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푸치니 서거 100주년 기념
영원히 빛나는 노래의 주인공
푸치니의 음악 유산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서거 100주년’이 아니더라도, 그의 명성과 작품은 세계 오페라 극장을 장악한 지 오래다. 그의 명성을 뒤받치는 매력은 무엇일까? 이번 특집을 통해 명작을 탄생시킨 푸치니의 삶과 시대상을 살펴본다. 또한 다가올 공연 속 예술가들의 입을 빌려 동시대에 의해 끝없이 재탄생 중인 그의 작품 세계도 들여다보자. 푸치니의 노래는 지금, 이렇게 빛나고 있다
총괄 허서현 기자
01. HISTORY 푸치니의 삶과 오페라
02. FOCUS 오페라에 드러난 이국주의
03. ANNIVERSARY FESTIVAL 토레 델 라고 푸치니 페스티벌 카라칼라 축제 ‘토스카’ ‘투란도트’
04. COMING SOON ‘토스카’로 내한하는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
05. PRODUCTION 아레나 디 베로나 ‘투란도트’
06. COLUMN 푸치니의 기악 작품들
07. RECORD CHOICE 영상물로 만나는 다양한 푸치니 오페라
08. PREVIEW 하반기에 만나볼 수 있는 오페라 공연들
01. HISTORY 남다른 성공 과정 & 그의 뮤즈들
푸치니의 삶과 오페라
본능적 흥행 감각을 가진, 20세기의 독보적 낭만주의자
이탈리아 중세도시 루카. 4대째 성당 오르간 주자인 집안에서 태어난 자코모 푸치니(1858~ 1924)는 아버지를 다섯 살 때 여의고 어머니와 누이들 사이에서 자라났다. 17세에 루카에서 멀지 않은 피사에 가서 베르디(1813~1901)의 ‘아이다’ 공연을 보고 흥분한 푸치니는 가업을 물려받는 오르가니스트 대신 오페라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을 굳혔다. 오르가니스트로서의 일을 그만두고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한 푸치니는 마스카니와 함께 ‘라 조콘다’의 작곡가 폰키엘리(1834~1886)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그의 주요 작품들 ‘마농 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 ‘마담 버터플라이’ 등은 모두 베리스모 시대에 초연되었지만, 현대적인 불협화음 속에서도 센티멘털한 선율을 자주 사용해 관객의 감성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이유로 푸치니는 엄연히 20세기 작곡가임에도 19세기 낭만주의 작곡가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작품은 남녀의 전형적인 성 역할을 보여주며 극적 긴장과 흥미를 강조한다. 압축미가 크지 않고 마치 TV 드라마처럼 상황을 사실적으로 펼쳐내며, 대사를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과 심리를 상세하게 드러낸다.
당시의 예술적 유행에 따라 푸치니는 ‘마담 버터플라이’에서 부분적으로 동양의 5음계를 사용하고 미국 및 일본의 국가와 민요를 인용해 넣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멜로디만 인용했을 뿐 일본 전통악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이다. 푸치니 시대의 작곡가들이 이해하는 ‘음악적 이국풍’은 20~21세기 현대작곡가들이 관심을 두는 ‘비서구세계 음악’과는 거리가 있다. 전자가 ‘단순한 호기심’이나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면 후자는 ‘공동체 의식’에 기초하고 있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베르디를 이을 스타 작곡가의 초기
젊은 날의 푸치니는 밀라노 음악원에서 레온카발로(1857~1919), 마스카니(1863~1945) 등의 친구들과 함께 보헤미안처럼 가난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밀라노 음악원 작곡경연대회에 첫 오페라 ‘요정 빌리’를 제출하면서 푸치니는 본격적으로 오페라 작곡을 시작했다. 경연에서 채택되진 않았지만, 친구 아리고 보이토의 격려에 힘입어 ‘요정 빌리’는 1884년 밀라노 달 베르메 극장에서 26세 푸치니의 첫 오페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독일 슈바르츠발트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발레 ‘지젤’로 유명한 유럽의 빌리(원혼이 된 처녀들) 이야기다. 첫 작품 때부터 이미 푸치니에게 눈독 들였던 이탈리아 최강의 악보 출판사 ‘카사 리코르디’는 이탈리아 예술의 혁신을 주장하며 독일·프랑스의 예술 사조를 받아들였던 밀라노 중심의 신진 예술가 및 비평가 그룹 ‘스카필리아투라’ 구성원들과 더불어 푸치니를 ‘베르디를 계승한 스타 작곡가’로 띄우기로 작심했다.
1889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한 푸치니의 두 번째 오페라는 시인 뮈세의 운문극을 토대로 한 ‘에드가’였다. 1300년대 플랑드르가 배경인 이 작품은 ‘푸치니의 카르멘’으로 불린다. 휘몰아치듯 빠른 템포와 엇박자 및 부점 리듬을 사용한 격정적인 음악도 그렇지만, 반항적이고 불같은 성격이면서도 우유부단한 면이 있는 주인공 에드가가 청순한 연인 피델리아와 관능적인 티그라나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티그라나에게 빠져들어 불행을 자초한다는 줄거리도 ‘카르멘’과 유사하다. 이야기 구성과 전개도 음악만큼이나 빠르고 극적이며, 특히 3막에 나오는 장송행진곡은 푸치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장례식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성공을 향한 과감한 선택
초기 두 작품은 푸치니에게 결정적인 성공을 안겨주지는 못했다. 회심의 역작은 1893년 토리노 왕립극장에서 초연한 ‘마농 레스코’다. 사실 푸치니의 악보를 출판했던 카사 리코드리는 마스네의 오페라 ‘마농’(1884)으로 이미 대성공을 거둔 아베 프레보의 소설로 또 하나의 오페라를 만드는 일에 반대했다. 그러나 푸치니는 성공을 장담하며 이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다.
“내가 믿는 여주인공 마농은 틀림없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 겁니다. 마농에 대한 오페라가 두 편이어서 안 될 게 뭡니까? 마농 같은 여자는 연인 하나로 충분하지 않아요. 마스네는 프랑스 작곡가답게 이 소재를 분칠과 미뉴에트로 치장했지만, 이탈리아 작곡가인 나는 절절한 열정으로 이 소재를 다룰 겁니다.”
자신만만했던 푸치니는 이 작품으로 드디어 ‘베르디를 계승할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라는 극찬을 받고 부와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테너 주인공 데 그리외의 아리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인’은 서정적인 선율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폭발적 효과에 이르는 푸치니 특유의 아리아 스타일을 정립한 곡이다. 푸치니는 이후 ‘라 보엠’의 로돌포,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서부의 아가씨’의 존슨이 부르는 대표 아리아를 모두 이와 같은 스타일로 작곡했다. 이 아리아 속에서 마농의 대답을 되새기는 ‘제 이름은 마농 레스코예요’라는 멜로디는 라이트모티프로 계속 되풀이해 나타난다. 마농과 데 그리외의 긴 이중창에는 1889년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을 본 푸치니가 습득한 바그너 반음계 화성의 영향이 들어있다. 1907년에 ‘마농 레스코’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올랐을 때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주역을 노래했다. 타이틀롤은 소프라노 리나 카발리에리, 데 그리외 역은 엔리코 카루소였다.
사회적 약자의 삶을 적나라하게 무대에 올린 베리스모 오페라 시대에 푸치니의 ‘라 보엠’(1896)은 베리스모 소재를 취하고도 음악적으로는 낭만주의의 길을 택했다. 베리스모 오페라의 음악은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격정·절망·분노 등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표현했지만, 푸치니는 구시대의 유려하고 센티멘털한 멜로디로 청중을 매혹했다. 토리노 왕립극장에서의 성공은 ‘라 보엠’에서도 이어졌다. 푸치니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엄청난 성공을 가져온 ‘마농 레스코’의 소프라노 체시라 페라니(1863~1943)를 ‘라 보엠’의 미미로도 무대에 세웠다. 토리노 출신의 페라니는 푸치니뿐만 아니라 베르디·구노·바그너·드뷔시 등 방대한 스펙트럼의 레퍼토리를 소화했다. ‘라 보엠’ 초연의 지휘는 당시 28세였던 젊은 토스카니니가 맡았고 초연 성공 이후 이 오페라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함께 전 세계에서 가장 공연 빈도가 높은 이탈리아 오페라로 자리매김했다.
현실의 연인보다 사랑한 뮤즈들
1900년 로마 코스탄치 극장에서 초연한 ‘토스카’는 전작들보다 훨씬 20세기 음악에 접근한 현대적인 세계를 펼쳐 보였다. 주역 토스카·카바라도시·스카르피아 뿐만 아니라 조역인 안젤로티 또는 성당지기까지도 자신을 나타내는 음악적 모티프를 갖는다. 격정적인 극의 내용에 어울리는 어두운 선율과 자극적인 화성도 ‘라 보엠’의 서정성과는 큰 차이가 있다.
‘토스카’ 초연의 타이틀 롤로 푸치니는 루마니아의 스핀토 소프라노 하리클레아 다르클레(1860~1939)를 기용했다. 다르클레는 서른 살이었던 1890년에 마스네의 ‘르 시드’로 이미 라 스칼라에 데뷔해 스타가 된 가수였고, 이후 전 유럽과 뉴욕·부에노스아이레스 등에서 오래도록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무수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고, 여성들을 사로잡는 매력을 스스로도 강조했던 푸치니는 “그 많은 연인 중 누구를 가장 사랑했느냐”는 질문에 “현실의 연인이 아닌 내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을 가장 사랑했다”고 답했다. 실제로 푸치니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무대에 세운 소프라노들과도 연인관계인 경우가 많았고 이들에게서 여주인공 캐릭터의 영감을 얻기도 했다. ‘마농 레스코’의 페라니와 마찬가지로 ‘토스카’의 다르클레도 푸치니의 연인이었다. 체코 소프라노 마리아 예리차(1887~1982) 역시 토스카의 탁월한 현신으로 푸치니의 사랑을 받았다.
