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호 김주원

홀딱 서로 반하다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7월 1일 12:00 오전

“나는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어려서부터 바지가 찢어져라 씩씩하게 돌아다녀서 그런가. 씩씩한 사람이 좋다. 그 에너지.”
저 김주원은요, 글쎄요. 저는 무용을 떠나서 어떤 것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무용을 빼고 뭘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말씀 드릴 것이 없는 걸요. 저 너무 재미없죠. 그렇지만 그게 저고, 그게 나예요. 뭘 하고 싶은 것이 있었나. 어려서부터 성악·바이올린·그림·플루트·테니스·피아노 등 다양하게 배웠어요. 그런데 저보고 뭘 상상해서 그리라고 하면 화가 났어요. 피아노 학원에 가도 벽만 보고 앉아있었죠. 태권도는 신 나게 해서 동네 태권도 선생님이 절 탐내기도 했던 것 같은데요? 다양한 경험들 중에서 전 발레를 선택했죠. 발뒤꿈치로 남의 무릎을 찍는 것보다 앞발로 아름답게 서는 게 좋았나 봐요. 나는 왜 태어났을까요. 감동을 나누기 위해서? 너무 진부한가? 그래도 전, 진심을 나누고 감동을 나누기 위해서… 아름다움에 대하여 생각하기 위해서….

“나는 공상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 나의 공상이 실제로 구현된 것은 아직 100에서 30정도 밖에 안 됐다. 나는 더욱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다.”
저 정구호는 아직도 너무 많은 것을 마음으로 그리고 있어요. 단 하루도 공상을 쉬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네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늘 하고 싶은 것이 많았어요. 어릴 적 동양화를 그리다 심취했고, 꿈은 피아니스트였죠. 남자는 바이엘까지만 치면 된다던 아버지 몰래 체르니 100번까지 배우고, 또 걸려서 다시 재즈를 몰래 배우기 시작했죠. 그러다 다시 또 걸렸을 때, 아버지는 피아노를 부수셨어요. 때문에 저는 다른 것들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피아노가 안 된다고 하니 저는 그림을 그렸죠. 그릴 때마다 방에다 붙여놨어요. 어머니 친구 분 중에 다행히도 화가가 계셨는데 “왜 얘 그림을 안 시키니” 하셨어요. 공부를 하러 가서도 좋아하는 것에 대해 공상을 했어요. 남녀를 불문하고 예술교육의 호의를 베푸셨던 김주원 씨네 부모님 아래 가는 게 나을 뻔했나요? 그래도 저는 꿋꿋하고 씩씩하게 삶을 쟁취해나갔죠. 저는 저에게 맞게 성장해온 것 같네요. 그림·옷·요리·춤의 무대… 무엇을 짓는다. 참 좋아요. 그것이 의상을 통해 무궁무진해진다는 것, 멋지다는 생각을 했죠. 못 해본 것이 있다면, ‘건축’.

올해 구호의 뮤즈는 김주원 씨였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정_사실 ‘구호(KUHO)’ 광고는 유명인을 한 번도 모델로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해요. 무용으로 광고를 하겠다는 데에 내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어요. 그래도 지금 3년째 해오고 있죠. 이번에도 긴 회의가 있었는데, 김주원 씨는 ‘히든카드’였어요. 평소 좋아하는 아티스트, 유명인을 다 떠나서 ‘구호’ 감성이 있다면 그 콘셉트를 공유할 수 있는 무용수라고 생각했죠.
김_‘구호’ 옷을 워낙 좋아해요. 여자들이면 모두 좋아하죠. 이전의 ‘구호’는 현대무용과 협업하며 광고를 만들어왔어요. 이번 작업에서 저는 국립발레단에서 했던 ‘포이즈’의 동작들을 엮어서 춤을 췄어요. 투명한 유리바닥 위에서 아찔하게 춤을 추니, 묘한 연출이 일어났어요.
