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필리프 라모

서거 250주년, 이성적인 아름다움을 기리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4월 1일 12:00 오전

1683 프랑스 디종 출생
1706 첫 작품 클라브생 작품집 1권 작곡
1722 ‘화성론’ 집필
1733 첫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 초연
1753 루소의 비판 이후 부퐁 논쟁에 휩싸임
1764 81세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

올해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아도 라모의 서거 250주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비교적 적은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독일 음악에 비해 프랑스 음악이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륄리 이후 가장 위대한 프랑스 음악가로 손꼽히는 장 필리프 라모(1683~1764)는 탁월한 음악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집필한 ‘화성론’(1722)은 오늘날까지도 읽히는 음악이론 분야의 명저로 꼽힌다. 그렇다면 그의 음악은 어떠한가?

이성과 본능의 화해
“이성과 본능이 서로 화해한다면 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으리라.”
일찍이 라모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성과 본능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서로 반대되는 것이 만나 화해를 하려면 결국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음악가 라모가 본능보다는 이성에 충실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개 사람들이 음악을 들을 때 가장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우리의 본능에 호소하는 아름다운 ‘선율’이지만 라모는 선율보다 ‘화성’이 우선한다고 생각했다. ‘화성’, 즉 화음의 진행은 보통 사람들에겐 선율에 배경을 형성하는 분위기 정도로 인식될지 모르나 라모에게 ‘화성’은 작곡의 원칙이자 근본 원리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선율 작법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낸 후 다른 성부의 선율을 작곡하려면 곧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선율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 (중략) 따라서 우리를 이끄는 법칙은 선율이 아니라 화성이다.” (라모 ‘화성론’ 중에서)
그런데 음악에서의 이성, 즉 ‘화성’을 중요시했던 라모의 음악은 뜻밖에도 우리 귀에 달콤하게 들린다. 라모의 음악 속에 살아 숨 쉬는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선율과 긴박감 넘치는 리듬이 우리의 음악적 본능을 충동질한다. 작곡 자체는 이성적인 원리에 따랐을지 몰라도 그 음악은 우리의 본능을 자극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라모는 그의 바람대로 이성과 본능을 화해시킬수 있었다.


▲ 라모의 화성론(1722)

오르가니스트로 출발한 과묵한 음악가
라모의 삶 자체도 서로 반대되는 것 사이의 갈등과 화해로 점철되는 듯하다. 생애 전반 50년간은 오르가니스트로 살다 후반 30년은 오페라 작곡에 전념했는가 하면, ‘작곡가’라는 창조자와 ‘이론가’라는 학자의 길을 병행했다. 또한 성격이 매우 다른 23년 연하의 여성을 만나 부부생활을 유지했다. 또한 생애 말년에는 여러 가지 오페라 논쟁에 휘말리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고 반론을 제기하며 반대파들과 불편한 공존을 감수했다.
라모가 프랑스의 디종에서 태어났을 때만 해도 그가 프랑스의 극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이자 화성학 이론을 정립한 음악학자로 성장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성당 오르가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배운 라모는 18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처럼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다. 클레르몽 페랑 대성당의 음악감독으로 일하다가 1709년에 고향인 디종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노트르담 성당 오르간주자직을 물려받았고, 다시 리옹과 클레르몽 등으로 자리를 옮겨 오르가니스트로 생계를 유지했다. 1723년에는 그의 큰 뜻을 대도시에서 펼치기 위해 파리로 건너갔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라모는 키가 매우 크고 마른 체격에 말수가 적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그가 동시대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타르티니와 닮았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극작가 세바스티앙 메르시에는 라모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매우 말랐고 키가 크고 강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눈은 불꽃처럼 빛났는데, 이는 그의 영혼을 불태우듯 강렬했다. (중략)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일했는데, 그가 작곡한 위대한 작품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뜨거운 열정을 지닌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런 묘사를 보면 오늘날 전해지는 라모의 초상화가 매우 온화하게 그려진 것 같기도 하다. 과묵하고 고집스런 성격에 강렬한 눈빛, 키 크고 마른 라모의 외모는 사람들에게 인색한 사람이란 인상을 주었다. “너무 마르고 가늘어서 인간이라기보다는 유령같이 보인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재능이 뛰어난 음악가일수록 라모에 대해서 결코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라모는 그 누구보다도 존경할 만한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50세에 피어난 극음악의 재능
‘대기만성’이란 말은 라모에게도 적용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오페라 작곡가로 유명한 라모가 그의 첫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를 발표한 해가 1733년이니 그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라모가 50세부터 30여 년 동안 발표한 오페라와 발레의 수는 29편, 막으로 치면 무려 80막이다. 게다가 그가 남긴 오페라는 그 성격도 다양해서 ‘서정 비극’과 ‘코미디 발레’, ‘영웅적인 전원극’ 등 여러 가지다. 진지한 내용의 서정비극으로는 쌍둥이자리 전설에 바탕을 둔 ‘카스토르와 폴룩스’와 로마신화를 바탕으로 한 ‘다르다뉘’ 등이 대표적이고,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오페라 발레로는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 ‘사랑의 놀라움’, 좀더 가벼운 성격의 코미디 발레로는 ‘나바르 공주’ 등이 전해진다.
아마도 라모가 부유한 세금징수대리인이자 음악후원자인 라 푸플리니에르와 친분을 맺지 않았다면 생애 마지막 30여 년 동안 이토록 많은 오페라를 작곡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라모가 그의 첫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의 대본을 써준 펠그랭을 만난 것도 라 푸플리니에르의 저택에서였다. 라 푸플리니에르의 저택은 ‘라모주의의 성채’라 불렸고, 라모는 이곳에서 여러 대본작가들을 만났을 뿐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라모가 30여 년간 29편의 오페라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열정적으로 작곡에 임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라모는 항상 음악에 한껏 고양된 상태에서 작곡에 몰두하곤 했으며, 한번 작곡하기 시작하면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과일로 간신히 끼니를 때우곤 했다. 라모의 작곡 작업을 도왔던 발바스트르는 라모가 오페라를 작곡하는 과정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가 작가로부터 대본을 받으면 그는 우선 몇 번이고 대본을 쭉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계속 생각해보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대개 작가에게 가서 어느 부분을 고쳐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과정에서 작가들은 대단한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는 보통 바이올린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음표를 그렸다. 때로는 하프시코드 앞에서 작곡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작곡하는 동안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때로는 그의 작곡을 방해한 사람들이 화를 입기도 했다.”
라모에게 시달렸던 대본작가 중에는 당대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도 있었다. 볼테르는 라모를 위해 오페라 ‘삼손’의 대본을 썼으나 이 곡은 상연이 금지되는 수난을 겪었다.


