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전파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불안의 시대가 그린 불운의 연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2월 1일 12:00 오전


▲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1916년작)

방향성이 불분명하며 획일적인 지금 세상에서 우리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찾아줄 이는 과연 누구인가.

2013년 연초, 불확실의 시대는 지속된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경기 침체 속에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ㆍ경제적 혼란을 겪는 국가가 적지 않다. 전문가들의 빗나간 전망과 정치인들의 허망한 구호 속에 역사의 진전은 멈춘 듯 보인다. SNSㆍ소셜미디어 등 정보화 세상을 이룩해낸 온갖 디지털의 이기(利器)들은 부메랑이 되어 사회를 병들어가게 하고 있다. 정보의 잡탕 속에 대중에게 혼란의 멍에를 덧씌운다. 그 틈바구니에서 문화는 대중소비의 공감대를 좇다가 사회적 존재감을 서서히 잃어간다. 냉소주의의 무거운 안개에 짓눌린 각박한 삶만이 팽만하다. 그래서 즉흥적 만족이 – 그것이 유튜브 조회수 일 억의 축복을 받을지언정 – 예술적 감동을 밀어낸 지 오래다. 그렇다고 옛 통기타 음악과 아날로그 시절로의 회귀가 대안이 될 수는 없는 현실에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마치 세기말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불안과 불확실성에 둘러싸인 요즘이다.
공교롭게도 약 150년 전 이 시대와 비슷한 빛깔의 자괴감에 빠진 예술인들이 있었다.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 혁명적 소용돌이에 빠졌던 18세기 말 영국, 물질적 해방구는 있어도 정신적 탈출구가 없던 이 시기에 ‘풍요 속의 빈곤’을 표현하는 예술인들이 있었으니, 바로 ‘라파엘 전(前)파(Pre-Raphaelite Brotherhood)’다.
라파엘 전파가 탄생한 시기의 런던은 산업혁명의 용광로 속에서 봉건주의와 전원적ㆍ종교적 신념이 녹아버리고 도시화ㆍ근대화ㆍ자본주의가 새로운 이상사회를 주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휘황찬란한 런던은 급격한 발전 속 노동착취ㆍ오염ㆍ전염병ㆍ매춘이 성행하는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몸살을 이기지 못한 약자들은 조용히 죽어갔다.
화려함의 그늘 속 라파엘 전파는 1848년 비밀 창립되었다. 그들은 모든 작품에 PRB라는 이니셜을 넣었다. 이 전파를 이끈 세 명의 화가는 윌리엄 홀만 헌트(1827~1910),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1828~1882), 존 에버렛 밀레(1829~1896)였고, 이들은 산업화에 억눌려 고통받는 런던의 소외된 계층에 눈을 돌리며 윤리적 메시지가 담긴 그림에 천착한다. 그들은 르네상스 때부터 발전된 예술적 문법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하며 철저히 근본적인 가치 및 현실주의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래서 라파엘 전파는 중세기의 판화를 참고했고, 자신의 주변인들을 모델로 삼아서 그렸다. 또 산업화 전의 아름다움을 주창하고자 자연으로의 회귀를 강조했다. 기존의 시스템을 근본부터 바꿔놓은 산업혁명을 ‘디지털’에 비견하자면, 라파엘 전파야말로 변혁기인 빅토리아 시대에 있어 ‘디지털 속 아날로그’를 주장하는 화파였던 셈이다.

