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에세이_박진영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4월 3일 11:35 오후

ARTIST’S ESSAY

아티스트 에세이_박진영

호수에 음악이 떠오르면

“데이비드, 안녕하세요!”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학생이 두 손을 흔들며 교수진 쪽으로 달려온다.

“안녕 호아킨, 잘 지냈어? 한 해는 잘 보냈고?”

작년 시에테 라고스 축제(Festival de los Siete Lagos) 이후 일 년 만에 만나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묻어난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데이비드는 이 축제를 위해 아르헨티나의 소도시 비야 라 앙고스투라를 찾았다. 그는 호아킨에게 한 해 동안 무슨 곡을 공부했는지 자세히 묻는다. 바이올린 학생인 호아킨은 바흐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바흐의 곡을 연주하기 어렵다고 늘어놓는다.

“우리 레슨이 언제지? 그럼 그때 브루흐랑 바흐를 들고 올래? 같이 작업해보자.”

호아킨이 자리를 떠나자, 데이비드가 그에 관해 설명한다. 자신이 처음 축제를 찾았던 2012년부터 8년째 참가하는 학생이며, 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바이올린을 공부 중이라고 했다. 열여덟 살 소년인 호아킨을 열 살 때부터 봐온 셈이다. 열심히 하는 학생이지만 스스로 너무 엄격해 어깨에 긴장이 많이 들어가 있다고도 했다.

도착한 첫날부터 이미 인상적인 하루였다. 시에테 라고스 축제 관계자들은 한해 또는 두 해에 2주가량 만나는 아이들에게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필자는 10주년을 맞이한 이 축제를 5년 만에 재방문했다. 2015년 당시보다 축제의 규모는 커졌지만, 여전히 몇몇 학생의 얼굴에서 5년 전 봤던 어린아이의 얼굴이 비쳤다.

아르헨티나의 지역 음악 축제

축제명이자 지명인 시에테 라고스는 스페인어로 ‘일곱 호수’를 뜻한다. 음악학교와 함께 운영되는 이 축제는 2011년 드 라 크루즈 부부에 의해 창립됐다. 남편 안드레스 드 라 크루즈는 근처 소도시 바릴로체 출신의 국제 로펌 파트너이고, 아내 안나 드 라 크루즈는 의대 졸업 후 네 자녀를 키우는 전업주부이다.

음악제의 시작은 소소했다. 이들은 음악가인 친구를 위해 파타고니아 일곱 호수 지역에서 일회성 공연을 마련했다. 공연은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었고, 첫해부터 2주간의 축제로 늘어났다. 음악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초·중등 학생이던 네 자녀를 위한 레슨으로 계획했으나, 동네 아이들 12명을 추가하면서 ‘소니도스 데 우에물(우에물의 소리) 음악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보통의 음악캠프는 개인레슨을 위주로 하고, 도시에서 벗어나 또래 학생들과 마음껏 연습하고 레슨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요즘은 한국에도 실내악 레슨을 곁들이는 음악캠프가 있지만, 여전히 개인레슨 중심이다. 반면, 드 라 크루즈 부부는 솔로보다는 ‘함께 음악하는 능력’을 중요시한다. 2013년부터는 음악에 합창이 빠질 수 없다는 이유에서 리듬 공부와 합창 수업이 추가됐다. 2016년부터는 11~20세의 청년부 ‘소니도스’, 18~28세의 대학·대학원생으로 구성된 ‘카메라타’로 반을 나눴다. 카메라타 학생들에게는 교수진과 함께 실내악을 연주하는 기회도 제공한다.

남미 음악교육을 대표하는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는 40년 넘는 역사를 지녔고, 두다멜(1981~) 같은 슈퍼스타도 배출한 바 있다. 드 라 크루즈 부부는 그러한 결과를 바라기보다, 파타고니아에서 접하기 어려운 최상의 음악교육을 지역 어린이들에게 마련하는 데 의의를 둔다. 어렸을 때부터 접하지 않고서는 진입이 어려운 음악가의 길에 대한 선택권을 쥐여 주는 것이다. 참가 학생들은 주로 일곱 호수 지역, 그리고 이웃 나라 칠레에서 온 아이들이다. 특히 카메라타 학생들은 현지 출신이 많고, 대부분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음악을 공부한다.

열정 넘치는 학생들

시에테 라고스 축제에 참가한 학생의 하루는 오전 9시 아침 식사로 시작한다. 실내악 리허설·오케스트라·합창·오페라 리허설(올해는 처음으로 어린이 오페라 부문이 추가됐다)·오케스트라 파트 시간으로 일정이 채워진다.

