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트 피아프

장밋빛 인생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샹송의 여왕’ ‘노래하는 작은 참새’라고 칭해지며, 20세기 프랑스 대중음악의 절대적인 위상을 높이고 샹송의 세계화를 이끌었던 에디트 피아프의 삶과 음악의 드라마를 살펴본다

2012년 12월, 세종문화회관에서 행해졌던 프랑스의 국민가수 파트리시아 카스의 내한 공연에 한국 측 제작감독으로 참여했다. 공연의 주제는 ‘파트리시아 카스, 에디트 피아프를 노래하다’였다. 이날 공연의 피날레는 파트리시아 카스를 포함한 전 출연진과 스태프 모두가 에디트 피아프를 향한 레지스탕스식 거수경례를 올리는 것으로 맺었다. 통역을 통해 질문을 했다. 에디트 피아프는 프랑스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들은 ‘정신’ ‘심장’ ‘영혼’ ‘자부심’ ‘신화’ ‘전설’ 등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파트리시아 카스는 “에디트 피아프와의 비교는 영광이 아니라 그녀의 위대함에 대한 결례”라고 비장하게 답했다.

노래하는 작은 참새

에디트 피아프의 본명은 에디트 조반나 가시옹이었다. 1915년 12월 19일 파리의 빈민가에서 태어났을 때, 프랑스인 아버지는 거리의 곡예사였으며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혼혈이었던 어머니는 거리의 가수였다. 그녀의 부모는 갓 태어난 딸의 육아를 책임질 수 없었다. 에디트 피아프는 태어나자마 외할머니에게 맡겨졌고, 몇 년 뒤에는 노르망디에서 매춘업에 몸담고 있던 친할머니에게 위탁되었다. 부모의 무관심과 세계대전으로 인한 빈곤한 시대에서 성장한 에디트 피아프는 영양실조로 성인이 돼서도 142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왜소한 체구를 지녀야만 했고, 심각한 각막염으로 시력을 잃어버릴 뻔도 했다.

에디트 피아프가 열네 살 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곡예단에 어린 딸을 데리고 와 잡일을 시키며, 프랑스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에디트 피아프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도왔고, 1년 뒤에는 아버지와 결별하여 홀로 거리에서 노래하며 독립적인 생활을 했다. 열일곱의 나이에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첫 번째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는 뇌수막염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만다. 에디트 피아프의 유년의 기억은 온통 어둠과 고통뿐이었다.

에디트 피아프에게 은인이 나타난 것은 그녀가 스무 살 무렵이었다. 방랑의 시·공간에서 노래했던 에디트의 숨겨진 재능을 찾아준 이는 파리에서 제니스라는 카바레를 경영하던 루이 르플레였다. 그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마성으로 청중을 사로잡는 소녀에게 프랑스어로 ‘참새’를 뜻하는 ‘피아프’라는 애칭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녀의 여린 체구를 더욱 부각되게 하는 검은색의 무대의상만을 입게 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작은 참새’라는 뜻의 ‘라 몸 피아프’라고 불렀다. 루이 르플레가 매니저를 맡은 2년여 동안 에디트 피아프의 음악은 급속도로 프랑스인들의 가슴속으로 전파되었다. 에디트 피아프의 초기 히트곡이었던 ‘종의 아이들(Les Mômes de la Clôche)’ ‘나의 외인부대 병사(Mon légionnaire)’ 등은 루이 레플레의 조력하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1936년 4월, 에디트 피아프의 공연에 연관되어 있던 폭력 조직이 루이 레플레를 권총으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에디트 피아프는 이 사건의 관련설에 언급되면서 그녀 또한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녀의 음악은 다시 거리로 버려졌다.

1930~1950년대를 풍미했던 프랑스의 시인·소설가·작사가, 그리고 훗날 가수로도 활동했던 레몽 아소는 실의에 빠진 에디트 피아프를 구원해준 두 번째 은인이었다. 그녀의 이름 ‘에디트’에 ‘피아프’라는 예명을 더해 ‘에디트 피아프’라는 온전한 이름을 안겨준 레몽 아소는 그녀를 위한 작사를 바쳤다. 에디트 피아프는 레몽 아소의 후원에 힘입어 다시 메인스트림 무대에 복귀, 새로운 성공을 질주할 수 있었다. 레몽 아소는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던 에디트 피아프에게 발성법과 악보를 보는 방법, 무대 매너뿐만 아니라 지성인으로 지녀야 할 교양과 문학, 인생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자신과 결연을 맺은 문화계 인사들에게 에디트 피아프를 소개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 현대문학의 대표 시인·소설가·극작가·화가·영화감독으로 활약했던 장 콕토와 당대의 배우이자 가수였던 모리스 슈발리에였다. 장 콕토는 레몽 아소의 권유로 에디트 피아프를 처음 만났던 ABC 음악홀에서의 감회를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피가로’에 기고했다.

“에디트 피아프는 재능이 넘친다. 그녀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여가수다. 피아프 이전에 피아프는 없었고, 피아프 이후에도 피아프는 없을 것이다.”

장 콕토는 오직 에디트 피아프를 위해 만든 희곡 ‘냉담한 미남(Le Bel Indifférent)’을 선물했고, 이로 인해 에디트 피아프의 음악은 프랑스의 지식인, 문화예술계에서 찬미하는 예술의 영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장 콕토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예술적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벗으로 자리했다.


