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니오 모리코네 (1)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음악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9월 1일 12:00 오전

“그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은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그 음악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문명 사회에 없다. 그는 현대의 J.S. 바흐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엔니오 모리코네를 향해 아주 정직하고 적절한 평가를 매겼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영화와 음악이라는 독립된 공간을 온전하게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준 ‘영화음악’ 작가이다. 그는 다른 각도에서 영화의 영상과 분리되어 영화음악을 그 자체로 존재하게끔 했던 장인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음악은 부속의 기능으로 존재했다. 무성영화에서도 음악은 주제에 해당하는 영상, 그리고 내러티브, 배우의 연기에 복종하는 변주에 불과했다. 그러나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은 달랐다. 그는 50여 년 동안 400여 편의 영화음악 작곡을 남기며, 현대의 영화에서 음악이 지녀야 할 새로운 위상과 가치를 깨웠다. 그로 인해 영화음악은 보면서 듣는 것이 아니라, 들으면서 절로 볼 수 있게끔 하는 기능이 완성되었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그렇게 ‘영화음악’의 이상을 실현시켜준 혁명가였다. 그의 음악적 마법이 도드라졌던 ‘미션’ ‘시네마 천국’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웨스트’ ‘러브 어페어’ ‘황야의 무법자’ ‘말레나’ 같은 영화 작품들은 20세기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누구에게나 특별한 추억과 감회로 각인된, 우리시대의 고전이다.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나다, 살아가다
1928년생, 우리 나이로 여든여섯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창작의 열정을 소진하지 않고 있는 현역의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 오래전부터 할리우드의 숱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평생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은 채 로마에 위치한 자신의 집과 근교의 별장에서 머물며 작곡의 소명을 다하고 있다.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영광을 선물하지 않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2007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할 당시, 엔니오 모리코네는 자국어 이탈리아어로 수상 소감을 남겼다. 제대로 된 영어를 한 마디도 구사할 줄 모르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인사를 급하게 통역했던 이는 시상자로 참여했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그렇게 평생을 이탈리아인으로 86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1928년 11월 1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마리오 모리코네는 트럼펫 연주자였지만 음악가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어린 시절의 가계는 넉넉하지 못했다. 그를 포함해 다섯 명의 자녀를 둔 모리코네 가정의 유일한 생계 수단은 아버지 마리오 모리코네가 나이트클럽과 홀에서 연주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이 전부였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열 살을 즈음한 시기부터는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어린 엔니오 모리코네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밤무대와 나이트클럽에서 트럼펫을 연주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트럼펫과 작곡 이론을 익혔던 엔니오 모리코네는 아홉 살에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서 개인적으로 트럼펫 레슨을 받았고, 열두 살에 공식적으로 같은 음악원의 예비과정에서 하모니 프로그램과 트럼펫 전공 본 과정을 차례대로 이수했다. 4년 과정의 예비 과정을 단 2년의 시간에 마무리할 만큼, 그는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기간 동안 엔니오 모리코네는 트럼펫 외에 작곡과 지휘를 익혔으며, 그의 작곡 지도교수였던 작곡가 고프레도 페트라시에게 특별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현대음악 작곡가, 지휘자 중 한 명으로 언급되는 고프레도 페트라시가 트럼펫을 전공한 어린 소년에게 작곡과 지휘를 가르치게 된 것은 각별한 선택이었다. 그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열정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풍부한 이론과 현대음악의 식견을 넓혀주었다. 애초 트럼펫 연주자보다는 작곡가가 보다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작곡을 선택했던 엔니오 모리코네는 2년의 수학 기간 동안 프로코피예프·스트라빈스키를 흠모하며 12음렬을 비롯한 현대음악 작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946년 엔니오 모리코네는 18세에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서 트럼펫 전공으로 학사를 졸업했지만, 같은 학교에 재입학하여 고프레도 페트라시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원했고, 1954년 작곡 전공으로 두 번째 학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엔니오 모리코네는 주로 실내악·관현악곡·가곡 등 순혈의 클래식 음악을 작곡했다. 그를 다시 상업음악의 생활 전선으로 내몰았던 것은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이탈리아의 혼란스러운 경제난이었다.