기업과 아티스트의 만남이라는 것이 왠지 시대를 대변하는 것 같네요. ‘스타일’이라는 것은 참 어렵다고 볼 수 있지요? 오늘도 정구호 씨는 특이한 뿔테 안경을 쓰고 오셨는데, 1985년부터 고집한 스타일이었다고요. 두 분이 생각하는 ‘스타일’이란 무엇인가요.
정_네, 저는 안경도 옷이라고 생각해요.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옷에 따라 달라지겠죠. 나 자신을 표현함에 있어서 새로울 수 있는 요소들은 얼마든지 많아요.
김_저는 거창하지는 않고… 환하거나 꽉 차 있는 예술을 좋아하진 않는 것 같아요. 전 비워두려고 하나 봐요. 선생님의 옷을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비어 있는 그 공간이 좋아요.
두 분은 언제 처음 만나셨어요?
김_1998년이요. 제가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당시 선생님이 작품 의상을 하셨어요.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셨죠. 뿔테 안경에 검정색 의상, 말투며 움직임. 15년 동안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죠?
정_살이 쪘지요. 김주원 씨 역시 지금과 같아요. 청초한 얼굴에, 눈에 띄게 ‘멋있는 무용수’로 자리하고 있었죠. 누가 봐도 함께 작업하고 싶은 사람이죠.
지난해 국립발레단의 창단 50주년 기념 작품이자 김주원 씨의 고별 무대이기도 했던 ‘포이즈’의 연출을 정구호 씨가 하셨죠.
정_마지막 작품에 아쉽지 않았나요?
김_순수 클래식 무대가 아닌 것에 대한 아쉬움이요 선생님? ‘순수 클래식’을 추는 김주원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었을 거예요. 저 또한 마지막 무대를 어떤 작품으로 끝내야 하나 많이 고민했고, 최태지 단장님과도 함께 무수한 대화를 나눴어요. 저는 제 마지막 무대가 ‘포이즈’였던 것을 아쉽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새로운 작품 방향, 연출을 제시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깊었죠.
정구호에게 ‘연출’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최근에 한 작업으로는 국립발레단의 ‘포이즈’, 국립무용단의 ‘단’이 있죠. 모두 작지 않은 무대예요. ‘디자이너 정구호’에서 ‘연출가 정구호’로.
정_연출은 매력적인 장르예요. 할수록 더 하고 싶고. 수렁에 빠져들 듯이요. 처음 안무가 안성수 선생님을 뉴욕에서부터 알게 됐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참 좋다고 생각했어요. 세련된 느낌이 있었죠. 의상을 함께 작업하다가 점점 연출을 맡아서 시작한 게 계기가 됐죠.
김_저는 선생님이 의상에 참여한 영화도 너무 좋았어요. ‘황진이’ ‘스캔들’. 영화 작업은 또 없으세요?
정_점점 감독들이 젊어지고 있어서, 절 찾지 않는 모양이에요. 아기자기한 작품들이 있다면 해볼 의향도 있고요.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한 디자이너와 한길을 올곧게 가던 발레리나, 아무리 함께 앉아있어 봐도 섞이지 않네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번 함께 나눠볼까요.
정_궁금해요, 주원 씨.
김_이런 얘기는 가족들이 어디 가서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전 어렸을 때 완전히 남자였어요. 하도 뛰어놀고 넘어지고 해서 항상 옷이 찢어져서 집으로 들어가곤 했어요. 그렇게 초등학교 때까지 부산에서 살다가 선화예술학교 입학과 동시에 경쟁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어요. 사투리 쓰는 초등학생. (경상도 사투리를 흉내 낸다)
지금은 ‘서울 깍쟁이’ 같은데요?
정_맞아요.
자기 정체성? 그건 계속 있었겠지만, 언제 ‘여자의 정체성’을 갖게 되셨죠? (모두 웃음) 그런데 어떻게 발레를 시작하게 됐어요?
