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토르 피아졸라 탄생 100주년 특집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10월 4일 9:00 오전

아스토르 피아졸라 탄생 100주년

빈민가에서 태어나 세계로 진출한, 누에보 탱고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전통 탱고에 균열을 내고 누에보 탱고의 결실을 얻었다. 이어지는 지면에서는 피아졸라의 삶과 음악을 돌아보고, 탱고 불모지와 같은 한국의 탱고음악에 새로운 역사를 일구어낸 반도네온 제작자·반도네오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를 만난다. 이어 국악과 만난 탱고의 문화사를 돌아본다.

기획·구성 임원빈 기자

PART1 | 피아졸라의 음악과 삶

PART2 | 레오 정·이어진·이성주 인터뷰

PART3 | 한국 탱고의 문화사

PART1 | 피아졸라의 음악과 삶

탄생 100주년을 맞은 아스토르 피아졸라

아스토르 피아졸라 (1921~1992)는 오늘날 탱고음악의 상징적·절대적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춤곡으로 가둬진 탱고의 의미를 감상을 위한 음악으로 돌려놓았고, 탱고의 범위를 전 세계로 확장시켰다. 피아졸라에게 다가가기 전 탱고음악의 역사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Astor Piazzolla
Nuevo Tango

피아졸라의 음악과 삶
전통을 가르고 태어난 누에보 탱고

아프리카-유럽에 뿌리를 둔 남미의 음악, 탱고

탱고는 19세기 유럽의 음악이 아르헨티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리듬이 혼용된 복합적인 음악이었다. 남부 유럽의 고전적인 춤곡과 아프리카 이주민들의 민속음악이 결합된 탱고음악은 쿠바 아프리칸 노예들의 음악 ‘하바네라(Havanera)’에 영향을 받았다. 이후 더 강한 템포감과 아르헨티나의 목동을 일컫는 ‘가우초’의 선율이 차용된 ‘밀롱가(Milonga)’ 등의 고유한 형식으로 발전했다.

1860년대 밀롱가는 독특한 당김음을 가진 4분의 2박자 카니발 음악 칸돔블레(Candomble)로 진화하고, 이는 탱고의 원형에 가장 근접한 음악이 되었다. 그 밖에 유럽의 폴카, 남미의 살사·볼레로의 영향을 받았다. 탱고의 다문화적 배경은 오늘날 탱고가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요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탱고의 산지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항구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 지역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당시 보카에는 부두와 신생공업지대가 인접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에서 온 극빈층 이주민들이 모여 살았다. 도시에는 생활에 찌든 노동자의 권태와 고독감이 가득했다. 하층민의 가난한 삶과 체념적 인생관은 라틴음악의 격정과 융화되어 탱고음악의 정서와 내용이 되었다.

최초의 탱고곡은 1880년대에 발표된 ‘바르토로(Bartolo)’로 기록되고 있다. 초창기의 탱고는 플루트·클라리넷 등으로 연주되었지만 1910년 무렵 ‘새벽(El Amanecer)’의 작곡자인 로베르토 피르포(1884~1969)가 처음 반도네온을 사용하면서, 반도네온은 탱고의 상징이 되었다. 무거운 음색의 반도네온은 스타카토, 레가토 주법으로 아르헨티나 탱고의 독특한 리듬감을 재현하는 데 유용한 도구였다.

탱고가 유럽에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였다. 탱고음악은 유럽에서 새로운 작풍으로 작곡·연주되었고, 탱고는 ‘아르헨티나 탱고’와 유럽의 우아한 댄스 음악이 접목된 ‘콘티넨털 탱고’로 분화되었다. 콘티넨털 탱고는 유럽 상류사회의 무도회에서 시작돼, 정서와 계급에서 아르헨티나 탱고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다채로운 현악기가 채용되어 실내악적인 감수성이 더해졌고, 아코디언이 채택되어 밝고 매끄러운 멜로디가 중심이다.

초기 탱고음악의 발전, 카를로스 가르델

카를로스 가르델(1890~1935)은 탱고음악의 첫 번째 거장이다. 수려한 외모, 아름다운 음색, 뛰어난 작곡 능력을 보유한 그는 최초의 탱고 스타, 작곡가이자 보컬리스트였다. 1917년 최초의 탱고 히트곡 ‘슬픈 나의 밤(Mi Noche Triste)’를 발표하면서 열광적 지지를 얻은 그는 ‘나의 사랑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Mi Buenos Aires Querido)’와 같은 명곡을 남겼다. 무엇보다 가르델의 최고 공로는 훗날 피아졸라의 탱고음악 개혁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안겼다는 것이다.

