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 윈덤 극장 ‘모두가 나의 아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1월 19일 9:00 오전

WORLD HOT UNITED KINGDOM theater

 

윈덤 극장 ‘모두가 나의 아들’ 2025.11.14~3.7

쓰러진 나무 아래에서 드러나는 진실

 

이보 반 호프의 연출로 되살아난 아서 밀러의 사회 비판극

 

모든 것을 날려버릴 듯 거센 바람이 불어닥친다. 잠옷 차림의 여자가 나무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지켜내려 하지만, 나무는 결국 쓰러지고 만다. 무대가 밝아지면 거대한 나무가 바닥에 놓여 있고, 그 주변에는 장미 꽃잎과 사과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원작에서 ‘가느다란 사과나무’로 언급된 이 이미지는 이번 프로덕션에서 커다란 상징으로 확장된다.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래리를 기억하기 위해 심었던 이 나무는 공연 내내 무대 한가운데 놓여 인물들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래리의 형 크리스는 쓰러진 나무의 가지를 전기톱으로 잘라낸다. 사방으로 튀는 파편과 거친 금속성 소음, 매캐한 냄새는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며 인물들이 직면한 거칠고 폭력적인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침묵으로 쌓아 올린 비극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1915~2005)는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중산층의 몰락을, ‘시련’에서 마녀사냥의 광기와 집단적 의심을, ‘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에서 이민자 사회의 욕망과 폭력을 그려내며 ‘아메리칸 드림’의 이면에 깔린 도덕적 침묵을 집요하게 파헤쳐왔다. 그중에서도 ‘모두가 나의 아들’(1947)은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윤리와 자본, 가족과 사회적 책임의 충돌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실화를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 328회라는 장기 공연을 기록하며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 공장을 운영하던 조 켈러는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실금이 있는 부품을 출고하고, 그 결과 21명의 조종사가 사망한다. 조는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고, 동업자 스티브는 모든 책임을 떠안은 채 감옥에 갇힌다. 스티브의 자녀 앤과 조지는 아버지를 경멸하며 면회조차 가지 않는다.

조의 둘째 아들 래리는 전쟁에서 실종된 상태지만, 아내 케이트는 그가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녀의 병적인 집착은 집안을 겨우 지탱하는 유일한 지지대다. 래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곧 조의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품은 전쟁, 산업, 도덕, 가정이라는 그물을 촘촘히 엮어낸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던 조는, 끝내 죽어간 군인들 역시 모두 “내 아들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조의 절규 속에서 제목의 의미가 드러나는 순간, 관객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번에 이해하게 된다.

가족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공간

윈덤 극장이 선보인 ‘모두가 나의 아들’은 2시간 15분 동안 쉼 없이 밀어붙이는 긴장감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연출을 맡은 이보 반 호프(1958~)는 인물의 감정과 내면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널리 알려진 벨기에 출신의 연출가로, 2014년 아서 밀러의 ‘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을 런던에서 성공적으로 선보이며 영국 연극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그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무대·조명 디자이너 얀 페르스베이벨트는 상징을 간결한 형태로 압축해 관객의 시선을 인물에게 집중시킨다. 무대 뒤를 가득 채운 거대한 벽의 둥근 창은 때로는 해처럼, 때로는 달처럼 보이며 시간과 감정의 흐름을 이끈다. 인물들은 그 창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거나 사라지고, 관객은 이 집 안에서 벌어지는 사적인 비밀을 엿보는 위치에 놓인다.

장면들은 급하게 몰아붙이지 않으면서도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맥박처럼 뛰는 조명, 공간을 울리는 불길한 박동음, 배우들의 얼굴을 기이하게 물들이는 녹색과 푸른색 조명은 불안을 한층 선명하게 증폭시킨다. 비밀을 안고 온 조지가 객석을 가로질러 무대에 오르기까지, 극장은 단번에 긴장으로 굳어진다. 움직임 없이 시선으로만 이어지던 위태로운 대립은 잠시 누그러지는 듯하다가, 단 한마디의 말로 폭발한다. 이보 반 호프는 원작의 결말을 비틀어, 마지막 순간까지 관객이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서로 다른 무대, 이어진 삶들

이 작품이 최고 300파운드(한화 약 59만 원)에 이르는 높은 티켓 가격에도 연일 매진을 기록하는 이유는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에 있다. 여러 작품을 통해 전문성을 인정받아온 캐스팅 디렉터 줄리아 호란은 작품 속 인물들을 세밀하게 분석해 가장 적합한 배우를 섭외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활성화되어 있지 않지만, 웨스트엔드를 비롯한 공연 현장에서는 캐스팅 디렉터가 제작 초기 단계부터 참여하며 작품 완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조 역은 이번 작품에서 단연 핵심이다. 연극과 영화에서 폭넓게 활약해온 브라이언 크랜스턴(1956~)은 여유롭고 이웃에게 친절한 가장에서,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는 인물로 흔들려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린다. 그는 끝까지 “가족을 위해서였다” “아들을 위해서였다”고 외치지만, 결국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실 앞에서 무너진다.

크리스 역의 파파 에시에두(1990~)는 오냐오냐 자란 순진한 아들에서, 아버지가 숨겨온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분노와 절망으로 치닫는 인물의 변화를 치밀하게 표현한다. 초반의 단란했던 부자 관계는 후반부의 격렬한 대립과 대비되며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특히 파파 에시에두의 건장한 체구와 압도적인 에너지는, “얘기 좀 하자”는 아버지의 요청을 뿌리치는 장면에서 금방이라도 그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폭발한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다 내 아이들’(2025.11. 28~12.14/선돌극장)이 매진을 기록했다. 극단 백수광부의 연출가 이성열은 제목을 의도적으로 ‘다 내 아이들’로 바꾸어 작품의 메시지를 오늘의 한국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했고, 극의 시간을 핼러윈 전날로 설정해 최근의 참사를 은유적으로 환기했다. 박완규, 길해연 등 배우들의 연기는 관객에게 깊은 안타까움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서울과 런던, 서로 다른 도시에서 무대에 오른 같은 작품은 사회 속에서 우리의 삶이 보이지 않게 얽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정재은(영국 통신원) 사진 델폰트 매킨토시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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