김_그래서 발레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경쟁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저는 부산에 ‘새싹발레’라는 곳에서 발레를 처음 배웠는데 거기서 저보고 ‘콩쥐 팥쥐’ 중에 콩쥐를 하라는 거예요. 전 울며 “난 팥쥐인데?” 했죠. 그게 제가 설정한 저였죠. 그러나 발레를 하면서 매번 새롭게 도전할 것이 생기고, 누군가를 이기기보다는 제가 몰랐던 움직임이나 생각을 찾아가는 것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제가 끈기는 있는 사람이거든요. 발레는 와인처럼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예술이에요. 기초를 다지기까지 참 오래 걸리는 예술. 물론 모든 예술이 그렇겠지만. 그러한 것들이 제 성격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경쟁이 발레와 멀다고요?
김_물론,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오면 다르죠. 경쟁이요,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춤도 늘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자신과의 경쟁에서 이겨나가는 과정 또한 예술가가 감내해야 하는 부분 같아요. 처음에는 그 감성에 적응이 되지 않으니, 되레 친구들을 혼내기도 하고 그랬죠.
중학교 2학년 때 유학을 갔죠. 러시아 볼쇼이발레학교 생활은요?
김_러시아에서 전 가장 춤을 못 추는 학생으로 시작했죠. 한국에서 나름 잘한다고 생각하고 갔는데, 기본이 뒤처져서 많이 고생했어요. 결국 다 과정이지만요. 나중엔 다 달라졌죠.
정구호 씨의 어린 시절은,
정_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저를 가리켜 손을 가만히 안 둔다고 할 정도로 구석에 앉아서 무언가를 만들곤 했어요. 가만히 있지 못하고 피자 만들자, 빵을 만들자 하면서 피자의 토핑을 올리고 있고, 페인트를 사다가 온 방을 다 색칠하고…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했어요. 조용히 공상하고, 공상한 것을 만들어내고. 부모님은 “너는 입 밖으로 낸 것을 꼭 실현하고 마는데, 나중에 어떻게 될지 두렵다”고 그러셨어요. (모두 웃는다)
내재된 에너지를 두려워하신 모양이에요.
정_전 꼭 했던 것 같아요. 무언가 했어야 했어요. 마음으로 그린 것은 꼭.
김_저도요. 그건 비슷하네요.
정_공통점이 있네요.
‘후회’ ‘선택’ ‘기쁨’의 순간들이 있었겠죠?
김_전 후회를 하지 않아요. ‘내’가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에요. 그 순간 집중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죠. 무대에서 종종 미끄러지거나 넘어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울지 않았어요. 미끄러운 땅을 밟고 쓰러졌다거나 무용수들 간의 부딪힘, 또는 테이프에 걸려 넘어지는 등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만들어지는 실수들이 있죠. 그것을 준비하는 동안은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가 없는 것 같아요. 대신 ‘선택’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요. 제게 선택은 늘 좋은 것들 가운데 있었죠. 그러나 그 안에 제 노력이 없었던 것은 단 하나도 없었어요. 불행과 행복이 동시에 왔을 때가 있었어요. 2005년 ‘족저근막염(발뒤꿈치 통증증후군)’에 걸렸을 때죠. 10개월의 휴직계를 내고 어떻게든 치료를 해보려고 했었죠. 그때는 모든 작품의 주인공을 하고 있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발이 아프고 만 거죠. 그로 인해 토슈즈를 신을 수 있는 것이 제 꿈이 되어버렸어요.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다시 토슈즈를 신을 수 있었던 그 순간이 제게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죠.
정_저도 후회해본 적이 없네요. 삶의 목표가 ‘후회하지 말자’고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해야 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운이 좋았던 사람 같네요. 열심히 한 대가로 새로운 기회들이 주어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쉽지 않은 경우죠. 그런 기회들이 주어지니까 그 기회에 보답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하게 되고, 큰 작품의 연출을 맡을 수 있는 기회들이 오게 되고… 주어진 기회를 감당해가는 것,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삶인 것 같아요. 감사하죠. 감사해서 더 열심히 공상을 하려고 해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술가의 공통적인 특징일까요?
