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원일과 제자 박지하는 피리가 주전공이지만 피리만으로 조우한 적은 거의 없다. 두 사람은 한예종에서 처음 만났다
음악그룹 숨[su:m](이하 ‘숨’)을 이끄는 제자 박지하가 말한다. “선생님이 해주신 단 한마디의 칭찬이 중요했던 거 같아요.” 가르침을 준 원일이 말한다. “흥분됩니다!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펼칠 줄 아는 후배와 제자들이 나오면서 이제 나도 해볼 만한 게임이 되겠구나 싶어요. 이제 나도 워밍업 좀 해볼까?” 원일과 박지하에게 2013년은 바쁜 한 해였다. 원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의 교편을 잠시 내려놓고 2012년부터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이끌고 있다. 예술감독으로서 적지 않은 양의 기획력을 악단에 쏟았다. 교향악축제에 국악관현악단으로는 처음으로 한 축을 맡았다. 6월에는 런던의 K뮤직 페스티벌의 개막공연을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 장식했다. 서정민(가야금)과 함께 7년째 ‘숨’을 이끌고 있는 박지하에게도 바쁜 한 해였다. 서울아트마켓에서 해외 월드뮤직 전문가들에게 ‘숨’과 한국음악을 소개했다. 월드뮤직의 초대형 축제라 일컬어지는 워멕스(WOMEX)의 공식 쇼케이스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지하는 미국 국무성 주최의 원비트에 개인적으로 한 달간 참여했다. 한국을 대표하여 홀로 맞은 시간 동안 본인이 나아가야 할 음악의 길을 읽고 한층 성숙해졌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고는 삶에 피리가 놓여 있다는 것뿐이다. 원일은 장고를 비롯한 타악기, 오선보를 만지고 다른 예술가를 통해 음악을 만들어낸다. 박지하도 그렇다. 피리로 시작했지만 그녀는 ‘숨’에서 피리 외에 생황과 양금을 연주한다. 곡도 짓는다. 이제 둘은 다르면서도 한 길을 걷는다. 스승의 그림자가 아닌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세계로 뻗는 한국음악의 길 위에 드리워져 있다. 원일과 박지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만났다. 2002년에 부임한 원일은 관현악·실내악·작곡을 맡고 있었다. 2004년에 입학한 박지하는 입학 후 정재국 명인으로부터 피리를 배웠다. 원일과는 관현악·실내악 수업에 만났다. 그런데 원일의 수업 방식은 좀 특별했다.
교편 잡은 앙팡 테리블&피리 속 우주 발견한 소녀
“나는 한국음악이 가야 할 방향이 창작에서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작곡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서양식의 작곡 기법이 있죠. 다른 하나는 연주자들의 작곡이 있습니다. 서양음악계에서는 없는 것이죠. 지금도 서양에서는 거의 움직임조차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반면 전통음악은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 창작방식은 어느 순간 끊겼죠. 그런데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만들어지면서 그런 수업을 알게 모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술학교이다 보니. 제 수업은 ‘자기 음악’과 ‘자기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수업이었습니다.” 전통음악계를 이끄는 원심력을 온몸으로 거부해온 그였다. 대학 시절 소리사위와 슬기둥의 멤버로, 이후 푸리와 바람곶을 이끌면서 자신을 장르화시켜온 앙팡 테리블 원일. 영화·무용·연극은 원일의 음악과 만나면 새로움과 색다름의 급물살을 타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현장에서의 경험과 믿음으로 제자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박지하에게는 그의 수업이 ‘악’ 소리 나게 했던 수업이었다. 