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통영국제음악제 셋째 날인 3월 24일 저녁. 어둑어둑해진 포구 안을 둘러싼 가게들의 네온사인이 하나 둘씩 켜지고, 검은 물결에 흔들리는 불빛을 뒤로한 채 통영시민문화회관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주차장에는 막 도착한 듯한 승합차가 중년의 무리를 쏟아내는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또 다른 승합차에서 우르르 내리는 인파 사이에서는 교회에서 차를 빌려 다 같이 공연을 보러왔다는 고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많은 인원이 모였음에도 대극장 로비는 차분한 분위기였다. 객석에 들어서니, 중·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청소년부터 전공생으로 추정되는 젊은이들, 나이 지긋한 노신사까지 곳곳에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올해 처음으로 통영국제음악제에 초대된 빈프리트 톨과 대전시립합창단은 이번 음악제에 참여한 유일한 합창단이었다. 2007년부터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대전시립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빈프리트 톨은 유럽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앙상블·합창단의 객원지휘자로 활동해왔으며, 헬무트 릴링과 볼프강 샤퍼에 이어 2004년부터 프랑크푸르트 칸토라이의 지휘를 맡고 있다. 1997년부터 프랑크푸르트 음대 합창지휘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지휘뿐 아니라 작곡가로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중이다.
이번 공연에서 빈프리트 톨과 대전시립합창단은 바흐 모테트 BWV227 ‘예수 나의 기쁨’(1723)을 첫 곡으로 시작해 부헨베르크 ‘55 천사가 보호하니’(2008) ‘주 안에 있으면 자유가 있고’(2001)를 선보였다. 특히 곡에 따라 합창단 대형을 바꿔가며 최선의 음향을 이끌어내는 모습을 보였는데, 단원들이 무대 중앙을 감싸는 반원 형태로 서서 부른 부헨베르크 ‘주 안에 있으면 자유가 있고’는 곡 자체가 지닌 배음을 잘 살려냈을 뿐 아니라 ‘대극장 음향이 이렇게 좋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운 소리를 안겨주었다.
이후 윤이상의 ‘오 빛이여’(1981)가 이어졌다. 그간 국내에서 듣기 어려웠던 이 작품은 이번에 통영국제음악제가 대전시립합창단에게 위촉했다. 여러 타악기와 바이올린이 등장하는 무대에는 지난해 윤이상콩쿠르 입상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가 함께 올랐다. 바이올린과 합창단이 벌이는 정반합의 대화 속에 마침내 “오 빛이여, 우리는 그대에게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라는 외침은 듣는 이들을 번뇌에서 해탈에 다다르게 했다. 한껏 깊어진 무게감을 대전시립합창단은 도브의 ‘회상’으로 가볍게 덜어냈다. 영국 시인들의 작품을 텍스트로 차용한 이 작품은 활기찬 리듬으로 광활한 대자연의 풍광을 관객에게 선사했다. 공연의 모든 순서가 끝나자, 발끝부터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느낌이 밀려들었다. 이를테면 성당에 갔다가 사찰에 들린 뒤, 드넓은 들판에서 한껏 바람을 쐬고 돌아온 기분이랄까. 그날 음악이 전해준 것은 힐링 혹은 위로의 힘을 지닌 그 무엇이었다.
이튿날 아침, 독일로 출국을 앞둔 빈프리트 톨을 만났다. 오랜 시간 음악 속에 담긴 신비한 선물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온 그는, “인간 본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순수한 음악을 한국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다”라고 이야기했다.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다양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레퍼토리는 어떻게 구성했나.
여러 관점이 담긴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 크게는 통영국제음악제가 위촉한 윤이상의 작품을 중심에 두고 레퍼토리를 구성했다. 쇤베르크가 있던 빈 악파의 계보를 따르고 있는 ‘오 빛이여’는 가사를 연극적으로 표현하는 음악적인 시도에 극적이면서도 현실주의에 입각한, 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느낌의 곡이다. 윤이상의 곡 이후엔 관객이 다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지를 주기 위해 도브의 곡을 택했다. 듣기엔 좋고 쉬워 보이지만, 구조적으로 복잡하면서도 잘 쓰인 곡이다. 19세기에 음렬주의와 무조음악에서 벗어나 울림과 소리에 관심을 가진 부헨베르크도 주목했다.
바흐 모테트를 첫 곡으로 둔 이유는 단순히 시대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인가.
윤이상의 곡은 불교의 기도문을 텍스트로 두고, 기도하는 듯한 운율을 곡으로 표현했다. 그보다 앞선 바로크 시대엔 바흐가 기도하는 느낌을 모테트 BWV227 ‘예수 나의 기쁨’에서 보여줬다. 근대주의 작곡 기법에 입각한 표현과 바로크 시대 작곡 표현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들의 작품에는 가사를 일반적인 말하기와 비슷하게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공통으로 등장한다. 또 현대 작곡가인 부헨베르크 ‘주 안에 있으면 자유가 있고’의 가사는 중세 고어 독일어다. 여기에서도 가사의 표현을 극대화시키는 부분이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가사의 표현에 무게를 둔 작품들로 구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과거에 윤이상의 작품을 공연한 적이 있나? 이번에 ‘오 빛이여’를 해석하며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윤이상의 작품을 공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예전에 동료 교수였던 박영희가 윤이상의 작품 몇 곡을 가져와 서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오 빛이여’를 처음 봤다. 당시에 이렇게 극단적이고 무거운 곡을 할 수 있는 합창단이 과연 있을까 생각했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윤이상의 텍스트 자체가 매우 두터운 것에 의구심을 가졌다. 더불어 포르티시시모를 쓰다가 갑자기 피아니시시모를 쓰는 극단적이고 대조적인 부분이 많은데, 그러다 바이올린과 합창단이 대화하는 듯, 또 타악기와 소리를 주고받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소리 가운데 존재하는 감각적인 고요함의 대조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연 중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단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모니터링 할 수 없었는지 밸런스가 조금 흐트러진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바로크 시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다. 특별히 선호하는 작곡가와 작품은 무엇인가.