정_후회한다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는 거잖아요. 아쉬움은 뭘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그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그 결과는 받아들일 수 있죠.

예술은 정답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걸까요?
정_네 맞아요. 정답은 없지만 미학이 있듯이, 예술에 기준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기준은, 지금은 평가가 안 되더라도 언젠가는 평가될 거라고 생각해요. 기록이 될 만한 것들이 있죠.
치열한 시간은 언제죠?
김_전 항상 치열해요. 친한 지인들은 제게 말해요. “넌 작업할 때 왜 이렇게 쓸데가 없니?”라고 말할 정도로 무기력하고 할 줄 아는 것도 너무 없어요. 아는 것도 부족하고요. 제가 하고자 하는 작업이나 하고자 하는 일의 과정은 정말 치열하게 하는 것 같아요. 매 순간의 무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아무래도 단체 소속일 때와는 마음의 변화가 크겠지요?
김_국립발레단에 있는 15년 동안에는 누군가가 만들어준 시간 안에, 어떻게 보면 제가 그 틀 안에서 움직였지만, 지금은 제가 설계하고 만들어가죠. 지금 바쁜 것도 어떻게 보면 제가 만든 일정이에요. 사실 발레단 있을 때가 훨씬 편해요. 최고의 무용수들과 최고의 환경에서 춤만 추면 되니까요. 누가 봐도 아름다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요. 발레단은 굉장히 완벽한 구조 속에 있기 때문에 제가 생각하는 것들은 내려놔야 할 때가 생겨요. 한 번에 네다섯 개의 작품을 하다 보면 하나의 작품을 조금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는 시간은 부족했어요. 제 능력 부족이지만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한 가지의 작업에 몰입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자연스러운 순간인 것 같아요. 지금은 더 행복해요. 무엇을 보더라도 좀더 높이 바라보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것을 꿈꾸죠. 제가 만족감을 얻고 관객들에게 새로운 작업들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 안정되나 봐요.
일정, 자유로워진 건가요?
김_큰 변화를 기대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 학교를 나가는데,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은 발레단에 나가서 몸을 풀어요. 객원무용수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죠. 후배들은 제게 가끔씩 그래요. “진짜 나갔어요, 누나?” 그렇게 매일 몸 풀고, 개인적으로도 안무가들과 작품 꾸준히 하고, 지방 발레 대중화를 위해 공연도 많이 다니고 있어요.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일주일에 두 번 학교 가는 것 빼고는.
반면 정구호 씨는 매여 있는 몸으로서 하루의 일과가 궁금합니다.
정_(강조하며) 아주 치열합니다. 정해진 시간과 자유의 시간을 잘 집중해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아홉 시부터 다섯 시까지는 회사 일에 집중하고, 다섯 시부터는 두 개에서 세 개의 저녁 약속을 하고요.
김_세 개요? 살쪄요, 선생님.
정_그래서 살이 안 빠지는 것 같아요. 집에 빨리 도착하면 10시 반. 하루 동안 돌아갔던 머리의 나사를 가라앉히고, 열두 시부터가 제 자유 시간이에요. 열두 시부터 새벽 세 시, 길면 네 시까지 저만의 공상을 하며 연출 아이디어 내고, 작품 아이디어 내고 그러죠.
그럼 하루에 몇 시간 주무시는 거예요?
정_3시 반에 잠들고, 7시 반에 일어나니까. 네 시간… 세 시간? 근데 저는 잠을 푹 자서 괜찮아요. 너무 안 자면 늙는데서 더 빨리 자보려고도 하는데, 저는 고요한 밤, 그 시간이 좋아요. 사실 잠을 너무 좋아하는데, 적막 가운데 생각하는 시간이 좋아서 버릴 수가 없어요. ‘포이즈’ 작품을 할 때도 5개월 동안 거의 매일 밤을 새고 작품을 했던 것 같아요.
