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주몽’의 무대를 그리고 채색하는 사람들
봄이 오면 국립오페라단은 창작 오페라를 선보인다. 올해의 선택은 ‘주몽’. 광복 70주년 기념작으로 박영근이 작곡하고, 김용범이 대본을 쓴 이번 작품은 2002년 ‘고구려의 불꽃-동명성왕’이라는 이름으로 초연한 작품이다.
주몽은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운 인물이다. 해모수와 유화의 아들인 주몽은 알에서 태어난 인물로 알려졌다. 태생만큼 운명도 기구하다. 평민의 신분으로 마구간에서 일하며 금와왕의 별궁에서 자랐고, 금와왕의 아들 대소태자의 음모를 피해 사랑하는 예랑과 뱃속의 유리를 두고 졸본부여로 도피한다. 나중에 무사 오이·협부·마리와 함께 연타발이 다스리던 졸본부여에 고구려를 건국하고 유리와 상봉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 그는 하늘로 오른다. 그가 세운 고구려는 전성기에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 일대를 다스린 대국이다. 3막 5장 구성의 ‘주몽’에는 이러한 역정과 고구려 민족의 포부, 기상이 담겨 있다.
이번 무대는 김홍승이 총연출을 맡았고, 최승한(지휘)과 코리안심포니·그란데오페라합창단, 안애순(안무), 손희정(의상), 바리톤 우주호가 주몽 역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임일진이 무대미술을, 고희선이 조명디자인을 맡았다. 특히 고희선은 초연 이후 ‘주몽’과 두 번째 만남이다.
두 사람을 만나기 전, 국립오페라단으로부터 받은 대본은 두 개의 버전으로 되어 있었다. 하나는 ‘막(幕)’으로, 하나는 ‘경(景)’으로. 경은 말 그대로 ‘풍경’을 뜻한다. 풍경을 담은 지문은 단순한 글이 아닌, 임일진과 고희선의 상상력을 건드리는 인화점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이 지나간 무대에는 주몽이 달려갈 광야가 생기고, 그에게 빛줄기가 내려온다.
오페라 대본을 처음 받고 나서 무대미술가와 조명디자이너는 어떤 순으로 작업을 진행하는지 궁금합니다.
임일진 고전 오페라와 창작 오페라를 작업할 때의 방식이 다릅니다. 창작 오페라는 음악이 덜 완성된 경우도 많고, 설령 그렇다 해도 익숙한 음악이 아닙니다. 그래서 초기에 연출가와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디테일한 부분보다는 전체적인 느낌을 잡습니다. 그리고 대본 분석과 자료 수집을 통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장면을 궁리하죠. 국립오페라단의 경우, 무대 제작은 제각각 다르지만 최소한 본공연 두 달 전부터 진행하는데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상상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을 구현하는 극장 환경, 전체 제작비, 규모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계속 검토해야 합니다.
고희선 보통은 무대미술가가 대본과 음악을 토대로 연출가와 의논해 무대를 만든 다음에 조명이 들어갑니다.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거죠. 흰 도화지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무대라는, 이미 있는 그림 위에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겁니다. 조명기에 색 필터를 끼우는데, 그건 화가가 물감을 고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밝기를 조절하는 건 물감의 농도를 조절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지된 그림이 아니라 움직이는 그림 위에 빛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게 정말 재밌는 작업이죠. 조명디자인에서 음악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오페라를 맡으면 음반을 외울 정도로 많이 듣습니다. 조명디자인 작업을 할 때 연극은 배우의 동선이, 뮤지컬은 템포가 중요한 반면 오페라에서는 전체 그림과 음악이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거든요. 창작 오페라는 연습 현장을 보면서 동선, 장면 변화, 무대 전환을 꼼꼼히 체크하고요.
주몽: (전투 중 분연히 일어서 활로 강을 내리치며) 나는 하늘의 아들 하백의 외손인 주몽이오. 내가 이 강을 건너야 함은 하늘의 뜻이니 황천과 후토는 나를 도우시어 이 강을 건너게 해주소서.
오이·협부·마리: 하늘이시여! 강의 신이시여! 우리 주군을 구하소서!
