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 연주자 허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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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1월 1일 12:00 오전

그 소리는 두껍고 진중하다. 하지만 그 소리를 얻기까지 연주자의 몸은 섬세히 반응하고 예민하게 움직인다. 이러한 거문고의 성격은 허윤정과 흡사하다. 두껍고 깊은 울림으로 재즈, 월드뮤직, 프리뮤직과 편히 만나 껴안고 받쳐준다. 하지만 그 음악과 접속할 때 그녀의 내면은 새로운 음악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하고, 섬세하고 치밀하게 움직인다. 허윤정은 오늘도 이 악기를 닮아가고, 또 어르고 달래며 자신만의 소리를 뽑아낸다

두 개의 음반이 있다. 1996년에 출반된 ‘젊은 산조 Live’(Nices), 다른 하나는 2016년에 출반된 그룹 블랙스트링의 ‘마스크 댄스’(ACT)다. 전자에 허윤정이 연주한 거문고산조와 산조합주가, 후자에 국악·재즈·월드뮤직을 한데 섞어 만든 창작 음악이 담겨 있다. 둘 사이에는 20년의 시간차가 흐른다. 하지만 두 음반을 관류하는 근원적 기질은 ‘즉흥성’이다. 그리고 전자가 전통음악의 내실을 다지는 젊은 예인의 자화상이라면, 후자는 국악·재즈·월드뮤직을 모아 새로운 한국음악이 될 때까지 밀고나가는 연금술로 그린 자화상이다. 두 기질은 오늘날 국악의 남북극에 있는 전진기지다. 둘 사이의 거리가 곧 최근 국악의 넓이다.

허윤정은 예원중학교에서 한국무용을,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서울대 국악과에서 거문고를 공부했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부수석을 역임했고, 그룹 슬기둥·상상·토리앙상블 등을 거쳐 현재 블랙스트링을 이끌고 있으며, 모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9월부터 강의를 맡고 있다.

이러한 약력보다 허윤정의 예술세계와 음악을 잘 대변해주는 것은 그녀 곁의 지음(知音)들이다. 전통예술의 물줄기를 꼿꼿이 이어가는 후예, 대중성과 실험을 오고가는 재즈 뮤지션, 아방가르드의 지대에 탐침을 밀어 넣는 즉흥음악가, 모두들 허윤정의 벗들이다. 허윤정은 여섯 줄 거문고를 메고 유랑하며 그들과 부지런히 접속한다. 이 글은 그녀가 걸어온 길을 통해 허윤정과 오늘의 국악이 나아가고 있는 길을 살펴보는, 한마디로 그 길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를 담은 길-론(論)으로 읽혔으면 한다.

아버지 허규|한국무용|거문고

“전통음악을 하게 된 건 아버지 덕분이었어요.”

허윤정은 허규(1934~2000)의 딸이다. 허규는 1961년 제작극회(制作劇會)가 국립극장(명동)에 올린 ‘껍질이 째지는 아픔이 없이는’(차범석 작)을 통해 연출가로 인정받았다. 이후 KBS·TBC·MBC 등에서 드라마를 연출했다. 그러던 중 1972년 방송국을 떠나, 1973년 극단 민예(民藝)를 창단했다.

“유치원을 다닐 나이였어요. 극단은 이화여대 정문 근처에 있었는데, 그곳이 저의 놀이터였습니다.”

전통예술의 현대적 계승. 허규의 예술관이자 스스로에게 내린 강령이었다. 단원들은 탈춤·판소리·인형극·굿 등을 몸에 익혔고, 토속적 정서와 율을 살린 창작극을 주로 공연했다. 아버지의 연극에 쓰일 연료 같은 전통예술들은 어린 윤정을 키우는 문화적 비타민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최현(1929~2002)을 사사했고, 예원학교에 한국무용 전공으로 입학했다. “춤 잘 춘다”는 소리를 들었다. 춤꾼으로 보장된 길이었다.