인간은 보통 80인생 가운데, 잠을 27년 정도 잔다고 해요. 정구호 씨는 대략 13년을 주무시는 건가요?
정_어려서 제가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해요. 전 300년 살고 싶다고. 그렇게 말한 기억이 나요. 기억이 안 나는 척하는데, 전 기억이 나요. 왜 300년이냐 했는데, 100년은 이런 직업으로 살고, 100년은 이런 직업으로 살고, 100년은 또 다른 직업으로 살고요. 세상에 너무 재밌는 일들이 많아서 삶이 짧고 아까운 것 같아요. 그래서 주어진 시간들 내에서 열심히 알차게 살고 싶어요. 잠을 좀 덜 자고 싶어요.
이번 ‘홀딱’에서 두 분께 듣고 싶은 것은 ‘대중화’ ‘예술’ ‘순수예술’ 뭐 이런 것들입니다. 그것들의 경계에 두 분은 서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해 김주원 씨는 15년 동안 몸 담아온 국립발레단 퇴단 후 독립을 선언하셨고, 정구호 씨는 ‘크리에이티브한’ 자신의 감각을 기업적으로 잘 운영하고 계시지요. 솔리스트의 입장으로 ‘구호 연출’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_정구호 선생님의 무용 무대 연출을 말하자면, 무용수들은 덕분에 좋은 경험들을 하게 돼요. 예를 들어 이번 ‘포이즈’ 같은 경우도 그랬어요. 보통 무용수들은 연습을 하는 스튜디오에서 춤을 출 때와 무대에서 출 때도 느낌이 굉장히 달라요. 1천 석에서 2천5백 석 정도 뚫려 있는 무대와 거울로 막혀 있는 스튜디오가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런데 그 무대가 돌아간다고 상상해보세요. 지난 ‘포이즈’에서 무대가 빙그르르 돌아갔거든요. 연습실에는 회전 무대도 없는데요. 가만히 돌아가기만 하는 무대라고 생각했는데, 춤을 추려고 섰더니 갑자기 무대가 돌아가는 거예요. 우린 끊임없이 돌면서 정면을 찾아댔고, 남자 무용수들은 여자 무용수들을 옮겨놓기에 정신이 없었죠. 선생님 죄송해요. 우린 분장실에서 선생님 욕 엄청 했어요.
정_익히 다 알고 있습니다. 연출가로서 회전 무대가 가능한 연습실을 구해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요. (무미건조하게 딱딱한 말투로 말하는 정구호. 그러나 그 안에 애정이 깃들어 있다) 구조의 문제는 늘 ‘예산’이죠.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저도 그랬는걸요. 제 머릿속에는 그림이 있는데, 그것을 만들어내기는 참 힘들어요. 돌면 먼 곳을 바라보고 있고, 또 돌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죠.
김_그런데 첫 리허설을 한 후에 얘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 나온 라인들이 너무도 독특하다는 걸 알게 됐죠. 그냥 고정된 무대에서만 춤을 추던 무용수나 안무가에게서는 나올 수 없었던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어요.
‘구호’ 옷 역시 ‘대중화’에 반(反)한 ‘대중적’ 감각으로 사랑을 받고 있지 않나요? 무대 연출과도 맥을 같이하는 작업 방식이군요.