▲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탕 ⓒStudio Lipnitzki Paris

운명적인 사랑 이후의 ‘사랑의 찬가’

레몽 아소·장 콕토·모리스 슈발리에의 후원 속에 에디트 피아프는 서른이 되기 전에 프랑스의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에게 쏟아졌던 뜨거운 조명과 찬사만큼이나 사랑의 추억들도 함께했다. 여기에는 훗날 프랑스의 대표 배우이자 가수로 유명세를 떨치게 될 이브 몽탕도 있었다. 1944년, 파리의 물랭루주 클럽에서 만났던 여섯 살 연하의 청년에게 매료되었고, 둘은 금세 사랑에 빠졌다. 에디트 피아프는 그의 후원자이자 매니저로 나서게 되었다. 에디트 피아프의 히트곡 중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은 이브 몽탕과의 열애 기간 동안의 감흥을 담아 에디트 피아프가 15분 만에 작사한 것으로 세기의 명곡이 되었다. 그러나 ‘장밋빛 인생’은 오래가지 못했다. 에디트 피아프의 후원에 힘입어 이내 프랑스의 프랭크 시나트라가 되고, 청춘스타로 은막과 무대를 점령했던 이브 몽탕은 에디트 피아프의 순정을 배신했다. 여배우·가수와의 스캔들이 연이어 터졌고, 에디트 피아프는 이브 몽탕의 폭력에 의해 얼굴에 멍이 든 채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에디트 피아프는 이브 몽탕과 이별을 선언한 후, 1946년 파리의 에투알 극장에서 자신이 발굴한 아홉 명의 남성으로 구성된 ‘샹송의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1947년 10월, 에디트 피아프와 샹송의 친구들은 브로드웨이의 플레이하우스에서 미국 데뷔 무대를 가졌다. 미국에서의 첫 번째 공연은 예상외로 흥행과 비평 모두 저조한 기록을 남겼지만, 1948년 1월, 브로드웨이의 베르사유 극장에서 열린 공연은 관객들의 기립 박수로 마감되었다.

미국에서의 활동 기간 중 에디트 피아프에게는 운명적인 사랑이 함께했다. 프랑스의 세계 미들급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과의 염문이었다. 기혼자로 세 아이의 아버지였던 마르셀이었지만, 둘은 미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은밀한 사랑을 지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불운으로 종결되었다. 1949년 10월 28일, 마르셀은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파리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고, 그를 태운 비행기가 추락 사고로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숱한 사랑이 있었지만, 진정한 사랑은 마르셀 세르당과의 만남뿐이었다고 자서전을 통해 회고했던 에디트 피아프는 사랑을 잃은 슬픔을 노랫말에 담았다. 그 비통한 심경의 노래가 ‘사랑의 찬가(Hymne à l´amour)’였다. 에디트 피아프는 연인 마르셀 세르당을 떠나보낸 슬픔을 달래기 위해 술과 마약에 의지했다.

사랑과 이별의 반복,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마르셀 세르당를 보낸 후 에디트 피아프는 1952년 9월 15일, 생애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자크 필스와의 단란한 신혼의 꿈도 4년 만에 멈추었다. 프랑스의 가수이자 배우·외교관이었던 샤를 아즈나부르와의 사랑, 그녀의 음악의 열정적 지지자였던 가수 조르주 무스타키와의 사랑도 잠시뿐이었다. 번번이 사랑의 상처를 술과 마약으로 씻고자 했던 에디트 피아프의 불행에 생사를 넘나드는 교통사고가 더해졌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생긴 모르핀 중독은 그녀의 삶을 더욱 어두운 수렁으로 몰고 갔다. 슬픔과 불행이 더해질수록 그녀의 음악은 더욱 깊이를 더했다. ‘파리의 기사(Le Chevalier de Paris)’ ‘파담 파담(Padam, Padam)’ ‘파리의 하늘 아래(Sous Le Ciel de Paris)’ ‘아코디언 연주자(L´Accordéoniste)’ ‘군중(La Foule)’ 등 히트곡이 계속 쏟아져 나왔고, 프랑스의 대중가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카네기홀에서의 공연이 1956년에 성사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과 예술의 모든 것을 담은 22곡을 노래했고, 관객들의 기립 박수는 7분간 계속되었다. 이듬해 카네기홀에서는 다시 한 번 에디트 피아프와 미국 청중의 교감이 재현되었다.

두 번의 카네기홀 공연과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공연 뒤에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 ‘나의 하느님(Mon Dieu)’ 같은 후기의 대표곡들은 한층 성숙한 음악 세계를 보여주었다. 1962년 10월에는 자신보다 스물한 살 아래인 테오 사라포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숱한 화제와 논란을 낳았던 그녀는 마지막 사랑조차도 1년을 채우지 못했다. 1963년 3월 21일 릴 오페라에서의 무대는 에디트 피아프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에디트 피아프는 건강 악화로 남부 프랑스의 별장에서 요양을 하다가 1963년 10월 11일, 파란만장했던 47년의 삶을 마감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에디트 피아프는 성당에서의 장례를 희망했지만, 그녀의 이혼 경력과 복잡했던 연애사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파리의 페르 라세스 묘지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프랑스인이 그녀의 삶과 음악을 애도했다. 에디트 피아프는 생전에 400여 곡의 노래와 80여 곡의 노랫말을 남겼다. 그녀의 음악은 고단했던 삶의 생채기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실존의 이야기, 진솔한 예술이었다. 그녀를 통해 프랑스의 ‘샹송’은 세계인의 것이 되었고, 미국의 팝 음악에서도 에디트 피아프류의 창법은 장르나 스타일과 무관하게 여성 가수의 고유한 덕목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혼신을 다해 노래하고 노래에 영혼과 감정을 무한히 실어 나른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는 음악 이상의 문학이 되었고,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되었다. 그래서 영국의 음악 작가인 루시 오브라이언은 에디트 피아프의 위상을 잔 다르크와 동렬에서 평가하기도 했다.

글 하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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