1981년, 국립극장 극장장으로 부임한 허규는 당시 극장 옆에 자리한 국립국악고등학교(현 공연예술박물관 위치)를 보았다. 국립창극단의 연출에 매진하며, 양복 안주머니에 북채를 늘 넣고 다녔다는 허규. 그는 윤정이 음악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그 쓰임새와 걸어갈 길이 무용보다 음악이 더 넓고 다양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중학교 3학년의 윤정은 아버지의 뜻을 흔쾌히 수락했고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지금과 달리 입학 후 전공 악기를 배정받거나 체격과 신체 조건에 따라 선택하던 때였다. 윤정에게는 선배가 연주하던 거문고 소리가 다가왔다. 자고로 선비의 악기이자, 남성의 악기였다. 여섯 개의 현을 ‘힘(力)’ 주어 눌러야 한다고 하여 그 운지법을 역안법(力按法)이라 하지 않던가.

“선생님이 손가락을 검사하시더니 약간 주저하셨어요. 그래도 한번 해보겠냐는 눈빛이었는데. 거문고 특유의 장단감과 평소 바이올린보다 첼로와 주파수가 맞던 그 묵직함이 이 악기를 택하게 했어요.”

사물놀이|즉흥|반복|차이

거문고는 오른손에 쥔 술대로 현을 쓸고 뜯고 때린다. 현을 세게 내려치는 주법을 대점(大點)이라 한다. 옛 시를 보면 “거문고를 타다”라고 하는데, ‘타’가 ‘치다’라는 뜻을 지닌 ‘타(打)’로 읽힐 정도로 강하게 현을 후리고 유연하게 구슬린다. 때로는 그 충격이 악기의 몸체를 울릴 때, 거문고는 선율성을 감추고 숨기고 있던 타악기적인 성격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타악적 성격과 장단은 허윤정의 음악을 푸는 열쇠 말이다. 그럼 허윤정이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때로 돌아가보자.

“당시 사물놀이는 우리 시대의 ‘록’이었어요. 사물놀이 공연을 보면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어요. 대단한 충격이었죠.”

판굿에서 풍물가락을 재구성하여 사물놀이를 선보였던 때가 1979년. 사물놀이의 대중성은 1980년대 국악계를 뒤덮었다. 국립국악원은 김용배(쇠), 남기문, 전수덕(장구), 박은하(징) 등으로 구성된 사물놀이패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 벽은 낮아졌지만, 당시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는 각각 궁중음악과 민속악의 적자라는 자부심이 강했고 서로 대립하던 때가 있었다. 따라서 민속악의 태기로 만들어진 사물놀이는 국립국악고등학교의 학풍과 맞지 않는 음악이었다. 하지만 윤미용 교장은 과감히 사물놀이 반을 만들었다. 장단의 호흡과 사물놀이의 힘, 그리고 그 대중성과 파급력을 인식한 선각적인 자세였다.

“2학년 때 사물놀이반이 생겨 들어갔어요. 원일(피리·작곡,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및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역임), 강은일(해금, 단국대 교수), 유경화(철현금·타악,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용우(민요), 권성택(가야금·타악, 국립부산국악원 연주단 예술감독)을 포함하여 여덟 명이 함께했어요. 대학 진학에 문제없는 아이들이 교장 선생님께 전공에 지장을 주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들어갔죠.”

일주일에 한 번, 방과 후 연습이었다. 궁중음악의 계보를 잇는 얌전한 후예들은 타악기를 잡으면 귀여운 악동(樂童·惡童)과 악귀(樂鬼)가 되었다. 지도하던 김용배는 이들을 무척 예뻐했고, 자신의 이름을 새긴 꽹과리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했는지, 교장 선생님께 악기를 압수당했어요. 결국 교무실의 캐비닛에 올려놓고 눈치 보고 들어가 힘들게 허락받고 악기를 잡을 수 있었어요.”

한·일 교류 음악회를 위해 일본 땅을 밟기도 했던 이들의 우정은 대학에 진학하던 1986년, 그룹 소리사위로 이어졌다. 국악과 대중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1985년에 창단된 그룹 슬기둥의 뒤를 이들은 바짝 따라 붙었다.