정_패션은 대중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장르인 것 같아요. 그러나 무대 연출이라는 것은 쉽지 않고, 특정 계층의 향유를 깨야 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국립발레단 역시 그러한 작업을 작품이나 프로그램 등으로 다양하게 시도해가고 있어요. 순수예술이지만 대중에게는 설명이 필요하죠. 그것을 해설이 있는 발레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작품을 통해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이 이해될 수 있도록 어떠한 코드를 잡아야 할까’ ‘조금 더 친근감을 줄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순수예술의 예술성을 유지하지만 대중과의 호흡도 함께 가져갈 수 있는 작품을 꼭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것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발레의 대중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_발레의 경우에는 ‘대중화’가 힘들죠. 발레단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밖에 나와서 겪고 느끼는 것은 발레는 아무데서나 출 수 없다는 거였어요. 현대무용이나 한국무용은 오늘 같은 미술관에서도 가능하죠. 하지만 발레는 토슈즈를 신을 수 있는 ‘댄스 플로우’여야 하거든요. 발레라는 장르가 사람들에게 주는 위로나 따뜻함은 말할 수 없이 크지만 그것이 대중화되지 못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한국 발레가 있어온 지 50년이 지나가는데 말이죠. 때문에 춤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을 가지고 있는 안무가와 연출가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구호 선생님 같은 분이 필요하죠. 대중의 마음도 잘 알지만 순수예술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지점인 것 같아요.
한국 발레 50년. 어떻게 정의하고 있고,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나요?
김_국립발레단 창단 이래를 한국 발레사라고 했을 때예요. 그 안에서 많은 작업들을 시도해 왔고요. 이제는 이미 많은 무용수들이 급격하게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체격 면에서나 표현 면에서나 모두 다요. 무용수들의 수준이 올라간 만큼 관객 수준도 실은 엄청 올라갔어요. 전문적인 분들이 많아지셨죠. ‘가짜 춤’을 춰서도 안 되지만 출 수도 없어요. 그건 엄청난 발전이죠. 그러나 그동안 안무가들을 키우기에는 척박한 현실이었어요. 이제는 ‘한국의 창작무’를 만들어내는 안무가를 키워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생각해요.
‘연출가 정구호’의 생각은요?
정_작품이나 예술가, 연출 등 그동안 노력해왔지만 앞으로 노력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더욱 많다는 것에 주목했으면 좋겠어요. 대중이 요즘 유행하는 뮤지컬 다섯 번 볼 때 무용 공연 한 번 더 보면 달라질 수 있겠죠. 무용은 한류가 될 수 있는 뛰어난 요소를 가진 장르예요.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가 생겨나는 거죠.
관객과 저희 모두 진지해지는 순간이네요. 그럼 사전에 받았던 관객 질문을 들어볼까요? 변수경 씨가 물으셨어요. “김주원 씨는 마인드 컨트롤을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_제 삶은 되게 단조로워요. 화려할 것 같다고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데 발레리나들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아요. 어릴 때부터 연습하고, 공연하고, 학교 가고… 무대를 오르는 프로가 되면서부터는 항상 예민하게 작업을 해야 하고, 삶이 점점 더 단조로워지더라고요. 만나는 사람도 제한적이고요. 저는 술을 안 마시는데요. 자기 관리를 하지 않으면 무대에서 흐트러지기 때문이죠. 감정적인 감각을 다루는 사람이니까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재미없지만 자기 삶을 절제해나가는 것이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요. 저는 생각보다 감정의 기복이 작업할 때 외에는 별로 없어요. 목소리도 이 ‘톤’ 그대로고요. 뮤지컬 ‘컨텍트’를 할 때 화를 내는 장면이 있었는데, 연출가에게 “화를 내면 왜 꼭 소리를 질러야 하느냐”고 그랬어요. 저는 화를 내도 (같은 톤의 목소리로) “네가 그랬잖아.”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정구호 씨는요?
정_저는 요리합니다.
시드니 ‘르 코르동 블루’에서 요리까지 배우셨죠?
정_제 작업이 데드라인이 있는 일이다 보니,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찾죠. 보통은 마인드 컨트롤을 위해 쉬어야 한다고들 생각하시는데, 그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머리를 비울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좋죠.
김주원 씨는 평소에 요리 안 하세요?
김_제가 김치볶음밥을 만드는 데 세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에요.
