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의 두 관찰자

월간객석 창간 30주년 인터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3월 1일 12:00 오전

창간 당시부터 ‘객석’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평론가, 박용구와 이상만을 만났다. 창간 준비과정에서부터
기억하는 두 관찰자는 서른 해를 지내온 ‘객석’의 미래를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창간 초기 편집인 평론가 이상만 선생
‘객석’은 ‘잡(雜)지’가 아니라 ‘본(本)지’이다

“선생님, ‘객석’ 창간 30주년입니다. 선생님이 계실 적 ‘객석’의 얼굴을 그려주십시오.”
창간 때부터 거대한 물결이 문화예술계를 관통하는 1980년대를 지나, 1991년까지 ‘객석’의 기획관리실장과 운영본부장 겸 이사, 편집인 겸 상무이사를 역임한 이상만 선생. 창간호에서 선생의 기억에 도움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 몇 부분을 복사했다. 노장은 돋보기를 들고 기록의 파편을 꼼꼼히 훑어본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적합한 인물일지는 모르겠지만···”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기록이 잇지 못한 길을 연결하는 선생의 기억들. 선생은 꼼꼼하게 기억을 엮으며 ‘객석’의 지난날을 회고했다. 노장은 앞으로 ‘객석’은 과거보다도 찬란한 미래를 가질 것이라며 힘을 잔뜩 실어주고 싶어 했다.

이상만이 직접 밝히는 ‘객석’의 태동
‘객석’ 창간 시 음악 잡지는 월간 ‘음악’밖에 없었어요. 금난새 씨의 아버지인 금수현 씨가 발행하던 거였죠. 그런 배경 속에 최원영 씨가 ‘객석’을 창간했습니다. 원래는 경영학을 공부했는데 서울대 대학원에서 플루트를 전공했죠. 그의 형 최원석 씨는 동아건설 사장이었고, 당시 동아건설이 세력을 넓히는 시기였어요. 동아건설 국외사업은 최원영 씨가 도맡았죠. 그 결과 리비아 대수로 사업도 성공적으로 따내고.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유산을 자식들한테 분배해주는 시기였어요. 최원영 씨에게도 어느 정도 분배가 되었고, 음악계를 위해서 새로운 사업을 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잡지부터 출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했죠. 당시 서울음대 이성재 선생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성재 선생이 작곡가 김성태 선생을 천거해서 최원영 씨의 후견인 비슷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문제는 당시 잡지 출판의 허가를 따내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당시 문화공보부에 출판과가 있었고 정기간행물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송지영 원장의 도움을 받았고, 중간에서 실무적인 진행은 당시 진흥원의 상임이사인, 지금은 충무아트홀 사장인 이종덕 씨의 역할이 컸어요. 그렇게 해서 주식회사 ‘예음’은 충무로에 자리 잡았습니다. 충무로에 ‘필하모니아’라는 감상실이 있었는데, 최원영 씨가 운영하던 곳이었죠.
일을 하다 보면 자기에게 맞는 실무진을 영입해야 하지 않나요? 먼저 동아그룹과 관계를 가졌던 정의용이라는 분, 문화방송 출신이죠. 감각과 추진력과 두뇌 회전이 굉장히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상임이사로 해서 실무적인 것은 그 양반이 주동했습니다. 편집장은 전영호라고, 우리나라 만화잡지계 베테랑이었죠. 편집국장, 즉 편집 책임자를 맡았고요. 저는 첫 호에 ‘한국의 서양음악 100년’을 기고하면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연재를 하던 도중 5월에 교섭이 왔어요. 나는 그때 KBS에서 강제해직을 당해 프리랜서 시절이었고,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되면서 조직위원회에서 제안이 왔었는데 ‘객석’에 몸담기로 했어요. 사실 그 사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잠시 근무를 했는데 감사 때, KBS에서 해직된 사람을 왜 여기서 데리고 있느냐는 지적에 좀 억울하고 화도 나서 한국 음악사 연구를 위해 좋은 글이나 ‘써야겠다 싶었죠’. 주식회사 예음은 ‘객석’을 발간하는 주체였고 그곳에 나는 기획관리실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후에는 ‘객석’의 운영본부장을 하면서 이사로 영입되었어요. 당시 가까이서 본 최원영 씨는 30대의 젊은 나이로, 의욕과 아이디어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지면을 넘어 새로운 지평으로 도약
‘객석’ 창간 후 동아일보사에서도 잡지를 해보겠다고 해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펴낸 게 ‘음악동아’예요. ‘객석’과 ‘음악동아’는 기사와 내용을 놓고 선의의 경쟁을 했죠. 두 잡지가 음악잡지를 넘어 출판계에서 무척 중요한 매체로서 성장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음이 중심이 되어 예음 클럽이라는 실내악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바이올린에 이택주·피아노 김용배·더블베이스에 안동혁 등이 참여했죠. 정기적인 연주회를 가졌는데, 순화동에 위치한 동아건설 별관 6층에 만든 조그마한 홀에서 했고, 예음 실내악 콩쿠르도 개최했습니다. 잡지의 경쟁자로 ‘음악동아’가 있었다면 실내악에서는 페스티벌앙상블이 있었습니다. 페스티벌앙상블은 당시 대농그룹 박용학 회장이 지원을 했는데 그분의 딸인 피아니스트 박은희 씨가 이끌던 단체였습니다.
1988년 5월에 서대문에 위치한 동서양빌딩에 예음홀이 개관합니다. 200여 석 규모였죠. 사실 1988년에는 예술의전당이 개관을 앞두고 있었기에 먼저 주목을 끌기 위해 앞당겨 개관한 겁니다. 빌딩 이름이 ‘동서양’이었기에 이를 잘 살려 예음 클럽의 정기연주회 외에 국악 공연도 많이 올렸습니다. 평상 같은 단을 고안해서 무대를 만들었고 나중에 이게 예음홀 국악공연만의 특색이 됩니다. 거기서 판소리 다섯 마당, 각종 유파의 산조를 올렸죠. 독창적인 기획력 덕분에 객석이 끊이지 않았고, 국내에 실내악 홀을 만드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봐요.
그 외에 ‘객석’은 플루티스트 제임스 골웨이(1985), 네빌 매리너와 피아니스트 알리시아 데 라로차(1986)의 내한 공연도 주최했습니다. 당시 헝가리와 수교가 없을 때였는데도 1988년에 예뇌 얀도를 기점으로 헝가리 피아니스트 초청 시리즈를 개최했고, 국내에 헝가리 음악 붐을 일으키기도 했죠. 뿐만 아니라 중공과 수교가 없던 시절에 피아니스트 인천종을 데려온 것도 ‘객석’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인천종은 정말 힘든 모험이었어요.