셋째 날부터는 저녁마다 열리는 교수진의 공연을 단체 관람한다. 개인 연습과 레슨을 위한 시간이 따로 없어서 오케스트라 파트 시간을 필요에 따라 파트 복습 또는 마스터클래스로 이용한다. 식사 및 휴식 시간에 학생들은 호수에서 수영하거나 축구, 탁구, 그리고 마피아 게임 같은 단체 활동을 한다. 이는 통신망이 잡히지 않는 곳을 캠프 장소로 택한 드 라 크루즈 부부의 고의적인 선택의 결과다.

음악에 대한 아이들의 열정은 정말 남다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대학생 마티앗은 개인 연습 시간을 확보하려 매일 6시에 일어난다. 점심시간이면 휴식 시간을 쪼개서 연습하는 아이들도 종종 보인다. 새로 배운 독일어로 필자와 대화를 나눈 베이스 학생 루캇은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르는 독어권 나라로의 유학을 꿈꾸며 언어부터 공부 중이다. 머리에 젤을 잔뜩 바른 사춘기 남학생은 양쪽 팔에 현악기 f-홀 문신을 했다. 첼로를 전공하는 나후엘은 필자에게 레슨을 요청하며, ‘클래시컬 사운드’가 무엇인지 묻는다.

참가비용에도 부담이 없다. 개인과 기업의 후원으로 학생들이 내는 2주간의 참가비는 대략 20만 원이다. 이는 모든 공연 티켓·숙박·수업료가 포함된 가격이다. 비교하자면 한국의 음악 캠프는 1주일에 150만 원 정도다.

남미를 채운 감동

축제의 연주도 특급이었다. 필자가 직접 참여한 연주는 쑥스러워서 언급 못 하겠지만,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공연은 베토벤 현악4중주 ‘세리오소’ op.95와 마티유 에르초그(비올라)가 지휘한 학생 오케스트라의 멘델스존 심포니아였다.

실내악의 정수인 현악 4중주, 더군다나 베토벤의 4중주는 축제 무대에 쉽사리 올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비엔나 트리오의 데이비드 맥캐롤(바이올린), 베를린 필하모닉의 시모네 베나르디니(바이올린), 앙상블 아파시오나토의 마티유 에르초그(비올라), 길드홀 음악학교 교수 피에르 두망주(첼로)로 구성된 4중주단은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한 듯, 디테일은 물론 곡의 큰 흐름에서도 훌륭했다. 비올리스트 에르초그는 에벤 현악 4중주단을 창단한 인물답게 두드러지면서도 방해되지 않는 밸런스를 잡아냈다. 베나르디니는 베를린 필의 에너지를 남미에 통째로 챙겨온 듯한 제2바이올린을 들려줬다. 에르초그와 학생 오케스트라의 멘델스존은 2008년 무렵 보스턴에서 들었던 두다멜과 엘 시스테마를 연상케 했다. 곡만 달랐을 뿐, 야심차게 준비한 곡을 관객에게 건네고 싶은 에너지와 집중력은 동일했다.

마지막 날 열린 어린이 오페라도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대가가 선보이는 폭넓은 음악과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12세부터 28세의 학생들이 함께 창조한 거대한 힘에서 오는 감동이었다. 합창 선생님이 작곡한 꼬마 원숭이에 대한 오페라였고, 오케스트라는 학생 10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주역도 합창도 모두 학생이었다. 드 라 크루즈 부부가 말한 ‘함께 음악하는 능력’이 현실화한 공연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에는 학생들이 준비한 실내악 공연과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를 들었다. 마지막 노래가 끝날 때, 학생들은 합창 선생님을 앞으로 모시고 새로운 노래를 시작했다. 관객 모두도 아는 민요인 듯했다.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걸맞은 가사였다.

‘내 가슴에 음악을 안고 가네(Tomo la musica en mi corazon)’

 

 

 

 

 

 

 

 

 

 

시에테 라고스 축제는 2011년부터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 빌라 라 앙고스투라 일대에서 개최되고 있다. 축제 기간 음악학교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지역 청소년들에게 오케스트라·관악기·현악기·합창·오페라 수업을 제공한다. 제10회 시에테 라고스 축제는 2020년 1월 20일부터 31일까지 열렸다. 박진영(1987~)은 이번 축제에서 진행된 공연과 마스터클래스(1.29)에 참여했다. 그 외에 데이비드 맥캐롤(바이올린)·마티유 에르초그(비올라)·시모네 베나르디니(바이올린)·피에르 두망주(첼로)·아말리아 홀(바이올린) 등이 축제에 참여했다.

 

글 박진영
첼리스트 박진영은 예원학교·커티스 음악원·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이화경향 콩쿠르·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그린필드 콩쿠르 등에서 우승했으며, 서울시향 제2수석으로 활약한 바 있다. 실내악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일러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2000~)는 장형준·신수정·강충모를 사사하고,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취미로 그린 그림을 자신의 SNS에 올리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젊은 연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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