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길을 잃은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게 안타까워 나침반을 내밀며 똑바른 길을 찾아가라고 자꾸 등을 떠민다. 하지만 애초에 나침반을 읽을 줄 모르는 삶의 길치인 사람도 있다. 자꾸 앞서가라고, 점점 나아지라고 재촉하는 사람들 속에 그 자리에 멈춰 서 있겠노라 선택한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모두에게 같은 길을 가라고 말하는 화살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은 모두가 더 나은 삶을 향해 달려가는 중에도, 오직 사랑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 하나로 ‘시시한’ 삶처럼 보이는 인생을 제자리걸음으로 살아간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형식의 영화다. 테츠야 감독은 텅 빈 마츠코를 안타까워하며 계속 물을 퍼 나르는 대신, 그녀가 처음부터 깨어진 항아리였다고 그를 품는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깨진 삶도 시시한 삶도 그저 삶이라고.
아픈 삶도 삶이라고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영화 세계는 크게 뜨겁게 부글부글 끓는 ‘갈증’, 얼음처럼 차가운 ‘고백’처럼 인간 본성의 저열함을 드러내는 영화와 ‘불량공주 모모코’ ‘라라피포’처럼 시시한 인생도 살아갈 만하다는 토닥임 같은 위로를 주는 영화로 나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마치 상처 입은 식도로 뜨거운 물을 삼키는 것 같은 순간과 차가운 얼음물을 마시는 것 같은 순간을 어지럽게 나열한다. 타인의 삶을 마구 짓밟는 인간의 가장 저열하고 추악한 욕망 속에, 그럼에도 삶은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를 이야기한다. 그렇듯 삶의 당위와 죽음의 매혹은 지구와 우주만큼이나 멀지만, 피부와 동맥 사이만큼 가깝기도 하다.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자취하는 쇼는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다. 여자친구도 그와 있으면 사는 게 재미없다며 그를 떠났다. 어느 날 쇼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고모 마츠코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대에 가출, 53세에 강변에서 죽은 마츠코다. 쇼는 마츠코의 아파트를 정리하며 유품과 그녀 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때 명랑하고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던 여인이 ‘혐오스런 마츠코’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한 여인의 비극적인 수난사를 되짚어간다. 초창기 미국 뮤지컬 영화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색감과 동작,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차용한 과장된 CG는 무척 화려하지만, 마츠코의 이야기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바라보면 상처 난 살갗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아프다. 마츠코의 인생이 타인들에 의해 망가져 가는 과정을 되짚어가면서 테츠야 감독이 내민 것은 손잡이가 아니라 칼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생채기를 내는 잔인한 영화인 것은 아니다.
초창기 미국 뮤지컬 영화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색감과 동작,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차용한 과장된 CG는 무척 화려하지만, 마츠코의 이야기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바라보면 상처 난 살갗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아프다. 마츠코의 인생이 타인들에 의해 망가져 가는 과정을 되짚어가면서 테츠야 감독이 내민 것은 손잡이가 아니라 칼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생채기를 내는 잔인한 영화인 것은 아니다.
깨진 삶도 그저 삶이라고
단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이 그리워, 사람을 믿고 사람에게 의지했을 뿐이다. 하지만 원하는 삶과 타인의 살은 늘 그녀를 배신한다. 성실한 음악 교사였던 그녀의 삶은 느닷없는 절도 사건에 연루되면서 망가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을 귀하게 여기기보다는 자신을 망치더라도 상대방을 일단 기쁘게 해주고 싶어 한다. 남자를 보는 눈도 없다. 성실할수록 실성할 지경에 이른다. 사람을 곁에 두고 싶었지만 불행이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그렇게 사람들의 진심에 가닿지 못한 한 여인의 시시하고 쓸쓸한 삶을 되짚는다. 영화는 마츠코의 죽음이 갖는 비밀을 되짚는 구성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삶의 이면을 함께 경험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마츠코의 과거는 쇼를 통해 현재로 자꾸 되돌아와 우리의 현실과 뒤섞인다. 테츠야 감독은 한 여인의 삶을 망친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진창에 빠진 마츠코의 삶을 동정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만이 전부인 마츠코의 삶은 다양한 차별을 담고 있지만, 감독은 그냥 마츠코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상황을 인정하고 강퍅해진 마음의 각질이 까슬까슬하더라도 굳이 벗겨내려 하지 않는다.
과장된 타이틀과 키치적 감성, 뜬금없을 정도로 스타일리시한 화면 위를 흐르는 음악은 깃털처럼 경쾌하다. 다소 산만해 보이는 뮤지컬 장면이 비극적 정서를 조금도 해하지 않는 이유는 테츠야 감독의 시선이 일관되게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마츠코의 판타지는 괴괴한 삶 속, 자기기만에 가까운 판타지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준다. 꿈을 꿀 수 없을 정도로 삶에 지쳐갈수록 마츠코의 환상도 점점 사라져 간다. 뮤지컬 장면의 미장센과 안무, 노래는 영화의 정서만큼이나 매력적이다. 한국에서는 야마다 무네키의 동명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2017년 세계 최초로 뮤지컬로 제작되었다. 내용은 원작 소설을 각색했지만, 전체적인 정서는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정서에 힘입은 바 크다.
현재는 과거의 주름진 얼굴
테츠야 감독은 고린도서 13장의 말을 인용,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사랑밖에 몰랐던 마츠코야말로 어쩌면 신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를 끝내 기억해주는 친구가 있고, 마츠코의 삶을 망쳤지만 마츠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있고, 그녀의 삶을 포근하게 이해해주고 손잡아줄 조카가 있어 마츠코의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의미 없는 삶으로 끝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읊조린다. 사실 과거는 언제나 현재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조카 쇼를 통해 되짚어가는 고모 마츠코의 삶은 늘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시야를 가릴 만큼의 슬픔이 침잠해 있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을 가진 마츠코의 삶은 과거, 현재, 그리고 죽은 후에도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미래를 포용한다. 사탕발림의 위안이나, 비현실적인 희망 대신 마츠코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듯 관객들의 어깨도 톡톡 두드려주는 것 같다. 지친 일상 속에서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 물기 있는 손길 한 번이면 족하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굳이 어려운 말과 철학으로 인생을 수식하지 않고, 현재의 시선에 놓인 사람들을 그저 바라봐주는 영화라 그 자체로 위로가 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