▲ 파리 오페라 발레의 ‘이폴리트와 아리시’ ⓒAgathe Poupeney/Opera de Paris

쿠프랭과 맞먹는 건반음악의 대가
라모가 오페라의 거장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작곡가 라모를 단지 오페라 작곡가라고만 할 수는 없다. 오랜 세월 성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던 라모는 모테트 ‘주가 돌이키실 때(In Convertendo)’와 ‘미제레레(Miserere)’ 등 뛰어난 종교음악을 남겼고, 클라브생(하프시코드의 프랑스어) 분야에서도 쿠프랭과 맞먹을 정도의 업적을 이뤘다. 1706년에 출판된 ‘클라브생 작품 1권’을 시작으로 줄줄이 탄생한 그의 클라브생 곡들은 라모의 ‘화성론’을 음악적으로 구현한 듯 과감한 화성과 표현력이 돋보인다.
물론 ‘화성의 달인’ 라모의 개성은 클라브생과 몇 대의 악기들이 함께 연주하는 다섯 곡의 ‘콩세르’에서도 빛난다. 라모의 ‘콩세르’는 실내 합주 형태의 클라브생 작품집으로 서너 악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악장에 흥미로운 제목이 붙어있다. 예를 들어 콩세르 3번의 1악장에는 그의 음악을 오랫동안 후원해준 라 푸플리니에르의 이름을 따서 ‘라 라 푸플리니에르’란 제목을 붙였고, 또 콩세르 5번의 1악장은 비올 연주의 명수인 포르케레의 이름을 따 ‘라 포크레’, 3악장은 마랭 마레의 이름을 따서 ‘라 마레’라 불렀다.


▲ 툴루즈 카피톨 극장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 ⓒPatrice Nin/Theatre du Capitole

논쟁에 휩싸인 노대가
1752년, 오랜 세월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라모는 어느덧 69세가 되었다. 바로 그해 이탈리아의 작곡가 페르골레시의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의 상연을 계기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지하던 세력들이 프랑스 오페라 지지자들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오페라를 좋아했던 장 자크 루소는 ‘프랑스 음악에 관한 편지’(1753)에서 라모로 대표되던 프랑스 오페라의 약점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프랑스 오페라의 레치타티보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합창은 복잡한데다가 화성과 관현악법이 산뜻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 프랑스어는 음악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었다. 루소의 신랄한 공격에 라모는 이탈리아 오페라엔 아리아밖에 없으며, 이탈리아 오페라는 결코 프랑스의 대규모 서정비극에 대항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당시 라모의 오페라는 파리의 지식인들 사이에선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라모는 단지 이탈리아 오페라 지지파들의 공격을 받은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륄리의 오페라를 지지하는 ‘륄리파’의 공격도 받아야 했다. 륄리의 전통적인 오페라를 지지했던 ‘륄리파’는 라모가 륄리가 이룬 훌륭한 프랑스 음악의 전통을 깨뜨렸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라모는 그의 오페라 발레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의 서문에서 이렇게 해명했다.
“나는 륄리를 모방하려고 노력했지만 똑같이 따라하려 하지는 않았다. 륄리처럼 지극히 아름답고 단순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모델로 삼았을 뿐이다.”
라모는 생애 후반기까지 오페라 작곡에 매달리면서 여러 논쟁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의 창작열과 왕성한 에너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쇠퇴하는 법이 없었다. 라모는 77세가 되던 1760년까지도 오페라 작곡을 계속했다. 그리고 1764년에 81세로 생을 마감하던 마지막 날, 마지막 종부성사 의식을 행하는 순간에도 사제의 노래가 잘못됐다고 호통을 칠 정도였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생각하고 음악에 열정을 불태웠던 라모. 그런데도 라모의 사후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라모의 음악보다는 그의 이론적 업적에 더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다. 라모의 서거 250주년을 맞이한 올해 라모의 음악이 좀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되길 빌어본다.

글 최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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