“관객에게 충격을 주는 소재가 아니면 오페라로 만들지 않는다”고 공언한 푸치니는 이 작품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드러냈다. 탁월한 무대 감각을 지닌 푸치니는 관객이 오페라 극장에서 보고 듣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혁명과 전쟁의 소재로 한 ‘토스카’에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공포 괴기극 ‘그랑 기뇰(Grand Guignol)’을 접목했으며, 잦은 불협화음으로 극 전체의 불안과 공포를 더욱 생생하게 느끼도록 했다. 1막 성 안드레아 성당, 2막 파르네세 궁, 3막 성 안젤로 성채 등 로마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무대로 삼았다는 점도 관객의 흥미를 끄는 데 일조했다. 3막에서 로마의 새벽이 열릴 때 들려오는 호른의 음색이나 양치기의 서글픈 노랫가락, 성당의 종소리 등도 오페라에서 시도된 새로운 효과였다. 그뿐만 아니라 ‘라 보엠’에서 함께 성공을 일군 대본 작가 루이지 일리카·주세페 자코사와 ‘토스카’도 함께 작업하며 대본을 수정해달라는 까다로운 요구를 계속했다.
한편, 나가사키 항구를 배경으로 어린 일본 게이샤와 미 해군 장교의 어긋난 사랑을 그린 ‘마담 버터플라이’(1904)는 푸치니 오페라의 극적·감성적 효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걸작이다. 미국 작가 존 루터 롱의 소설을 극화한 연극을 보자마자 푸치니는 바로 오페라화를 결정했다. 부분적으로 동양의 5음계를 사용하고 미국 및 일본의 국가와 민요를 인용해 넣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 이 작품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일본이라는 나라를 아시아나 동양 전체로 확대해서 바라보게 하는 오류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자코사와 일리카의 섬세하고 시적인 대본은 음악과 더불어 관객을 울렸다. ‘로지나’로 불렸던 이탈리아 소프라노 로자 스토르키오(1872 ~1945)는 푸치니의 존경과 숭배를 받았던 소프라노로, 초초상(마담 버터플라이)으로 스토르키오를 염두에 두고 완성했다.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춰
1907년, ‘마농 레스코’와 ‘마담 버터플라이’를 공연하러 간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푸치니는 데이비드 벨라스코의 신작 연극 ‘황금시대 서부의 아가씨’(1910)에 사로잡혀 대본 작가들에게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 대본을 부탁한다. 1850년경 미국 ‘골드러시’ 시대 캘리포니아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이 오페라는 1910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초연되었다. 초연 당시 미국인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고, 오늘날에도 유럽보다는 미국에서 더 많이 공연된다. 19세기 유럽 이민자들의 신산한 삶과 애환을 담은 이 오페라에서 황량한 서부의 삶을 감당하며 거친 광부들을 통솔하는 적극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여주인공 ‘미니’는 시대에 적응한 푸치니의 새 여주인공으로 인기를 얻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초연 때 미니 역을 노래한 체코의 드라마틱 소프라노 에미 데스틴(1878~ 1930)은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중 한 사람이며 그의 밝고 강인한 이미지는 푸치니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서부의 아가씨’는 음악적으로도 푸치니가 센티멘털한 멜로디를 거의 포기한 첫 작품이다.
‘푸치니의 라 트라비아타’로 불리는 ‘라 론디네(제비)’(1917)는 파리와 리비에라를 배경으로 19세기 프랑스 나폴레옹 3세 시대의 서글픈 코르티잔(귀족이나 부자를 상대하는 정부) 이야기를 다뤘다. 오페레타나 뮤지컬처럼 가벼운 선율에 어울리는 아름답고 화려한 무대가 시선을 끄는 작품이다. 왕의 청혼을 거절하고 가난한 대학생을 사랑하는 처녀의 이야기를 담은 아리아 ‘도레타의 꿈’이 유명하다. 마치 연극처럼 진행되는 현대적인 음악 사이에 서정적이고 우아한 선율이 숨어있어, 역시 푸치니의 작품임을 확연히 느끼게 한다.
말년의 푸치니가 다다른 곳
1918년 메트오페라에서 초연한 삼부작 ‘일 트리티코’는 각각 한 시간 남짓한 ‘외투’ ‘수녀 안젤리카’ ‘잔니 스키키’로 구성된다. 삼부작 모두가 ‘죄와 죽음’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앞의 두 편이 처절한 비극인 것과는 달리 ‘잔니 스키키’는 유산 상속을 둘러싼 친척의 싸움을 다룬 즐거운 희극이다. 평생 비극으로 관객을 울렸던 푸치니가 말년에 시도한 희극이어서, 베르디 최후의 희극 ‘팔스타프’와도 비교된다. 여주인공 라우레타의 ‘오, 사랑하는 아버지’와 피날레 사랑의 이중창을 제외하면, ‘원래의 목소리로’라는 지문대로 등장인물들은 오케스트라 음악 위를 자연스럽게 흐르는 낭송조의 대사를 들려준다.
푸치니 서거 2년 후인 1926년에 토스카니니 지휘로 초연된 유작 ‘투란도트’에서 푸치니는 더욱 과감한 음악적 도약을 감행했다. “이제까지의 내 오페라들은 다 버려도 좋다”라고 말할 정도로 푸치니는 ‘투란도트’에 애정과 자신감을 보였다. 카를로 고치 및 프리드리히 쉴러의 ‘투란도트’를 토대로 한 이 작품에서 선대 여성 통치자의 비참한 운명에 충격받아 심리적 외상을 얻게 된 투란도트 공주는 노예 류의 희생을 카타르시스로 삼아 히스테리의 치유를 경험하고 칼라프 왕자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신분이 낮은 인물을 희생시키고 공주와 왕자가 행복에 도달하는 이 결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현대 관객을 위해 오늘날에는 연출가에 의해 수정된 결말이 대세를 이룬다. 더욱 증가한 불협화음, 현대적인 조성 변화, 어둡고도 화려한 화성은 푸치니 현대성의 정점을 보여준다.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푸치니의 유산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토마스 만은 소설 ‘마의 산’(1924)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이탈리아 오페라의 테너와 소프라노 이중창보다 더 감각을 자극하는 건 세상에 없다.” 소설이 발표된 해에 푸치니가 세상을 떠났고,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여기 등장하는 작곡가는 푸치니임을 알 수 있다. 푸치니의 열정적인 테너와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소프라노는 온 세계를 열광시켰고, 바로 이 때문에 푸치니의 오페라는 음악사에서 저평가되기도 했다. 음악이 지나치게 감각적으로 마음에 와닿았던 까닭에, 평론가와 음악학자들은 그의 음악을 ‘센티멘털한 대중음악’으로 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생전에 푸치니만큼 인기를 끈 작곡가는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관객이 가장 많은 눈물을 쏟는 공연은 역시 푸치니의 작품들이다.
글 이용숙(음악 평론가)
02. FOCUS 푸치니 오페라 분석
왜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했을까?
푸치니 오페라에 담긴 이국적 풍경과 오리엔탈리즘
19세기 중후반 서구 음악계는 이전에 비해 보다 다양해지는 추세였다. 19세기 이전에는 주로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던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으나, 1850년경 관현악·실내악·합창 등의 공연이 늘어나면서 이전 시대의 작품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라 승인된 고전 레퍼토리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짧게는 19세기 초의 슈만·슈베르트에서부터 베토벤·바흐·헨델을 거슬러 올라가 르네상스의 팔레스트리나(1525~1594)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연주곡목을 보유하게 됐다. 이 시기의 청중들은 자연스레 새로운 음악과 옛 음악을 동시에 접했고, 종교음악에서부터 합창·관현악·실내악·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 장르와 양식을 즐겼다.
낯설고, 이국적 정서에 빠진 유럽인들
고전 레퍼토리의 대부분은 주로 독일어권 음악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동시에 다른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음악에 대한 새로운 수요도 늘고 있던 시기이다. 당시 유럽은 공통된 언어·문화·역사를 가진 민족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독립 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민족주의의 열풍을 맞았다. 실제로 이탈리아와 독일은 각각 1861년과 1871년에 독립했고, 이는 이후에 서유럽 사회를 새로운 질서로 재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시대·사회적인 변화는 문화예술에도 응당 영향을 미치는 법. 민족주의는 19세기 유럽 음악의 화두였다. 러시아는 ‘막강한 소수’ 5인(보로딘·발라키레프·림스키코르사코프·큐이·무소륵스키)을 중심으로 독일 고전 레퍼토리에 대항하여 러시아 언어와 음악의 특성을 살린 작품을 선보였으며, 북유럽과 동유럽의 여러 작곡가 역시 자신의 민족적 특성을 음악에 담았다.
한편, 나와는 다른 ‘타자’에 대한 열망은 19세기 초부터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낯섦(Fremdheit /독일)’과 ‘다른 곳(l’ailleur/프랑스)’에 대한 갈망을 기본으로 하는 낭만주의 사조가 유럽 이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이국적 취향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열광은 19세기 이전부터 있었다. 16세기에 시작된 새로운 대륙의 발견 및 식민지화와 그로 인한 교류·무역 등으로 이러한 취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19세기 낭만주의와 만나 당대 문화예술에서 ‘이국주의(Exoticism)’의 꽃이 피어났다.