시대를 먼저 담아내고, 담아내야 한다
‘객석’은 최원영 씨의 굉장하고도 집요한 열정으로 만든 잡지였습니다. 디자인에도 많은 신경을 써서 제호 작업을 하는데 안상수 씨처럼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머리를 맞대기도 했죠. 그런 열정 끝에 1989년 즈음에는 ‘객석’ 잡지만으로도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지점에 올랐습니다. 당시 국내에 평론 기반이 약해서 음악·무용·연극평론가를 육성하기 위해 창간과 함께 ‘객석예술평론상’을 제정했고요. 기사의 폭도 넓고 다른 문화와의 여러 가지 접점을 통해 그야말로 예술종합잡지로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객석’의 출현은 일간지가 주도하던, 일명 ‘신문평론’뿐이던 평단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무엇보다 1988년 월북예술가들에 대한 해금 조치에 있어서 ‘객석’이 그간 진행해온 물밑 작업이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김순남과 같은. 무엇보다 당시 화제는 서울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었는데, 한국의 전통문화를 계·폐회식에 반영시킨다는 이론적 근거와 분위기를 ‘객석’이 주도해나가기도 했어요.
지금은 속도에 의지하다 보니 많은 것들이 단편적이고 찰나적인 사고에 결정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완하는 정보의 깊이와 문자 시대의 종이문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을 보완해주는 역할은 잡지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일본을 따라 ‘잡지(雜誌)’라고 번역했지만 ‘객석’은 이 시대 문화예술의 뿌리가 되는 ‘본(本)지’라 생각해요. 이 시대의 생각을 심화시키고 문화현상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하는 그런 책 말입니다.

공연예술 평단의 큰어른 박용구 선생
‘객석’은 새로운 르네상스를 여는 문

“선생님. ‘객석’이 30주년을 맞았습니다.”
“하··· 벌써 그렇게 됐나.”
지난 1월 1일, 신년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길에 ‘객석’의 나이를 말씀 드렸다. 우리 나이 101세에 이른 선생은 마치 당신의 삶의 30년을 더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녁이지만 시간대를 아침으로 바꿔 생각한다면 저 멀리의 일몰은 일출처럼 보였다.
“며칠 뒤에 다시 오게나. 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며칠 뒤, 일요일의 한적한 오후. 고목의 탁상을 앞에 두고 마주했다. 음악평론가로, 무용평론가로, 작가로, 예술행정가로 살아온 선생은 ‘객석’의 30년에는 자신의 삶의 중요한 30년이 묻어 있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손에 들린 종이에는 한글과 영어, 한문과 일본어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객석’을 위해 그린 선생의 지도.
“월간객석 30주년··· 이런 말로 시작을 했으면 좋겠어. 공간예술의 문은 ‘퍼블릭’의 형성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공간예술 월간지로서 ‘객석’은 그 문을 여는 역사적 사명을 지녀왔다(선생은 극장예술이라는 단어 대신 ‘공간예술’이라는 단어를 익숙하게 사용하였다).”