탱고의 황금기인 1930년대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때였다. 1930년 군부가 아르헨티나를 점령했고, 탱고음악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가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면서 탱고음악은 ‘아르헨티나 서민들의 자유를 위한 찬가’라는 의미를 얻게 된다. 1946년 포퓰리즘을 표방했던 후안 페론이 집권하고, 영부인 에비타가 정열적인 탱고를 선보임으로써 탱고는 최고의 중흥기를 맞는다. 그러나 페론주의가 선택한 정치적·외교적 고립과 1955년 로나르디 군부의 집권, 경제적 공황을 겪으면서 탱고는 20여 년 동안 암울한 어둠 속에 버려졌다. 소멸할 것 같았던 탱고가 부흥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피아졸라 때문이었다.

피아졸라의 등장

피아졸라는 1921년 3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쪽으로 400㎞ 떨어진 마르 델 플라타(Mar del Plata)에서 태어났다. 피아졸라가 세 살 때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해 ‘리틀 이탈리아’ 지역에 자리 잡았다. 소년 피아졸라는 싸움꾼으로 자라났다. 피아졸라는 “뉴욕의 뒷골목을 헤치며 싸워나갔던 거친 경험들이 자신의 음악계에서 인내하고, 승리할 수 있는 의지의 원동력이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1959년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를 발표한 이후 ‘베레틴(Berretin)’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 중 ‘겨울(Verano Porteno)’ 등을 쏟아내며 탱고의 부흥을 꾀했다. 피아졸라는 탱고음악이 새로운 양식으로 진화·발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의 화성 체계를 탱고에 이식해 ‘누에보 탱고(El Nuevo Tango)’의 음악적 위상을 현대 클래식 음악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격상시켰다. ‘새로운 탱고’를 향한 그의 선언 아래 깨어 있는 탱고 작곡가와 연주자가 몰려왔으며, 변화의 흐름 속에 탱고는 오늘까지도 닫힌 음악이 아닌 열린 음악으로 진화하고 있다.

피아졸라의 꿈을 빚은 스승들

피아졸라를 음악으로 이끈 이는 그의 부모였다. 탱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피아졸라에게 반도네온을 선물했다. 1934년, 피아졸라의 아버지는 가르델에게 나무 조각을 선물하며 아들을 위한 인연을 맺고자 했다. 가르델과 피아졸라의 가족은 친분을 쌓았다. 가르델이 바로 그 피아졸라의 반도네온 연주를 듣고 매료되었다. 그는 자신이 제작·주연하던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1935)에 피아졸라를 출연시켰다.

가르델은 피아졸라에게 자신의 콘서트 게스트 출연과 함께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투어 콘서트에 동행하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는 피아졸라의 삶을 연장시켰다. 1935년 6월 24일 가르델이 바로 그 콘서트 투어 중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가르델은 피아졸라의 음악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최초의 스승이었다.

1937년, 가족과 함께 고향 마르 델 플라타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회계사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시험에 실패한 후, 음악이 자신의 운명임을 깨달았다. 그는 최고의 반도네오니스트 아니발 트로일로(1914~1975)를 찾아갔고, 저명한 밴드인 아니발 트로일로 앙상블의 반도네오니스트 겸 편곡자로 발탁되었다.

당시 피아졸라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작곡과 오케스트레이션을 위한 전문적인 학습에 목말라 있었다. 그는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1887~1982)에게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악보를 들고 찾아갔다. 루빈스타인은 그의 가능성을 보고 작곡 공부를 권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1916~1983)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튿날 아침 히나스테라는 피아졸라의 첫 번째 작곡 선생이 되었다. 피아졸라는 그의 곁에서 6년 동안 피아노 협주곡·실내악곡 등을 작곡했다. 1953년 작곡 콩쿠르에서 우승한 그는 부상으로 파리에서 수학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작곡가 나디아 불랑제(1887~1979)에게서 혹독한 수련을 받았다. 불랑제는 피아졸라에게 탱고만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임을 일깨워주었다. 피아졸라는 자신의 삶을 바꾼 세 명의 위대한 스승으로, 히나스테라, 불랑제, 그리고 탱고의 고향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언급하곤 했다.

성역화된 탱고에 혁신의 메스를 가하다

1955년, 유학을 마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피아졸라의 평전 ‘피아졸라, 위대한 탱고’에서 이야기하듯 약 20년 동안 ‘투쟁’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성역화된 음악’ 탱고에 ‘혁신의 메스’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의 선택은 탱고에 클래식 음악의 화성·오케스트레이션·대위법을 적용한 것이었다. 바흐·스트라빈스키·버르토크·라벨의 유산은 그의 새로운 탱고 작곡을 위해 사용되었다. 더불어 그는 어린 시절 미국에서 들었던 재즈의 악기편성, 스윙, 불규칙적인 리듬감, 즉흥연주를 적극적으로 이식하고자 했다. 사람들은 피아졸라가 실험한 새로운 탱고를 ‘누에보 탱고’라 칭하게 되었다. 그의 새로운 음악은 젊은 청중을 사로잡았으나, 전통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탱고 순혈주의자들에게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도 그의 음악이 진보적이라며 억압했다.