“우리들은 ‘남다른 에너지’의 소유자였고, 그때 터득한 것이 지금을 이루는 ‘남다른 에너지’가 되고 있습니다. 장단을 ‘안다는 것’과 ‘쳐본 것’은 달라요. 선율악기는 가락이 먼저이고 장단이 그것을 뒷받침하는데, 좌질굿·우질굿·오채질굿 등의 장단을 쳐보면서 장단의 생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몸에 익힌 것이죠. 타악기는 타점(打點)에 따라 소리가 달리 나는데요, 그런 점이 거문고의 타현(打絃) 주법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즉흥’의 감각을 체득했다. 어제의 장단은 오늘의 장단이 될 수 없는 법. 장단의 ‘반복’ 속에 ‘차이’를 꽃피우게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상황과 상태를 얼마만큼 잘 이용하는가에 있었다. 이것이 즉흥의 묘미다.

“타악은 현재 유일하게 즉흥성이 남아 있는 음악이에요. 기본 장단을 토대로 계속 변주가 일어납니다. 그 누구든, 단 한 번도 같은 장단을 연주할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게 어느새 변주를 하는데 그 힘은 즉흥에서 나와요. 저와 제 동기들(원일·유경화·강은일)이 하는 음악이 다 이 연장선에 있어요.”

사물놀이를 통해 허윤정이 익힌 타악과 장단. 그것은 그간 잠겨 있던(lock) 끼의 빗장을 푼, 한마디로 그녀의 표현대로 “그들만의 록(rock)”이었다.

방황|국악관현악단|젊은 산조|독주(獨走)

“어릴 적 아버지의 극단에서 뵈었던 명인들과 그 환경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된 것은 대학교에 입학한 뒤였어요.”

서울대 국악과 86학번 허윤정. 교정은 혼란과 혼돈, 그 자체였다. 고인이 된 이한열과 강경대가 유령처럼 청춘의 시공간을 배회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그들의 죽음을 통해 시대와 자신이 얽혀 있음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나름대로의 소신을 갖고 아크로폴리스광장에 나가 시대의 아픔에 동참을 했다는 게 다행스러워요. 그렇지 않았다면 마음의 빚이 남았을 거예요.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스스로 묻던 시기에 그런 일들을 접하며 정체성에 대해 생각했어요. 거문고만 잡고 있을 때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었지요.”

시대와 대면했다. ‘국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답을 못 찾을 때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올곧던 발걸음은 방황으로 이어졌다. 거문고에는 살짝 먼지가 쌓였다. 하지만 목적지 없는 떠남이 방황이라면, 목적지로의 회귀를 약속한 것은 여행 아니던가. 잠시 거문고를 놓았을 뿐, 발걸음은 산조와 민속음악의 지대를 여행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아쟁도 공부했고 장단도 뜨겁게 배웠죠. 생각해보면 그런 외도가 영양분이 되었습니다. 거문고의 정도(正道)로 확실하게 들어설 수 있게 했으니까요. 다른 장르를 열심히 보고 들으며 살았어요. (강)은일과 ‘새로운 예술의 현장에 우리가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은 훗날 큰 차이를 낳을 것이다’라며 부지런히 찾아 듣고 다녔습니다.”