30세의 청년이 가져야 할 역사적 사명감
“나는 공간예술의 월간지로 ‘객석’하고 ‘공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객석’ 발간은 우리나라 문화사의 역사적 사건이었어. 비로소 싹을 틔우는 계기가 되었으니깐. 그때 우리나라는 군사정권에서 민주화의 싹이 틀 때였고, 그런 시기 속에서 예음이 생기면서 역사적 필연을 제대로 밟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선생은 ‘객석’이 발행되기 전부터 건축가 김수근이 1966년부터 발행해온 ‘공간’ 지의 주요 필자로 활동해왔다. 선생이 참여한 ‘공간’은 건축잡지에서 문화와 예술을 ‘건축’하는 잡지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런 선생의 여정을 보면 젊은 시절에는 여러 매체에 예술현장의 오늘을 기록하고 분석하는 데에 치중을 두었고, 이후 ‘박용구식 사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후반기에는 다가올 미래를 가늠하고 청사진을 그리는 데에 ‘객석’과 ‘공간’ 두 잡지를 십분 활용했다.
‘객석’의 초창기를 회고하는 선생의 기억은 저 멀리, 문화예술의 황금기였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올라갔다.
“지금의 세계 공간예술의 역사를 보면 어느 예술사나 문화사에서건 피렌체 르네상스를 꼽지. 그 문을 여는 역할에 메디치 가라는 해양 재벌이 있었고. 말하자면 예술에 투자를 해가지고 퍼블릭을 형성하는 데서부터 르네상스의 문이 열렸다고 볼 수 있지. 공간예술의 역사가 그렇게, 재벌들이 시작을 해서 예술에서 중요한 퍼블릭이 형성되었고. 거기서 오페라도 생기고, 공간예술이 생기기 시작했죠. 희랍에서 이어져온 문명을 메디치 가가 일군 토양이 흡수하여 그것을 토대로 서양문화예술과 문명이 싹트게 되었어. 마키아벨리와 같은 인재도 거기서 나오고. 500여 년 동안. 그 르네상스와 비슷한 과정을 ‘객석’이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주장한 ‘한반도 르네상스’의 길잡이로서. 그런 점에서 ‘객석’과 예음, 그리고 ‘공간’의 역사성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예요. 이제 ‘객석’은, 지금의 ‘객석’이라면 그런 역사성을 자각해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
선생은 ‘객석’이 지나온 30년을 묻는 청년에게 한반도의 미래를, 이것은 ‘한반도 르네상스’를 열 열쇠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문명을 아우르는 선생의 거시안은 ‘객석’이 챙겨야 할 ‘오늘’에 대해서도 틈틈이 논했다.
“이런 역사성과 함께 채산성(경제성)을 겸해야 한다고 봐요. 매체가 가진 경제력도 중요하다는 것을 부언하고 싶어. 경제성. 독자를 늘리고 광고가 붙고 채산이 맞도록. ‘객석’이나 ‘공간’이 그렇게 지속해올 수 있었던 것은 예음재단이라는 재벌가의 메커니즘으로 시작했고, ‘공간’도 건축으로 돈을 버는 문화재단이 있었기에 지속할 수 있었지.”
선생의 이야기는 피렌체의 르네상스와 서울의 ‘한반도 르네상스’를 오고 갔다.
“내가 ‘객석’에 쓴 글을 보면 총체예술에 대한 글이 있고, 1980년대 꿈틀거리던 때에 음악·무용·연극 등에서 중요한 토픽들을 건드렸어요. ‘한반도 르네상스’의 예술 양식, 나는 심포카(Sympoca)라고 했지만 그런 이름이 아니어도 새로운 21세기적인 종합예술과 그 양식이 창성되도록 유도해 나가는 것이 ‘객석’의 구체적인 임무이자 그 역사성을 위하는 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음이 시작을 해서 윤석화 대표를 거쳐, 3대 김기태 대표가 그런 역사성을 자각해서 ‘객석’이 ‘한반도 르네상스’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미 문은 열었지. 앞으로도 ‘객석’은 한반도 르네상스의 길잡이가 된다는 자부심도 갖고, 그 역사적 사명에 의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야기의 끈을 잠시 내려놓고 101년이 된 선생의 손이 30년 된 청년 ‘객석’의 겉표지를 손으로 쓰윽 더듬는다. 창밖으로는 노을이 지고 있다. 그런데 저 붉은 석양은 붉게 타오는 일출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2011 객석예술평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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