특히 음악과 함께 드라마가 중요한 오페라는 이국주의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르였다. 주로 프랑스 작곡가들의 오페라에서 나타났는데, 이를테면 비제(1838~1875)는 고대 실론 섬을 배경으로 하는 ‘진주조개잡이’(1863)와 스페인 남부지역 담배공장을 배경으로 하는 ‘카르멘’(1875)을 만들었고, 생상스(1835~1921)는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1877)를 작곡했으며, 들리브(1836~1891)는 인도 브라만 계급의 딸과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 장교의 운명적 관계를 다룬 ‘라크메’(1883)를 선보였다. 러시아 작곡가들 역시 민족주의 경향과 함께 이국적인 음악 양식과 요소를 도입했다.
중국·일본은 물론 미국 서부까지
본격적으로 푸치니(1858~1924)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자. 스스로 “극장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여겼던 푸치니는 미사와 레퀴엠 각 하나씩을 제외하고는 평생 오페라에 헌신했던 작곡가이다. ‘마농 레스코’(1893)로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차기작 ‘라 보엠’(1896)은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큰 사랑을 받았다. ‘토스카’(1900)는 베리스모(사실주의) 경향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가장 푸치니다운 작품’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1903년에 있었던 자동차 사고는 푸치니를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루카에서 토레 델 라고로 향하던 여행 도중 벌어진 이 사고로 인해 푸치니는 몇 달 동안 계속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작곡 중이던 ‘마담 버터플라이’(1904)의 완성도 늦출 수밖에 없었다.
‘마담 버터플라이’는 존 루터 롱(1861~1927)의 소설과 데이비드 벨라스코(1853~1931)의 동명의 희곡을 바탕으로 하여, 일본에 파견된 미군 장교 핑커톤과 집안이 몰락해 게이샤가 된 열다섯 살의 초초상(나비 씨라는 뜻)의 이야기를 담은 오페라이다.
흥행 감각이 탁월했던 푸치니는 당시 소설과 연극으로 소위 ‘핫’했던 작품을 오페라로 가져오는데 서슴없었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내용인 만큼, 푸치니의 음악도 상당히 이국적이다. 물론 일본음악을 접한 적 없던 푸치니가 제대로 재현했을 리 만무하다. 그는 중국 민속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5음음계로 된 선율을 쓰고, 오르골의 낯선 기계음으로 이국적 특성을 강조했다.
1907년 미국으로 건너가 작곡한 ‘서부의 아가씨’(1910)는 19세기 말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로 흘러 들어왔던 이민자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작품이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데다 미국의 청중을 위해 만든 작품이기에, 푸치니는 당시 유행했던 래그타임·투스텝·찰스턴 같은 재즈 음악과 멕시코 음악,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민요 등 민속음악 요소를 차용하여 혼합했다. 이처럼 미국적인 성격 역시 서유럽 음악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국적인 것이었다.
푸치니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의 유작 ‘투란도트’(1924)는 그의 대표적인 이국 취향 오페라이다. 이탈리아 극작가 카를로 고치(1720~1806)의 희곡에 기초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후두암에 걸린 말년의 작곡가가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이후, 결국 그의 동료가 남은 부분을 완성하여 푸치니 사후 1926년에 초연됐다. 이 오페라는 전설 속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름다운 공주 투란도트는 아버지인 황제의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구혼자를 망설임 없이 죽이지만, 정답을 맞힌 칼라프에게 결국 굴복하여 사랑에 빠진다. 중국에 가본 적이 없던 푸치니는 상당히 낯선 이 이야기에 상상력으로 음악을 덧붙였는데, 중국풍의 선율과 악기 음색으로 이국적인 면모를 살렸다.
편협한 오리엔탈리즘, 그럼에도…
21세기 현대의 청중에게 푸치니 오페라는 그저 당시 유행했던 이국 취향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100여 년이 지난 현재, 그의 작품은 문제시될 소지가 분명히 있다. 구시대적인 성역할이 강조되고, 여성혐오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거나 인종에 대한 부정적 고정 관념이 나타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투란도트만 해도 아름답지만 차가운 ‘얼음공주’로 그려지는데, 이는 냉정하고 무자비하며 잔인한 성향이어야만 여성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잘못된 편견에 의해 부당하게 묘사되는 부분이다. 칼라프가 정답을 맞힌 후, 차갑고 강인한 태도를 줄곧 유지하던 투란도트는 마치 겁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비합리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동양 여성, 그것도 최고 권력을 쥔 여성 지도자에 대한 편향적 해석이 푸치니의 음악으로 뒷받침된다.
‘동양에 대한 서구의 왜곡된 시선과 편견’을 의미하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문화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1978년 동명의 저서 이후로 현재까지 유효하게 통용되는 개념이다. 푸치니의 비범한 예술적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접 갈 수 없었던 미지의 아시아, 쉽사리 접할 수 없었던 동양 문화는 그의 작품에서 실체 없이 왜곡되고 부풀려지기에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으로 해석 가능하다. ‘투란도트’에서 서양과는 다른 동양 여성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 아름다움은 이를 욕망하는 칼라프와 구혼자들의 시선에 의해, 여성(특히 동양 여성)이 남성(서양 남성)에 의해 타자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며, 예술작품이 ‘저항은 게임의 일부’라는 잘못된 여성혐오적 신념을 강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 작품을 현재의 시선으로‘만’ 해석하는 것 역시 위험한 일이 아닐까. 예술 작품은 당대의 사회상과 사람들의 보편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20세기 초 서구 사회를 이해하는 단서 정도로 이해해도 충분할 것이다. 또한 예술 작품이 설사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더라도, 그 메시지가 쉽게 전달되거나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 위험하다는 사고 역시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우리는 21세기 현대 사회의 지성인으로 작품의 내외적 맥락을 충분히 살펴 이해하고, 이와는 별도로 예술작품이 주는 감흥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오리엔탈리즘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푸치니 오페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즐길 만하다.
글 강지영(음악학자)
03. ANNIVERSARY ➊ 70년 전통의 푸치니 페스티벌 현장
토레 델 라고 푸치니 페스티벌
푸치니가 사랑했던 마을에서 매년 두 달간 열린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마사추콜리 호수에 접해있는 ‘토레 델 라고’는 작은 마을이다. 18세기 중반까지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던 늪지였지만, 사냥을 하거나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들어와 지내면서 마을이 생겼다. 오늘날에도 수십 가구밖에 살지 않기에 어쩌면 마을이라기보다는 작은 지역공동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토레 델 라고는 ‘호숫가의 탑’이라는 뜻으로, 이는 15세기에 호숫가에 세워진 낡은 성채와 함께 서있는 망루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사람도 변변찮게 사는 이 지역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작곡가 푸치니 덕분이다.
작은 마을에서 폭발한 창작력
올해 서거 100주기를 맞이한 푸치니는 토레 델 라고에서 20km 가까이 떨어진 루카에서 태어났다. 오페라 작곡가로 데뷔 이후, 무려 10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낸 그는 1893년 오페라 ‘마농 레스코’로 화려하게 재기하고 ‘라 보엠’(1896) 등이 연달아 성공하며 베르디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 떠올랐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푸치니는 밀라노처럼 번잡한 대도시를 떠나 조용히 창작에 몰두할 만한 별장 지역을 찾기 시작했다.
푸치니는 창조적인 영감을 얻으면서 안정되게 작업을 이어가기 위한 장소를 고향인 루카 근처에서 찾았다. 아무런 방해 없이 음악을 창작하기에 적합할 뿐 아니라 물오리 사냥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기에도 좋은 장소를 찾고 있던 사냥 애호가 푸치니에게, 조류가 풍부한 늪지인 마사추콜리 호수는 이상적인 곳이었다.
1891년 토레 델 라고를 처음 방문했던 푸치니는 1900년, 그곳에 완전히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빌라 푸치니를 지었다. 호수 옆에 지어진 빌라 푸치니에는 호숫가를 매립한 작은 정원이 있었고, 집에서 바로 물오리 사냥을 나갈 수 있는 선착장도 있었다. 또한 당시 등장하기 시작한 신문물, 자동차 운전에 빠졌던 그는 집 앞까지 전용 도로를 마련했다. 그는 30년 동안 토레 델 라고에 머물면서 오페라 ‘토스카’(1900) ‘마담 버터플라이’(1904) ‘서부의 아가씨’(1910) ‘라 론디네(제비)’(1917) ‘일 트리티코’(1918) 등 주요 작품 대부분을 작곡했다. 30년간 토레 델 라고에 지극한 애정을 보인 푸치니에 대한 보답으로 이곳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토레 델 라고 푸치니’로 변경했다.
토레 델 라고는 푸치니에게 무한한 안식과 창조적 영감을 제공했지만, 이곳에서 그에게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09년 미국으로부터 미국을 소재로 한 오페라를 써 달라는 의뢰를 받고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의 작곡에 몰두하던 푸치니에게 치명적인 스캔들이 일어난다.
일명 ‘만프레디 사건’으로 불리는 이 스캔들은 빌라 푸치니에서 일하던 열여섯 살의 하녀 도리아 만프레디와 푸치니가 불륜 관계인 것으로 그의 부인이 단정 지은 것에서 비롯됐다. 억울한 마음에 세상을 등진 도리아를 사후 부검까지 한 결과, 모든 것이 부인 엘비라의 과한 의심으로 인한 오해였던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됐다. 엘비라는 도리아의 가족들로부터 큰 소송을 당한다. 푸치니는 거액을 주고 유족과 사건을 매듭짓고는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나 한동안은 토레 델 라고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러한 스캔들의 존재에도 오늘날 푸치니는 토레 델 라고의 집에 마련된 작은 가족 예배당에 잠들어 있다.
“내 오페라를 이곳에서…”
토레 델 라고의 ‘푸치니 페스티벌’은 1924년 인후암 수술을 위해 브뤼셀의 진료소로 떠나기 직전, 푸치니가 친구 조바키노 포르차노(1883 ~1970)에게 한 말에 의해 시작됐다. “나는 이곳에서 항상 사냥만을 해왔지…. 하지만 한번은 여기 야외에서 내 오페라 중 하나를 듣고 싶네.”
