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미술관 ‘애니미즘’ 전

우리는 왜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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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월 1일 12:00 오전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시작된 전시회가 7개국을 거쳐 서울에 막 도착했다

글 김여항 기자(yeohang@) 사진 일민미술관


▲ 박호상 서울시 이태원 부군당


▲ 애덤 아키카이넨 ‘CSI:DNR’

광화문. 일민미술관에 ‘애니미즘’이 자리를 틀었다. 애니미즘이라 하면 동물숭배나 태양신, 아니면 굿과 같은 ‘원시시대’ 잔여물 정도만 생각나는가? 글쎄다. 조금 고개를 돌려보면 근대 이성을 비판하는 철학자들이 자신들 철학의 원형을 찾은 곳 또한 바로 애니미즘이다. 이성의 신화에 경종을 울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지상의 사물이 친화관계 속에서 수평적인 교감을 나누는 유사성의 세계를 말한 발터 베냐민, 실천적 생태철학의 의미를 주창한 펠릭스 가타리 등의 철학적 개념들에 애니미즘은 깊숙이 파고들어 있다.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시작된 ‘애니미즘’ 전시가 7개국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4개월 전 서울을 방문한 기획자 안젤름 프랑케는 일민미술관의 기획자와 참여 작가들과 함께 리서치를 진행하며 한국의 애니미즘을 끄집어냈다. 큐레이터 남선우는 “근대화가 진행될 때 비서구 세계들은 서양문화에 반발하는 시기를 갖는데, 한국은 예외적으로 새마을운동을 비롯하여 자체적으로 토속문화를 파괴해나간 점에 다소 놀라는 모습이었다”라고 설명했다. 프랑케의 리서치 작업 결과물들은 전시된 신문 스크랩과 각종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없어져야 할 폐습 연재 기사로 굿 문화가 소개된 것이 그 예다.
아도르노는 “애니미즘은 사물에 영혼을 부여했고, 산업주의는 영혼을 사물로 만든다”고 말했다. 애니미즘적 사고를 위한 첫 단계는 근대 이성의 산물인 우리의 머릿속을 전복시킴으로써 시작되는데, 1층에 전시된 작품들부터 천천히 따라 올라가보면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한다. “사물에 영혼을!” 이라는 명제 하나만 갖고 이 전시를 이해하기엔 너무도 많은 요소들이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 체계를 뒤섞어버리기 때문이다. 해골이 춤을 추는 애니메이션(ani-mation), 목화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동자, 신비주의에 대한 각종 기록,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스물한 살 된 남편을 따라 5개월간 식음을 전폐하다 함께 저 세상으로 간 청산과부 이야기까지. ‘애니미즘’이라는 틀 아래 쉬이 들어오지 않는 인간의 정신문화사를 여행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1층부터 3층까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전시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1층은 애니미즘적 요소를 무시하고 타자를 구분 짓는 합리화의 양태를 보여준다. 이곳에서 애니미즘에 대한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들과 함께 갖가지 애니미즘적 요소들을 일람할 수 있다. 2층에서는 애니미즘을 새롭게 작품화한 시도들을 볼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거대한 적토색 작품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작가는 문래예술창작센터에 3개월간 체류하며 근처 공장에서 얻어온 기계를 덮는 천과 교감한 후, 그 교감의 결과를 벽을 덮는 거대한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정신병자들을 분리하고 구분하는 데 반대하는 다큐멘터리도 한 편에서 상영 중이다. 3층은 다큐멘터리 위주로 구성된다. 2008년, 정치적인 격변을 겪은 후 승인된 에콰도르 헌법은 헌법 사상 처음으로 법의 주체로 자연을 포함한다. 이 법조항은 바위·산·삼각주·바다 등의 요소에도 기본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브라질 건축가인 파울 루타바레스의 ‘비(非)인간적 권리’ 작품에서는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역사적인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 기간 중 강연이 마련되어 있다. ‘한국의 애니미즘적 시각문화 전통’(1월 15일), ‘펠릭스 가타리의 생태철학과 그 실천성’(1월 22일), ‘우리는 한 번도 근대인 적이 없었다: 브뤼노라투르의 사상’(2월 12일).
12월 6일부터 3월 2일까지, 일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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