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크 사티 ①

COMPOSER OF THE MONTH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8월 1일 12:00 오전

종교와 예술, 해학의 아이콘

1866 프랑스 옹플뢰르에서 출생
1879 파리 음악원 입학
1888 ‘3개의 짐노페디’ 작곡
1890 ‘가톨릭 장미+십자회’ 공식 작곡가·음악감독 임명
1892 발레곡 ‘위스퓌드’ 작곡
1893 ‘짜증’ 작곡
‘지도자 예수의 예술 도시 교회’ 설립

에리크 사티(1866~1925)에 대한 이미지는 ‘3개의 짐노페디’(1888) 중 1번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하면서도 오묘한 멜로디와 투명하면서도 몽환적인 화음은 감각적이면서 비범한 인상을 준다. 가볍지만 고급스러움을 풍기는 이러한 이중적 뉘앙스의 절묘한 균형은 분명 사티다운 특징이며, 그의 작품이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된 요인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짐노페디’는 카페 음악 작곡가의 노련함이 엿보이는 실용음악의 걸작이다.

그러나 ‘짐노페디’에서 조금만 눈을 돌린다면 사티의 당돌함에 어리둥절할 것이 분명하다. 지나치게 단순한 멜로디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화음 진행, 그리고 순수예술의 진지함과 대중적 해학의 기로에 선 이미지는 오늘의 우리에게 낯선 까닭이다.

당대 음악가들에게도 대형화하고 날로 복잡해지던 당시의 작곡 스타일에 극단적으로 배치되는 사티의 음악은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사티를 미래의 음악이 가야 할 길로 본 젊은 음악가들은 스스로 그의 추종자를 자처했고, 그의 작품은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니멀리즘 같은 후대의 사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에리크 사티 탄생 150주년을 맞아 오늘날 ‘짐노페디’에 가려진, 그리고 여전히 신선함이 살아 있는 그의 다른 음악들도 감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인정받지 못한 어린 시절
사티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옹플뢰르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가족과 파리로 이주했지만 2년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콩라드와 함께 다시 옹플뢰르에 사는 조부모에게 맡겨졌다. 그들은 가톨릭 신자였고, 사티는 10세에 생 레오나르 성당의 음악감독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비노에게 첫 음악 수업을 받게 된다. 이곳에서의 수업은 훗날 그가 종교적 음악을 다루거나, 중세 성가풍 선율과 교회 선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12세에 할머니가 해변에서 사체로 발견되자 사티 형제는 다시 파리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얼마 되지 않아 새 부인을 맞았다. 피아노 교사였던 그녀는 사티의 음악 교육에 도움을 줄 수는 있었지만, 그와 인간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맺진 못했다. 사티는 음악에 대한 감정이 계모로부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 정도로 음악에 싫증을 느끼고 말았다.

이듬해인 1879년, 정신적으로 방황을 겪는 가운데 사티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다. 그가 좋은 학생이 되길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사티는 곧 게으르고 집중력이 부족하며 재능 없는 학생으로 낙인찍혔고, 결국 1882년에 성적 부진으로 음악원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머무는 동안 사티는 살롱 음악을 작곡하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출판사에서 악보를 출판하며 나름 작곡가로서 활동했다. 2년 반이 지난 1885년 말 음악원에 재입학했지만, 여전히 그는 좋은 학생이 되지 못했다. 결국 사티는 이듬해 11월 군에 입대하며 음악원을 완전히 떠났다. 그런데 군대 역시 그가 마음 둘 곳이 못 되었다. 불과 몇 달 후, 추위에 장시간 노출된 사티는 기관지염이 발병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어린 시절 끊임없이 떠밀리면서 인정받지 못한 탓이었을까? 성인이 된 사티는 줄곧 자신을 인정해줄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 가운데 인간적인 갈등을 참지 못해 성급하고 극단적인 결단을 내리곤 했는데, 이는 열등감과 불안감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전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사티를 괴팍한 성격으로 내몰았으며 그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었다.