마사추콜리 호수가 제공하는 특별한 자연 무대에서 자신의 오페라가 공연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작곡가가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손녀인 시모네타 푸치니(1929~2017)는 이에 반대했다. 시모네타는 토레 델 라고를 최고의 안식처로 생각했던 조부가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다며, 이탈리아의 극성맞은 오페라 문화에 지친 그가 이곳에서 또다시 오페라를 듣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포르차노는 1930년 8월 24일 푸치니의 후배이자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1863~1945)와 함께 작곡가의 집 앞 호숫가에서 푸치니 오페라의 첫 공연을 제작했다.
무대는 호수에 박힌 말뚝 위에 세워졌고, 포르차노의 연출과 마스카니의 지휘로 ‘라 보엠’이 공연됐다. 이후 간간이 이어졌던 음악회는 푸치니 서거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서부의 아가씨’로 재개됐고, 본격적인 오페라 축제로 거듭난 것은 1950년대부터였다. 오늘날에는 1990년 ‘푸치니 페스티벌 재단’이 설립된 후, 2008년 최신 시설과 음향을 갖춰 새롭게 건립된 약 3,400석 규모의 테아트로 알 아페르토(야외극장)에서 공연한다.
100주기를 장식한 올해의 축제
축제는 매년 7월과 8월, 두 달간 열린다. 매년 5~6개의 푸치니 오페라를 공연하고 있는데 올해는 푸치니 서거 100주기를 기념하고, 페스티벌의 7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관객과 만났다. 오페라 연출의 거장 피에르 루이지 피치와 지휘자 얀 라탐 쾨니히가 공동 예술감독을 맡은 이번 축제에는 7월 12일부터 8월 24일까지 푸치니의 오페라 여섯 작품이 공연됐다.
데뷔 작품인 ‘빌리’와 초기작 ‘에드가’를 지나 ‘마농 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 ‘마담 버터플라이’ ‘투란도트’까지 작곡가의 음악적 연대기를 따라 의미 있는 대작들이 무대에 올랐다. 특히 축제의 마지막을 유작인 ‘투란도트’가 아니라 올해로 탄생 120주년을 맞은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이 장식한 것이 이채롭다. 비비안 휴잇이 연출하고 세계적 일본 조각가 야스우다 칸(1945~)의 무대와 피렌체의 패션 디자이너 레지나 슈레커가 의상을 맡았던 이번 ‘마담 버터플라이’ 프로덕션은 2000년에 초연한 이래, 70년 축제 역사상 가장 널리 호평받으면서 가장 오랫동안 공연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70년 동안 토레 델 라고의 무대에는 세계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들이 나서 푸치니 오페라의 사랑과 이별을 노래했다. 생전의 푸치니는 고요한 안식을 위해 토레 델 라고를 찾았지만, 오늘날 이곳에는 매년 여름 수많은 관객이 요란하게 모여든다. 주목받기 좋아하고 본인의 인기를 즐겼던 푸치니라면, 매년 여름 본인을 위한 왁자지껄한 소란을 분명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글 손수연(오페라 평론가) 사진 토레 델 라고 푸치니 페스티벌
03. ANNIVERSARY ➋ 새 프로덕션 선보인 로마의 카라칼라 축제
카라칼라 축제 토스카 · 투란도트
폐허가 된 욕장, 푸치니 오페라의 무대가 되다
이탈리아 로마의 카라칼라 페스티벌은 푸치니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며 프란체스코 미켈리(1972~) 연출, 마시밀리아노 푹사스(1944~)·도리아나 푹사스(1955~) 부부의 무대 디자인을 입힌 새로운 프로덕션의 ‘토스카’로 7월 5일 개막했다.
소프라노 소냐 욘체바(1981~)가 그려낸 질투의 연인이자 용기 있는 여장부의 토스카, 비토리오 그리골로(1977~)의 열정적인 카바라도시, 스카르피아 그 자체인 로베르토 프론탈리(1958~)가 무대에 올랐다.
푸치니를 향한 경의는 8월 10일까지 그의 마지막 작품 ‘투란도트’와 함께 계속되었다. ‘토스카’와 같은 무대 디자인과 같은 연출가의 연출로 도나토 렌체티(1950~), 루치아노 간치(1982~)가 칼라프 역을 맡았고, 줄리아나 그리고랸의 강렬한 류, 차가운 투란도트로 카라칼라에 데뷔한 앤절라 미드(1977~)가 함께했다.
푹사스 부부의 무대 디자인은 폐허가 된 로마 카라칼라 욕장에서 영감을 받았다. 폐허가 된 후 더욱 멋진 건축물이 된 카라칼라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가 되었다. 하얀 무대 배경은 부재를 표현하며, 빈 곳이 된 로마 유적의 폐허에는 새로운 것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다. 거대한 빙하와 같은 무대는 종이를 이리저리 접은 듯 보이기도 하며, 무대 너머 솟아오른 두 개의 기둥 유적은 내용을 비추는 화면으로서 기능했다. 이러한 무대 미술은 오페라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닌 현재가 되도록 만들었다.
‘공허’와 ‘여백’ 사이의 줄타기
거대한 하얀 무대와 두 개의 기둥에는 라틴문자를 사용한 로마가 보인다. 기독교 교회의 중심이라는 영적인 측면, 로마제국이라는 세속적인 측면이 모두 담긴 토스카의 배경 도시, 로마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탈리아, 또 로마의 명 여배우였던 안나 마냐니(1908~1973)를 위한 헌정으로, 오페라 속 토스카는 21세기 안나 마냐니로 재탄생한다. 2막에서 카르미네 갈론의 영화 ‘로마 전체가 그 앞에서 떨었다’ 속 절박한 마냐니의 연기 장면을 고문 장면에 함께 배치하며 극적인 면을 살렸다. 그러나 이 흥미로운 요소는 2막에만 분명하게 나타나고 사라져 아쉬웠다.
무대 소품이나 장치는 종종 성악가들이 묘사한 구절과 불일치했다. 안젤로티가 예배당 문을 여는 것이나 토스카를 질투하게 만드는 카바라도시의 그림은 허공에 그려졌다. 다행히 두 연인의 절절한 모습을 그림자로 연출한 부분의 기계 장치는 완벽했고, 성악가들의 훌륭한 연기가 하얀 캔버스 위에서 극적인 효과를 냈다. 카바라도시의 고문은 무대 뒤가 아닌 우리의 눈앞에서 일어나 더욱 잔인하게 느껴졌으며, 고통을 뜻하는 라틴어(‘Tormentum’)가 쓰인 영상이 고문이 심해질 때마다 커져 의미 전달이 확실했다.
토스카가 스카르피아를 죽이는 장면은 완전히 다시 쓰였다. 토스카는 스카르피아의 시체 주위에서 촛대로 장례식을 주례하지 않고 무관심하게 옷을 입으며 퇴장하였는데, 장면의 진정한 의미를 감소시켜 아쉬움을 남겼다. 다만 리볼버로 죽임을 당하는 카바라도시의 처형 장면은 실제로 관객이 처형장에 모여 이를 지켜본 듯 강한 인상을 남겼다. 성악가들의 의상은 통일성이 없어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진보적인 성향의 카바라도시는 현대적인 복장을, 반동적인 스카르피아는 옛 정권의 복장인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토스카는 옛 스타일 드레스로 시작해서 현대적인 옷으로 극을 마치는데, 그가 카바라도시의 성향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나타냈다.
히키코모리의 꿈, 게임 같은 연출
새하얀 캔버스는 거대한 비디오 게임 속 가상현실 세계가 되고, 세 가지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구혼자들을 제거하는 투란도트는 ‘히키코모리’의 아바타가 된다. 그는 끊임없이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접속하며 방에 갇혀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진 현대의 아이들을 상징한다. 실제로 코로나 이후 이탈리아 어린이 5만 명이 이와 같은 일을 겪고 있다. 연출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적인 현상을 드러내고, 나아가 교육적인 영향까지 고려했다.
‘토스카’에 비해서는 덜하지만 무대 미술과 소품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인해, ‘투란도트’ 역시 공허함이 느껴졌다. 작품의 배경인 중국을 연상시키는 것은 의상 디자이너인 자다 마시의 손에만 맡겨졌다. 합창은 오케스트라 후면에 위치하며 무대 위에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합창 음악을 배경으로 무대 위의 캐릭터가 죽고 살아나며 게임이 진행됐다. 커다란 컴퓨터 화면으로 변한 무대 배경은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했다.
시선을 두어야 할 곳이 많은 것이 다소 아쉬웠다. 전체 이야기가 무대에서 펼쳐지는 가운데, 자막이 나오는 곳, 그리고 영상이 보이는 유적의 두 기둥까지. 관객은 성악가의 움직임과 가사를 따라가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움직이게 되어 조금 어지러웠다.
한편으론 완전히 새로운 투란도트를 그려낸 연출에 박수를 보낸다. 게임 속 전사 같은 칼라프, 빨강·초록·파랑의 전신 타이츠를 입은 핑·퐁·팡, 난초로 그려진 류 등의 의상과 분장은 게임이라는 연출과 잘 맞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성악가들의 연기와 영상이 잘 맞아 의미 전달이 분명해진 것도 좋았다.
궁극적으로 이 연출은 관객에게 희망을 전하고자 했다. 인터넷이 만들어낸 가상 세계의 고립 속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진정한 사랑이었다. 극의 마지막에 히키코모리 소녀가 방을 떠나 자신이자 분신인 투란도트와 긴 포옹을 하자,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는 마침내 하나가 됐다.