그러나 피아졸라를 향한 비난, 이에 완강하게 맞섰던 피아졸라의 저항이 거세질수록 그의 누에보 탱고는 넓은 공간으로 확산되고, 새로운 청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때부터 아르헨티나 탱고의 역사는 ‘친(親)피아졸라(피아졸리스타)’와 ‘반(反)피아졸라(안티피아졸리스타)’ 간의 대립으로 발전·진화했다.

누에보 탱고의 본격적인 개화 시점은 1960년이었다. 피아졸라의 혁신은 외형상 탱고 앙상블의 악기 편성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950년대 솔로에서부터 오케스트라, 그리고 8중주와 9중주를 통해 모색되었던 새로운 탱고를 향한 접근은 1960년 결성되어 1974년까지 유지된 첫 번째 누에보 탱고 퀸텟(Nuevo Tango Quintet)을 통해 발화되었다. 이 시기, 피아졸라는 반도네온을 중심으로 다양한 악기를 편성에 흡수하면서 새로운 탱고음악의 사운드를 모색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음악은 소수의 것이었다. 피아졸라의 첫 번째 누에보 탱고 퀸텟은 잦은 멤버 교체와 수시로 바뀌는 악기 편성으로 1974년 해체되고 말았다. 하지만 피아졸라를 위한 뜨거운 환영은 유럽에서 일고 있었다. 유럽에서 발매된 피아졸라의 음반은 꼭 들어야 봐야 할 앨범으로 대두되었다.

트로일로

루빈스타인

히나스테라

불랑제

 

 

 

 

 

타지에서 되찾은 영광

1974년 피아졸라는 프랑스로 향했다. 1978년 피아졸라는 두 번째 누에보 탱고 퀸텟을 결성했다. 그의 2기 탱고 5중주단은 피아졸라 음악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세계의 음악가들은 음악에 깃든 비애, 격정, 관능, 그리고 희망과 절망의 드라마에 탄복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피아졸라와 누에보 탱고의 이름은 단순히 탱고의 개혁을 넘어선, 새로운 음악의 발견, 오늘의 음악이 지향해야 할 자세로 상징화되었다.

아르헨티나도 피아졸라의 드높아진 위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1985년, 그가 돌아왔을 때, 조국은 탱고를 전 세계에 알린 공로를 치하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광스러운 시민’으로 추대하였다. 1988년 5월,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 퀸텟은 음반 ‘La Camorra’를 마지막으로 녹음한 후, 6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1990년 8월 4일, 피아졸라는 파리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뒤 23개월간의 투병 생활을 했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1992년 7월 5일, 그는 탱고의 성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피아졸라의 탱고는 탱고음악뿐만 아니라 클래식·재즈·팝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음악가가 머물 수 있는, 불멸의 쉼터가 되었다. 그가 행한 고단한 투쟁과 실험의 결과는 오늘과 내일의 음악이 향해야 할 구체적인 방법론이자 해답이다.

정리 김민주 수습기자 (※ 본 기사는 본지 2013년 1·3월호에 게재된 ‘아스토르 피아솔라’(하종욱 작성)를 발췌·정리했다)

Book

피아졸라

마리아 수사나 아치·사이먼 콜리어 저 | 한은경 역 | 을유문화사

성역화된 탱고에 도전장을 던진 피아졸라의 인생을 단번에 읽어낼 수 있는 책이다. 가족과 친구들, 동료 아티스트들과 진행된 인터뷰와 다양한 기사, 자료들을 통해 피아졸라의 삶과 음악 세계를 엿본다. 연주가로서의 성장, 두 번의 결혼과 가정생활, 연주 및 리코딩 작업 등 탱고의 역사를 바꾼 그의 개인적 서사를 담았다.

 

 

PART2 | 레오 정·이어진·이성주 인터뷰

한국에서 탱고를 빚는 사람들

1. 반도네오니스트·반도네온 제작자 레오 정
우리는 항상 빛나고 있다

레오 정 반도네온 제작소로 들어가려는 문에는 한 줄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우리는 항상 빛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탱고가 빛을 보기까지의 여정은 험난했다.

레오 정(1972~)은 새로운 길의 여정이 버거웠지만, 황무지를 개척해가는 기쁨을 안고 묵묵히 걸어왔다. 2012년 ‘레오 정 반도네온 제작소’를 설립하고 2017년 공식적으로 그 이름을 알렸다. 그는 인터넷도 생소하던 때 막연히 반도네온 이미지를 찾아 목공소에 가서 비슷한 사이즈로 판을 제작해달라고 했다. 물어볼 곳도, 답 해주는 이도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무판에 운지를 하나둘 외우기 시작한 것이 반도네온과 그와의 인연의 시작이다.

