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의 작은 여행, 산책 그리고 음악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0월 1일 12:00 오전

클래식 음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산책길 이야기와

현대의 예술가들이 산책길에 즐겨 듣는 음악을 소개한다

걷기는 인간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위라 우리는 그것에 대해 별로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특정한 목적 없이, 보폭이나 속도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산책’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바쁜 일상의 틈을 걷는 것은 긴장을 풀어주고 여유를 갖게 하며, 마음을 풍요롭게 하기에 산책은 마치 작은 여행과도 같다.

예술가들이 산책을 즐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고독과 사색을 즐길 수 있고, 많은 영감과 소재를 안겨주며, 휴식과 충전도 할 수 있는 산책은 많은 클래식 음악가들에게 취미이자 일상이었다.

PART 1

클래식 음악가들의 산책 이야기

오스트리아 화가 율리우스 슈미트의 ‘산책하는 베토벤’. 그림 속 베토벤(1770~1827)은 입을 굳게 다물고 상념 가득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묵묵히 걷고 있다. 자연예찬론자이던 베토벤에게 산책은 매우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거의 날마다 모자도 쓰지 않고 비가 오든 해가 뜨겁든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점차 난청이 악화되던 나날 속에서 사람들과 멀어져가던 베토벤에게 산책은 유일한 안식처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1808년 베토벤은 요양을 위해 빈의 외곽 도시 하일리겐슈타트를 찾았다. 이곳에는 시냇물이 흐르는 작은 숲길이 있는데, 베토벤은 이곳을 사랑하여 자주 산책했다. 현재는 ‘베토벤 산책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숲길을 산책하며 교향곡 6번 ‘전원’의 악상을 떠올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전원’을 듣고 있으면 베토벤이 이곳을 산책하는 장면이 한 편의 영상처럼 떠오른다. 그가 직접 악보에 적은 표제처럼, ‘전원에 도착했을 때의 유쾌한 기분’(1악장)에 사로잡혀 산책길로 들어서고, 숲길을 따라 고요히 흘러가는 작은 ‘시냇가에서’(2악장) 마음의 평화를 맛보았을 것이다. 그의 주위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어디선가 ‘농부들의 즐거운 모임’(3악장)이 한창이다. 어떤 날에는 ‘폭풍’(4악장)이 몰아치기도 하고, ‘폭풍이 지나간 후의 평화’(5악장)에 깃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도 했을 것이다.

드보르자크(1841~1904)도 산책길에 종종 악상을 떠올렸다. 체코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이자 작곡가로서 자리 잡고 있던 드보르자크는 189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듬해에는 보헤미아에 남아 있던 가족들도 넘어와 함께 아이오와 주 스필빌에서 휴가를 보냈는데, 드보르자크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여 자주 산책을 즐겼다.

드보르자크의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칸’은 스필빌을 배경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숲속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반복되는 선율로 시작하는 1악장의 도입부는,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영감을 받아 탄생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3악장 스케르초에는 드보르자크가 산책로에서 발견한 어느 새의 울음소리를 바이올린의 높은 멜로디로 표현되어 있다. 4악장에는 교회 오르간의 코랄 선율을 모방한 조용한 악구가 등장한다.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교회 오르간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스필빌의 거리를 산책하는 드보르자크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19세기 중엽 모스크바에서 독특한 산책을 즐기던 음악가는 바로 차이콥스키(1840~1893)다. 그는 하루 2시간의 산책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책에서 읽고 거의 매일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나갔는데, 5분이라도 일찍 끝내면 병이 걸리고 불운이 닥치기라도 할 것처럼 정확히 2시간을 지키는 미신적인 산책을 했다. 이 산책 시간 동안 차이콥스키 역시 많은 악상을 얻었기에, 흔히 베토벤과 비교되곤 한다.

차이콥스키의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탄생 일화도 산책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러시아 5인조의 정신적 멘토였던 발라키레프가 차이콥스키에게 이 작품의 작곡을 제안한 것이 산책길 위에서였다. 그들과 함께 산책길에 동행한 차이콥스키의 친구이자 그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카슈킨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발라키레프와 차이콥스키 그리고 나는 산책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 날 세 사람이 함께 산책하러 나갔을 때 발라키레프가 차이콥스키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곡을 권유했다. 5월의 아름다운 어느 날이었다. 우리가 산책하던 언덕의 그 초록빛 숲과 높다란 전나무들….”

