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뮤직: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10월 12일 9:00 오전

셰이프 오브 뮤직: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기억의 형상과 감각의 균형

2018년 데스플라/프랑스 오케스트라 콘서트(협연 에마뉘엘 파위)

 

 

 

 

기억의 성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감촉, 행복했던 날의 냄새, 함께 나눈 달콤한 맛이 녹아있다. 음악으로 각인되어, 마치 내 인생 어느 순간이 뮤직비디오 같다고 느끼는 기억도 있다. 영화를 볼 때 이런 순간은 더욱 명확해진다.

영상에 각인된 음악은 더 또렷한 기억으로 남는다. 영화 전체를 기억하지 못해도 가장 감동적인, 또는 무척 인상적인 순간에 흘러나온 음악과 장면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마음에 녹아들고 추억으로 남는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혹은 무심히 앉아있다 듣게 되는 영화음악은 우리를 영화를 보던 날의 그 감각 속으로 휙 끌어다 놓는다.

 

음악인, 데스플라

얼마 전,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코네(1928~2020)가 고인이 되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음악을 들려주었던 그의 죽음은 마치 오랜 친구를, 사려 깊은 어른을 잃은 것 같은 큰 슬픔을 주었다. 그의 음악에 우리의 기억과 감각이 너무 깊게 맞닿아 있어서 그 상실의 아쉬움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더해져 ‘셰이프 오브 뮤직: 알렉상드르 데스플라’(2018)를 더 주의 깊게 보았다.

엔니오 모리코네와 함께 가장 아름다운 영화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로 인정받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1961~)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음악을 들으면 대번에 알아차릴 법한 수많은 영화음악 명곡을 만들었다.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작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8) 이외에도 제목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2004) ‘탄생’(2004) ‘더 퀸’(2007) ‘색, 계’(2007)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9) ‘킹스 스피치’(2011) ‘아르고’(2012) 그리고 가장 최근작 중 하나인 ‘작은 아씨들’(2020) 등이 있다.

프랑스 출신인 데스플라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트럼펫·플루트를 연주했고 관현악 음악을 주로 작곡했다. 1990년대 초 프랑스 영화음악 작곡을 시작으로 영화음악을 시작했고, 2004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탄생’을 통해 할리우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영화감독 스티븐 프리어즈, 피터 웨버, 톰 후퍼 등 세계적인 거장은 물론, 웨스 앤더슨 감독과의 인연도 깊다. ‘문라이즈 킹덤’(2012)과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등을 함께 했다. 최근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작업했고 이 작품을 통해 2018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음악상을 나란히 받았다. 데스플라는 일단 한번 협업을 하면 계속 같은 감독과 작업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2021년 개봉 예정작 ‘피노키오’도 함께 하고 있다.

이번 다큐멘터리의 감독 파스칼 쾨노는 2007년 작곡가 가브리엘 야레(1949~)를 시작으로 총 7명의 영화음악 작곡가를 그린 다큐멘터리 시리즈 ‘영화음악의 거장들’을 만들었다. 극적인 장치나 자극적인 편집 없이 무덤덤한 감독의 시선 덕분에 각 음악인의 이야기에 오롯이 집중하기 좋은 시리즈인데, ‘셰이프 오브 뮤직: 알렉상드르 데스플라’는 시리즈의 6번째 작품으로 2014년에 제작되었다(‘셰이프 오브 뮤직’이라는 부제가 2017년 개봉작 ‘셰이프 오브 워터’를 연상시켜 관련 내용이 나올 것 같지만, 본 다큐멘터리는 2014년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2015년 이후 제작된 영화 이야기는 담기지 않았다).

 

조화와 균형, 그 사이

이 다큐멘터리는 데스플라가 그의 대표작들을 만드는 과정을 인터뷰와 녹음 현장, 오케스트라 합주 장면 등을 통해 기록한다. 1년에 평균 6편, 최소 4편 이상의 영화음악 작업을 하는 등 다작을 하면서도 수준 높은 음악을 만들기로 유명한 데스플라는 작곡 과정에 팀을 이루지 않고 혼자 작업하는 것으로 더 유명하다. 하지만 혼자 일을 할 수 없는 작업의 특성상 작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는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나, 함께 일한다.

웨스 앤더슨, 자크 오디아르 등과 감독 자격으로 인터뷰에 참여한 조지 클루니 등 데스플라와 함께 작업했던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 순간을 회상하며, 한결같이 그의 균형감각과 소통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실제로 영화음악 작업 의뢰가 들어오면 그는 시나리오를 먼저 보고, 작품 안에 공감할 지점이 있는지를 살핀다고 한다. 그리고 함께 작업할 감독의 이전 작품들까지 확인한 후 결정한다. 그만큼 데스플라에게 영화의 이야기와 감독의 스타일은 무척 중요하다.

영화의 주제와 이야기, 캐릭터를 모두 분석하고 만들어낸 그의 음악에 균형감각이 느껴지는 것은 영화라는 예술 작품과 영화감독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는 영화 음악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있지만, 감독과 견해가 다른 경우 늘 감독의 의견을 우선하여 따른다. 감독은 결국 영화의 방향을 정하는 사람이고 최종 결정권자라고 믿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음악이 영상에 앞서면 과잉이 되고, 영상의 의미를 놓치면 결핍이 되는 영화음악의 특성을 고려할 때 데스플라가 가진 균형감각은 영화음악가가 지녀야 할 주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만들어진 영상에 음악을 입히는 것, 어떻게 보면 더 예쁘고 화려한 옷을 입히는 일처럼 보이지만, 그의 영화음악은 언제나 영상이 이야기하는 그 바탕, 즉 골격과 함께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시나리오를 읽고 캐릭터를 분석하고, 그 화면이 전하는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한 후 음악을 만든다. 그래서 음악이 영상보다 앞서거나, 이야기와 유리되어 겉도는 일이 없다.

데스플라는 현악기와 금관악기가 어우러진 오케스트라 화음을 만드는 것을 즐기는데, 조화와 균형이 필수적인 오케스트라 작곡의 경험이 영화음악에 긍정적으로 녹아있다. 그는 종이에 연필로 음표를 하나씩 그리고, 감독의 요청에 따라 악보를 순식간에 바꾼다. 그는 영화음악이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다는 것, 그리고 영화의 전부 혹은 독보적 주인공이 아닌 영화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기대와 달리 이 다큐멘터리에 영화음악과 어우러진 영화 장면과 은밀하고 개인적인 데스플라의 이야기는 담겨있지 않다.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초점이 음악인 데스플라에 맞춰져 있어서, 그 구성이나 방식이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모든 순간이 악상의 순간이며, 어디서든 음표를 그리는 그의 모습을 통해 예술가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진중한 시간이 감동적인 울림을 만든다.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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