스무 살을 갓 벗어난 음악학도들에게 원일이 던지는 과제는 이랬다. “너희들의 음악을 해봐라.” 이 ‘해봐라’는 나무와 악기로 대화해보기, 연주를 통해 소리가 기화(氣化)되면서 음악이라는 물질성이 없어지게 하는 등 너무나 우주적인 것이었다. 그간 배워온 것과 너무 달랐다. “일주일에 하나씩 자기 곡을 만들어오라고 하셨어요. 그게 많이 부담이 돼서 싫을 때도 있었어요. 뭔가를 만들어 완성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 싫었고, 확신도 없었죠. 사실 안 해봤던 것이었으니. 한마디로 선생님은 좋은데 수업은 싫었던 것이죠.” 사실 학생들 대부분이 낙오자였다. 무에서 유를 빚는 것이 예술이라고 하지만 박지하의 말대로 ‘안 하던 것’을 ‘하는 것’은 정말 힘든 것이었다. 원일이 곁든다. “음악과 나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 나를 알고, 내가 내는 소리는 무엇인가? 내가 중심에 서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수업의 대부분은 곡을 만드는 시작에서 그쳤습니다.” 한편 박지하의 피리는 흔히 ‘우렁차다’라고만 비유되는 소리를 다양한 색채로 확장시킨다. 이런 특징은 ‘숨’의 ‘오후 5시 16분’ ‘거울자아 Ⅱ’ ‘아까시 나무’를 들어보면 잘 나타난다. “지하는 탄탄하고 정통적인 줄기에서 학습된 친구입니다. 음악에는 음정, 박자 등에 안정감이 중요하고, 휩쓸려가지 않는 자기 조종 능력이 있어야 하죠. 그 위에 진짜 음악이 꽃피는데, 지하는 뭘 불어도 허투루 불지 않는 주자입니다.” 이 피리소리는 학습기에 빠지기 쉬운 막막한 길의 한 가운데 묻힐 뻔했다. 어느 날이다. “선생님이 나란 사람을 알 것이라는 생각도 못했다”라 생각하는 박지하의 피리 소리는 원일의 시야에 단번에 들어온다. 관현악 수업 때다. 선배가 빠져 대신하게 된 한 가락의 피리 선율은 박지하의 몫이 되었던 것. “그때만 해도 학교를 다니면서도 음악을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악과 산조만 오고 가는 것, 좋은 선생님은 많았지만 마음의 스승을 못 만났죠.” 그런데 원일의 지휘봉을 좇아오던 그 가락을 듣고 칭찬이 쏟아졌다. 유머 있고, 잘 웃고, 학생들에게도 붙임성 좋은 스승이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가차 없는, 지휘봉을 든 독설남의 칭찬이었다. 그 후 원일은 관현악곡과 자신의 곡의 중요한 부위를 박지하의 피리에 맡기기 시작했다. 때로 원일의 요청에 의해 생황을 불기도 했다. 완성이 아니면 내놓지 않는 박지하의 성격에도 시동이 걸렸다. 믿고 주는 만큼 올곧게 받아내고 연주로 보답했다. ‘감’과 ‘눈대중’이 아닌 ‘정확성’과 ‘감각’을 입는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고, 관객과 나누는 훈련은 학교 밖에서도 계속되었다. 당시 원일이 박차를 가하던 바람곶의 객원 아닌 객원으로 합류하기도 했다. 연극부터 녹음실, 세계 여러 나라를 누볐다. 그러면서 동시에 박지하는 이 경험을 학창 시절부터 미지근하게 끌고 오던 숨에 뜨겁게 불어넣기 시작했다.
닮고자 했던 열정이 만든 오늘, 국악의 창작을 열다
‘숨’은 박지하가 7년째 이끄는 음악그룹이다. 이십 대의 열정이 곳곳에 배어 있는 팀으로 가야금 연주자 서정민과 단 둘로 구성된 앙상블이다. “만약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숨을 이끄는 활동 같은 것은 못했을 것 같아요. 여러 무대에 대한 제안과 그 활동이 제게 잘 맞았고 갈증을 해소해주셨죠. 사실 제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모든 것을 알고 싶고, 닮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며칠 전, 우연히 ‘히든 싱어’라는 프로그램을 봤어요. 한 가수가 있고, 여러 사람이 나와 모창을 하는데 너무 똑같이 부르는 거예요. 그중 몇 번이 원래 가수라고 고르는 거예요. 그 가수를 너무 좋아하는 마음이 모창의 완성도를 가르더라고요. 음악적인 힘에 끌려 결국 그 사람 자체를 닮고 싶어 하는 마음··· 저도 선생님이 가는 길이 좋아보였고 닮고 싶었어요. 