브람스(1833~1897)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뒷짐을 진 자세로 산책을 즐겼다. 거구의 몸집이기에 사진이나 그림을 통해 본 브람스의 걷는 모습은 언뜻 불편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 자세로 많은 곳을 걸어 다녔다. 자신의 이름을 딴 산책로를 가장 많이 보유한 작곡가가 아닐까 싶다. 뤼데스하임·빈·뮈르츠슐라크 등 아름다운 풍경과 산책로가 있는 곳에는 브람스의 흔적인 ‘브람스 산책길’이 남아 있다. 브람스의 산책은 철학자 칸트만큼이나 규칙적이었다. 매일 새벽 5시경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 걸었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산책을 통해 악상을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오전에는 항상 작곡에 몰두했다.

피아노 소품집 Op.118 2번 ‘인터메조’를 듣고 있으면 노년의 브람스가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걷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모호한 화성 진행 속에서 수줍은 듯 고개를 내미는 아름다운 멜로디에서, 산책을 나갈 때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 항상 주머니에 작은 사탕을 넣고 다닌 브람스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글 임형준 기자(byejun@gaeksuk.com)

PART 2

예술가 6인이 말하는 ‘산책길 나의 음악’

현대의 예술가들은 어떤 산책을 즐기며 영감과 감흥을 느끼고 있을까?

여섯 명의 젊은 예술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산책길과 그때에 즐겨 듣는 음악 리스트를 ‘객석’ 편집부에 보내왔다

지휘자 최수열

드레스덴 엘베 강가에서 듣던 음악

몇 년 전 독일 드레스덴에 살았을 때는 해가 넘어가기 직전, 어스름해지는 시간에 매일 엘베 강가를 천천히 걸었다. 노을이 물든 강가와 고풍스러운 건축물, 마치 예쁜 엽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참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로는 고독하기도 했다. 작품에 대한 해석뿐 아니라 살면서 갖게 되는 소소한 고민도 드레스덴 엘베 강가를 산책하며 ‘해결’하곤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도 드레스덴에서 작곡되었다고 한다. 서정성의 극치인 3악장을 듣다 보면, 어쩌면 라흐마니노프도 바로 내가 걷던 엘베 강가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를 떠올리며 외로움 가득한 나만의 플레이 리스트를 공개한다. 너무 오래 감상하면 쓸쓸함이 넘쳐 우울해질지도 모르니 적당량만 감상하시길.

최수열은 국제 앙상블 모데른 아카데미(IEMA)에서 활동했고, 현재 서울시향 부지휘자로 일하고 있다.

피아니스트 김다솔

스위스 장크트모리츠의 온도

장크트모리츠. 스위스 동남부에 있는 휴양도시로 유명한 이곳에는 장크트모리츠 호수가 중심에 자리해 있다. 겨울에는 꽁꽁 얼어 그 위를 걸을 수 있고, 여름이 되면 수영을 즐길 수도 있는 이 호수의 호숫가는 내가 유럽에서 겪은 산책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다.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음악의 온도를 재어보고,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다양한 감흥을 얻었다. 지난해 라벨의 작품인 ‘밤의 가스파르’의 첫 악장인 ‘물의 요정’ 연주의 영감을 얻기 위해 이 산책길을 찾았다가 이미 얼어버린 호수를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을 안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호수가 얼기 전 조금 일찍 찾아갔더라면 그해에 ‘밤의 가스파르’를 더욱 잘 연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습 중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고 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면 피아노 뚜껑을 닫고 나가버리는 것이 버릇이 된 나에게 산책은, 그저 일상이다. 2012년 장크트모리츠의 한 재단 상주 음악가로 여름 동안 머무르며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종종 장크트모리츠 호숫가를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 준비하던 작품 중 하나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이 협주곡의 느린 악장인 2악장은 피아노 레퍼토리 중 가장 낭만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낭만’이라는 명사의 범위에서도 많은 성격이 존재한다. 좀처럼 어떤 상상력과 개성을 가지고 이 아름다운 작품을 이끌어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시작한 산책길.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바로 해 질 녘 일몰이었다. 더운 여름날의 노을은 옅은 붉은색을 끼며 물놀이에 신난 아이들마저 게으르게 만들었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문득, 바로 그 기분 좋은 나른함 속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그 풍경 속에 늘 존재해왔던 것처럼.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스위스로 공연을 하러 갈 때면 기회를 노려 장크트모리츠를 종종 찾아가곤 했다. 그 다음 해 초겨울, 아직은 호수가 얼기 전이었다. 호수 물에 손을 담그면 온몸이 굳어버릴 것 같았고, 그곳의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는 따뜻한 옷으로 감싸고 있어도 얼굴을 차갑게 했다. 지난해 여름의 감동은 없을까, 아쉬운 마음으로 곧 열릴 공연에서 연주할 작품들을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나를 집중하게 한 작품은 바로 라벨의 ‘거울’ 3악장 ‘바다 위의 작은 배’였다. 이 악장의 바로 전 악장인 ‘슬픈 새’가 주는 더운 기운 때문이었을까. 겨울이 주는 하얀 이미지, 햇살에 비친 호수, 조금 전 얼음이었다가 막 녹아버린 것 같은 차가운 물결이 주는 감동은 그 어떤 음악인의 조언, 어떤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준 영감보다 훨씬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람의 체온을 재보듯 작품의 온도를 재본다는 것이 색다르게 들리겠지만, 가끔은 이 과정만큼 도움을 주고 해결책을 안겨주는 것이 없다.