졸업 후 1990년, 허윤정은 서울시국악관현악단에 입단했다. 국악관현악단 설립에 불붙은 때가 1980년대라면, 1990년대는 악단들이 고유의 색깔을 찾고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던 때였다. 국악관현악단은 물오른 창작국악의 기운이 잔뜩 고인 수원지(水源池)와 같았고, 그 수력(水力)은 전통음악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창작국악에 아름답고 훌륭한 곡이 많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를 대표하는 김희조·이상규·김영동 등이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작곡한 선이 굵은 곡들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표를 사서 입장하는 관객들과 만난다는 것은 늘 설레는 일이었어요. 대학을 갓 졸업한 제가 프로 연주자로 무대에 서서, ‘관객의 반응’과 그에 대한 ‘저의 반응’을 인식한다는 게 참 소중하고 중요했죠. 만약 관현악단에 입단하지 않았다면 대중이란 존재를 인식하는 시간이 늦어졌을 거예요. 거문고의 레퍼토리와 관현악단 내에서의 존재감을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은 묘한 곳이었다. 1964년, 민속악에 중심을 둔 서울국악예술학교의 국악관현악단을 모태로 만든 이 악단은 민속악의 대가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까닭인지, 시간에 녹아 있는 민속음악의 향이 허윤정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서양의 관현악단 형식이었지만, 그 분위기와 소리는 질그릇에 비유하고 싶은, 민속악적인 느낌이 있었어요. 창단시 명인들이 남긴 체취랄까? 이종대(피리, 부산대 교수 역임), 김방현(대금), 김일륜(가야금, 중앙대 교수), 이태백(아쟁·소리북, 목원대 교수) 등 현재 민속악의 일가를 이룬 분들이 당시 단원이었는데, 그분들과 시나위를 함께 하며 깊은 공부를 했어요. 대학 시절 배운 아쟁으로 협연도 했고요. 지금도 저를 소름 돋게 하는 음악은 민속음악과 산조인데, 당시 그것들은 너무 큰 존재였습니다. 명인들의 소리를 들을수록 한계와 좌절의 지점을 분명이 알았죠. 그래서 이 음악에 평생을 걸어도 될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허윤정은 젊은 예인들과 교감했고, 기라성 같은 명인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밀어 넣었다. 시간과 소리는 정직했다. 오래 머물수록 깊게 들어갔고 무르익었다. 성음(聲音)은 강하고 단단해졌다. 허윤정을 비롯해 이태백(아쟁)·이지영(가야금)·강은일(해금)·이용구(대금)·김재영·박경현(피리)·서영호(아쟁) 등 젊은 예인들의 산조와 성음이 한데 모여 1994년 ‘젊은 산조Ⅱ’와 1996년 ‘젊은 산조 Live’ 음반에 담겼다.

“산조와 창작음악은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각각의 음악을 위해 서로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산조에도, 현시대가 요구하는 창작음악에도 귀를 기울이며 힘을 쏟기로 했습니다.”

허윤정은 서울시국악관현악단에 자신을 푹 담고 1994년 말에 나왔다. 국악관현악이 계통적 진화를 할 때, 군(群) 속의 허윤정도 개체적으로 진화했고, 자신의 앞날에 패를 던졌다. 불안했고 막연했다. 하지만 포부는 가득했다.

균형|창작|고독과 단독

국악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개량을 통해 탈피한 가야금이 퓨전의 기류를 타고 대중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 뒤를 해금이 좇았다. 하지만 거문고의 두꺼운 현에서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쨍’ 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한국적인 소리, 나만의 소리를 찾고 싶었는데 그 길이 개량이나 퓨전 같은 방법밖에 없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다르게 생각하고 싶었죠.”

혈혈단신이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1998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첫 독주회를 가졌다. 한갑득류 산조, 정악곡 중 하나인 ‘수연장지곡’, 이재화와 이해식의 창작 초연곡으로 전통(정악·민속악)과 창작음악 사이의 균형을 잡았다. 그 후 오늘날까지 이러한 균형감으로 빚은 독주회를 10회 이상 선보였다. 한쪽에는 흠집 없는 전통을 보존하려는 정신의 집중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티끌에 이를 때까지 모든 전통을 해체하려는 고집이 있었다. 시나위와 산조로 즉흥의 감각을, 선비들이 남긴 고(古)악보 및 거문고악보(琴譜)를 해독하며 역사적 감각을 익히던 허윤정은 작곡가를 탐색하고 접속을 시도했다. 전통음악에 뿌리를 둔 이해식부터 전자음악가 메들린 바이른의 작품을 연주하며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드러냈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에 재직하며 품었던 “거문고의 매력을 부각시켜 좋은 작곡가들이 좋은 거문고 곡을 많이 쓰도록 소리쳐야겠다”는 약속도 지킨 셈이다.

한편, 작곡가와의 작업을 통해 거문고 레퍼토리의 외연을 넓혔다. 황병기·이건용·이해식·이성천·이태원에게 위촉한 독주곡들과 자작곡 ‘복선’을 담아 2007년 ‘일곱개의 시선’ 음반을 출반했다. 2008년 독주회 ‘거문고 일렉트로니카’에서는 “‘내 것’을 해보고 싶던 마음”으로 자작곡 ‘결’ ‘낯선 규칙’ ‘가’ ‘길’과 최영준, 메들린 바이른과 협업하여 멀티미디어와 거문고의 만남을 시도하기도 했다.

