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3
지휘자·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플레브니아크
역사를 지나 부활한 베르사유의 위엄
2023년 내한의 화제가 그와 베르사유 오케스트라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시대를 초월한 것들은 모두 모서리를 지녔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절대 닳지 않는 뾰족한 무언가가 그것들 속에 있다. 그 날카로운 특별함이 오가는 모든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흔적을 남긴다. 지난 2023년, 수백 년의 역사를 품은 궁전의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수백 년간 사랑받은 작품으로 내한했던 스테판 플레브니아크가 한국 청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이유 또한 같지 않을까. ‘베르사유 궁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사계’를 둘러싼 비발디와 조반니 귀도의 음악까지…. 매력적인 모서리를 잔뜩 갖춘 이들은 한국 청중의 마음을 말 그대로 ‘저격’했다.
실황 무대의 관객 반응도 뜨거웠지만, 이들의 매력에 도화선을 지핀 것은 그 이후다. 내한 당시 연주한 비발디 ‘사계’ 중 ‘여름’ 영상이 온라인상에서도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 영상에 달린 ‘유럽 사람들은 저 당시에도 헤비메탈을 이미 듣고 있었냐’는 류의 댓글로 미루어보아, 평소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지 않았던 일반 청자에게까지 특별한 인상을 심어주게 된 듯하다.
“한국에 올 때마다 얼마나 큰 감동을 받는지 몰라요. 동시에 제가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만한가 생각이 드는데, 그럼에도 한국 관객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게 되죠. 같이 음악을 나누는 순간이 제 삶에도 특별하고 소중합니다.”
열렬한 반응에 힘입어, 올해 5월에도 특별히 한국을 찾아 공연을 선보였던 스테판 플레브니아크가 오는 11월에는 다시 한번 자신이 음악감독으로 이끌고 있는 베르사유 궁전 왕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이하 베르사유 오케스트라)와 한국을 찾는다. 이들이 선보일 공연의 형태는 총 세 가지. 2023년 내한 당시 큰 사랑을 받은 비발디와 조반니 귀도의 ‘사계’를 교차해 선보이는 공연(11.2·6)을 다시 한번 올리고, ‘바이올린의 전설’(11.7·9)은 공연명은 같지만 레퍼토리 구성을 새롭게 했다. 여기에 더해 올해는 특별히 발레가 함께하는 ‘마리 앙투아네트’(11.4·5)도 선보이는데, 베르사유 왕립 오페라 극장(이하 베르사유 극장)에서 종종 무대에 함께 오르는 말랑댕 비아리츠 발레단이 내한 공연에 동행할 예정.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준비를 마친 스테판 플레브니아크와 이들을 둘러싼 특별한 음악·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세기의 궁전을 품은 오케스트라

베르사유 궁전 ©Thomas Garnier
베르사유 극장은 프랑스 전성기에 탄생한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그 위용이 대단한데요. 이곳에서 연주하며 느끼는 특별함이 있나요?
수 세기의 역사적 정신이 외형과 내부, 무대 장치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과거의 유산을 이어가는 동시에 우리의 공연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매우 특별한 궁전이자 오페라 극장입니다.
이 공간의 음악을 시대악기 연주자들로 구성된 베르사유 오케스트라가 채우고 있습니다. 음악감독으로서 추구하는 음악적 방향은 무엇인가요?
베르사유 오케스트라는 여러 국적의 연주자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문화적 다양성이 독특한 조화를 이루고 있죠. 이들과 특별한 에너지를 공유하면서, 무대 위에서 다 같이 온전히 몰입하는 경험을 만들길 추구하고 있습니다.
베르사유 극장의 위치는 베르사유 궁전의 입구입니다. 극장을 찾는 주요 관객층은 관광객들인가요?
매 시즌 100여 회의 공연을 선보이기 때문에, 일 년 내내 공연을 보러오는 충성스러운 관객층이 있습니다. 여름에는 궁전 관광객들이 공연도 함께 즐기는 경우가 있죠. 한 번 공연을 본 이후로, 매년 이곳을 찾는 이들도 있답니다.
