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축과 LP의 문화사

돌고 돌며 소리 내는 동그라미가 몰고 온 변화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7년 1월 1일 12:00 오전

전축과 LP의 활성화가 1960년대 한국 클래식 음악 문화에 몰고 왔던 다양한 변화들. 그 가운데 수집에 열을 올리는 새로운 문화 주체도 등장했다


▲ 경향신문 2월 22일

1960년대 들어 클래식 음악을 대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기면서 감상과 수용의 이유와 그 모습도 다양해졌다. 특히 당시 유행한 교양애호 문화는 클래식 음악 감상 문화의 풍경을 다채롭게 가져갔다. 대학생을 비롯한 대학 안팎의 소수 감상자들은 클래식 음악에 담겨 있는 ‘낭만성’을 소비하는 동시에 반드시 학습해야 할 ‘교양’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1960년대 초부터 보급된 전축과 LP(Long Playing) 레코드는 클래식의 수용과 소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전기축음기(電氣蓄音機)의 약자인 전축(電蓄)은 LP를 재생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가르켰다. 이 명칭은 1970년대 중반 ‘컴포넌트 오디오’나 ‘오디오’라는 이름이 정착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통용되었다. 유성기를 작동시키는 기계 태엽의 동력을 전기로 공급하는 방식으로 인해, 전기축음기라고도 불렸으며, 이것은 이전에 사용되던 유성기와 SP 레코드를 점차 밀어내면서 이후 1990년대 초까지 음악 소프트웨어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해왔다.

1954년 충무로에 음악사라는 이름으로 고급 전축과 LP 음반을 판매하는 점포가 생겼고, 1956년 ‘연악사(硏樂舍)’로 개명한 뒤 충무로 일대에는 ‘엔젤사’ ‘리빙사’ ‘하이화이사’ 등 동종 점포가 문을 열었다. 이들은 SP와 유성기를 판매하던 점포와 달리 새로 수입된 전축과 LP 음반을 판매했다는 점을 내세웠으며,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제품을 직접 수입하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하이엔드 오디오를 판매하는 점포와 희귀 음반을 판매하는 점포가 결합된 형태였다. 특히 점포의 이름에 상업적 의미가 강한 ‘사(社)’가 아니라, 집이라는 뜻과 문화적 의미가 강한 ‘사(舍)’를 붙인 것이 당시 이들의 지향점을 잘 대변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곳들은 ‘멋쟁이들이 출입하는 곳’이라는 평을 들으며 서울 환도 이후 거리의 독특한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음악사라는 명칭은 LP 판매점, 일명 ‘판 가게’로 불리며 오랫동안 존속했다. 또한 전축과 LP를 사고파는 장소를 넘어 음악 애호가들이 만나고 정보를 교환하는 ‘회합의 장소’로서의 의미도 갖게 되었다.

1960년대 초기의 전축이란 라디오 수신기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LP를 재생할 수 있도록 조립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천일사의 ‘별표 전축’과 성우전자의 ‘독수리표 전축’은 이 시기 전축의 대표적 모델이다. 이 외에도 활표·바이킹·엠파이어 등의 업체들이 국산 전축을 판매했는데, 대부분 현재 다른 기업으로 인수되었거나 소멸해버렸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유입되던 유성기는 대개 일본산이었던 반면, 전축에는 ‘국산’이라는 기호가 긴밀하게 따라다녔다. ‘일제(日製) 유성기’가 ‘국산(國産) 전축’으로 대체되는 이 과정은 소리-기계에 담긴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전반적 변화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피아노’라는 소리-기계에는 당시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데, 1962년부터 국내의 피아노 제조산업이 활발히 고개를 들던 때는 호경기라는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증권 붐의 덕분으로 피아노가 평상시의 2배 이상의 호경기를 보여 월평균 350여대나 팔렸다. (…) 대당 9만원을 호가하는 고급악기가 잘 팔린다고 하니 (…) 고객들의 대부분이 일반가정 수요이며 그 다음이 학교를 비롯한 교회 및 기타 수요임을 참작할 때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경제양상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경향신문 1963년 5월 27일)

이러한 사회적 배경 아래 전축과 LP는 부의 상징으로 통용되거나, 허영의 상징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재래의 온돌이 주는 비위생적 비활동적인 결함을 없애고” 입식 생활을 권하는 기사(경향신문 1960년 10월 21일)를 보면, 부유층만이 살 수 있는 이 집의 구조는 거실·침실·부엌과 식당·화장실로 구성되었는데, 거실에는 대부분 전축과 텔레비전 그리고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국내의 음반 제작