글 이실비아(성악가·이탈리아 통신원) 사진 로마 극장
04. COMING SOON 서울시오페라단의 ‘토스카’ 무대 주인공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
우리 시대 살아있는 토스카의 내한을 앞두고 9.5~8
토스카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권력자를 살해하지만, 악인의 죽음에도 가책을 느끼는 인간적인 인물(2막)이다. 사랑하는 이가 다른 여자와 대화를 나눈다고 오해해 질투하다가도(1막), 그와의 사랑을 위해 무엇이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다채로운 감정을 극에서 보여준다(3막). 이 열정적인 역할에 전 세계 극장의 디바인 안젤라 게오르규가 겹쳐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십 번 토스카로 무대에 서며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아온’ 그는 영국 로열 오페라,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프랑스 파리 오페라, 이탈리아 라 스칼라 오페라, 독일 도이체 오퍼 등 셀 수 없는 수많은 극장에서 노래를 한 디바이다. 무대 위와 아래에서 보여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는 토스카가 가진 극단적인 감정의 폭을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만사(萬事)를 품은 디바, 토스카와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게오르규가 9월 서울시오페라단 ‘토스카’ 무대에 오른다. 다음은 그녀와 주고받은 일문일답.
올해는 푸치니 서거 100주기인데, 상반기에 이를 기념하는 활동이 있었는가?
2023/24 시즌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라 보엠’을 오랜만에 공연했다. 또 드물게 연주되는 푸치니의 곡들을 모아 올해 1월에 ‘푸치니, 당신에게(A Te, Puccini)’라는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언젠가 당신은 “푸치니의 악보 속 세심한 표기를 보면, 극을 만드는 작곡가의 특별한 능력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푸치니의 독창성은 그의 모든 오페라에서 느낄 수 있다. ‘투란도트’ ‘마담 버터플라이’ ‘토스카’ 등 여성 인물에 작곡가는 정말 큰 애정이 있었고, 인물에게 드라마를 심어주는 능력이 정말 뛰어났다.
이번 세종문화회관에서 선보이는 ‘토스카’로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토스카’의 거대한 서사는 하루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다. 모든 인물은 이 하룻밤 사이에 각자가 처한 상황으로 죽는다. 푸치니가 유일무이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각 단어에 음악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힘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인물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에도 능숙한데, 특정 인물이 무대에 등장한다는 것을 음악만으로도 눈치챌 수 있다.
토스카 역을 처음 맡은 것은 극장 무대가 아닌 2001년에 개봉한 브누아 자코(1947~) 감독의 오페라 영화 ‘토스카’였다. 이 작품은 안토니오 파파노/로열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합창단과 함께 한 작품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영됐는데,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오페라를 영화로 만드는 일은 흔치 않은데, 정말 특별한 기회였다. 당시 베니스 영화제에서 기립 박수를 받은 것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조너선 켄트(1949~) 연출가의 새로운 프로덕션(2006)으로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 토스카로 출연하게 됐고, 그 뒤로 여러 극장에서 토스카로서 노래하게 됐다.
토스카의 주요 아리아 중에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가 있다. 수십, 수백 번 부른 이 아리아에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흥미롭게도 푸치니는 이 아리아를 작곡할 생각이 없었다. 루마니아 소프라노 하리클레아 다르클리(1860~1939)가 ‘토스카’ 초연을 맡으면서 직접 푸치니에게 2막에 부를 아리아를 작곡해달라 요청하여 탄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아리아는 오페라 이야기 흐름에 꼭 필요한 노래는 아니다. 그렇지만 가사를 보라. ‘나는 예술을 위해 살았고, 사랑을 위해 살았어요’ 내게는 이 자체가 예술적 찬미가이자 성가이고, 그 때문에 이 아리아를 부를 때의 감정은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다채로운 감정, 불멸의 깊이
많은 이들이 당신 커리어의 중요한 순간으로 1992년 로열 오페라 데뷔 또는 1993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로 꼽는다. 본인에게 기억나는 인생의 사건은 무엇인가?
손꼽히는 세계적인 오페라 하우스 데뷔 무대도 물론 중요한 순간이었지만, 무척 젊은 시기의 일이고, 그 이후로 모두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생의 이정표가 있었다. 나를 위해 제작한 오페라 프로덕션 무대에 선 일이나, 새로운 극장의 개관 공연에 초청된 일, 그리스 작곡가 반젤리스(1943~2022) 작품의 초연 무대, 첫 자서전(‘A Life for Art’/2018)을 출간했을 때, 데카·워너 클래식(EMI)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매하던 매 순간이 내게 소중히 남아있다.
푸치니와 베르디 오페라로 쌓은 관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이외에도 도니체티·구노·비제·마스네 등의 오페라도 소화했는데, 아직도 레퍼토리를 더 넓히고 싶다고.
‘얼마나 많은 오페라를 했느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라 보엠’의 미미와 같이 다양한 역할에 나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그러한 생각을 했다. 또한 블라디미르 코스마(1940~)의 ‘마리우스와 파니(Marius et Fanny, 2007)’를 초연했던 것처럼, 새로운 역할에 항상 열려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양보다 질을 중요시한다. 어떤 작품을 하든지 연출·무대·의상·파트너 등이 무척 세심하게 어우러지는 것이 가장 우선되는 고려 사항이다.
수많은 프로덕션에 참여한 만큼 다양한 국가의 여러 감독·연출가와 작업해 왔다. 작품의 해석과 관련하여 기억에 남은 사람을 꼽자면?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프랑코 제피렐리(1923~2019)를 항상 특별하게 기억한다. 오페라를 정말 완벽하게 이해하고, 작곡가·음악·극작가의 상세한 부분까지 알고 존중했던 감독이다. 그와 함께 작업하고, 그가 새로 제작하는 프로덕션에도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정말 행운이라고 여긴다.
존경하는 오페라 성악가가 있는가?
버지니아 제아니(1925~2023)와 매우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환상적인 루마니아 소프라노로 폭넓은 레퍼토리와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이다. 레나타 테발디(1922~2004) 역시 무척 좋아했다. 나의 활동 초기에 내게 무척 아름다운 편지를 써준, 나에게 첫 번째 지지를 보내준 이였다.
반대로 젊은 성악가에게 조언을 전한다면?
젊은 가수들에게 현명하게 레퍼토리를 선택하라고 언제나 말한다. 독창적이어야 한다. 독창성이 여러 오페라 가수 사이에서 당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무기이다. 타인을 흉내 내지 말고, 본인이 되어라. 실수가 생기더라도 자신의 실수가 될 것이고, 그걸 통해 배울 점도 더욱 많을 것이다. 목소리와 자신의 진심이 하나로 통하면, 당신은 뛰어난 오페라 가수가 되어 있을 터!
‘토스카’를 인연으로 한국 팬들과 만나게 되니, 인터뷰도 이제 곧 만나게될 작품 얘기로 마무리해야겠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얻는 교훈은 무엇일까?
사랑·배신·희생·권력, 그리고 혁명적인 시기에 대중이 품었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1980년대 루마니아에서 비슷한 일(1989년 루마니아 혁명)을 겪었다. 인류 역사의 많은 부분은 반복된다. 이 복잡하고 의미 깊은 오페라에서 관객이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세종문화회관
안젤라 게오르규(1965~) 루마니아 출신으로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로열 오페라 하우스, 빈 슈타츠오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 수많은 극장 무대에 올랐다. 데카·EMI-워너 클래식 레이블과 독점 계약을 맺은 후 수많은 음반을 발매, 다수의 그라모폰상을 받았다.\
Performance information
서울시오페라단 ‘토스카’
9월 5~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박혜진(예술감독), 표현진(연출), 정호정(음악코치)/ 안젤라 게오르규·임세경(토스카),
김재형·김영우 (카바라도시), 사무엘 윤·양준모(스카르피아) 외/ 지중배(지휘),
부천필하모닉·위너오페라합창단· 브릴란떼어린이합창단
05. PRODUCTION 아레나 디 베로나 무대의 ‘투란도트’
최대 규모의 프로덕션, 한국 상륙! 10.12~19
이탈리아 축제의 화려한 오프닝 무대를 재현하다
이탈리아 베로나의 명물 극장인 ‘아레나 디 베로나’가 제작한 ‘투란도트’가 오는 10월 한국에서 공연을 갖는다. 아레나 디 베로나 축제(이하 베로나 축제)의 프로덕션이 해외 공연에 나서는 것은, 100년의 축제 역사상 처음이다. 프로덕션은 천재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1923~2019) 버전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의 ‘투란도트’를 만날 기회다.
Interview
세계 최고의 무대를 만드는 주인공들
1 아레나 디 베로나 재단 예술감독
체칠리아 가스디아
체칠리아 가스디아(1960~) 이탈리아 베로나 음악원을 졸업하고 1980년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소프라노다. 라 스칼라 극장 ‘안나 볼레나’로 데뷔한 바 있다. 2018년부터 베로나 재단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베로나 축제는 무척 특별한 공간에서 개최된다. 이탈리아의 원형 경기장 ‘아레나’가 바로 이 축제의 공연장이다. 2,000년의 세월을 간직한 문화유산은, 1850년대에 이르러 수리 과정에서 거의 모든 좌석에 소리가 전달되는 완벽한 음향 효과를 가졌음이 발견된다. 1913년 이곳에서 시작된 베로나 축제는 이제 매년 50만 명의 관객이 찾는 대표 문화예술 상품이 되었다.
베로나 축제가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원동력은 무엇인가?