2018년부터 ‘베르사유 스펙터클’(Château de Versailles Spectacles) 레이블을 통해 이곳에서 연주되는 르네상스·바로크 시대 음악이 녹음됐고, 현재 100개가 넘는 방대한 아카이브를 쌓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이끄는 특별한 동력이 있나요?
현재 레이블의 감독인 로랑 브루너가 이 모든 일의 심장과도 같은 인물이죠. 베르사유에서 연주되는 거의 모든 공연이 CD나 DVD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매년의 활동을 기록하는 것이며, 청중에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꾸준히 소개할 기회입니다. 축제나 오페라, 발레와의 공동 작업 시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죠.
각 시대의 음악이 무대를 채운다
내한 공연 이야기를 이어 가볼까요. 베르사유 오케스트라 솔리스트들과 선보이는 ‘바이올린의 전설’은 17~18세기 코렐리·몬타나리·바흐·로카텔리와 20세기 버르토크 등의 작품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은 바로크부터 20세기까지의 춤곡이나 민속 음악으로 구성했습니다. 제 음악의 기원은 여기에 있거든요. 각 시대에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한 작곡가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폴란드 출생인 것을 떠올려볼 때, 폴란드 작곡가인 비에니아프스키(1835~1880)나 바체비치(1909~1969)의 작품을 포함한 것도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비에니아프스키의 ‘카프리스’는 이탈리아 춤곡 ‘타란텔라’의 형식에 가깝습니다. 바체비치는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폴란드 출신의 뛰어난 여성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죠. 바체비치의 작품에선 폴란드의 민속음악과의 긴밀한 연결을 느낄 수 있죠.
이번 내한에는 발레와 함께하는 ‘마리 앙투아네트’ 공연도 선보일 예정입니다. 베르사유 극장이 1770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을 기념하여 개관됐다는 점에서 작품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유럽 역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자, 두 사람의 실제 이야기가 안무로 재현되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역사의 무대였던 베르사유 궁전에서 공연된다는 점에서 뜻깊죠. 완벽한 무대와 의상으로, 우리를 그 역사 속 베르사유로 데려다 놓습니다. 볼 때마다 인상 깊은 무대예요.
발레 공연의 음악으론 하이든의 교향곡 6·7·8번과 글루크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가 사용됩니다.
특히 하이든의 초기 교향곡은 이탈리아 협주곡의 전통이 느껴지는 작품들입니다. 비발디나 코렐리의 바로크적 전통과 가까운, 일종의 대화의 형식이 중심에 있는 음악이죠. 섬세하면서도 때로는 생기 넘치며, 종종 가득 찬 낭만성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무용수들이 무대 위에서 춤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오케스트라는 피트에서 솔리스트와 오케스트라의 대화가 가득한 또 하나의 드라마를 펼치게 됩니다.
바로크를 넘어 현재에 닿다

안무가 티에리 말랑댕 ©Jean-Marie Périer
지난 내한 당시, 비발디(1678~1741)와 조반니 귀도(1675~1729)의 ‘사계’를 교차한 프로그램으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가진 매력은 무엇인가요?
‘사계절’이라는 같은 주제를 두고, 서로 다른 두 작곡가가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는가’를 알 수 있는 형식이죠. 관객에게도 무척이나 흥미로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발디의 음악을 들을 때면 마치 즉흥처럼 자유롭고 예측 불가능한, 광기에 가까운 생동감을 느낄 테고, 보다 구조적인 귀도의 음악에선 신선한 에너지와 아이디어로 가득 찬 감동을 경험하게 되니까요.
한국은 사계절을 뚜렷하게 느끼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작품의 모든 순간에 더 잘 공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올해 이 작품이 연주될 때 한국의 계절은 ‘가을’이네요. ‘가을’에 해당하는 악장에서 특별히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나요?