반도네온의 수요가 더 많은 아르헨티나가 아닌 한국에서 반도네온 제작소를 연 이유가 궁금하다.

오히려 반도네온 제작자가 없다는 것에서 더 가능성을 보았다. 한 마을에 여러 개의 우물이 있는 것과 한 개의 우물이 있는 것의 차이다. 최소한 누군가는 나처럼 탱고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르쳐주는 이가 없어 한국에서 반도네온 제작소를 열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했을 것 같다. 아르헨티나 유학 시절, 나사 하나가 궁금해 180km 떨어진 곳까지 찾아갔다. 한편, 한국에서는 리드 플레이트(울림판)를 연구하기 위해 서울대 신소재공동연구소에 의뢰를 해 분석과정을 거치기도 했고, 여러 전문기관의 자문을 구해 악기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했다. 필살기, 비밀 기술이란 없다. 그 기술은 모두 악기에 들어있다. 단지 그 비밀을 끈기 있게 파헤치는 건 본인 몫이다.

전수받고자 하는 이도 많을 것 같다.

진심과 간절함이 닿을 때 언제든지 가르쳐줄 준비가 됐다. 하지만 아직 그 진심과 간절함을 보지 못했다. 반도네온 제작은 내 삶의 일부분과도 같다. 제작기술을 가르쳐주는 건 내 삶을 함께 나누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간절함이 한국 탱고음악 발전에 중요한 요소라고 보는가?

간절함이 좋은 연주자를 낳고, 좋은 연주자가 좋은 관객을 모은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절대적 실력을 갖춘 반도네오니스트, 탱고음악가가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적인 대학 기관에서 학제로 편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탱고를 만날 기회가 점점 많아져야 한다. 그런 시도를 전혀 안 했던 것은 아니다. 탱고 페스티벌, 반도네온 페스티벌 등을 개최해 관객에게 더 친숙히 다가가려고 했다.

악기를 제작할 때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는가?

나는 제작자이기 이전에 연주자다. 연주자로서 악기의 개선점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악기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단단한 내구성을 갖추고 음향 확장을 유도했다. 일반적인 반도네온의 내부 구조는 직각이다. 아무리 끼움 축(내구성 강화를 위해 직사각형 나무를 잘라 덧대는 것)을 보태도 소리의 울림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내부에 둥글게 만든 공명통을 덧붙이면 소리가 모여 밀도 있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금방 틀어질 수 있는 악기의 내구성도 보강하는 역할을 한다.

Processed with VSCO with m5 preset

 

 

 

 

 

 

 

 

 

 

 

 

 

마른 우물 속에서 퍼올린 탱고

레오 정은 반도네오니스트 이전에 탱고 안무가로도 활동했다. 재직 중이던 회사에서 받은 업무 스트레스를 해소할 목적으로 시작한 취미가 일이 커진 것이다. 이후 갑작스럽게 겪은 교통사고는 그의 삶의 새로운 신호가 되었다. 그는 유한한 인생의 행복한 결말을 고민했고, 마음속 담아 두었던 반도네오니스트의 꿈을 키웠다.

탱고 안무가로서 이력이 반도네오니스트로서의 음악적 활동에 어떤 도움이 되었나?

춤은 철저하게 전통탱고의 영역이다. 전통탱고를 이해해야 누에보 탱고가 보인다. 전통탱고에 요구되는 구체적인 형식은 마치 사투리의 어감을 배우는 것과 동일하다. 안무가로서의 경력이 탱고의 ‘사투리’를 체화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르헨티나 국립 탱고 아카데미와 부에노스아이레스 고등음악원에서 수학했다. 유학 한 달 전 급하게 구한 반도네온으로 유학길에 올랐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가?

시작은 맨땅의 헤딩이었지만, 유학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스페인어를 전혀 할 줄 몰랐지만, 학교 측의 배려로 영어가 가능한 조교의 도움을 받아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먼 나라에서 그들의 음악을 하겠다고 왔으니 신기할 법도 하다.

탱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두와 신생공업지대가 인접한 보카에서 태동했다. 거친 항만 노동자의 땀과 고독함이 탱고음악의 정서가 되었다.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음악적 정서가 어떤 부분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비슷한 듯하지만, 다르다. 이들의 사랑 표현 방법은 3분이면 모두 끝난다. 마음에 담아두기 전에 이미 말로 표현하는 것이 이들의 국민성이다. 우리가 공통점을 느끼는 건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일 것이다.

연주자·교육자·악기 제작자 등 다방면으로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탱고가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 삶은 유한하다는 것이 원동력이다. 언젠가 끝이 있는 삶을 어떻게 잘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결국 내가 행복하고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탱고음악이었다.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가 궁금하다.