졸업 이듬해인 1955년부터 엔니오 모리코네는 이탈리아 국영방송(RAI)의 경음악단에 재직하며 트럼피터와 작·편곡가로 활동하면서 생활을 위한 작품들을 남겼다. 1956년 아내 마리아 트라비아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엔니오 모리코네는 1959년,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현대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다. 이듬해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초연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음악계는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가능성을 비로소 주목하기 시작했다.

세르조 레오네를 만나다
1961년, 엔니오 모리코네는 영화음악 작곡가로서 첫 번째 필모그래피를 열었다. 그의 나이 33세. 그에게 의뢰된 첫 번째 영화음악은 코미디 영화 ‘일 페데달로’였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영화음악 작곡가로 처음 활동하던 당시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자존심 때문에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레오 니콜스·댄 사비오와 같은 가명을 사용하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지우고 있었다. 무명의 작곡가에게 의뢰되는 영화들은 B급 액션 영화, 드라마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중에는 포르노 영화도 있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다작의 영화음악 작업에 참여했지만 그의 음악도, 그가 참여한 영화들도 모두 실패작들이었다. 3년의 시간을 성과 없이 영화음악의 전선에서 소비했던 엔니오 모리코네가 비로소 전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음악 작곡가로 시선을 끌었던 것은 1965년 영화 ‘황야의 무법자’에 참여하면서였다. 역설적으로 엔니오 모리코네는 자신의 첫 번째 성공작이자 전환기적 작품에서도 레오 니콜스라는 가명을 사용한 채 이 작품이 안겨다 줄 장밋빛 전망을 짐작하지 못했다.
‘황야의 무법자’는 엔니오 모리코네와 같은 고향 로마 출신의 영화감독 세르조 레오네의 연출작이었다. 엔니오 모리코네보다 한 살 어린 세르조 레오네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이탈리아 풍의 서부 영화, 이른바 ‘마카로니 웨스턴’ 혹은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이단적 영화 장르를 개척한 영화감독이었다. 훗날 엔니오 모리코네의 아카데미 수상식에 곁을 지켜주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을 맡은, 이색적이고 이국적인 서부 영화는 흥행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의 성공에 뒤따르는 후광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담배·망토뿐만이 아니었다. 영화의 전반을 감싸고 있던 주제곡 ‘Wandering Whistle’은 일렉트릭 기타와 다이내믹한 남성 코러스로 주제를 상승, 하강시키는 기법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가사가 없는 허밍과 휘파람 소리를 중점에 놓은 엔니오 모리코네의 유머러스한 실험과 도전은 영화의 성공과 더불어 고스란히 새로운 경향, 유행으로 번지게 되었다.
‘황야의 무법자’ 이후 세르조 레오네와 엔니오 모리코네는 공생의 관계가 되었다. 둘의 공조는 ‘석양의 건맨’(1966) ‘석양의 건맨 2’(1967),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웨스트(1968) ‘석양의 갱들’(1971) ‘무숙자’(1973), 그리고 세르조 레오네의 유작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로 이어졌다. 애초 세르조 레오네는 ‘황야의 무법자’에서 미국 서부 영화 작곡의 전형성을 답습한 엔니오 모리코네의 스타일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영화 제작자의 요구를 충실하게 받아들인 엔니오 모리코네의 작곡을 처음 접하고 세르조 레오네는 드미트리 티옴킨과 다를 바 없다며 새로운 방식의 실험적인 창작을 요구했다. 그 즉시 엔니오 모리코네는 기존의 서부영화, 영화음악 작곡에서 볼 수 없었던 리드미컬한 구성과 독창적인 선율, 악기 구성, 사운드의 작품을 바쳤다. 이후 세르조 레오네는 영화의 촬영 이전에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시나리오를 설명한 후, 촬영 이전에 영화음악을 완성하고 그가 펼쳐낸 음악적 배경 위에 맞춰 배우의 연기를 의도하는 절대적인 신뢰를 구축하게 되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아메리카’ ‘미션’을 작곡하다