비발디 ‘사계’ 악보에는 각 계절을 묘사하는 짧은 시(소네트)가 적혀있습니다. 그 내용에 따라 1악장에선 한 해 동안 어마어마한 노동을 견디며 농사를 마친 농부들의 춤을 떠올려요. ‘소주’를 진탕 마셔 비틀거리며 추는 춤, 휘청거리는 다리…. 2악장엔 안개 낀 들판 위에서 잠드는 모습, 3악장엔 숲속에서의 사냥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거칠고 시끄러운 사냥꾼들에 비해 동물들은 더 빠르고 영리해서 잡히지 않죠.
시대 악기 연주는 소리가 작고 덜 화려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본인이 ‘바로크 바이올린계의 파가니니’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고, 한국 청중으로부터 “바로크 시대의 헤비메탈 같다”는 평도 얻었으니, 스스로 추구하는 연주 가치관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음악은 제게 무척 ‘강렬한’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리듬과 선율, 화성 진행, 그리고 즉흥과 자유의 공간까지를 포함해서요. 작곡가가 악보를 써 내려가기 전,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강렬하게 이 음악을 느꼈을지 상상합니다. 악보에 적힌 것만을 이해하는 것보다, 그 작곡가 내면의 강렬함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겠죠.
결국 음악가는 음악을 전달하고 청중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기술의 완벽함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죠.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한 인간으로서 타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대 위에서 솔직해져야 해요. 청중과 같은 것을 느끼고, 또 나누어야 합니다. 마음과 영혼을 주고받으며, 하나가 되는 것이죠. 저 또한 매번 그럴 수 있길 바라며 무대에 오릅니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메이지프로덕션
스테판 플레브니아크(1981~) 베르사유 왕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다. 폴란드 카메라 오페라 음악감독을 역임했고, 일 자르디노 다모레 오케스트라·필하모니(Feel Harmony) 오케스트라 등을 창립했다. 레이블 Ëvoe Records를 설립, 야쿠프 유제프 오를린스키·나탈리아 카바웨크 등의 음반으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베르사유 궁전 왕립 오페라 오케스트라 ‘비발디 & 귀도의 사계’
11월 2일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 | 11월 6일 부산콘서트홀
스테판 플레브니아크(지휘·협연), 베르사유 궁전 왕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연주)
베르사유 궁전 왕립 오페라 오케스트라 X 말랑댕 비아리츠
발레 ‘마리 앙투아네트’
11월 4·5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티에리 말랑댕(안무)/스테판 플레브니아크(지휘·솔로), 베르사유 궁전 왕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연주)/클레르 롱샹(마리 앙투아네트 역)·미카엘 콩트(루이 16세 역) 외
베르사유 궁전 왕립 오페라 오케스트라 솔리스트 ‘바이올린의 전설’
11월 7일 안동예술의전당 웅부홀 | 11월 9일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
스테판 플레브니아크(바로크 바이올린), 카타르지나 치혼(바로크 첼로), 나타나엘 말누리(바로크 더블베이스), 세실 샤르트랭(하프시코드)
ABOUT
베르사유 왕립 오페라 극장과 오케스트라
베르사유 궁전의 역사는 158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루이 13세가 별장을 성으로 만들면서 시작해, 1661년 루이 14세가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하며 규모가 커지게 된다. 가장 유명한 ‘거울의 방’을 만든 것도 루이 14세.
베르사유 왕립 오페라 극장은 이 왕정 시대의 상징적인 극장이다. 1770년, 황태자였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을 기념하며 개관했다. 목재로 구성되어 있어 음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극장은 2009년 보수 공사를 거치며 재개관했다. 글루크·모차르트·몬테베르디 등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고, 현재는 매 시즌 100여 회의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고음악 지휘자인 윌리엄 크리스티의 공연부터 프렐조카주 발레까지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오르는 활발한 공연장이며, 헨델·퍼셀·오펜바흐·로시니 등의 오페라도 전막으로 오른다.
베르사유 오케스트라는 2019년, 존 코릴리아노(1938~)의 오페라 ‘베르사유의 유령’ 프로덕션을 계기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베르사유 왕립 오페라 극장 시즌에 함께하며, 해외 투어도 활발하다.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짧지만, 베르사유 궁전의 스펙타클 레이블을 통한 음반으로 호평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