이경숙은 에이블 음악가협회 초청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해외의 초청으로 미국 땅을 밟는 이들은 중·고등학생 신분이었어도 국내 음악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떠나기 전 고별연주회는 오늘날의 귀국연주회와 같은 관행이었다. 이들은 한국과 제휴된 미국의 여러 기관으로부터 초청받아 현지에서 독주회나 교향악단과 협연 기회를 가졌다. 이후 정착과 유학의 수순을 밟았고 콩쿠르와 독주회로 그 결실을 맺었다.
줄리아드 옆에 있는 카네기홀은 꿈의 무대였다. 줄리아드 재학생 오정주는 1960년 카네기홀에 올랐다. 뉴욕타임스는 “훈련을 잘 쌓은 피아노 연주자”이지만, “음악적인 해석은 오히려 강조와 함축에 대하여 미흡한 경향”이라고 평했다(동아일보 3월 15일). 1961년 김정자는 미국행 일 년 만에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같은 해 서울예고 1학년 김덕주는 휘문중 2학년이던 김영욱(바이올린)과 덴버시 기자협회 초청으로 덴버시립교향악단과의 협연을 위해, 1963년 서울예고 2학년 김춘명은 피바디음대의 초청독주회를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 1964년에는 경기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대욱이 미시간 주 하기 음악제에 초청받아, 4월 국립극장에서 도미고별독주회를 갖고 미국으로 떠났다.
실력은 출중했지만, 경제적 사정에 발이 묶인 이도 있었다. 1961년 “세계의 피아니스트로 데뷔하는 뉴욕에의 길은 그리도 멀기만 한 것일까”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경향신문(9월 23일) 기사의 주인공은 백건우였다. 당시 한양공고 1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그해 12월 미트로폴리스 콩쿠르에 참가하고자 했다. 하지만 1천 달러의 여비를 구할 수 없었다. 이후 그의 경비를 위해 ‘별을 돕는 모임’이 만들어졌고, 11월 4·5일 서울대음대 강당에서 3회 공연을 가져 비용을 충당했다.
피아노 틴에이저들의 콩쿠르 참가
1962년 동아일보(7월 18일)에는 31개의 콩쿠르의 개최국·도시·종목·개최연도가 도표로 일괄 정리됐다. 하지만 한국음악계에게 유럽의 다양한 콩쿠르는 먼 꿈일 뿐이었다. 1960년대의 콩쿠르 참여는 (1)국가기관 주최로 파견하는 형태와 (2)유학을 통해 현지에서 경험을 쌓은 후 도전하는 방식이었다. 현재처럼 국내에서 수학한 후 해외 콩쿠르에 개인적으로 직접 참가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1962년 미국 밴 클라이번 콩쿠르 참가는 전자에 해당한다. 2013년 손열음이 준우승한 이 콩쿠르의 한국인 첫 참가자는 백연희(23·경희대 졸)와 김정규(26·서울대 졸).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주최로 YMCA강당에서 실연심사를 거쳤고, 김원복(서울음대 기악과장)이 이들을 인솔하여 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백연희는 건강상의 이유로 하차했고, 조성미가 이를 대신했다. 이듬해 김원복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제1회가 되어서 그런지 16개국밖에 참석치 않았으나 세계 주요 국가를 포함한 이 가운데에 우리 대표도 당당히 참석하여 기술을 겨루어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음악계를 위하여 또 하나의 플러스가 된 것으로 믿는다. (…) 지정곡 8곡 중 현대곡 1곡이 개최일에 임박해서 입수되는 등 곤란이 많았다. 그러나 주최측의 대우는 매우 친절하였다. 예를 들면, (…) 3대의 스타인웨이 피아노 중 참가자가 각기 마음에 드는 피아노를 고르도록 편의를 보아주었고 한 사람마다 30분씩 연습할 기회를 주었다. 한편 많은 국제적인 음악가들로 구성된 심사원들 가운데는 나와 동경의 신인연주회에 출연한 바 있는 일본인 피아니스트 정구기성 씨가 끼여 있음을 볼 때 우리나라는 언제쯤 이런 국제적인 행사에 우리나라의 음악가들이 심사원으로 참석할 수 있게 될는지 잠시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동아일보 1963년 3월 21일)
첫 회였던 밴 클라이번 콩쿠르는 미국의 반대 이념국인 소련에서 우승한 클라이번을 기념하며 이념 선전을 위한, 한마디로 냉전의 산물이었다. 김원복이 말한 ‘16개국’은 미국과 동일한 이념의 국가였을 테고, 혈맹국인 한국 역시 미국으로부터 참가 권유와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냉전의 기류는 국내 음악계에 모순적으로 작동했다. 1962년 러시아에서 개최된 제2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현장과 수상 결과가 보도되며 아슈케나지의 우승 소식이 전해졌는가 하면, 1964년 한동일이 6년 만에 귀국하여 서울시민회관에서 독주회를 할 때 서울시공보실은 공산국가 소련의 작품을 다른 곡으로 대체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문제가 된 작품은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6번. “이는 공산혁명을 상징하는 곡으로 우리나라 국시에 위배된다”(경향신문 5월 13일)는 것이었다. 