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하는 탱고음악가들을 한데 모으는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다. 신진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에게 무대 기회를 제공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촬영감독이자 음향감독으로 영화를 준비 중이다. 탱고를 주제로 인간의 삶을 다룬다. 한편, 장기 프로젝트로 반도네온 박물관도 준비하고 있다.

글 임원빈 기자 사진 박유리 –

 

2. 반도네오니스트 이어진
묵묵히 걸어 간다는 것

무엇이 그를 탱고의 세계로 이끌었을까. 서울대 건축공학 박사를 수료한 이어진(1978~)은 33세에 돌연 반도네오니스트의 길을 걷는다. 그가 갑자기 음악의 길에 들어선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 누구보다 음악의 굴레 안에 있었다. 6세 때 피아노를 접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 취미로 클래식 기타를 꾸준히 배웠던 그는 학교 선배가 들려준 피아졸라의 ‘사계’를 통해 그 음악에 점점 잠식되었다. 때마침 남미 음악과 재즈를 즐겨 듣고 있던 때여서 이끌림은 자연스러웠다. 왕자웨이의 영화 ‘해피 투게더’(1998)를 보고는 반도네온에 더 빠져들었다. 배경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이고 음악도 피아졸라의 음악이었다.

반도네오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미 나의 전공 분야에서 활동 폭을 넓히던 차였고, 33세라는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하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2009년에 반도네온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막상 하려니 막막했다.

반도네온을 배우기로 마음먹고 바로 유학을 결심했다고 들었다.

국내에서는 악기조차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던 중 아르헨티나에서 유학 중인 레오 정 선생님의 메일을 우연히 발견하고 연락한 뒤 회신을 받았다. “반도네온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라는 말에 설득이 되어 당시 마음먹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아깝지 않는가”라는 걱정도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는 것을 보면 다시 반도네온을 잡은 계기가 있을 것 같다.

음악이 다시 한번 나를 강하게 쥐고 흔들었다. 때마침 레오 정 선생님께서 아르헨티나 출국 3일을 앞두고 한국에 계셔서 직접 만나 뵙고 조언을 구했고,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반도네온을 부탁했다. 그렇게 2년 뒤 돌아오신 선생님에게 본격적으로 2011년부터 레슨을 시작했다.

레오 정이 설립한 한국 탱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201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고등음악원에 입학해 탱고와 민속음악과를 수학했다. 7년의 세월을 준비해 떠난 유학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첫인상은 어땠는가?

시간과 약속 엄수가 기본인 한국과 정반대인 나라다. 이 모습이 아르헨티나의 모습이고 그들의 국민성이다. 즉흥적이고 열정적인. 파업도 많고, 정전돼서 수업이 일주일간 취소된 적도 있다. 간혹 일본인 유학생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이었고, 한국인은 나뿐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클링엔탈 아코디언 콩쿠르(2015) 반도네온 솔로 부문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래도 아르헨티나의 민속음악을 한국인으로서 몸에 익히기까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 같다.

그들이 몸에 새긴 탱고의 언어는 따라갈 수 없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이들은 즉흥연주에서도 감각적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오랫동안 탱고의 리듬과 음악을 몸에 새긴 덕분에 다른 이들보다 시행착오가 적었다.

전문적인 탱고음악 연주자로서 전통 탱고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에서 현실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 같다.

연주자들은 각자의 길이 있고, 길마다 정답이란 없다. 하지만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연주자로서 새로운 음악을 해보고 싶고, 나의 여정을 떠날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있다. 방구석에서 음악만 할 수 없지 않은가?

반도네온 제작도 함께하고 있다고 들었다.

자연스레 시작한 악기 제작의 일이 때론 음악가의 길을 내려놓게 될까 걱정이 될 정도로 악기를 뜯고, 만지는 즐거움을 느낀다. 그 모습 또한 나다. 현재는 일단 연주자로서 폭을 넓히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는?

연주자로서 느끼는 책임 중 하나는 나만의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작품을 발굴하는 것이 내가 가야 할 방향이다. 또한 제작자로서의 모습도 내 모습 중 하나다. 기회가 닿는다면, 반도네온을 시작하게 된 계기인 영화음악 제작에도 참여하고 싶다. 피아졸라의 탱고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갈구’에서 시작됐고, 나 역시 그의 마음을 따라가고 싶다. 끝으로 탱고의 역사에서 전통 탱고와 누에보 탱고 모두 중요하지만, 나는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는 우리의 음악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 임원빈 기자

공연 정보
윤혜진 바이올린 리사이틀(협연 이어진)

10월 16일 오후 2시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피아졸라 ‘탱고의 역사’ ‘천사의 죽음’ 외