“자작곡은 작곡가의 곡과 달리 예상하지 못한 음악을 얻는 기대감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마치 배낭여행 같아요. 가다 힘들면 잠시 쉬고, 가고 싶은 곳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 내가 온전히 나를 주도하는 세계로 가는 희열이 있는 것이죠.”

고독이라는 말보다 단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멀리 보고 직진하며 걸었다. 주변에 흔들리지 않았다.

“예술은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 같은 것이었어요. 지금도 늘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가가 되고자 해요. 물론 대중에게 다가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죠. 그때는 대중보다 주위의 예술가들에게 인정받고 싶던 욕망이 컸습니다. 만약 그런 인정이 없었다면 굉장히 외로웠을 거에요. 자기만의 영역을 만든 이들과 만나면서,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제 자신을 위로하기도 했죠. 그리고 알고 보면 전(前) 시대의 전통음악 명인들은 다 외로운 존재들이었잖아요.”

슬기둥|상상|뉴욕|토리앙상블|이스트리오

‘홀로 허윤정’이 있었다면, 다른 쪽에는 ‘함께 허윤정’이 있었다. 허윤정은 음악 그룹 슬기둥·상상·토리 앙상블·이스트리오(EASTrio)의 멤버와 대표로 활동했다.

“슬기둥에서 대중적 음악을 연주하면서,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을 느끼고 교감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쯤 저의 음악은 저만의 우주에 갇혀 있을 거예요.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내 음악으로 하여금 그들이 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때였습니다.”

‘국악의 대중화’를 강령삼아 움직이던 때가 슬기둥 시절이라면, 그녀를 밀실과 내면으로 안내한 것은 그룹 상상의 활동이었다. 허윤정은 강은일, 유경화와 함께 전위의 척탄병이 되었고, 한국 프리뮤직의 선각자였던 강태환(색소폰)·김대환(타악)·최선배(트럼펫)가 지원사격을 했다. 약속을 위반한 소리, 법칙을 거스르는 소리, 경계를 넘은 비(非) 거문고 소리. 결론적으로 음악적이지 않은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되는 가능성을 맛보던 때였다.

“상상의 활동은 ‘우리가 진정 새로운 것을 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안겨주었어요. 실현할 수 없어서 상상만 하던 것을 오롯이 다 해보던 때였습니다. 관객을 등지거나 그들이 입장할 때 연주를 했고, 서로 악기를 바꾸어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들이었고, 여기서 뻗은 가지가 지금의 저에게 큰 힘이 되었죠. 예전에 작곡가들과 작업하면서 시나위의 형식과 타악의 즉흥성을 거문고에 얹으면 고스란히 시나위와 산조가 되어 나왔어요. 한계였죠. 그때 강태환·김대환·최선배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거문고에서 편안하게 나오는 모든 주법과 소리를 배재하자는 약속. 한마디로 ‘안 하던 것’만 찾아 실험해보았죠. 거문고가 걸어온 길을 피하며 만든 그 길을, 한 시간의 공연 동안 걸었던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2007년은 삶의 전환점이었다. 미국 록펠러재단 아시안문화위원회의 레지던스 예술가로 선정되어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 국내 강의와 연주 일정은 모두 내려놓았다. 뉴욕(엔젤먼 리사이트홀)에서 ‘거문고 메아리’라는 제목의 공연을 선보였다. 허윤정은 루프스테이션(Loop Station)을 사용하여 방금 연주한 음을 녹음했고, 그 위에 방금 전 연주를 통해 발생한 소리를 덧씌웠다. 마치 여러 명이 거문고 산조를 연주하는 것 같았다. 제목을 ‘복선’이라 했다. 거문고와 더블베이스·클라리넷·사쿠하치(일본 전통 관악기)·타악기 등이 함께하는 곡도 선보였다. 접속과 이접의 주어였던 허윤정은 뉴욕에서 새로운 음악가들과 만나며 새로운 동사를 쓰기 시작했다.