축제의 오랜 전통이 곧 우리의 자랑이다. 동시에 우리는 거대한 무형유산 ‘아레나’를 잘 보존해준 앞선 세대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이 존경심이 축제를 이어갈 에너지가 된다. 오페라가 존재하기도 전에 만들어진 이 장소를 지켜온 앞선 세대의 노력을 이어받아, 이곳에서 오페라라는 유산이 계속 이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베로나 축제의 특별함은 장소에 있다. 개방된 공간인 아레나에서 자연 음향으로 소리 전달이 가능한 건축적 이유는 무엇인가?
아레나의 특별한 음향은, 공간의 형태와 재료에서 비롯된다. 로마식 타원형의 구조, 그리고 베로나에서 나는 ‘붉은 돌’이 그 원인이다. 이 돌은 수백만 년 전에 베로나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로 인해 만들어진 2천 년의 역사와 이야기는, 피부로 직접 느껴보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마법에 가깝다. 이번 서울 공연은 이를 완전하게 재현하기 위해 여러 조건을 갖추었고, 덕분에 많은 부분이 서울에서도 전달될 것이다.
베로나 축제는 20년간 유럽 은행 그룹인 ‘유니크레딧’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축제의 예산은 어떻게 구성되나?
이 기회를 빌려 유니크레딧을 비롯해 오랫동안 신뢰 관계를 이어온 모든 스폰서와 파트너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협력하는 많은 주요 기업이 있고, ‘67개의 기둥’인 개인 후원자들도 있다. ‘67개의 기둥’은 1117년 원형극장 붕괴 당시 외벽에서 빠진 기둥 수를 의미한다. 이와 더불어 국가 및 도시의 지원이 예산의 큰 수입이긴 하지만, 사실 수익의 가장 큰 비중은 유료 티켓 판매 수익이다. 이는 이탈리아에서도 드문 사례다. 작년에는 3,300만 유로라는 매우 기록적인 판매 숫자를 기록했다.
다가올 10월, ‘투란도트’ 서울 공연을 찾을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프로덕션을 한국에 선보이는 것이 자랑스러우면서, 또한 우리에게도 영광이다. 많은 한국 성악가들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오는 등 한국은 오페라에 대한 이해가 깊다. 무엇보다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제피렐리의 연출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푸치니의 마지막 걸작을 충실하게 재현한, 동시에 오페라가 줄 수 있는 장대한 감동을 만나는 공연이 될 것이다.
2 솔오페라단 단장
이소영
이소영(1966~) 베로나 국립 음악원에서 성악과 피아노를 전공했다. 현재 산마리노 공화국 명예영사이자, 솔오페라단 단장이다.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조직위원장·대한민국오페라단연합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탈리아 베로나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감동을 국내에서도 가질 수 있는 것은 공연을 주최하는 솔오페라단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년 창단된 민간 오페라단인 솔오페라단은 로마 오페라 극장·바리 페르투첼리 국립극장·모데나 시립극장 등 해외 극장과 협업해 국내에 오페라 프로덕션을 선보이는 역할을 도맡아왔다. “오랜 기간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극장들과 공동 제작 사업, 협업을 해오고 있었다. 아레나 디 베로나 ‘투란도트’의 내한은 이 규모가 훨씬 커진 형태”라는 것이 이소영 단장의 소회다.
이미 여러 차례 해외 오페라 극장의 프로덕션을 선보여 왔다. 올해 선보일 아레나 디 베로나 프로덕션은 어떤 차별점이 있나?
‘예술공연의 산업화’는 전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이슈다. 5차 산업으로 분류되며, 부가 가치가 가장 높은 산업 중 하나가 되었다. 아레나 디 베로나는, 축제를 통해 엄청난 부가 가치를 일으키는 성공한 문화 상품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오페라가 소위 일부 계층만 보는 장르라는 인식을 깨고, 누구나 편안하게 오페라를 즐길 수 있는 대중성을 확보했다. 이런 오페라 축제가 국내에도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터라, 이번 공연의 성사가 더욱 기쁘다.
구체적인 유통의 과정이 궁금하다. 한국 공연에 대한 베로나 재단 측의 반응은 어떠했나.
공연 추진에는 주한국이탈리아문화원(원장 전예진)의 역할이 컸다. ‘한-이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며 문화예술교류의 해로 올해와 내년에 추진할 프로젝트를 논의했고, 문화원의 제안으로 아레나 디 베로나 재단과 얘기를 나누게 됐다. 이 큰 프로젝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처음에는 가늠하기도 어려웠는데, 의외로 베로나 재단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레나 디 베로나에 한국 관객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고, 최근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며 호감도가 급격히 높아진 것도 큰 영향을 미친 듯 했다.
프로덕션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특별히 베로나 측에서 제시한 조건은 없었나?
아레나 디 베로나의 오리지널 프로덕션이라는 점, 그리고 프랑코 제피렐리의 연출작(무대·의상도 포함)이라는 점을 모든 홍보물에 반드시 명시해야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참여하는 스태프의 수준도 최고여야 한다는 점이 계약서에 명시됐다. 이를 위해 지난 5월, 한국 스태프들이 이탈리아 현지에서 공연 준비 과정에 직접 참여하며 만반의 준비를 기했다. 프로덕션을 그대로 선보이는 계약이기 때문에 올해 아레나 디 베로나의 오프닝 공연 성악가들로 한국 공연을 구성했다. 부득이 다른 스케줄이 있는 성악가들은 축제 측과 협의해서 선정했다. 이 과정에 지휘자인 다니엘 오렌도 꼼꼼하게 관여했다.
이번 프로덕션을 한국에서 잘 구현하기 위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지점이 무엇인가?
제피렐리가 연출한 ‘투란도트’가 보여줄 놀라운 풍경을 구현할 장소를 찾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 KSPO-DOME(올림픽 체조경기장/14,594명 동시 수용 가능)은 제피렐리 프로덕션의 무대 재현이 가능하고, 몇 년 전 공연장으로 개조를 하면서 음향 장비나 조명 설치도 가능했다. 여러 면에서 최선이었는데, 대관이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KSPO-DOME 기획 공연 공모에 선정되어 순조롭게 가능했다. 현지 공연과 유사하게 구현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KSPO-DOME을 3D로 시뮬레이션해서 적합한 조명을 구현하기도 하고, 신발부터 가발까지 소품 하나하나를 전부 공수해왔다. 무엇보다 음향에 가장 신경 썼다. 예전과 달리 한국에 클래식 공연의 음향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톤 마스터들의 수준이 높아졌고, 전문 장비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들었다. 자연 음향에 가장 가깝게 조정할 생각이다.
민간 오페라단이 추진한 ‘대형’ 오페라 공연의 사례로 남을 텐데, 이런 공연이 한국 오페라계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레나 디 베로나 재단은 이탈리아 정부와 베네토주, 베로나시 문화부와 베로나상공회의소가 창립회원으로서 함께 조직 운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을 준비하며, 국내에서 여러 공공기관의 문을 두드려봤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아쉬웠다. 유료 티켓을 판매하기 때문에 지원할 수 없다고 했다. 산업 분야에서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이 붕괴되면 경제가 무너지듯, 공연계도 다를 바 없다. 국공립 단체의 운영도 중요하지만, 민간단체의 육성도 중요하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민간에서도 이런 큰 프로젝트를 감당할 만한 역량이 있음을 보여주게 되어 다행이다.
3 ‘투란도트’ 역 소프라노
전여진
전여진(1987~) 이화여자대학교 및 동대학원 성악과를 졸업했다. 동아음악 콩쿠르 성악 부문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토스카’ ‘아틸라’ ‘아이다’ 등의 주역을 맡은 바 있다.
여러 버전의 ‘투란도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사랑받는 프로덕션 중 하나가 프랑코 제피렐리(1923~2019) 연출 버전이다. 제피렐리의 인생에서도 ‘투란도트’는 그가 꼽은 대표작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도 가장 많이 공연된 ‘투란도트’ 프로덕션으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아레나 디 베로나 페스티벌에서 최대 규모로 공연되고 있다. 오는 10월, 한국에서의 공연에도 화려한 라인업들이 함께 한다. 아레나 디 베로나의 음악감독인 다니엘 오렌이 지휘하며, 마린스키 극장의 아이콘인 옥사나 디카가 투란도트 역을, 전 세계 오페라 극장의 스타 성악가인 테너 마틴 뮐레가 칼라프 역을 맡는다. 외에도 다수의 스타 성악가들 중, 올해 아레나 디 베로나 오디션을 통해 이번 시즌 ‘투란도트’ 역에 발탁된 소프라노 전여진이 한국 공연에서도 그 모습을 선보이게 됐다.
현지에서 경험한 아레나 디 베로나의 무대는 어떤가? 거대한 프로덕션이 빚은 무대 위에 오를 성악가로서 어떤 각오를 갖게 되나?
제피렐리 프로덕션의 ‘투란도트’는 아레나 디 베로나에서도 모두 매진일 정도로 인기 있다. 다른 극장에 비해도, 아레나 디 베로나에서의 규모가 제일 크다. 2012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며, 여름마다 기회가 되면 베로나를 찾아 오페라를 봐왔다. 당시 관람한 ‘투란도트’는 정말 웅장했다. ‘저기서 노래할 수 있다면 정말 꿈 같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기회로 꿈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기대에 부응하는 공연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냉혈하고 냉혹한 공주로 자리매김했지만, 투란도트 역에 대한 해석도 시대에 따라 다양해지고 있다. 어떤 관점으로 인물을 접근하게 되는지 궁금하다.
제피렐리의 해석에서 특별히 느낀 것은, 투란도트가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투란도트는 선대 공주가 이방인 왕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며 증오심을 품는다. 그리고 자신과 결혼을 원하는 왕자들에게 세 개의 수수께끼를 내면서까지 결혼을 피하려는 방어막을 쌓는다. 뭔지 모를 증오심이 그녀를 보호막처럼 둘러싸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칼라프 왕자가 수수께끼를 하나씩 맞추며, 그녀의 벽이 깨어진다. 그러자 마지막에 그녀가 아버지인 황제에게 공주로서가 아닌 그저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매달리는 모습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오는 해석이었다.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유작이다. 그의 작품에 담긴 음악적 특징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를 반영해 ‘전여진만의 투란도트’가 보여줄 특징은 무엇인가?