▲ 경향신문 1969년 2월 8일

사영 라디오 방송국, 이른바 ‘민방’이 속속 등장하던 1960년대. 1961년 문화방송(MBC), 1963년 동아방송(DBS), 1964년 동양방송(TBC) 등이 차례로 개국하며 라디오와 스피커의 보급률도 빠르게 증가했다. 방송산업의 확장은 연예인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낳는 데에 그치지 않고, 라이브 중심의 음악 문화를 레코드 중심의 음악 문화로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텔레비전·라디오의 보급으로 대중음악만큼 클래식 음악도 전파를 통해 대중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불어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클래식 음반 판매는 1970년대 들어서 해마다 20% 씩 증가하는 등 이른바 ‘클래식 붐’을 이루었다.

한국의 음악가들도 LP음반을 제작했다. 이를 처음 시행한 음반사는 킹스타였다. 1964년 이인영(성악)은 김선주/KBS교향악단·정진우(피아노)의 반주로 LP에 36곡을 취입했다. 김자경(소프라노)의 가곡집과 민요집이 출반될 예정이라는 광고도 돌았고, 이듬해 2월 같은 음반사에서 그녀의 한국가곡집이 출반되었다. 임원식/KBS교향악단과 함께한 녹음곡은 김성태 ‘한송이 흰 백합화’, 이흥렬 ‘부끄러움’ 나운영 ‘달밤’, 김순애 ‘4월의 노래’, 김동진 ‘수선화’, 현제명 ‘김동진’, 홍난파 ‘봉선화’ 등 12곡이었다.

1964년 4월 사단법인 대한레코드제작자협회 설립은 당시 활발하던 음반 제작의 현황을 간접적으로 대변해주는 것으로, 음반제작사와 판매업자의 협조를 통한 최초의 음반 단체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 단체는 1967년에 한국음반협회로 변경되었다가 1970년 해산되었고 1972년 부활했다.

LP의 발전과 연관되어 가장 중요한 제도적 변화는 1967년 제정되어 1968년부터 시행된 ‘음반에 관한 법률’이었다. 이 법은 일정 수준의 설비를 갖추고 공인된 업체만이 문화공보부의 정식 등록업체로 신고할 수 있다는 요건을 두었는데, 그 결과 40∼50여 개로 난립하던 음반사가 11개 정도로 축소·정리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클래식 음악과 대중가요를 막론하고 음반 제작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중음악계에서 가수 정훈희·문주란·김하정·박건·배호·현미·패티김·이미자 등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서울에 있던 10여 개 레코드사가 한 달 동안 발매하는 디스크는 약 15종에 지나지 않았다. 신세기, 지구 등 규모가 큰 회사에서는 3~4종까지 발매했지만, 한 달에 1개도 못 내는 회사가 많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클래식 음반은 꾸준히 발매되었다. 언론은 공연 외에 음반에 대한 소개에 적극적이었다.

“클래식 팬들에게는 대망의 디스크다. 잡다하게 재생반이 속출하고 있지만 이 정도의 명반도 많이는 나오지 못한 레코드가에 국산 염가반(盤)이 등장하였으니 희소식이라 하겠다. LP12인치 2매의 앨범 속에 ‘겨울나그네’ 전24곡이 피셔 디스카우의 폭 있는 음성으로 우리들을 감동시킨다.”(경향신문 1963년 2월 25일)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음반시장이 커졌지만 대부분 팝과 이른바 ‘경음악’에 대한 소비가 많았고, “클래식은 위축, 하이 파이니 스테레오니 기계에 까다로운 클래식족들은 재생된 우리나라 판(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형편”이었다(경향신문 1962년 3월 4일).

1969년에는 성음사(社)가 데카와 기술을 제휴하여 클래식 음반을 제작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푸치니 ‘라 보엠’의 아리아,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주요 품목이었고, “복사판이 아닌 좋은 음질의 음반을 살 수 있게” 되었다며 “음악애호가들을 위해 다행한 일”이라고 언론이 보도(경향신문 1969년 2월 8일)하기도 했다. 성음은 1973년 필립스·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을 맺었고 폴리돌·A&M·아르고·머큐리와도 계약을 맺어 클래식 음악과 팝 음반 생산에 주력했다. 1970년대 이후 국내 음반사들이 외국사와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 음반을 판매함으로써 복각음반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새로운 문화 주체로서 수집가


▲ 경향신문 1963년 5월 17일

1960년대 전축과 LP 문화가 만든 새로운 문화적 주체는 ‘수집가’다. ‘오늘의 상품’이던 음반이 유행의 흐름으로 인해 ‘처분해야 할 어제의 상품’이 되는 대중음악과 달리, 과거의 음악을 주로 다루는 클래식 음반 수집은 음반에 쌓이는 시간 개념에 대한 생리부터가 달랐다. 수집은 곧 역사를 탐구하는 고고학적 자세와 연결되기도 했다. 한편 이들의 음악과 소리의 수용 방식은 밀실 지향적이고 개인적인 수준에 그치는 것이었다.