라파엘 전파와 동시대를 산 바그너
연초 런던에서는 이들의 작품을 다룬 기획전 ‘라파엘 전파: 빅토리아 시대의 아방가르드(Pre-Raphaelites: Victorian Avant-Garde)’ 전이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영국 미술을 보여주는 대표 미술관. 테이트 모던의 모태)에서 열렸다. 라파엘 전파가 빚은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에 대한 현대인의 공감을 방증이라도 하듯 신년 초부터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필자는 문득 어떤 의미에서 잊히고 있던 사조가 이제 다시 지금 세대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런 의문을 품게 된 즈음, 올해가 독일 음악가 바그너(1813~1883)의 탄생 200주년이라는 사실이 그 호기심을 증폭해주는 기폭제가 됐다.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바그너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 행사들이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했고, 영국의 주요 일간지인 ‘가디언’ 지는 크리스마스 전후로 바그너의 대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알리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기존 음악언어를 거부하며 종교적 신비주의와 탐미적 심미주의를 표방한 바그너. 그는 라파엘 전파와 동시대의 예술가로 활동했고, 음악과 미술로 둘은 각각 지향하는 콘텐츠가 달랐지만 그 경계를 뛰어넘은 특별한 상징적 매개체를 공유했다. 필자가 발견해낸 그 연결고리는 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다. 바그너가 1865년에 발표한 오페라로서, 1857년부터 1859년까지 작곡, 1865년 뮌헨에서 초연됐다.
바그너는 독일에서의 초연 이후 17년이 흐른 뒤인 1882년에 처음으로 자신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에게 선보였다. 우연인지 몰라도 라파엘 전파 또한 같은 시기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를 작품의 테마로 잡았다. 거센 사회 변혁의 시기에 맞서 그들의 사상을 승화시키려 했던 작품이 공통 분모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바그너에 이르러 오페라로 탄생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베르디 ‘아이다’,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함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이야기로 켄트 지역에서 5세기부터 화자되어왔다. 12세기 프랑스에서 ‘트리스탕과 이죄(Iseut)’라는 제목의 문학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을 시작으로 이후 19세기까지 서양예술 전반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활용되었다. 콘웰의 왕 마르크의 조카인 기사 트리스탄이 아일랜드 공주 이졸데를 왕의 신부로 데려가다가 두 사람이 묘약을 마시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라파엘 전파는 당시 유럽미술계에서 최고선으로 받아들여졌던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이상적인 화풍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이전의 사실주의에 근간한 미술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라파엘 전파의 2세대라고 볼 수 있는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1849
~1917)는 로세티의 프로테제로서 라파엘 전파 화파의 상징적인 작품 특성을 집대성해 가장 잘 보여주는 화가로 손꼽힌다. 그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실재하는 주변 인물을 모델로 삼아 중세 역사를 충실하게 그린다는 라파엘 전파의 특성을 따랐다. 화풍은 지극히 고전적으로 보이는 한편 화려한 색감으로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 폭의 화폭에서 고전과 현대적 사실성이 상충한다. 이 때문에 라파엘 전파는 영국 최초의 현대미술(Modern Art)로도 불려진다.
자연을 중시하는 그들의 가치에 부합할 수 있도록 인상파보다 먼저 야외에서 그림을 스케치했던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교외로 나가 펼쳐져 있는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이른 새벽부터 땅거미가 엄습하는 저녁까지 배경을 세밀하게 그린 다음 스튜디오로 돌아와 인물을 채워넣었다.
라파엘 전파가 즐겨 그리던 테마는 인간의 심리극을 보여줄 수 있는 소재들이었다. 따라서 결혼ㆍ청혼ㆍ배반ㆍ죽음ㆍ깨달음 등 지극히 극적인 순간에 드러나는 인간의 감정을 포착해 화폭에 담기를 원했다. 이 그림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잔에 담긴 사랑의 묘약을 마시기 직전의 상황을 포착했듯이 강한 상징물을 그림 안에 집약하는 장기도 특색이다. 이졸데 뒤에 있는 왕좌처럼 보이는 의자는 왕과 결혼해야 하는 이졸데의 아이러니컬한 운명을 상징하고, 중간 부분에 위치한 컵과 갈라진 바닥은 둘을 가르는 넘지 못하는 선을 의미한다. 이 장면에서 사랑의 묘약을 먹는 트리스탄의 왼쪽 발이 갈라진 나무 바닥에서 이졸데 쪽으로 이미 넘어가 있는데, 묘약을 먹는 순간 둘 사이의 선을 넘게 됐음을 암시한다.
당시로서는 아방가르드 성향을 추구한 바그너처럼, 라파엘 전파 역시 동시대 만연한 이상적인 미술 풍토를 거부하고 전위적이며 현실적인 미술을 추구했다. 그 도전에 지독한 혹평도 있었다. 한 세기 반이 흐른 지금, 그들이 빚어낸 아방가르드한 예술은 다시 고전이 되어 현 세대에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자신감이 넘쳤던 바그너 역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을 앞두고 ‘자신의 이졸데’였던 마틸데(후원자인 베젠동크의 부인)에게 대중의 반응을 반신반의하는 편지를 썼다. 어쩌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빠져 있던 바그너는 트리스탄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 위로 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했던 작품으로 불안해했지만, 이제는 어느 작곡가보다 많은 열혈 추종자들을 잉태시킨 바그너.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은 또 어떻게 재조명될까. 바그너의 민족주의적이며 심미적이었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라파엘 전파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림들. 둘은 분명 각각 음악과 미술로 분야도 달랐고, 국가적ㆍ정치적ㆍ사회적 역사 배경도 다소 달랐지만, 그들이 선택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분명 혁명을 갈구하며 새로운 방향점을 제안하고자 하는 상징적인 모티브였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현재를 보자. 방향성이 불분명하며 획일적인 지금 세상에서 우리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찾아줄 이는 과연 누구인가.

라파엘 전파가 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

에드워드 레이턴 1902년 작 
에드워드 레이턴은 라파엘 전파와 깊은 연관이 있는 작가로 화풍이 비슷한데 로맨티시즘 요소가 더 크다. 사랑에 빠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모습을 왕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 앞으로 다가올 비극의 복선 역할을 한다. 그림의 배경에는 빅토리아 시대에 전 세계 각국 식민지에서 온 이국적인 물건들이 가득하다. 오리엔탈 카펫, 북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에보니(검은 나무)와 상아로 장식된 하프, 문직 실크 등 빅토리아 시대에 오리엔탈리즘에 심취했던 귀족들이 집에 전시했었던 물건을 등장시킴으로써 사실주의에 충실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67년 작 
트리스탄이 사랑의 묘약에 손을 내밀며 자신의 운명에 입맞춤을 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면. 오른쪽 위의 천사가 중세종교화에서 나올 법한 고전적 형태인 것이 눈에 띈다. 고전적 가치를 추구하는 라파엘 전파의 화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요소다. 이졸데의 머리 장식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로세티는 길고 붉은 머리에 하얀 얼굴의 모델을 자주 그렸다. 미술공예운동(Art and Craft Movement)을 이끌었던 윌리엄 모리스의 부인 제인 모리스를 모델로 삼아 그린 것이었다. 로세티는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에게 연정을 품었고 둘은 선을 넘었다. 바그너도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제작할 때 자신의 후원자인 베젠동크의 아내 마틸데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결국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에 투영해 예술혼을 불살랐다.

글 김승민(이스카이 컨템퍼러리 아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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