이 작품은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 특별하고 미스테리한 작품이다. 만약 푸치니가 살아있었다면 이 오페라를 어떻게 마무리 지었을까? 이번 공연에서는 ‘얼음 공주’인 투란도트의 히스테릭한 성격, 그리고 그에 반해 여린 소녀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드리고 싶다. 드라마틱한 목소리와 같은 아시안으로서 연기하는 모습에 조금 더 자연스러운 인물 해석을 담고자 한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솔오페라단
Performance information
2024 오페라 투란도트 아레나 디 베로나 오리지널
10.12~19 올림픽 체조경기장(KSPO-DOME)
이소영(예술총감독), 프랑코 제피렐리(연출), 스테파노 스레스피디(재연출)/올가 마슬로바·옥사나 디카·전여진(투란도트), 마틴 뮐레·아르투로 샤콘-크루즈(칼라프), 마리안젤라 시실리아·굴리아 마촐라(류), 페루초 푸르라네토(티무르) 외/다니엘 오렌(지휘), 뉴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위너오페라합창단·송파어린이합창단
06. COLUMN 푸치니의 기악곡들
푸치니는 ‘오페라’만 작곡했을까?
관현악곡부터 미사곡·현악 4중주곡까지
오늘날 ‘오페라 작곡가’로 익히 알려진 푸치니의 기악곡과 종교음악은 이례적인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가문은 루카 지역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종교음악가 집안이었고, 심지어 25세 이전까지는 기악곡이 그의 주력 장르였다. 여기에는 집안과 학교에서 요구한 과제도 있고, 오페라에 필요한 관현악 작곡을 익히기 위한 학습의 측면도 있다. 젊은 시절 작품들이 미사·전주곡·스케르초·미뉴에트·광시곡 등 고전적인 제목을 가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적 내용은 고전적이거나 양식적이라기보다는 오페라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듯 특정한 정서에 몰두하고, 매우 극적이며, 또한 풍부한 음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성장 과정이 담긴 기악곡들
오늘날 연주될 수 있는 푸치니의 첫 기악 작품은 아직 10대 후반이었던 1876년에 작곡된 ‘관현악에 붙인 전주곡’(Preludio a Orchestra)이다. 2분 30초의 짧은 소품으로, 주제나 곡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관현악도 준수하지만, 곡을 길게 이끌어가는 솜씨가 아직 부족했다.
1880년에는 집안의 전통에 따라 ‘관현악이 있는 4성부 미사’라는 종교음악도 작곡했다. 이 곡은 ‘글로리아’ 부분이 가장 길어서 ‘영광 미사’(Messa di Gloria)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라틴어 통상문 전체를 사용하고 있는 45분 이상의 장대한 작품으로서, 사실상 ‘장엄 미사’에 더 가깝다. 19세기 콘서트용 미사곡의 일반적인 경향에 따라 실제 미사에 어울리는 경건함보다는 오페라처럼 극적이면서 장면의 정서적 묘사를 들려준다.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us)의 불안하고 폭력적인 표현이나,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이 어울리는 목가적이고 평온한 분위기의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은 그 예이다.
고향을 떠나 밀라노 음악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이후 푸치니가 가장 관심을 가진 장르는 밀라노에서 붐이 일었던 현악 4중주였다. 푸치니의 첫 현악 4중주곡은 1881년에 완성된 ‘세 개의 미뉴에트’이다. 하지만 정박을 잘 따르지 않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짙어서 18세기 미뉴에트가 갖는 이미지와 많이 다르다. 자기 스타일의 선율과 화음 등의 음악적 소재로 3부 형식과 대위법 등 고전 양식을 연습하기 위한 결과물로 보인다.
학교를 졸업할 때가 된 1883년, 푸치니는 여러 작품을 완성했다. 약 5분 길이의 현악5중주 소품 ‘스케르초’는 당시 스케르초에 기대되는 경쾌하고 조급한 분위기로 시작하고, 중간 부분에 이에 대조적인 선율이 등장한다. 제1바이올린이 전체를 이끌어가고 다른 세 악기는 반주에 치중하는 정도지만, 극적인 표현은 미뉴에트에 비해 훨씬 감각적이다.
같은 해에 ‘현악 4중주 D장조’도 완성했다. 이 곡은 소나타 양식으로서 매우 고전적으로 진행한다. 비올라-제2바이올린-제1바이올린-첼로의 순서로 주제가 대위적으로 강렬하게 제시된 선율들(그 선율들의 묶음 전체를 제1주제라고 봐야 할 것 같다)이 서로 어우러지고, 제2바이올린이 매우 서정적인 제2주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주제를 변주한 짧은 발전부와 다시 본래 주제를 연주하는 재현부로 이어진다. 그런데 재현부에서 제시부의 주제를 거의 그대로 연주하고 있다. 이 두 곡을 미루어 보건대 오래전에 이미 오페라 작곡가를 목표로 삼았던 푸치니는 기악곡 양식을 그다지 깊이 고민한 것 같지 않다.
성악(오페라)의 세계를 준비하며
상기한 현악 실내악곡을 작곡하던 해에 두 곡의 관현악곡도 작곡했다. 하나는 과거의 관현악곡과 비슷한 제목인 ‘교향적 전주곡’(Preludio sinfonico)으로, 약 10분 길이의 관현악 소품이다. 현악 앙상블 중심의 진행에 관악기가 음색을 더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흐름을 끈기 있게 이끌어가면서 대단원에 다다르고, 조용히 본래 주제를 재현하면서 마무리한다.
또 하나의 작품은 ‘교향적 광시곡’(Capriccio sinfonico)으로, ‘전주곡’보다도 긴 13분의 길이에 관현악의 음향을 다채롭게 사용하고, 여러 주제와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으며, 비장미까지 갖추고 있어 한 편의 교향시에 필적하는 음악적 내용을 갖추고 있다. 푸치니는 이 곡을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13년 후 오페라 ‘라 보엠’(1896)에서 이 곡의 일부를 사용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작곡가로서의 사회생활을 시작한 푸치니는 오페라에 집중했다. 하지만 죽음과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는 오페라 작곡을 이어갈 수 없었다. 푸치니는 스페인 국왕을 역임했던 그의 친구 아오스타 공작이 1890년에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에 추모의 의미로 사용하는 꽃 ‘국화’(Crisantemi)를 제목으로 오랜만에 현악 4중주곡을 작곡했다. 제1바이올린의 노래선율과 다른 악기들의 화음 반주의 단순한 구성이지만, 아름다운 선율과 감각적인 화음은 추모의 의미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 곡은 그의 첫 성공작인 오페라 ‘마농 레스코’(1892)에서 마농 레스코의 죽음 장면에서 사용되었으며, 사후에 출판된 다른 기악곡과 달리 이 곡은 1892년에 출판되었다.
특별한 마음을 담은 ‘레퀴엠’
또 하나의 죽음은 푸치니의 오페라에 대한 열정을 또다시 잠시 멈추게 했다. 바로 그의 우상 베르디의 죽음! 베르디는 1901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1905년에 4주기를 맞아 푸치니는 ‘진혼곡’(Requiem)을 작곡했다. 종교음악 작곡은 무려 25년 만이었다.
진혼 미사의 도입 부분인 ‘레퀴엠 에테르남’ 뿐으로 6분 정도의 짧은 곡이지만, 이 곡에는 그의 남다른 아이디어가 들어있다. 먼저 오르간으로 하강하는 제스처로 슬픔을 상징하고, 합창은 한 음씩 상승하면서 ‘야곱의 사다리’처럼 하늘에 닿는다. 이 상승 음형은 단음계와 반음계를 섞어 사용하여 베르디가 ‘아베 마리아’에서 사용했던 소위 ‘수수께끼 음계’를 연상시킨다. 이 곡에 사용된 합창은 소프라노·테너·베이스로, 빠진 알토 성부 역할을 비올라 독주가 대신하는 것도 독특하다(‘알토’는 프랑스에서 비올라를 뜻한다). 인성과 비올라의 합창은 마치 이승과 저승이 맞닿아 있는 듯한 오묘한 분위기를 만든다. 이러한 음악적 장치들은 푸치니가 이미 대단히 창의적이고 능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런 만큼 이 곡을 통상문 전곡으로 작곡하지 않은 것에 큰 아쉬움이 남는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recommended album
푸치니 : 영광 미사와 관현악 작품
Harmonia Mundi HMM905367
구스타보 히메노/룩셈부르크 필하모닉, 찰스 카스트로노보(테너)·루도빅 테지에(바리톤) 외
‘영광 미사’ ‘교향적 광시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현악 앙상블 연주로 ‘국화’도 수록되어 있다. ‘스케르초’를 녹음한 유일한 음반
푸치니 : 관현악 작품집
Decca E4757722
리카르도 샤이/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교향적 전주곡’ ‘교향적 광시곡’, 현악 4중주 ‘국화’가 수록되어 있으며, ‘세 개의 미뉴에트’가 녹음된 유일한 음반
07. RECORD CHOICE
실황 영상물로도 푸치니 오페라의 감동을!