한동일은 슈만 판타지 C장조로 대체했다. 당시 ‘러시아’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이 곳곳에서 연주됐지만, ‘소련’의 작곡가는 금기였던 것이다. 1960년에 뉴욕타임스로부터 “프로코피예프의 토카타를 연주함에 있어 신속하고 현대적인 감각을 완전히 발휘”했다는 평을 받은 한동일은 모국의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유학 후 현지 콩쿠르에 도전했던 경우를 살펴보자. 1961년 이화여중 재학 중 도미한 박순자는 1963년 워싱턴 주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1963년 김정규는 루스벨트 대학원 재학 중 시카고의 기획사 알라이드 아츠에서 주최한 경연대회에서 우승자로 뽑혀 이듬해 독주회를 가졌다. 1963년 서울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신수정은 그해 3월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악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1964년 빈 엘리노어 스테파노브 콩쿠르에 2위로 입상했고, 같은 해 부소니 콩쿠르 파이널리스트 13명에 들어갔다. 당시 아시아인은 필리핀 출신 2명과 신수정뿐이었다고 한다(동아일보 9월 5일).
건반 위의 전쟁
1960년대 콩쿠르는 무려 10여 개에 달했다. 서울대·연세대·이화여대·숙명여대·경희대·한양대·수도사대 콩쿠르 등으로, 대부분 대학 입학에 중점을 두었다. 이유선(음악평론)은 “신입생 유도책으로 여는 대학마다의 콩쿨전(戰)”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래서 1961년 시작된 동아일보사 주최 전국음악경연대회(현 동아음악콩쿠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대학입시를 위한 콩쿠르와 달리 ‘신인 등용을 위한 첫 거사’를 표방한 것으로, 틴에이저들이 전문 연주자로 ‘등용’하는 데에 큰 장을 펼쳐주었기 때문이다. 1964년까지 살펴보면 피아노 부문에는 1961년(1회) 신수정(서울대 3년), 1962년 이대욱(경기중 3년), 1963년 윤미경(서울예고 2학년), 1964년 조화자(서울대 2년)가 1위에 입상했다. 콩쿠르가 진행되는 10월 동안 동아일보에는 개막·예선·본선 소식과 참가자 인터뷰·프로필 등이 게재됐다. 인터뷰에는 참가자들의 가정환경과 부모의 직업 등이 상세히 실렸다. 신수정의 부친이 서울대 교무과장, 이대욱의 부친이 서울대의대 교수라는 것에서 그들의 생활 교육 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입상 후 이들은 KBS교향악단과 서울시향 등으로부터 협연 기회를 제공받았다.
1962년 3월 21일과 22일에 있었던 두 공연에 대해 동아일보는 ‘모차르트 경연’이라는 헤드라인을 붙였다. 21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김만복/서울시향 연주회에는 재일교포 이청이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6번을, 22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임원식/KBS교향악단에는 신수정이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57번을 연주한 것.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고 한동일보다는 한 살 어렸다. 1961년 국내에서 독주회를 가지며 화제가 됐던 이청은 일본 구니타치 음대에, 1961년 제1회 동아콩쿠르가 배출한 스타 신수정은 서울음대에 재학 중이었다. 한마디로 국내파와 해외파의 대결이었다. 두 사람을 인터뷰한 경향신문은 생일이 하루밖에 차이 나지 않는 이야기부터 한국과 일본의 학습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청은 일본 학생들은 유럽 유학을 선호한다고, 신수정은 아르바이트가 가능한 미국을 선호한다고 했다. 일본이 유럽을 선호한다는 것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때 적대국이던 일본 미국과의 갈등을 추측해볼 수 있고, 신수정의 이야기에선 한국과 미국의 우호적 관계를 느낄 수 있다.
1950년 후반과 1960년 초반에 유학을 떠난 이들이 서서히 귀국하여 활동했다. 1961년 에콜 노르말 음악원으로 유학 간 성정희는 1963년에 귀국했다. 작곡가 성두영의 동생이었던 그녀는 귀국 후 경향신문(1월 16일)과의 인터뷰를 통해 프랑스의 교수진, 졸업과정, 학비, 거주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서양 사람과 견주어 체질이 언제나 뒤져 곤란을 받는다” “프랑스 학생들은 하루 평균 8시간씩을 꼬박 피아노를 치지만 동양 학생들은 그것을 당할 수가 없다”라는 발언을 통해 해외 유학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에콜 노르말 음악원에서 수학한 서계숙도 1964년 귀국 독주회를 가졌다.
