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 없는 21세기 피아니스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6월 1일 12:00 오전

평소 좋아하고 스스로 따르고자 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피아노를 믿어라”이다. 한 분야, 그중에서도 악기를 가지고 씨름해본 분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바, 여러 가지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 필자의 경우는 연습과 그에 따른 전반적인 노력에 관한 것이다. 즉 지금 당장 만나게 되는 연주에서 오늘 내가 땀 흘린 것을 그대로 보상받을 수는 없을지 모르나, 피아노 연습은 은행에 돈을 예금해놓는 원리와 비슷한 것이라서 언젠가 (혹은 내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 땀과 정성이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혼자 그럴 듯한 ‘격언’을 만들어놓고 뿌듯해 있는 사이, 그동안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필자의 신조에 의문과 부정적인 의견을 달아주었다. 특히 선생님들과 선배들의 이야기들은 사뭇 불안하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난 평생 피아노에 속아 살았다”라든지, “내 피아노는 언제 예금 만기가 되느냐” 식의 이야기다. 정작 말을 만들어낸 사람도 그 믿음에 대한 증거를 제대로 받은 적은 없다. 어쩌면 적당히 게으른 스타일의 피아니스트인 필자는 예금은 조금만 해놓고 매일 은행에 찾아가 이자를 더 올려달라고 떼를 쓰는 진상고객인지도 모르겠다.
언제 내 노력의 결과가 조금이라도 나타날지, 아니면 평생 만족스런 답을 얻지 못하고 연주자의 생활을 마칠지 불확실하지만, 필자가 거는 희망은 이 거대한 악기가 내게, 그리고 청중에게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존재라는 확신에 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여든여덟 개의 폭으로 넓힌 지도 불과 150여 년 남짓이다. 그간 수많은 이들이 건반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허다한 결과가 화려하게 쏟아져 나왔지만, 아직도 피아노가 청중에게 들려줄 주옥 같은 스토리는 그 거대한 삼각형 나무 박스 안에 무한대로 숨어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게 궁금한 이들이라면 목숨 걸고 그 안에 들어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세기가 바뀌고 모든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 이 악기와 전에는 시도되지 않았던 창조적인 ‘수다’를 호기롭게 떨어보려는 젊은이들이 많이 등장한 건 참으로 반갑고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함께 나눌 수 있었던 것도 내게 큰 행운이었다. 늘 익숙한 음악 분야에서 세계를 빛내고 있는 대한민국 젊은 피의 뜨거운 모습들이나, 결코 불가능하리라 여겨지던 체육 분야의 특정 종목들에서 태극기를 가장 높은 곳에 날리는 놀라운 일들 중 어느 쪽이 더 큰 사건인지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그들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온전히 즐긴다. 스스로 ‘이건 내가 좋아서, 그래서 온 인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아서 하고 있는 일’이라는 주관이 뚜렷하다. 철없는 객기 끝에 온 제법 큰 실수를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옛말로 피해가는 일도 없을뿐더러, 자신의 시행착오를 미리 대비하고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어울리지 않는 분야에 몸담아보는 실험도 서슴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그것 자체로 놀랍다.
이렇게 똑똑한 이들이니 자신의 강점과 취약점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은 물론이요, 대부분 반드시 필요한 인생경험들을 속성으로 겪어낸 듯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정확한 자가진단을 내놓고 있는 모습들이 부러울 정도다. 추구하는 레퍼토리의 합리적인 구축방법, 이를 위해 습득해야 할 예비 지식과 폭넓은 상식의 필요성, 피아노 외의 음악활동이 주는 교훈 등을 이해하고 있는 모습도 기특하다. 굳이 필자의 세대와 비교할 필요는 없겠으나, 무엇보다 청중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박수갈채를 위해 서두르는 모습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세대 간 격차를 체험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굳이 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졸저 ‘피아니스트 나우’(객석아카이브, 2012)의 부록으로 실린 인터뷰에서 “시대가 바뀌고 청중이 여러분들에 대한 정보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도 변했는데, 정작 연주자들은 어떤 변화의 자세를 취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20대를 보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피아니스트들은 이 질문에 이구동성이었다. “작품을 다루고 연주하는 방법이 같고 연주회에서의 소통이 전과 다름없는데, 굳이 피아니스트가 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의 의견은 분명 타당하다. 문제는 전보다 한결, 그리고 매우 빨리 ‘간접화’되고 있는 음악 내외적 정보들의 교류와 이미지 메이킹에 있다. 연주자 한 사람의 실체 중 일부분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갖가지 이야기들은 자칫 음악과 상관없는 곳에서 몰이해를 낳거나, 음악을 만들고 그것을 감상하는 양쪽에 상처를 남길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악기와 달리 피아노는 자신의 기질과 감성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기 어려운, 그것을 다루는 이의 절제와 수련, 그리고 정서의 숙성에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런 특성을 지닌 음악과 음악가들을 설익은 얘깃거리나 이미지들로 ‘앞서가게’ 만들 때, 예술 분야의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예민한’ 타격을 적잖이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무대에 서는 모든 연주자들이 자신을 안팎으로 단련시키고 좀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 힘쓰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독 피아노 연주자에게만 소위 ‘지적인 성숙’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손끝발끝’만 닿는 연주 방법으로 청중과 무언의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이유를 붙여본다.
예전에 들은 어느 원로 피아니스트의 말씀이 떠오른다. “바흐를 연주하는 이도 위대하지만, 그것을 듣는 청중은 더욱 위대하다.” 멋진 연주에 열광과 환호를 보내는 청중의 손길도 훌륭하지만, 그들을 길고 긴 호흡으로 기다려주고 넓은 마음을 동반한 채 이해해줄 수 있는 청중은 그야말로 위대한 존재들이다. 분명한 것은, 21세기를 수놓을 젊은 손가락들이 이미 자신의 악기가 아직도 할 말이 많다는 것을 눈치 챘으며, 그 이야기를 아주 긴 시간 동안 풀어놓을 준비를 갖췄다는 사실이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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