이어진 퀸텟 ‘피아졸라 100주년 특집’ 온라인 콘서트

10월 22일 오후 8시 교보 노블리에 공식 유튜브 생중계

피아졸라 ‘5중주를 위한 콘체르토’ ‘푸가타’ 외

레오 정 & 이어진 반도네온 듀오 콘서트

12월 22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전통탱고, 피아졸라의 작품

3.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
기다림 끝에서 만난 10월의 탱고

피아졸라의 음악적 위치는 어디쯤일까? 클래식 음악가에게도, 재즈 음악가에게도 익숙한 이 음악은 클래식 음악도 재즈도 아닌 단지 ‘피아졸라의 음악’으로 남아있다.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원장 취임 이후 이성주(1955~)가 향한 첫 발걸음은 피아졸라다. 이번 공연의 토대가 마련 된 건 이미 오래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생활하던 중, 뉴욕 피셔홀(현 게펀홀)에서 기돈 크레머가 처음 피아졸라와 비발디의 ‘사계’를 엮어 선보이면서 이성주의 마음에도 피아졸라가 자리 잡았다. 그런 그녀가 10월 피아졸라의 ‘음악 세트’로 우리를 찾아온다. 피아졸라의 ‘탱고의 역사’ ‘천사의 죽음’을 포함해 가르델의 ‘귀향’ 등을 연주하고, 탱고의 분위기를 짙게 하기 위해 이성우(기타)·조윤성(피아노/편곡)·김영후(더블베이스)·신동진(드럼)·도승은(보컬)과 함께 한다. 언젠가 피아졸라의 작품을 제대로 소개할 날을 기다렸다는 이성주와 인터뷰를 나눴다.

클래식 음악의 길을 오래 걸어온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아르헨티나의 민속음악인 탱고는 어떤 음악으로 다가오는가?

초기 탱고음악은 춤을 기반으로 탄생했다면,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는 클래식을 기반으로 다져졌다. 생각해보면 누에보 탱고와 클래식 음악은 전통이라는 기반 아래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탱고의 즉흥성은 클래식 음악의 영역에 속해 있기도 하다. 음악 속 덮여 있는 즉흥적인 감정을 찾아내는 것도 연주자로서 느끼는 기쁨이다. 그 낯익음 속에 피아졸라의 음악을 풀어보려고 한다.

 

탱고음악은 클래식 음악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지만 분명 클래식 음악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이론적인 논리를 떠나서 탱고음악은 가사 없이도 감정이 진하게 전달되는 음악이다. 무엇보다 탱고를 연주할 때 즐겁다. 음악이 개입되는 타이밍, 감정 등이 자유롭기 때문에 신이 난다.

 

피아졸라의 작품 중 가장 애정하는 작품을 꼽는다면?

‘카페 1930’을 연주할 때에는 맺혀있는 한이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빠른 템포의 탱고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이 작품에 스민 슬픔은 그렇게 멀지 않은 곳, 일상의 슬픔이다.

피아졸라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알려진 ‘리베르 탱고’ ‘망각’ 외에 탱고의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은?

푸가 양식을 차용한 ‘천사의 죽음’, 산뜻하고 가벼운 ‘바르다리토’를 들어보시길 바란다. 탱고음악의 특징인 몰아치고, 풀고, 다시 몰아치는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외에 스페인의 작곡가 알베니즈(1860~1909), 파야(1876~1946)의 곡에서도 탱고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연주회를 통해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피아졸라가 음악에 담아 둔 그의 내면을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그의 음악에 파고들수록, 탁월한 선율과 풍부한 감성에 감탄한다. 공연을 보는 관객들도 나와 같은 감동과 감정을 느꼈으면 한다.

이번 공연을 구성할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있는가?

익숙한 편성에서 벗어나고자 피아니스트 조윤성에게 새롭게 편곡을 의뢰했다. 공연의 후반부에는 조윤성 트리오(조윤성·김영후·신동진)·보컬(도승은)과 함께 협연도 마련했다. 다채로운 탱고의 매력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조윤성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대되는 순서가 있다면?

공연의 중간부에 피아니스트 조윤성에게 ‘피아졸라를 기념한 즉흥연주’를 부탁했다. 아르헨티나에서 10대와 20대를 보낸 그와 한 무대에 서는 것이 나에게는 뜻깊다. 아르헨티나에 음악의 뿌리를 둔 그가 들려줄 연주가 기대된다.

이대로 피아졸라 기념을 그치기에는 아쉬운 한해다.

12월 19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조이오브스트링스와 함께 다시 한번 피아졸라를 기념할 예정이다. 이때는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를 연주한다. 이 외에도 피아졸라의 ‘리베르 탱고’와 영화 ‘여인의 향기’의 ‘Por una Cabeza’ 등이 준비됐다.