장크트모리츠 호숫가에서 즐겨 듣던 음악을 소개한다. 이 작품들의 온도가 따뜻한지, 차가운지 상상하며 들어보시길.

김다솔은 앨런 길버트/뉴욕 필 등과 협연했으며, 현재 하노버 국립 음대에서 수학하고 있다.

음악감독 정재일

여운을 음미하던 거리

언젠가 멍하니 걷는 것을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이 걷던 코스는 역삼동 LG아트센터부터 예전에 살던 동네인 압구정동 성수대교까지였다. 천천히 걸으면 두 시간쯤 걸렸다. 음악과 연극, 무용을 보는 것에 푹 빠져 지내던 그때, 공연을 통해 받은 감동을 곱씹으며, 이미지들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며, 또 그저 무언가를 ‘생각’하며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마냥 걷던 그 시절이 그립다.

정재일은 밴드 긱스로 데뷔했고, 대중음악과 국악, 영화·극음악 등 다양한 범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대무용가 김설진

잠든 새벽길의 음악

산책이라기보다는, 걸어야 했던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어두웠던 순간들… 굳이 환하게 밝히려 하지는 않았다. 그저 어두운 채로 두고 싶었다. 그로 인해 그 안에서 빛을 찾을 수 있었다. 고향이 제주도라 어릴 적 걸었던 제주도 밤바다가 떠오른다. 서울에 올라와 수없이 걷던 동호대교, 그리고 벨기에 브뤼셀의 거리가 그동안 내가 가장 많이 다니던 곳이다. 작품에 대한 생각, 춤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걱정을 이 거리들과 함께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잠든 거리를 걸었던 것 같다. 가라앉은 길은 걷는 이를 겸손하게 한다.

김설진은 2008년부터 벨기에 현대무용단 피핑톰무용단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무버의 예술감독이다.

배우 지현준

일상을 특별하게 하는 음악

극장으로 가는 길,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나에게 반복적인 일상이지만, 때로는 특별한 순간이 되기도 한다. 달리는 버스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과 바람은 계절에 따라 다른 빛을 띠고,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흐르는 음악은 선곡에 따라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연습과 리허설을 준비하기 위한 한낮의 출근 시간, 일찍 도착해 머무는 분장실과 극장 주변에서의 혼자만의 시간, 저녁 10시경의 퇴근 시간 모두 나에게는 홀로 산책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순간이다.

지현준은 연희단거리패를 통해 데뷔했고 대한민국연극대상·동아연극상에서 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소리꾼 정은혜

행복한 사색의 시간

밤바람이 선선해진 요즘, 일을 마치고 돌아와 혼자 고양이처럼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있다. 한 시간 남짓 같은 음악을 반복해 들으며 한 공간을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연남동과 연희동 언저리를 뚜벅뚜벅 걷다 달리고 싶은 기분이 들면 그 길로 자전거를 꺼내 들어 한강으로 간다.

정은혜는 2013~2014년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했고, 현재 정은혜컴퍼니를 이끌고 있다.

정리 김호경 기자(ho@gaeks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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