몽마르트르에서 탄생한 명작


▲ 사티가 피아노를 연주했던 카페 ‘르 샤 누아’

군대에서 돌아온 사티는 집을 나와 몽마르트르에 거처를 마련했다. 대중문화가 꽃피던 벨 에포크 시대(19세기 말~20세기 초)의 파리, 그중에서도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모여든 몽마르트르에서 음악가가 일할 곳은 많았다. 물론 대중음악을 연주한다는 전제 아래. 사티는 카페 ‘르 샤 누아’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이곳에서 피카소를 비롯한 큐비즘 화가와 베를렌·말라르메 같은 상징주의 시인 등 다양한 예술가를 만났다. 이들과의 대화는 소심하고 예의바르던 사티의 성격을 적극적이고 당돌하게 바꿔놓았다.

유명한 ‘3개의 짐노페디’(1888)를 작곡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간결하고 명상적인 선율과 교회 선법의 신비함, 과감한 불협화음의 해결되지 않은 불안함, 단순한 리듬 패턴의 반복, 가볍고 투명한 음향 등 최면을 거는 듯한 전형적인 사티의 스타일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이는 ‘반 바그너’ ‘반 드뷔시’라는 그의 모토와 관련 있으며, 중세의 단선율을 모방하는 취향과도 연결된다.

‘4개의 오지브’(1886)와 ‘3개의 그노시엔느’(1890)도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마디선이 없는 악보는 자연스럽게 흐르며 현장에서 울리는 사운드를 중시하는 그의 음악 스타일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 특징은 일시적이지 않고 그의 음악 전체를 지배했다. 이후에도 사티는 ‘스포츠와 오락’(1914) 등 여러 작품에서 마디선을 쓰지 않았다.

이렇게 연주자와 작곡가로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명성을 쌓았으면 좋았으련만 그의 삶은 궁핍해져가기만 했고, 덩달아 집의 크기도 점점 작아졌다.

종교와 신비주의에 탐닉하다
괴로운 현실은 사티가 종교와 신비주의에 탐닉케 하는 데 적잖이 일조했다. 1890년, 사티는 작가 조세펭 펠라당을 만났다. 이듬해에는 그가 창설한 ‘가톨릭 장미+십자회’의 공식 작곡가와 음악감독으로 임명됐고, 중세풍의 ‘장미+십자회의 종소리’(1891)와 펠라당의 대본을 바탕으로 한 ‘별의 아들’(1892)을 작곡했다. 이 두 곡은 장미+십자회의 행사에서 연주됐다. 장미+십자회의 행사는 높은 예술성으로 당시 파리 시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사티 또한 이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런데 펠라당과의 관계는 1892년 중엽에 깨지고 만다. 펠라당은 바그너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면서 ‘별의 아들’을 완벽한 바그너풍 작품으로 정의했는데, 사티는 ‘별의 아들’을 스스로 바그너 스타일로 작곡했음에도 자신이 그의 아류로 비치는 점이 몹시 불쾌했던 것이다. 분노에 찬 사티는 ‘질 블라스’지에 이렇게 기고했다.

“만약 내가 누구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면 그 스승이 바로 나 자신임을 이 지면을 통해 분명히 밝힌다.”

사티는 교단에서 탈퇴하고 펠라당과 절교했다. 그리고 자신의 음악에서 바그너적 요소와 중세 기사적 요소들을 버렸다. 이렇듯 사티는 자존감이 높았으며, 독창성을 생명으로 여겼다. 이는 예술가에게 매우 필요한 덕목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그의 인간관계를 좋지 않은 결말로 이끌기도 했다.

사티는 친구 콩타민 드 라투르와 함께 기독교적 요소와 신비주의가 결합된 발레곡 ‘위스퓌드’(1892)를 만들었다. 이 곡은 펠라당이 강조했던 바그너 양식을 풍자하는 작품으로, 펠라당에 대한 조롱도 담겨 있다. 초연은 1979년에서야 이루어졌다.