글 임원빈 기자 사진 스테이지원

공연 정보
이성주의 누에보 탱고

10월 13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피아졸라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탱고 연습곡 3번, ‘탱고의 역사’, 가르델 ‘귀향’ 외

PART3 | 한국 탱고의 문화사

한국 탱고의 문화사
대중가요부터 창작국악까지

한국과 아르헨티나가 공식 수교를 맺은 것은 1962년이지만, 그 전부터 탱고는 유입되었다. “허리를 착 재고 몸을 사내에게 내맡기고 선정적인 리듬 흐르는 대로 꿈을 꾸듯 스텝을 밟는 춤.” 유진오는 1938년 잡지 ‘삼천리’에 연재한 소설 ‘수난(受難)의 기록’에 탱고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1930년대에 탱고는 ‘땅고’라는 이름으로 경성 곳곳의 댄스홀을 점령했다.

대중가요에서 영화로

1945년 해방 후, 탱고 특유의 분위기와 정서는 대중가요를 통해 퍼져나갔다. 아르헨티나의 빈민가나 누항(陋巷)에서 발달한 춤과 음악은 시대적으로 우울했던 한국의 정서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하여, 탱고는 화려한 춤과 음악의 예술보다는 쓸쓸한 넋두리의 음악으로서 퍼져나갔다.

서양에서 한반도로 유입되는 가운데 ‘원본’을 수용했던 클래식 음악과 달리, 탱고의 수용방식은 여러 음악을 통한 부분적 차용과 흡수를 통해 성장한다. 특히 대중가요는 이러한 탱고와 음악적 문법을 수용하는 텃밭이었다.

1956년, 남성 가수 도미(본명 오종수·1934~2010)❶가 발표한 ‘비의 탱고’는 “지나간 날의 비 오던 밤에 그대와 마주 서서 속삭인 창살가에는 달콤한 꽃 냄새가 애련히 스며드는데 빗소리 조용하게 사랑의 탱고”라는 가사와 함께 탱고 특유의 어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1990년 여성 가수 방실이(본명 방영순)의 ‘서울탱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태어난 노래였다.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도 묻지 마세요. 이리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나이도, 이름도, 고향도 묻지 말라는 노래는 고향을 떠난 도시 실향민들의 애환을 탱고의 분위기에 녹여 넣었다.

이러한 탱고에 대한 이미지가 변한 것은 1993년이다. 한쪽에선 임권택의 ‘서편제’가 판소리를 통해 한민족의 뿌리를 영상적 상징으로 보여주었고, 다른 한쪽에선 영화 ‘여인의 향기’❷가 국내 개봉하며 영화 속의 탱고 장면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알파치노가 젊은 여인과 함께 추는 탱고 장면을 통해, 한국의 대중가요 속 애환의 젖줄을 타고 흐르던 탱고는 ‘아르헨티나 빈민가’를 넘어 ‘유럽의 살롱’에서 추어진 춤으로 인식되었다.

영화의 힘은 강했다. 영화와 함께 탱고의 바람이 불면서 클래식 음악가들도 해외 유학을 통해 익힌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를 독주회와 리사이틀에서 선보였다. 이후에도 영화 속의 탱고는 음악계에 탱고가 레퍼토리로 안착하는 데에 지렛대 역할을 했다. 탱고의 바람은 1998년 영화 ‘탱고 레슨’❸의 국내 개봉과 함께 더욱 커져만 갔다. 1990년대에 불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은 1990년대 후반 월드뮤직의 붐을 예고했고, 한국 대중가요를 통해 부분적으로 수용되던 탱고는 영화음악(OST)와 클래식 음악, 월드뮤직 등을 통해 전면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다.

 

 

창작국악의 중요한 음악으로

이러한 탱고가 창작국악으로 수용된 것은 1990년대 말이다. 외국 영화를 통한 탱고 이미지의 낭만화, 클래식 음악계에로 불기 시작한 피아졸라의 열풍에 맞춰 창작국악도 탱고를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작은 1999년에 창단한 가야금 앙상블 사계(四季)❹였다. 서울대 출신의 가야금 연주자 4명으로 구성된 사계는 영화와 클래식 음악을 통해 한층 고급화된 탱고(누에보 탱고)의 노선을 따르며, 피아졸라의 ‘오블리비온’(망각)을 편곡하여 선보였다. 이해식 영남대 교수가 편곡했는데, 땅땅거리며 소리가 끊어지는 가야금 소리를 보완하고, 애환의 선율이 흐르도록 4대의 가야금에 해금이 함께 하도록 했다. 해금은 반도네온이나 아코디언의 선율을 맡았다.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 구성원이 국악계가 사대해온 서양음악이나 아카데미권 작곡가들의 창작품이 아니라 탱고를 선택했다는 점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당시 아카데미 음악권의 작곡가로 활동 중인 이해식 교수가 직접 편곡을 맡았다는 점도 놀라웠다. 이러한 사계의 행보는 지금 생각해보면 1980년대에 활약한 서울새울가야금삼중주단의 행보에 견줄 수 있겠다. 서울대 음대 출신의 김해숙·김일륜·박현숙으로 구성된 이 앙상블은 백대웅이 편곡한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을 연주하며 논란을 낳기도 했다. 국내 학계에서 ‘번역’보다 ‘논문’ 집필이 더욱 높은 점수의 연구물로 인정받는 것처럼, 창작국악계도 ‘편곡’(=번역)은 작곡가들의 부수적인 활동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하지만 ‘캐논’의 백대웅, ‘오블리비온’의 이해식은 편곡(=번역)의 수준을 창작(=논문) 수준으로 끌어올리면서 국악기로 연주하는 외래 음악과 그에 관한 담론을 한층 격상시켰다. 창작국악은 1980년대에 모방의 주요 대상으로 삼았던 클래식 음악으로부터 한층 확장되어, 1990년대에 포스트모더니즘 음악과 월드뮤직으로서의 탱고를 수용하며 확장의 길을 걷게 된다.