주몽: 내게 길을 열어주소서. 이 강을 건너가 하늘의 뜻을 펴게 하소서. (물고기들과 자라들이 몰려와 강에 다리를 만든다. 일행 서둘러 강을 건넌다)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대중문화 속 주몽이 떠올랐어요. 송일국이 출연한 드라마 ‘주몽’이 있었고, 시뮬레이션 게임 ‘주몽’도 있습니다. TV 리모컨으로 주몽을 안방으로 끌어올 수도 있고, 마우스로 주몽을 움직일 수도 있는 지금인데, 오페라로 주몽을 다시 만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임일진 이탈리아 오페라와 달리 바그너가 만든 독일 오페라에는 신화적 요소가 많이 등장합니다. 신화야말로 대중을 상대로 한 드라마나 게임업계에서 자주 소재로 삼는 것만 봐도 자국민이 갖는 민족주의를 넘어 전 세계인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다양하게 궁리한다면 주몽이 오페라 외에 연극이나 영화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 오페라의 원래 제목도 ‘고구려의 불꽃-동명성왕’인데,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이미 다른 매체를 통해 많이 알려진 ‘주몽’으로 바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고희선 주몽 신화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죠. 오페라 속의 주몽을 보러오는 관객은 사실 주몽의 스토리가 궁금해서 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구려의 불꽃-동명성왕’의 초연과 달리 음악이 어떻게 다듬어졌을지 궁금해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오페라는 종합예술이잖아요. 그래서 오페라 ‘주몽’은 관객이 스토리보다는 음악과 시각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막이 열리면, 삼족오의 형상이 그려진 대형 걸개그림이 무대 중앙에 걸려 있고, 황제의 복장을 한 주몽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 암전되고 잠시 뒤 사막에 삼족오가 날아가는 모습이 비친다. 그것을 배경으로 막 뒤에서 합창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며 암전된다.
‘고구려’ 하면 떠오르는 고분 벽화가 무대에 많이 쓰인 것 같습니다.
임일진 사실 참고 자료가 다른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굉장히 오래된 나라라 현재 유물도 별로 없고, 설령 남아 있다고 해도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더군요. 하지만 이렇듯 불확실해 보이는 벽화야말로 사실에 근거한 상상의 여지를 극대화해 고구려 탄생 신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몽’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참조한 레퍼런스는 무엇인가요?
임일진 고구려 벽화입니다. 그건 작품의 배경이 고구려라는 걸 보여주려고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고구려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죠. 자료의 유무를 떠나 고구려 하면 기상, 광범함, 대범함 등이 떠오르잖아요.
고희선 저 또한 고구려 하면 힘과 기상이 와 닿습니다. 그래서 조명도 부드러운 빛보다 강한 빛 위주로 선택했죠.
임일진 무대를 만들면서 고구려만의 힘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끌어들여 보여줄까, 아니면 역으로 비워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등등. 아무튼 공간의 미학적 기능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고구려의 정신과 힘을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 ‘웅장한 무대네!’라는 찬사를 끌어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몽’에는 무대미술과 조명만이 가능한 ‘전매특허’ 광경이 무엇입니까?
임일진 개인적으로 그런 것들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습니다. 무대미술에서 임팩트가 강한 효과가 반드시 필요할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주몽’에서는 디테일을 살렸죠.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미술의 특징은 수공예 같은 무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도 그 점을 많이 자랑합니다. 저는 한국의 수공예적 요소를 오페라에 접목하고 싶었어요. 보통은 배경을 평면 작화(作畵)로 제작합니다. 그냥 회화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일일이 스티로폼을 조각해 벽돌처럼 질감을 살렸고, 채색을 덧입혔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멀리서 볼 때 그러한 수고들이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생각하겠지만요.
고희선 사실 엄청난 차이가 날 겁니다! 거기에 조명이 들어가면 무대의 질감이 달라지죠. 부조(돋을새김)로 된 입체 세트는 조명을 잘 입혀야 합니다. 그래서 그 입체성과 질감·재질을 살릴 수 있는 빛의 방향과 각도가 제일 중요하죠. 조명을 잘못 비추게 되면 디테일한 입체 세트가 그냥 평면적으로 보이거든요.
임일진 때로 사람들은 무대미술가인 제가 ‘무대마술가’가 되길 바랄 때가 많아요. 무대에서 뭔가 ‘휙’ 하고 사라지거나 옮겨지는 등. 그런 기법은 근래에 뮤지컬에서 많이 하는데, ‘주몽’의 특징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디테일과 상징입니다.
보통 ‘한국적 무대’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조명에도 한국적인 색이 있습니까?
고희선 작품마다 고유의 색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립오페라단에서 했던 ‘천생연분’은 한국적 색이 담긴 창작 오페라지만, 그 색을 ‘주몽’으로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늘 고민하게 됩니다. 작품에 맞는 색을, 그리고 그것을 찾는 것을요.