프랑스 유학생을 통해 그 나라의 레퍼토리가 유입되곤 했으나, 드물게 연주되는 수준이었다. 미국 예일대에서 5년간 수학하고 1963년 귀국한 백낙호가 예일대에 한국 학생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당시 미국은 유학생들이 선호한 유학국이었다.
파벌의 형성과 연주 활동
연주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없던 이들은 자연스레 교육 활동도 겸했다. 1960년대 들어 콩쿠르 문화가 활발해지면서 틴에이저와 하이틴을 육성하는 선생들의 경쟁도 보이지 않는 격전지를 형성했다.
1960년대 피아노계의 특징 중 하나는 피아니스트의 교육 활동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기악 분야에서 학생 수가 많았던 피아노 인구는 자연스럽게 많은 스승을 만들어냈고, 하이틴·틴에이저·로우 틴의 피아니스트를 많이 배출하는 스승은 스타 연주자 못지않은 스타 스승이 됐다.
흔히 ‘문하생 발표회’라고 불리는 공연도 많이 올랐다. 이러한 연주 문화를 주도한 이는 노신옥이었다. 그녀는 1955·1956·1960·1961년에 걸쳐 네 번의 문하생 발표회를 가졌고, 재직하던 숙명여대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1963년에 노신옥피아노그룹이라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1960년 쇼팽 탄생 150주년 기념연주회에는 정진우 문하의 조화자(서울예고 1)·김태자(경기여고 1)·박현자(서울예고 2)·신수정(서울대 2)·김금희(서울대 3)·이은경(서울대 4)들이 함께 했다. 정진우는 여권에 오스트리아 빈 유학 1호로 기록된 이였다. 1957년 임원식(지휘)의 주선으로 빈에 유학하여 서울음대 학장이던 현제명(성악·작곡)의 권유로 1959년 귀국하여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훗날 신수정이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난 데에는 정진우의 오스트리아 유학 경력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추측된다.
서울대에 정진우가 있었다면, 이화여대에는 신재덕, 경희대에는 윤연, 한양대에는 정은모가 있었다. 1951년 부산 피난 시절 이화여대 채선엽(성악)의 주선으로 미국 인디애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신재덕은 귀국 후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화여대는 오래전부터 쌓아온 전통을 바탕으로 서울대와 쌍벽을 이루는 피아니스트들을 배출했다. 1960년대 초반에 신재덕 문하에서 한옥수·장혜원·김용인·한귀환·전흥복·방선혜·감만자·김명기·길경자 등이 배출됐다. 1960년 이화여대 대강당에선 장혜원·김명기·길경자가 정희석/KBS교향악단과 협연했다. 이중 장혜원은 1960년 제8회 문교부 전국음악경연대회에서 피아노부 1등을 차지한 재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961년 경희대에 재직 중이던 윤연 문하의 황선(경희대 3)·최길자(4)·백연희(4)가 YMCA강당에 올랐고, 1963년에는 문하생 박혜경·조미미·이경자·우정일·문초자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부터 5번까지 협연했다. 1963년 한양대 정은모 교수 문하의 손인섭(경기여중 3년)·주영옥(금란여고 1년)·남광순(이화여고 3)이 임원식/KBS교향악단과 협연했고, 1961년에 귀국하여 서울대·숙명여대·서울예고에 출강하던 오정주 문하의 김혜자(숙명여대3)·남창현(서울대 4)·이남주(서울대 졸)·육영희(서울예고 3)·김덕희(서울예고 3)·최일수(서울예고 1)가 국립극장에 있었던 문하생 발표회에 함께했다.
‘누구의 문하로 입문하느냐’는 스승이 재직 중인 대학의 진학으로 이어졌다. 당시 학생들이 서울대의 정진우를 찾아가면 “거절 대신 벌집처럼 짜여진 씨의 스케쥴”을 내보였다는 일화는 “모찰트를 만들려는 뻬토벤의 아버지의 심리를 가진 어버이들의 격증(激增)”(동아일보 1906년 12월 16일)과 동시에 대학입시를 둘러싸고 치열했던 당시의 입시 환경을 입증해준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 피아노를 둘러싼 연주·교육·유학 환경을 살펴보았다. 다음 호에는 1965년부터 1969년까지의 5년을 살펴본다. 그리고 1960년부터 시작된 피아노 국내생산과 이를 둘러싼 밀수·수출·수입 등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