1990년대 후반 탱고 열풍과 ‘한국적 탱고’의 등장

일제 강점기에 경성에 위치한 댄스홀의 에로틱한 춤으로만 인식되었던 탱고는 이처럼 1990년대를 지나 클래식 음악계-국악계에 더욱더 깊이 들어오게 되었다. 특히 해외 저명 음악가들이 몰고 온 탱고 유행은 국내외로 인기였다.

1997년은 어떤 기점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내한한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는 클래식의 제왕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탱고의 밤’(예술의전당)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지금과 달리 음반 시장이 활발했던 1997년에 발매·수입된 크레머의 ‘El Tango’(Nonesuch)❺와 첼리스트 요요 마의 ‘Soul of The Tango’(Sony Classical)❻는 국내외 음악계에 탱고 열풍을 이끌었다. 크레머의 탱고 사랑은 이후 ‘탱고 발레’와 피아졸라 ‘사계’❼ 음반으로도 이어졌고, ‘요요 마=탱고=리베르 탱고’는 당시 남성 고급정장 광고의 배경음악이 되기도 했다. 영화나 연극, 무용에도 고급화된 누에보 탱고의 분위기를 닮은 음악들이 등장했다. 탱고 전문악기로 인식돼오던 아코디언의 자리도, 국내외에서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와 반도네온을 익힌 반도네오니스트들이 하나둘씩 차지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인터넷과 정보망은 탱고 마니아들을 위한 제2의 교재가 되었다. 수요는 많아졌지만, 그 누구도 ‘전문가’가 아닌 상태에서 누군가는 인터넷을 통해 모은 조각 정보를 따라 탱고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이처럼 급증한 수요의 생태계에서 창작국악도 탱고의 문법과 어법을 차용한 음악을 내놓았다. 하지만 피아졸라의 음악을 전면적으로 수용·변주한 클래식 음악과 달리 창작국악계는 탱고를 부분적으로밖에 수용할 수 없었다. 화려한 춤이고, 때로는 격한 감정과 함께 흘러가는 탱고의 모든 음을 국악기로 연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탱고의 ‘전면’보다 ‘부분’을 수용하는 방식이 되면서, 국악과 탱고의 교호작용은 부분적으로 이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탱고풍의 창작국악은 꾸준히 나왔다. 가야금 연주자이자 싱어송라이터 정민아는 ‘미나 탱고(mina tango)’❽를 작곡해 가야금과 베이스·아코디언이 함께 하도록 했고, 그룹 거문고 팩토리는 개량한 거문고를 위한 ‘거문고&탱고’❾를 발표하며 화제를 낳기도 했다. 생황 연주자 김효영은 생황 특유의 음색과 주법을 활용해 빠른 속도의 ‘리베르 탱고’❿를 연주하며 자신만의 레퍼토리로 안착시켰고,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박범훈은 ‘스포츠댄스를 위한 국악관현악 시리즈’⓫의 하나로 탱고 편을 작곡하기도 했다. 2015년에 결성된 제나탱고⓬는 탱고의 리듬과 멜로디를 결합하여 ‘한국적 탱고’를 연구하고 있다.

피아졸라 탄생 100주년은 한반도 탱고 문화사 100주년이기도 하다. 정보와 사람의 이동이 느려 문화적 격차를 만들었던 과거에 비해, 20세기에 발전한 근대적 미디어와 소통 장치를 통해 형성된 ‘동시성의 세계’에서 탱고의 유동·유입·변용은 각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피아졸라 이후 ‘포스트-피아졸라’가 누가 될진 모르겠으나, 누에보 탱고는 꾸준히 새로움이라는 옷을 입으며 진화할 것이다. 혹은 한국에서 한국적 정서와 결합된 새로운 탱고가 탱고의 수출국이나 주요국으로 역수출될지도 모를 것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

 

 

❽ 미나 탱고

❾ 거문고&탱고

 

❿ 리베르 탱고

 

⓫ 스포츠댄스를 위한 국악관현악 시리즈

⓬ 제나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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