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최지은, 거듭된 도전의 결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3월 16일 9:00 오전

CHALLENGE

 

소프라노 최지은

거듭된 도전의 결실

 

연이은 콩쿠르 우승 이후, 오페라와 여러 무대에서 성장의 척도를 가늠하다

 

 

세상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쥔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일흔의 나이까지 그가 이루지 못한 단 한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사랑’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품었던 사랑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심지어 그를 처형해야만 했던 여인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마지막으로 외치며 쓰러진다. “Giacomo il Re!(제임스에게 왕위를 물린다!)”

세계사에 관심이 있다면 특정 인물이 연상될 것이다. 바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의 이야기, 정확하게는 실존 인물에 극적인 픽션을 가미한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의 주인공 엘리자베타의 이야기다.

‘로베르토 데브뢰’(1837)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비극을 다룬 ‘안나 볼레나’(1830),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 여왕과 엘리자베스 여왕의 팽팽한 기싸움을 다룬 ‘마리아 스투아르다’(1835)에 이어 도니체티 ‘여왕 3부작’의 막을 내리는 작품이다. 이 오페라 세 편의 국내 초연은 비교적 최근으로, 2015년 ‘안나 볼레나’, 2019년 ‘마리아 스투아르다’에 이어 ‘로베르토 데브뢰’는 2023년이었다. 세 작품 모두 프리마 돈나에게 극한의 역량을 요구하는 탓에 무대에 올리기 쉽지 않다.

“엘리자베타는 음역·기교·체력 그리고 감정 표현까지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어려운 대목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배역이기에 자칫 테크닉, 특히 콜로라투라 기교에 집중하다가 감정 표현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있습니다.”(최지은)

 

뒤늦게 공부한 성악으로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최지은은 올해 3월 ‘로베르토 데브뢰’는 물론, 4월 ‘나부코’(서울), 7월 ‘안드레아 셰니에’(칠레 산티아고), 10월 ‘나비부인’(베를린)의 주역을 맡는다. 또한 하반기 중 국내에서 말러 교향곡 8번 ‘천인’,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브람스 ‘독일 레퀴엠’ 등의 솔리스트로도 합류한다. 그야말로 바쁜 일정이다. 이처럼 여러 무대를 소화함은 물론 엘리자베타라는 벨칸토 오페라의 난역을 맡을 정도로 큰 성장을 이룩했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 길에 뜻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성악의 길에 강한 의지도 없었고, 그저 대학교 진학만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부 졸업 이후로 방황도 겪고, 음악과 관련없는 직장에 3년을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업무에 종사할수록 점차 성악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열망이 커졌다.

“당시에 이미 2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든 시기였기에 정말 오랜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결론 내렸죠.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평생 할 수 없겠구나’.”

마음은 다잡았지만, 한시가 급하다고 생각한 그는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준비를 마치고 제대로 된 어학 공부도 없이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처음에 머물기 시작한 곳은 독일의 작은 도시 데트몰트.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지내며 외로움을 달래기보다 고독하게 공부에만 전념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돌이켜보면, 유학길에 오른 이후 매 순간이 고비의 연속이었습니다.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도 많았습니다. 연습실에서 홀로 울기도 많이 울었고요.”

최지은은 각고의 노력 끝에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물론 한동안 성악 공부의 공백이 있었던 만큼 재학 중에도 슬럼프는 끊임없이 찾아왔다고. 그럼에도 그는 모든 고통의 시간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으며 성악의 길에 매진했다.

그러던 그에게 첫 오페라 주역 데뷔 무대로 주어진 ‘라 보엠’의 미미 역은 오페라 가수로서의 길을 명확히 일깨워주었다.

“그 무대에서 ‘음악과 극 속의 인물’로 살아간다는 생생한 감각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앞날의 방향을 잡는 중요한 경험이었어요.”
분명한 목표를 세운 채로 도전을 이어가던 그는 2024년 베르디 콩쿠르, 2025년 스페인 비냐스 콩쿠르에서 연이은 우승을 이룩하기에 이른다.

“저에게 다가오던 제한을 넘어 가능성을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콩쿠르 입상 이후 뚜렷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되고, 결과에 상관없이 도전 자체가 저를 발돋움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의미를 두게 되었습니다.”

 

작품 속 여인의 마음과 삶을 헤아리며

최지은에게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이사장 박의숙)이 주최하는 ‘로베르토 데브뢰’의 엘리자베타 역은 또 한 번의 새로운 도전이다.

“기존에는 주로 베르디·푸치니의 작품처럼 리릭한 배역을 주로 맡았지만, 세아이운형문화재단에서 제 음악적 색채와 발전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엘리자베타 역을 제안했습니다. 도니체티 특유의 벨칸토 어법과 드라마틱한 표현을 동시에 요구하는 이 배역은 저에게도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것이라 생각했고요.”

역사 속의 엘리자베스 1세는 강력한 군주였지만, 극 중의 엘리자베타는 한 여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엘리자베타는 권력 뒤에 숨겨진 한 여인의 고독과 두려움을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그 때문에 이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대본과 음악에서 드러나는 그의 내면적인 고독·질투·상처에 집중하며, 단순히 여왕이 아닌,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최지은은 다른 배역들과 합을 맞추기 전, 홀로 긴 시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낀 고독감이 오히려 엘리자베타를 깊이 이해하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는 엘리자베타를 비롯하여 로베르토 데브뢰(테너 김범진)·노팅엄 공작(바리톤 최인식)·사라(메조소프라노 김정미)까지 네 인물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감정의 충돌이 이어진다.

“엘리자베타는 권력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데브뢰는 충성심과 사랑 사이에서 흔들리며, 노팅엄과 사라는 각각 질투와 희생을 상징합니다. 각 인물의 입장에서는 모두 정당한 선택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이야기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최지은은 이 작품의 줄거리를 외우기보다는 “각 인물들의 심리 변화와 ‘벨칸토 특유의 성악적 아름다움’에 집중하면 더욱 폭넓은 감상이 될 것”이라 전하며, “음악과 드라마가 일체화되는 피날레에서 크게 감동하게 될 것”이라 덧붙였다.

최지은은 앞으로도 다양한 작품을 통해 도전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언젠가는 ‘로엔그린’과 같은 바그너 레퍼토리에도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다만, 충분한 시간을 갖고 그 음악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을 때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지금 맡고 있는 배역들을 발판 삼아 앞으로 한 무대, 한 작품씩 차근차근 음악적인 표현의 폭과 레퍼토리를 넓혀가고자 합니다.”

최성혁 기자 사진 비냐스 콩쿠르

 

최지은(1990~) 수원대 음대 졸업 후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2023년 KBS 한전음악콩쿠르 금상, 국립오페라단 콩쿠르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2024년 베르디 콩쿠르에서 한국인 여성 최초 우승, 2025년 비냐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현재 독일 코트부스 극장 소속 솔리스트이자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오페라 후원 인재로 활동 중이며,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 최고연주자과정에 재학 중이다.

 

 

PERFORMANCE INFORMATION

세아이운형문화재단 ‘로베르토 데브뢰’

3월 6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데이비드 이(지휘)/서울시향, 노이오페라코러스/최지은(엘리자베타), 김범진(로베르토 데브뢰), 최인식(노팅엄 공작), 김정미(사라) 외/표현진(연출)

서울시오페라단 ‘나부코’

4월 9~12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이든(지휘)/한경arte필, 위너오페라합창단/양준모·최인식(나부코), 서선영·최지은(아비가일레), 전승현·임채준(자카리아) 외/장서문(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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