정_요리 취미에 후유증은 분명히 있어요. 살이 찌는 거죠. 저처럼.
정구호 씨, 소개하고 싶은 간단한 요리 없으세요?
정_어떤…?
음. 야식? (객석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비오는 날 야식이요!” 바깥은 비가 오고 있었다)
정_야식… (당황한 기색을 하며) 비오는 날은 부추전이죠. 부추가 없으면 김치전. 부추전이든 김치전이든 하실 때는 부침가루 쓰지 마시고, 밀가루를 쓰시고. 그런데 밀가루로만 전을 부치면 전이 푸석하죠. 찹쌀가루를 넣어야 쫄깃해지기는 하지만, 녹말가루를 넣으면 되요. 밀가루 둘에 녹말가루 하나를 섞어서 전을 만드시면 아주 쫄깃쫄깃한 전을 드실 수 있습니다.
(모두 박수(?)를 쳤다. 알아듣기 쉬운 훌륭한 ‘레시피’. 평범하지만 세련된 미각, 그리고 가루들의 적절한 협업. ‘정구호답다’)
미국에서 레스토랑도 운영하셨죠? 잘됐나요?
정_네, 잘됐죠. 뉴욕의 한 일간지에 ‘뉴욕을 대표하는 레스토랑 톱 텐’에도 들었어요. 캐주얼한 식당이었어요.
뭘 해도 잘 되는 스타일인가요?
정_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전 글 못써요. 글 쓰면 수렁으로 빠지면서… 쓰다 보면 이상하게 호러물이 되어버려요.
관객 질문 하나 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에 서 있는 예술가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뭐다.” 성스레 씨가 질문하셨어요.
정_저는 대중성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무엇보다 예술이든 뭐든, ‘뿌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걱정은 되지요. 내가 이 작업에 뛰어들어 폐가 되진 않을까.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이 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하게 돼요. 심사숙고의 과정이 두 배로 들어가서 그럴까요.
김_저는 창조자의 입장은 아닌, ‘플레이어’로서 대중성과 순수예술의 선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항상 제 움직임이나 몸 상태에 관한 책임은 제가 지는 것이고, 시도 안에서 새로운 작품이 탄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뭐든 시도하는 것은 좋은 것 같아요.
2015년, 작품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하셨지요?
정_네, 무용수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요소들을 넣은 (자세하게 이야기했지만, 기자의 ‘촉’에 의하면 이것은 비밀로 붙여야 할 것 같아 기록하지 않겠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요.
김_오. 저는 4층 무대에 오르는 것이라면 안 할래요. 전 1층이 좋아요.

인터뷰가 끝나자, 여느 때의 ‘홀딱’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러 앞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대부분은 의상과 발레를 공부하는 학생들 같아보인다. 발레를 위해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인 어느 학생, 의상 디자이너를 꿈꾸고 있는 이… 그들이 인터뷰 끝나기가 무섭게 각각의 해당 ‘뮤즈’들에게 달려가 적극적으로 물었다. “잘 먹어야 해요. 응원할게요.” “네, 반갑습니다. 어디서 공부를 하죠?” “아, 맞아요! 거기.” 정말 아름다운 대화 아닌가? 이 시간을 위해 이들은 1시간 40분을 어떻게 참고 있었을까. 괜스레 미안해지기까지 했던 오늘, 오늘 역시 동숭동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다.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박진호(studio BoB)

인터뷰이 발레리나 김주원·패션 디자이너 정구호
인터뷰어 정우정 기자
2013년 6월 17일 오후 8시
월간객석 사옥 갤러리 정미소

열 번째 ‘홀딱’은 리코더리스트 권민석과 함께, 시공간을 거뜬히 초월하는 음악 이야기를 나눕니다. 7월 11일까지 이메일 friends@gaeksuk.com으로 이름·연락처·참석인원과 질문을 보내주십시오. 당첨자는 7월 12일 개별통보합니다.
문의전화 02-3673-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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