경향신문 1963년 5월 17일자에 게재된 ‘내가 아끼는 디스크’라는 제목의 기사는 “비단 음악가가 아니라도 음악애호가로서 (···) 몇 분이 아끼고 있는 디스크를 소개”하는 기사로 개인의 수집열을 공론화하고 있다. 이 중 손동진(화가)의 기사를 보자.

“파리에 갔을 때 구한 걸로 베라 바르토크의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이란 디스크를 들 수 있습니다. 독일의 도위치 그라마포 회사제 베를린 심포니 연주에 펠렌스 프리차이가 지휘하는 걸 취입했습니다. (···) 그 밖에 나는 2백여 장의 디스크를 간수하고 있습니다. 바흐를 중심으로 한것들로요. 해마다 그랑프리상을 받은 작품은 꼬박 모으느라 노력하고 있답니다.”(경향신문 1963년 5월 17일)

수집가들의 개인화된 공간과 달리 전축과 LP가 있는 곳은 공연장과 성격이 다른 또 하나의 음향 공간으로 자리 잡으며 서울의 문화 풍경을 바꿔놓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음악감상실 ‘르네상스’다.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로 잘 알려진 이규태가 연세대 화학공학과에 재학 중 디스크자키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던 곳. 작곡가 백병동·강석희부터 문학평론가 이어령 등 다시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의 집합소였던 곳이다.

“40여 년간 레코드를 모아온 박용찬 씨(르네상스 대표) (…) 바하 음악, 특히 오라토리오(성가)를 좋아한다는 그가 지금껏 모아온 레코드는 고전음악만 1만 5천 장. 개인으로는 동양의 톱을 달리고 있다. 박씨 다음으로는 일본의 음악평론가 도무가 아라이비스 씨가 1만 3천 장으로 2위를 마크했었으나 얼마 전에 동경도 당국에 기증해버렸고 국내에선 그중 많다는 D방송국이 클래식과 재즈 합쳐 5천 장 정도.” (매일경제 1969년 9월 23일)

흔히 다방이라 불리는 곳에 전축과 LP가 있었고, 그것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 나왔다. 손님들은 차를 마시는 일보다 음악과 분위기에 발길을 거듭했다. 이러한 문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신문물이 수용되던 일제강점기부터 점차 커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1938년에 발행된 ‘조광’지에 실린 ‘현대적 다방이란?’ 제목의 글을 보면, ‘차 파는 곳’과 ‘차 마실 기분을 파는 곳’으로 다방을 구분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에 다방·카페는 계량화가 불가능하고 형상조차 없는 기호(嗜好)가 상품으로 유통되는 장소였다.

1960년대 LP와 전축의 문화가 ‘수집’의 문화를 낳으면서 탄생시킨 새로운 주체는 ‘개인화된 청중’이었다. 사실 이들은 유성기와 SP가 유행하던 일제강점기에도 존재했다. 19세기 말에 서양 음악이 조선에 수용될 때, 음악에 대한 청취는 여과 없이 눈앞에서 연주하는 연주자의 음악을 듣고 감상하고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그로써 자연스레 연주자와 듣는 자가 구분되었고, 듣는 자들은 군(群)을 이루며 청중이라는 계통으로 진화했다. 이런 이들이 SP와 유성기를 거쳐 LP와 전축 그리고 국내 산업을 통한 생산과 시장의 활성화로 인해 공공(公共)의 음악회를 벗어나 홀로 음악을 즐기는 이들로 성장하며 ‘개인화된 청중’이 된 것이다.

1960년대 전축과 음반 문화, 그리고 수집에 대한 열광은 1970~1980년대에 형성된 고집스럽고 집요한 마니아 문화를 이루는 전초전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 주체가 클래식 음악 시장에 자리 잡던 1980년대 중반부터는 독특한 콘셉트의 음반들이 수입되어 더 많은, 더 독특한, 더 개성적인 음반을 추적하고 수집하며 필청하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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