대표작부터, 국내선 만날 수 없는 희귀작까지
푸치니의 출세작이자 세 번째 오페라 ‘마농 레스코’의 추천 영상물은 단연 1980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실황 ➊DG이다. 유명 오페라 작곡가인 잔 카를로 메노티의 무대와 연출은 지극히 전통적인 반면 마농을 부른 레나타 스코토(1934~2023)가 압권이다. 몸을 던진 연기와 영혼까지 읽어내는 가창력 덕분에 마농의 요염함이 그대로 살아난다. 스코토를 ‘디바 그 이상’이라고 격찬했던 도밍고도 대단한 연기파지만 스코토 앞에서는 하찮게 보일 정도다. 데 그뤼와 재회한 2막의 이중창, 4막에서 죽어가는 마농을 스코토 이상으로 불러내기란 불가능할 것 같다.
‘마농 레스코’ 중 연출 측면에서 흥미로운 것을 꼽는다면 2018년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 실황 ➋C Major이다. 연출자 다비데 리베르모레는 늙은 연기자를 묵역(默役)으로 내세워 그가 젊은 날의 자신과 마농의 사랑을 회고하는 형식을 취했다. 아베 프레보의 원작에 부합하는 방식이다. 다만 주역을 노래한 류드밀라 모나스티르스카와 그레고리 쿤드가 이 오페라의 캐릭터에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유명 오페라의 다양한 프로덕션
네 번째 오페라 ‘라 보엠’은 극사실주의, 극도의 세밀함을 표방한 프랑코 제피렐리 프로덕션이 라 스칼라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지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 연출에 의한 여러 영상이 존재하는데, 개인적으로 홍혜경이 무제타로 출연한 라 스칼라 실황을 가장 좋아하지만, 일반적 평가가 더 좋은 것은 2008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실황 ➌EMI이다. 라몬 바르가스가 시인 로돌포를 맡은 것이 조금 의외인데 미미의 다양한 면면을 드러낸 안젤라 게오르규의 열연이 모든 것을 만회한다.
오랜 오페라 팬에게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미렐라 프레니, 카라얀 지휘의 ‘라 보엠’ 녹음이 불후의 명반으로 기억될 것이다. 카라얀이 죽은 해인 1989년, 두 성악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오페라를 불렀고 영상으로 남겼다. 지휘는 티치아노 세베리니, 연출은 프란체스카 잠벨로다. 당연히 추억을 불러 일으킬만한 영상이지만 파바로티와 프레니 모두 최전성기는 지난 시점임을 감안해야 한다.
2012년 노르웨이 국립오페라 실황 ➍NAXOS은 스테판 헤르하임(1970~)의 대담한 연출이 돋보인다. 1막이 시작될 때 이미 미미는 머리카락을 완전히 밀어버린 채 중환자실에서 연명하는 신세다. 로돌포의 친구들인 마르첼로·쇼나르·콜리네·무제타는 모두 병원관계자들이다. 그러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워낙 파격적인 설정이어서 부분적으로 무리한 진행이 없지 않지만 레지테아터 연출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
여섯 번째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는 특이한 프로덕션의 영상이 여럿 존재한다. 그중 전통적 일본풍을 잘 살린 것으로는 2009년 마체라타 페스티벌 실황 ➎C Major이 좋다. 무대와 의상까지 도맡는 다작의 연출가 피에르 루이지 피치 프로덕션인데, 야외무대에 일본식 가옥과 정원을 정말 효과적으로 구현했다. 2막에서 미국인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는 초초상이 엉성한 양장 차림인 것도 그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은 해석이다. 라파엘라 안젤레티는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소프라노는 아니지만 앙칼지면서도 우렁찬 음성으로 초초상의 비극을 소화해냈다.
2009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실황 ➏Sony은 영국의 유명 영화감독 앤소니 밍겔라(1954~ 2008) 프로덕션인데, 그가 첫 공연 전에 죽는 바람에 더 화제가 되었다. 일본에 관심이 많은 밍겔라의 홍콩인 아내 캐롤린 초아가 사실상의 연출자로, 일본 본토가 아닌 영국인 스태프들을 기용한 바람에 의상이나 무대에 다소 허술하다는 약점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초초의 어린 아들을 일본 전통극의 하나인 분라쿠 인형으로 처리한 것이 신의 한수다. 검은 옷의 조종자들이 머리·몸통·다리·손 등을 나누어 맡아 진짜 아이가 출연한 것보다 몇 배나 감동을 선사한다. 샌프란시스코를 위시한 미국 서부의 대표 소프라노였던 패트리샤 레이셋이 뉴욕의 메트 공연에서 성공적인 열창을 선보였다.
2018년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실황 ➐OPUS ARTE도 주목할 만하다. 연출가 아닐레제 미스키몬(1974~)은 배경을 개항기의 나가사키가 아닌 1950년대 미국 군정기로 바꾸었다. 실제로 많은 일본 여성들이 미군과의 결혼을 꿈꾸던 시기다. 1막 시작도 결혼중개소요, 이곳에서는 미국으로 건너가 행복하게 사는 일본 여성들을 촬영한 영상을 틀어 방문자들을 꼬드긴다. 현대로 각색한 연출이지만 레지테아터(편집자 주_ 시대와 배경을 재해석한 연출) 느낌은 없고 무대는 지극히 아름답다. 다만 젊은 가수들로 구성된 출연진은 평범하다.
푸치니, 이 오페라로도 만나보자!
여덟 번째 오페라 ‘라 론디네(제비)’는 2009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실황 ➑EMI이 최선이다. 오페라계 최고의 스타 커플이었던 안젤라 게오르규와 로베르토 알라냐가 공연했다. 두 사람이 결별설을 딛고 재결합한 상태에서 공연(그 이후에 결국 이혼)했는데, 2막 무도장에서 펼쳐지는 분위기는 그야말로 두 사람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달콤하다. 1막 마그다의 아리아 ‘도레타의 꿈’을 게오르규만큼 매혹적으로 불러낼 수 있는 소프라노 또한 찾기 힘들다. 니콜라스 요엘의 연출과 마르코 아르밀리아토의 지휘 또한 낮게 평가되기 쉬운 이 오페라의 격조를 한껏 끌어올렸다.
1998년 워싱턴 오페라 실황 ➒DECCA도 특별하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아내 마르타 도밍고가 연출한 것인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부럽지 않을 정도의 휘황찬란한 무대를 만들어냈다. 이 실황을 추천하는 더 큰 이유는 마그다가 파리로 돌아가는 통상적인 피날레와는 다른 대안 종결부를 채택한 유일한 영상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소프라노 아이노아 아르테타, 미국 테너 마커스 해덕도 인상적이다.
아홉 번째 오페라 ‘일 트리티코’는 2022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➓UNITEL이 탁월하다. 잘츠부르크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리투아니아 소프라노 아스믹 그리고리안(1981~)을 위한 맞춤형 프로덕션이나 다름없다. 세 단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원래 순서는 ‘외투’ ‘수녀 안젤리카’ ‘잔니 스키키’인데, ‘잔니 스키키’ ‘외투’ ‘수녀 안젤리카’의 순으로 바꾸었다. 뒤로 갈수록 주역 소프라노의 비중이 커지도록 조율한 것이다. 세 작품 모두에 출연한 그리고리안은 과연 ‘수녀 안젤리카’에서 누구라도 울게 만드는 엄청난 열연을 펼친다. 스타 연출가 크리스토퍼 로이는 세속에서 낳은 아들이 죽은 것을 알게 된 수녀 안젤리카가 신에게 반항해 담배를 피우고, 독초를 먹은 것도 모자라 오이디푸스처럼 스스로 눈을 찌르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 참혹한 순간에 놀라운 감동이 이어진다.
2008년 라 스칼라 실황도 좋다. 루카 론코니(연출)와 리카르도 샤이(지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신구 거장이 만났고, 후안 폰스(루이지), 파올레타 마로쿠(조르제타), 바르바라 프리톨리(안젤리카), 레오 누치(잔니 스키키), 니노 마카이제(라우레타), 비토리오 그리골로(리누치오) 등 작품마다 최적의 캐스팅을 성취했다.
글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
08. PREVIEW
하반기에 만나볼 수 있는 오페라 공연들
푸치니의 걸작부터, 축제 속 국내 초연작까지
푸치니의 선율이 하반기를 가득 채운다. 서울시오페라단과 울산싱어즈오페라단이 ‘토스카’를, 솔오페라단과 어게인2024투란도트가 ‘투란도트’를, 서울시오페라단과 대구오페라하우스가 ‘라보엠’ 등을 선보인다. 동일한 작품에 녹아든 각 오페라단만의 개성을 비교하며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으로 보인다. 반가운 작품도 눈에 띈다. 국립오페라단이 2021년 국내 초연한 ‘서부의 아가씨’가 다시 돌아온 것. 푸치니 오페라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련한 여성 대신 당차고 야무진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오페라 애호가들을 설레게 하는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 개막도 성큼 다가왔다. 오페라 하이라이트로 구성된 프린지 콘서트가 대구 도심 곳곳에서 펼쳐져, 본 축제 이전에도 오페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축제는 대구오페라하우스 프로덕션인 ‘장미의 기사’(10.4·5)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페라라 시립오페라의 ‘광란의 오를란도’(10.11·12), 카메라타 창작오페라 연구회의 ‘264, 그 한 개의 별’(10.18·19), 국립오페라단의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10.25·26), 광주시립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11.1·2)로 이어진다. 폐막 공연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오페라의 ‘푸치니 오페라 갈라’(11.8)가 장식한다. 축제를 수놓는 여러 작품 중 비발디의 ‘광란의 오를란도’는 한국 초연작이기에 더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카운터테너와 콘트랄토 등 자주 접하기 어려운 음역의 성악가들이 무대에 올라 바로크 오페라의 매력을 생생히 전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오페라와 갈라, 콘서트오페라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즐길 수 있는 베르디 작품과 한국 초연 이후 45년 만의 전막 오페라로 준비된 바그너 ‘탄호이저’도 눈길을 끈다.
글 김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