선생님 곡을 매번 들어도 매번 좋았어요. 그 마음이 숨을 이끄는 7년에 녹아 있고 늘 원동력이 되었어요. 사실 초반에는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어서 한 것도 있답니다.” ‘숨’은 지난해에 워멕스 공식 쇼케이스 무대에 섰다. 현지의 반응은 뜨거웠다. “‘숨’은 한국음악이 가야 하는 연주자 중심의 창작 방식에 정확하게 부합합니다. 유럽에서도 두 사람만으로 밀당을 하면서 하는 음악이 본인들의 마음을 잡을 줄 몰랐던 거죠. 듣다 보면 차분해지고 더 듣도록 유혹하고 홀리는 것이 ‘숨’의 힘이라고 봐요. 어라! 얘네 봐라, 얘네 봐라 하면서 끝날 때까지 내가 듣고 있었네 하는 매력. 그런 매력을 뿜는 연주자의 진정성이 압도적으로 ‘숨’이 갖고 있는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2010년에 원일과 바람곶이 워멕스에 초청받아 한국음악의 매력을 수놓고 온 지 3년이 흐른 지금, 둘은 스승과 제자에 이어 월드뮤직계의 선후배가 되었다. 이제 원일의 표현대로 “서로 진검승부하며 창과 방패를 겨누는 사이”가 된 것이다. 지난해와 같이 올해에도 두 음악가는 정신없이 바쁘단다. ‘객석’이 마련한 자리 덕분에 신년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간만에 한복도 곱게 차려 입어보았다고. 웃음꽃 핀 사진도 남겼다. 원일과 박지하, 그들 앞에 놓인, 아니 그들이 만들 여정이 궁금해진다.
간만에 제자를 만나 신이 난 스승, 짧은 시간 동안 훌쩍 커버려 오히려 앞으로가 겁이 난, 하지만 간만에 스승을 만나 역시 신이 난 제자. 둘 사이로 서로의 고민과 소소하지만 음악을 위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그 모습이 하도 훈훈하여 몇 장면 옮겨본다.
#1 지하 넌 빛이 났어 “생각해보면 지하는 다 잘했었어. 피리도 정통적으로 잘 불었고.” “저는 관현악 시간에 선생님 칭찬 듣고 그날 일기에 적었어요.” “사실 내가 음악적으로 안 되면 좀 가차 없었잖아.” “‘밝다 밝어! 우리의 미래들!’ 하시면서···.” “맞아. 그런데 너한테는 그때 빛이 났었어.”
#2 멍 때리던 지하 “내가 그때 밤에 갑자기 너희들한테 전화했었잖아.” “네, 그렇지 않아도 워멕스 갔다 와서 너무 큰일을 겪고 멍 때리고 있을 때였어요.” “밤에 책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너희들이 생각나는 거야. 얘네 지금이 중요한 때인데 하면서. 나 전화로 길게 통화하지 않는 거 알잖아. 무슨 감정인지 걱정이 되더라고. 뭔가를 확실하게 하고 다져야 하는 시기인데. 그래서 내가 보자고 했잖아. 너희들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고. 해외 시장에 몇 번 나간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야. 유럽권의 음악에서 듣고 싶어 하는 팀이 되어야 한다는 게 중요해.”
#3 선생님은 언제가 제일 힘든가요? “모든 것을 중단하고 조용히 없어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어. 난 사람의 운이라는 게 10년에 한 번씩 바뀌게 된다고 믿는다. 그 사이에는 대운과 소운으로 나눠져 5년에 주기가 한 번씩 바뀌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푸리나 바람곶 모두 5년째 전성기와 6년부터는 시들시들해졌던 것 같아. 그거 알아? 그 다음을 마련 못하면 바로 접어야 한다. 늘 그렇듯 인간 대 인간이 부딪히는 것이 제일 어려운 거 같아. 음악도 팀도.”
#4 지하야, 나도 가끔 힘들어 “지하야. 우리는, 피리는 서양음악의 역사와 달라. 그들은 1천 개의 곡이 든 ‘창고’가 있는데, 우리는 열 개도 안 되는, 그것도 ‘서랍’에서 꺼내야 하거든. 일천한 역사야. 지하야, 곡 쓰는 거 힘들지? 나도 힘들어. ‘그분’이 오셔야 할 때도 있거든. 그래도 내가 해방체가 되면 음악은 술술 나오게 된다. 그날을 위해!”
글 송현민 사진 박진호(studio BoB)
송현민은 공연예술계 전반에 관심이 많은 젊은 재담꾼이다. 2011 객석예술평론상을 통해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