먼저 바흐를 꼽고 싶다. 모두가 말하듯 바흐는 음악의 시작이자 끝이고, 음악의 아버지이다. 그의 음악은 항상 신비롭게 느껴진다. 헨델도 좋아한다. 자신의 신앙을 음악으로 표현한 바흐와 달리, 헨델은 인간 내면을 묘사한 작품이 많고 음정이나 텍스트를 과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표현해서다. 바그너·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무조 시대 이전의 조성음악도 좋아한다. 만약 내가 무인도에 갈 때 가져갈 수 있는 음악 세 가지를 고른다면 바흐의 작품들, 말러 교향곡 9번, 바그너 ‘파르지팔’ 혹은 푸치니 ‘라 보엠’을 꼽겠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전공하기에 앞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계획된 순서에 의한 과정이었나.
의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지휘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학교에서 음악을 배우던 중 문득,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다 보니 다시 음악이 좋아졌고, 작곡도 공부하게 됐다. 그때 같이 성악을 배웠고, 이후 자연스레 합창 지휘를 하게 됐다. 보통 음악을 깊게 파고드는 사람들이 나중에 공부하는 것 중 하나가 철학이다. 음악을 계속 연구하면서, 그 안에 담겨진 신비와 작곡가의 의도를 깊이 알고 또 세상을 열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철학을 공부하는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그동안 지나온 과정이 많은 유익을 주고 있다.
신의 존재를 믿는가? 평소 어느 때 신의 존재를 떠올리나.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나 ‘B단조 미사’를 분석하고 연주할 때, 그 신비스러운 구조들을 발견하고 느낄 때다. 괴테는 ‘이름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바흐의 작품들에서 신의 존재를 느낀다. 더불어 조금이나마 그 음악적 신비를 열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고 항상 겸손하려고 노력한다.
합창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선 테크닉이다. 합창하는 사람을 하나의 악기로 생각할 때, 그가 어떤 소리와 울림을 가지고 하나의 소리를 만들 수 있는지, 특정 부분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두고 훈련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특히 표현에서 작곡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음정을 만들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한 파트를 구성하는 각 사람들의 소리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하나의 곡을 어떻게 완성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이 모든 부분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합창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2007년부터 대전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간 대전시립합창단에 레퍼토리와 하모니가 상당히 달라졌는데, 지휘자가 느끼는 합창단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합창단의 소리가 달라졌다.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합창단은 큰 소리를 잘 낸다. 특히 베이스의 무겁고 깊은 소리, 소프라노의 강렬하고 큰 소리는 간혹 독일 합창단들이 부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한국 합창단원들이 학생 시절, 유명 오페라 가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음악을 배워 그러한 소리를 갖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합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앙상블이다. 자신의 소리를 깎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가 돼야 한다. 독일 내 여러 합창단들이 여기에 중점을 두고 연습한다. 앙상블 면에서 대전시립합창단은 상당히 발전했고, 유럽에 있는 합창단들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대전시립합창단이 더 발전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면.
대전시립합창단과 지난 2010년 헨델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을 녹음했고 올해 초 프랑크 마르탱의 ‘두 개의 합창을 위한 미사’가 담긴 두 번째 음반을 냈다. 레코딩 작업은 합창단이 지금 어느 위치에 와 있는지를 파악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번 음반을 통해 대전시립합창단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왔음을 확인했다. 앞으로 음악적 표현과 구조에 유연하면서도 지능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유연성이 더 필요하다. 이 목표는 어느 합창단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기연주회나 음반 레퍼토리를 보면 국내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곡들이 상당하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독일의 전통적인 합창 음악과 유럽의 합창 음악을 통해 음악의 순수성을 소개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고요한 섬에서 인간 본연에 관해 귀 기울일 수 있는 음악과 마주하길 바랐다. 재임 초기에는 레퍼토리를 두고 너무 어렵다는 내부 의견도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음악 그 자체를 느끼게 되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은 서로 주고받으며 공유하는 것이니 말이다. 아이스크림 같은 엔터테인먼트 음악에서 조금 떨어져 마음과 생각을 활짝 연다면, 우리가 전하는 음악이 결코 어렵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순수한 음악 그 자체를 전하고 싶다. 대전을 비롯해 다른 도시에서도 그런 기회들이 점차 쌓이면서 우리의 음악에 관심을 갖고 소통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요즘에도 작곡을 계속하고 있나.
지금은 클라리넷 협주곡을 작곡하고 있다. 평소에는 일정이 바빠 여름에만 조금씩 곡을 쓰고 있다.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의 주제는 ‘자유와 고독’이다. 어느 때 자유와 고독을 느끼는가.
자유와 고독은 항상 함께한다고 생각한다. 등산을 즐기는 편인데, 산 정상에 올라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면서 자유를 느낀다. 동시에 그 광활한 자연 안에 홀로 서 있음에 고독을 느낀다. 낭만주의 시대 프리드리히의 그림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내 깊은 고독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 앞서 합창에서 중요한 것으로 테크닉과 앙상블을 말했는데, 그중 어느 하나만 신경을 쓰면 다른 것을 놓치기 쉽다. 내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음을 깨달을 때 고독이 엄습하지만, 또 그 안에서 자유롭게 탐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모든 음악가는 자유과 고독을 늘 함께 느끼지 않을까.
글 김선영 기자(sykim@) 사진 통영국제음악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