“외국 연주자들과 협업하면 그들은 ‘한국음악을 가지고 이런 방식의 음악도 하냐’며 놀란 표정을 짓고는 했습니다. 그들과의 차이를 느끼기보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음악가로서 제 자신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낯선 이들과 협업할 수 있는 자신감이 붙었어요.”

허윤정은 2007년에 토리 앙상블을 결성했다. 허윤정이 중심을 잡았고 강권순(소리), 민영치(타악), 네드 로젠버그(색소폰·클라리넷), 에릭 프리드랜더(첼로), 사토시 타케이시(타악·전자음악), 6명의 뉴욕·한국 연주자들이 모였다. 후에 이석주(피리)가 합류했다. 그녀가 생각하고 꿈꾸던 음악을 녹여 넣었다. 이후 4명의 한국 연주자로 수렴된 토리앙상블은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차(茶) 같은 명상적 성격의 궁중음악과 술(酒) 같고 흙냄새 나는 민속음악이 4명이 일군 사각형 안에서 춤추고 뛰어놀았다. 그들은 월드뮤직 엑스포(WOMEX), 월드뮤직 페스티벌 워매드(MOMAD) 등을 누비며 한국 음악의 새로운 지도를 그렸다. 거문고와 독대하며 ‘개인의 음악’을 만들던 허윤정의 힘이 ‘우리의 음악’을 만드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여세를 몰았다. 뉴욕에서 만난 다나카 유미코(샤미센), 민샤오펀(비파)과 함께 동아시아 현악기들로 구성된 이스트리오(EASTrio)도 2010년에 결성했다.

“한·중·일 음악인들의 연대입니다. 한국인이자 동양인이 제가 음악을 통해 해야 할 역할이 담긴 앙상블이에요. 유럽에서는 동양 음악이 그들의 취향에 맞춰 소비되곤 합니다. 이러한 점이 현재 한국 음악이 월드뮤직계에 진출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이스트리오를 통해 그들에게는 없는, 그들이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철학과 미학이 녹아든 음악을 보여주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블랙스트링|허윤정=장르|믿음


▲ 블랙스트링 공연 장면

2011년부터 허윤정은 그룹 블랙스트링에 정진하고 있다. 거문고를 검다는 뜻의 ‘현(玄)’, 거문고를 뜻하는 ‘금(琴)’을 써서 현금(玄琴)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을 우리말로 푼 것이 ‘거문고’다. 이 어원을 가져 와 이름 붙인 블랙스트링은 허윤정과 이아람(대금·양금·단소), 황민왕(소리·장구), 오정수(일렉트릭 기타)가 함께하는 4인조 앙상블이다.

“토리 앙상블에서는 훌륭한 연주가들의 개성적인 소리를 최대한 끌어내는 데 주력했다면, 블랙스트링은 하나로 모아지는 밴드(band) 사운드에 주력합니다. 그래서 토리 앙상블의 공연이 끝나면 곡보다는 연주자들이 빛을 발하던 순간이나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관객이 많았고, 블랙스트링은 연주 후 곡과 음악을 기억하는 관객이 많아요. 이를 위해 4명의 연주자가 지닌 올을 하나하나 살리되, 음악이 한데 모아지는 최종 결정은 제가 합니다.”

이아람·황민왕·오정수는 ‘허윤정’이라는 코드에 각자 개성을 더하고 이를 확장시킨다. 그리고 ‘허윤정’과 약속한 출구로 반드시 나온다. ‘허윤정’이 블랙스트링 음악의 형식이자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의 국악이 만든, 그리고 오늘의 국악을 만드는 장르다.

“블랙스트링을 하면서 특정 대중을 상정할 수도 없었고, 상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악만 했을 뿐입니다. 예전의 음악에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무질서하게 나열되어 있었어요. 지금은 정리가 되었습니다. 제 자신이 정리된 것이겠지요. 그러니 과거에 이것과 저것이 섞여 있고 불확실하던 감각들이 정리와 선택의 과정을 거쳐 음악의 화질과 선명도가 명확해졌어요. 그리고 믿음! 전에는 저를 확실히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대중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 말이죠.”