드뷔시와의 25년 우정


▲ 우정과 반목 사이를 오갔던 드뷔시(좌)와 사티(우)

1891년 ‘르 샤 누아’에서 ‘오베르주 뒤 클루’로 카페를 옮긴 사티는 그곳에서 당시 프랑스 작곡가들의 우상이던 드뷔시를 만났다. 사티는 드뷔시를 알게 된 것을 기뻐하며 그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드뷔시를 처음 만난 순간 그에게 압도당했고, 영원히 그의 곁에 있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드뷔시 또한 사티의 독특한 음악 세계에 큰 흥미를 보였다. 드뷔시는 ‘보들레르 시에 붙인 5개의 노래’(1887~1888)를 사티에게 헌정하며 “자신의 친구인 드뷔시에게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 현세에서 방황하고 있는 온화한 중세의 음악가 사티에게 헌정”이라고 기록했으며, 사티의 ‘천국의 영웅적인 대문의 전주곡’(1894)을 “계시와도 같은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일체 편곡하지 않던 드뷔시가 1897년 ‘짐노페디’ 1·3번을 직접 오케스트레이션해 연주한 것을 보면, 사티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드뷔시는 사티의 음악을 형식미가 없다고 지적했고, 이에 사티는 ‘배 모양의 3개의 소품’(1903)으로 대응하는 등 갈등의 조짐을 품고 있었다.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드뷔시의 친구이자 평론가인 루이 랄로이에 따르면, 둘의 관계에 긴장감이 감돌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 명은 형처럼 포용력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우월함에 대해 자신감이 넘쳤으며, 다른 한 명은 장난기 가득한 탈을 쓰고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려고 했다. 둘은 서로의 음악에 대한 긴장과 우정을 동시에 키워갔다.”

둘의 갈등에는 드뷔시에게 인정받길 원했고, 그를 통해 출세하길 바랐던 사티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드뷔시는) 왜 한편의 조그만 그림자 자리조차 내주지 않는 걸까. 햇볕을 원하는 것도 아닌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사티의 음악에 담긴 독특한 해학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드뷔시는 이를 일시적 현상으로 여겼다. 이에 격분한 사티는 1916년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드뷔시에게 원망하는 편지를 쓰고 25년 우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2년 후 세상을 떠난 드뷔시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893년에는 18세이던 라벨을 만났다. 그는 사티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았다. 당시 사티의 작품 중에는 ‘짜증’(1893)이라는 곡이 있다. 마디선 없이 26박 동안 해결되지 않는 화음이 이어지는 이 독특한 작품은 ‘840번 반복’이라는 황당한 지시로 유명하다. 라벨은 이러한 사티의 스타일 덕에 ‘볼레로’(1928)와 같은 당돌한 작품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쉬잔 발라동


▲ 쉬잔 발라동이 그린 ‘에리크 사티’(1892)

화가이자 모델이었던 쉬잔 발라동을 만난 것도 1893년이었다. 사티는 발라동과 하룻밤을 함께한 후 청혼했지만 그녀는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발라동은 사티의 옆집으로 이사하고 이웃의 연인으로 지냈다. 사티는 발라동을 ‘비키’라고 불렀으며, ‘안녕, 비키!’라는 짧은 음악을 만들었을 정도로 그녀에 대한 강한 애정(혹은 집착)을 보였다. 사티는 이 기간 동안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고딕식 무곡’(1893)을 작곡했고, 발라동은 사티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하지만 발라동은 6개월 만에 사티를 떠났다. 마음이 무너진 그는 6개월간 여자를 만나면서 버린 시간과 열정이 아깝다고 생각했고,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 결심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켰다.

장미+십자회도 탈퇴하고 발라동도 떠나간 사티. 종교의 초월적 가치를 통해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 했던 것일까? 그는 1893년 10월에 자신의 교회를 세운다. 이름은 ‘지도자 예수의 예술 도시 교회’(L’Église Métropolitaine d’Art de Jésus Conducteur)다. 사티는 펠라당의 교리에서 영향을 받아 “예술은 (…) 하나의 종교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교회를 위해 합창과 오르간을 위한 ‘가난한 자의 미사’(1895)를 작곡했다.

그러나 불순한(?) 의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열의가 식는 법이다. 1895년에 상속으로 약간의 돈이 생기자 사티는 12벌의 동일한 회색 벨벳 정장과 모자를 구입했고, 곧 ‘벨벳 신사’라는 별명을 얻었다(그리고는 다시 가난해졌다). 종교인의 분위기가 풍기던 중세 스타일을 고집하던 그가 신사 복장을 입었다는 것은 그의 관심과 음악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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