세르조 레오네와의 협작을 통해서 엔니오 모리코네는 일약 영화음악 작곡가로 촉망과 각광을 누리게 되지만, 그의 고유한 스타일이 완성의 과정에 진입하기에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의 구분을 초기·중기·후기로 구분하자면, 1965년부터 1984년까지 20년의 시간은 초기로 분류된다. 이 시기의 특징은 ‘팝과 오케스트라가 혼합된 자유분방한 스타일’로 모호하게 정의할 수 있다. 이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 작품들이 세르조 레오네와의 협업을 제외하고는 특별함을 지니지 못한 채,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음을 방증하는 결론이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마카로니 웨스턴의 작품 외에는 또 다른 영화음악의 혁신을 기하지 못한 채, 다작의 영화음악 작곡가로 20년의 시간을 소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과 자유로움으로 평가받는 초기의 작품 군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요하는 몇몇의 작품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1969년 작 ‘시실리앙’에서 사용된 단순하면서도 강한 인상의 선율미는 1984년 이후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명작들의 특징을 미리 예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성 소프라노의 스캣 창법이 유장하게 곁들여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웨스트’의 주제곡은 오페라적인 기법과 재즈적인 기법이 극적으로 조화를 이룬 결과물이었다. 1981년 작 프랑스 영화 ‘프로페셔널’에 삽입되었던 ‘Chi Mai’는 애초 1971년에 발표되었던 영화 ‘막달레나’에 사용되었던 곡이었다. ‘프로페셔널’의 주연으로 참가한 배우 장 폴 벨몽드는 10년 전의 영화 속 음악을 기억하며, 자신의 출연작에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직접 부탁을 했다. 이에 엔니오 모리코네는 보다 풍부한 멜로디, 새로운 편성, 섬세한 편곡으로 재편하였으며, ‘Chi Mai’는 드라마나 CF음악으로 널리 애용되며 오랫동안 사랑받는 명곡으로 남게 되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존재가 재차 영화 팬들, 음악 팬들에게 환기될 수 있는 중대한 전환을 안겨준 이는 다시 한 번 세르조 레오네였다. 1984년에 완성된 세르조 레오네의 유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영화와 음악이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 불멸의 명작이었다. 1968년 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웨스트’의 배경을 미국으로 옮겨 이탈리아 초기 이주민들의 역사를 애닯게 묘사한 장편 영화에 삽입된 곡들은 이채롭고도 신선한 결과로 영화의 감정을 증폭시켜주었다. ‘Cockey’s Song’에 등장하는 건조하고 격정적인 팬 플루트의 음색, 드라마틱한 전개가 그랬다. ‘Amapola’에서 애잔하게 감성에 스며들었던 현악기의 선율미는 수많은 영화 팬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1986년, 프랑스 영화 감독 롤랑 조페로부터 의뢰 받은 영화 ‘미션’의 임무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적 연대기에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으며 과정이었다. 18세기 유럽 교황청에서 벌인 남미의 침략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엔니오 모리코네는 중세의 중교음악·고음악·성가에 대한 관심과 클래식 목관 악기에 대한 재해석을 극적으로 이끌어냈다. ‘Gabriel’s Oboe’에서 묘사되는 하프시코드의 리드미컬한 움직임 위에 얹어진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오보에의 멜로디는 20세기에 가장 빛나는 관현악 협주곡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밖에 남아메리카 원주민 소년들의 무반주 합창으로 불려지는 ‘Ave Maria’와 남미의 민속악기와 어우러진 ‘Te Deum Guarani’, 심포닉 오케스트라의 장엄함으로 남미의 폭포와 대자연의 절경을 직역한 ‘Falls’는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첫 번째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노미네이트를 선물했으며, 이 음악들은 지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화음악으로 공전의 히트를 지금까지 누리게 되었다. 팝페라의 여왕 세라 브라이트먼은 ‘Gabriel’s Oboe’에 매료되어 이 곡에 직접 가사를 붙인 노래를 취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녀는 이를 승낙받기 위해 2년 동안 두 달에 한 번씩 진심 어린 편지를 남기는 정성으로 엔니오 모리코네의 마음을 돌려냈다. 그 곡이 세라 브라이트먼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크로스오버·팝페라·뮤지컬의 영역에서 애창되고 있는, 인류의 아리아, 합창곡이 되어버린 ‘Nella Fantasia’이다.

글 하종욱(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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