허윤정과 블랙스트링은 바쁘다. 세상을 통틀어 한국에만 있는 악기, 그리고 한국에서도 전례 없는 음악이 태어난 셈이니 널리 퍼뜨리고 퍼져야 할 것 아닌가. 10월 20일 스페인에서 개최된 월드뮤직 엑스포(WOMEX)와 22일 벨기에 한국문화원에서 공연을 가졌고, 2017년 미국 투어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또다른 앙상블 모자이크코리아(거문고·타악·소리·대금·해금·베이스·기타·색소폰·드럼)의 스페인 공연도 준비 중이다.

허윤정-되기|허윤정-넘기

일제강점기를 헤쳐 나온 명인들로부터 전통음악의 세례를 충분히 받았고, 그로부터 탈피와 혁신에 대한 욕망이 강한 세대. 그래서 시대의 흐름과 강하게 맞물렸던 세대. 이 세대가 허윤정의 세대다. 이소영(평론)은 ‘포스트산조’ 세대라 명명했다. 그리고 지금의 20, 30대는 이 세대가 쌓은 성과를 인정하고 이에 협력하고 창조적으로 모방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를 내고 싶어 하는 ‘포스트-포스트산조’ 세대다.

“전통음악의 세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치맛자락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쓴 세대가 또 우리 세대예요. 전통음악에 대한 맛과 양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데,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중압감, 하지만 후배들에게 그것을 강요는 못하고··· 그러면서 시대가 외치는 새로운 요구에 부응해서 앞서나가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공존하는 세대예요.”

전통과 현재의 ‘경계’에, 국악과 국악이 아닌 것 ‘사이’로 제 자신을 힘차게 내던진 세대. 스스로 자신에게 강하게 묻고, 시대와 관객이 답하길 바라던 세대. 허윤정은 그 세대의 선봉에 서 있었고, 지금도 서 있다.

“현재까지 해온 것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해도, 지금 제 위치에 맞는 것을 하고 있나 하는 자문을 종종 해요. 그 결과물이 최고는 아니라 해도, 동시대 음악가들에게 자부심과 함께 내세울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함께 수학하고 경험을 쌓아온 동기들은 물론 위아래 세대들이 판단했을 때 좋다고 해야 마음이 놓여요. 이제 자신의 전공 위에 시대의 흐름을 읽고 알파부터 오메가를 더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것들을 실행하기에 모든 것이 수월하고 용이해진 시대이고요. 이런 시대를 통해 후배와 제자들이 특별한 예술가로 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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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연
11월 5일 오후 7시 벨로주, 12월 9일 오후 7시 30분 스트라디움

해외 공연
12월 15·17일 스페인 마타데로 마드리드(모자이크코리아)
2017년 1월 5일 뉴욕 록우드 뮤직홀, 7일 뉴욕 윈터 재즈페스티벌,
9일 워싱턴 케네디 센터 밀레니엄 스테이지, 13일 마이애미 애번투라 예술문화센터(블랙스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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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재즈 레이블 ACT 발매 | 블랙스트링의 ‘Mask Dance’

[사진5: 32_거문고 연주자 허윤정, 전통을 입력하여 미래를 출력하다-5]

Yoon Jeong Heo(geomungo), Jean Oh(guitar, electronics), Aram Lee(daegeum, yanggeum, danso), Min Wang Hwang(voice, janggu, percussion)
Improvisation has been present in Korean music for centuries, in the ensemble-based “sinawi” which accompanied shamanistic rituals, and the “sanjo”― literally meaning scattered melodies―for soloist and drum. Heo says that the closest the band reaches in this direction is in “Mask Dance” “We play together, we make contrasts, we share and follow pitches, and there is a minor thing going on which is very close to Korean traditional forms and scales.” (ACT 9036-2)

사진 김용호
진행 김호경 기자(ho@gaeksuk.com)
의상 협찬 차이 김영진·금단제
헤어·메이크업 손유정·서영화(CARA′di)·글로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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