주몽: 내 아버지가 이 땅에 내려와 다시 돌아가듯, 나 그의 뜻 따라 이 땅을 떠나리. 나는 돌아가리라. 하늘의 나라로. 동방의 위대한 나라, 고구려여, 영원하라! 고구려여, 영원하라! (주몽은 채찍을 들어 무대의 중앙을 힘껏 내리친다. 일시에 불이 꺼지고 하늘로 비상하는 주몽)
작품을 준비하면서 무대미술가와 조명디자이너의 충돌은 없습니까? 예를 들어 뒤에 가세한 조명이 이미 정해진 무대의 색채와 느낌을 바꿀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고희선 저는 충돌보다는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명은 무대가 설치되어야 진행되는 작업입니다. 무대 설치가 늦어지면 조명도 늦어지죠. 색에 대해서는 무대미술가·연출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조명이 어떤 색깔이냐에 따라 의상·배우 등 무대가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좋은 조명이란 화려한 채색보다는 무대가 원래 갖고 있는 기본 색감을 장면의 분위기에 맞게 최대한 살리는 것입니다.
임일진 무대미술가와 무대 디자이너를 혼용해 쓰곤 합니다. 조명·의상 등 창작 작업을 하는 이들은 사실 넓은 의미에서 모두 무대미술가라고 볼 수 있죠. 같이 무대미술을 하는 동료인 셈입니다. 그리고 조명·의상·미술에 대해 각자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기도 하고요. 밑그림을 그리는 초기부터 작품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없으면 안 됩니다. 제대로 된 프로덕션팀은 초기 구상을 논하는 테이블에서 모든 것을 끝냅니다. 눈앞에 무대가 나와 있는 현장에서 호불호를 이야기하면 끝이 없습니다.
국립오페라단의 창작 오페라가 오를 때마다 두 분은 늘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각각 꼽아주신다면.
임일진 지금은 성남문화재단 대표로 계신 정은숙 단장님과 2006년 양정웅 연출가와 함께 만든 ‘천생연분’입니다. 그동안의 창작 오페라는 무대가 사실적·설명적이었다고 봅니다. ‘천생연분’은 한국적 미니멀리즘과 양식화를 생각하면서 작업했고, 모든 점에서 파격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백이라는 비움의 미학을 한국적 평면성에 접목하면서도 무대의 열림과 닫힘을 통해 살아 있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줬고요. 해외 공연 때도 관객의 반응이 너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하고자 하는 스타일을 시도해본 작품입니다.
흔히 말하는 ‘한국적 미니멀리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임일진 사실 미니멀리즘이란 재료가 지닌 본연의 성질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간단하다고, 혹은 무대가 텅 비어 있다고 미니멀리즘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미니멀리즘이 참 어려운 것은 그 상징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선택과 집중이라고나 할까요?
끝으로 고희선 선생님도 참여한 국립오페라단의 창작 오페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오페라를 꼽는다면요?
고희선 2014년 서재형 연출가와 함께한 ‘천생연분’입니다. 무대 전환, 즉 ‘큐!’가 많은 작품이었는데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도 있었죠. “조명만 좋았다”라는 칭찬보다는 “(전체도 좋고) 조명도 좋았다”라는 칭찬을 조명디자이너들은 원하는데, 그런 만족을 얻은 작품입니다.
그렇다. 수많은 예술가가 군생하는 게 오페라라는 우주다. 오페라를 음악이라는 장르로만 국한하여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들리는 음악과 보이는 무대-빛이 어떻게 결구되는지 지켜보면서, 그 군생과 종합성에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이 한국 오페라의 미래를 밝게 하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또한 성악가들의 캐스팅과 그들의 노래에만 관심을 가졌는데, 임일진과 고희선을 만나고 나서 앞으로는 무대를 뚫어지게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도 6월, 주몽을 만난다면 당연히 귀는 활짝 열어두고 동시에 두 눈 크게 뜨고 임일진과 고희선이 빚은 디테일의 풍경을 찾아보시기를.
사진 박진호(studio Bob)
임일진 서울시립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밀라노의 브레라 국립미술대학 무대미술과 석사 및 우니베르시타 카톨리카 델 사크로 쿠오레 디 밀라노 연출·드라마투르그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고전·창작 오페라 외에 연극·무용·뮤지컬·창극·발레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연극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희선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무대미술로 석사를, 미시간 대학교에서 조명 디자인으로 석사를 취득했다. 이탈리아·독일 오페라부터 한국 창작 오페라뿐 아니라 뮤지컬·연극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무대미술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립오페라단 광복 70주년 기념작 ‘주몽’
6월 6·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주몽(바리톤 우주호), 황후예씨(소프라노 박현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