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EKSUK’S EYE
from AUSTRIA
가장 화려한 12월
빈의 송년과 신년을 장식하는 음악회 음악 문화가 도시 관광에 큰 몫을 하고 있는 빈의 12월은 연중 가장 화려하고 요란하고 즐거운 달이 된다. 국민 94%가 가톨릭인 빈은 11월 초부터 구세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 행사로 설렌다. 시청 앞과 역사박물관 등 시내 18개 중심지 광장에 대림절과 성탄절을 축하하는 각종 장터가 들어선다. 악단의 풍악도 빠지지 않는다. 특별히 산데리아 불빛이 화려하게 켜지는 쇤브룬 궁전과 슈테판 대성당, 콘서트홀, 극장들에선 대림절·성탄절·송년회·신년회를 위한 각종 음악회가 열린다. 12월의 많은 음악 행사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이벤트를 소개한다면, 빈 소년 합창단과 볼쇼이 돈 코사크 합창단, 스텔라 존스와 아메리칸 크리스마스 가스펠의 대림절과 성탄절 합창이라고 할 수 있겠다.
1498년 7월 7일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명으로 6명의 소년으로 시작했다는 빈 소년 합창단은 오랜 미사 예배소로 삼고 있는 호프부르크 왕궁 예배당에서 12월 5일부터 매주 일요일 오전 9시 15분부터 특별히 성탄절을 위한 미사를 합창한다. 12월 5일엔 몬테베르디의 미사곡, 12월 25일엔 하이든의 미사곡을 합창한다.
빈 소년 합창단은 오르간이 있는 후면의 3층 꼭대기에 위치하여 아래층에서는 볼 수 없다. 상체와 머리라도 보려면 비싼 입장권을 사야 한다. 합창단 운영처는 이러한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하여 미사가 모두 끝난 뒤 합창단원이 강단으로 내려와서 13세기부터 창작된 가톨릭 찬송가 모테트 한 장을 불러 주는 순서를 가지고 있다. 청중은 이때 녹음하거나 사진을 찍기에 분주해진다. 근년에 와서 새로운 모습은 유일한 외국인으로 한국 소년 2~3명이 합창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볼쇼이 돈 코사크 합창단은 매년 11월부터 오스트리아로 순회공연을 하러 오는 남성합창단이다. 원래는 1921년 러시아 혁명 때 포로가 된 코사크족 군인들이 수용소에서 창단한 합창단인데, 러시아에서 추방당해 미국 뉴욕에 자리 잡게 되었다. 1985년 창립자이자 지휘자 세르지 자로프(1896~1985)가 사망하자 펫자 후자코프(1934~)가 계승하여 미국과 유럽 등에서 40년간 순회공연을 해오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가와 러시아 민요가 주요 레퍼토리이다. 2019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을 받았다. 올해 성탄절을 기념한 오스트리아 공연은 12월 8일 오후 7시 보티프 교회와 23일 오후 7시 30분 빈 콘체르트 하우스에서 열린다.
미국 흑인영가 중창단 ‘스텔라 존스와 아메리칸 크리스마스 가스펠(Stella Jones & American Christmas Gospel)’은 보티프 교회에서 12월 10·11·17일(매회 오후 8시 시작)에 3회의 창립 20주년 기념 빈 순회공연을 갖는다. 미국의 가수 겸 제작자이자 어린이 뮤지컬과 교육용 오디오 창작자인 스텔라 존스가 창립한 이 중창단은 재즈와 블루스의 흑인영가를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부르는 중창단이다. 스텔라 존스를 포함하여 7명으로 된 이 중창단의 ‘Oh Happy Day’와 ‘Amazing Grace’는 유명하다. 이 중창단은 1879년 높이 99m 쌍탑 네오 고딕식 성당으로 완공된 보티프 교회의 대림절과 성탄절 행사의 공동운영자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 곳곳에선 송년음악회와 신년음악회가 열린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매년 1월 1일 오전 11시 빈 무지크페어아인 황금홀에서 열리는 빈 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이다. 이번 지휘자는 다니엘 바렌보임(1942~)이다.
글 김운하(오스트리아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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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99m 쌍탑의 보치크 교회
볼쇼이 돈 코사크 합창단
호프부르크카펠레의 일요미사
스텔라 존스와 아메리칸 크리스마스 가스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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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AUSTRIA
소프라노 양제경 & 베이스 박종민 부부의 행복한 신년
2022년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의 해’의 가장 행복한 성악가 부부는 오스트리아 빈 슈타츠오퍼 전속 가수를 7년간 역임한 박종민과 바덴 시립극장의 객원가수 양제경 부부가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겐 신년 초부터 황홀한 공연 스케줄이 짜여있기 때문이다. 이 부부를 지난 11월 3일 오후 빈 슈타츠오퍼 근처에 있는 ‘카페 무제움’에서 만났다.
“내년 첫날부터 아내에게 행운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박종민이 인사를 하며 의자에 앉자마자 던진 말이다. 그의 말인즉슨 바덴 시립극장이 아내에게 신년음악회를 독창회로 열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음악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더욱이나 동양계 여성에게 이런 대우는 처음이다. 합스부르크 왕족, 빈 상류층이 유명한 온천을 찾은 후 들리는 옛 황실의 극장에서 꿈도 꿀 수 없는 특례를 만든 것이다.
“저는 2019년부터 이 극장에서 정성을 다해 열심히 노래했어요. 모차르트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의 콘스탄체 역에 대한 호평이 영향을 준 것 같아요. 2020년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으로 선발되어 언론에 소개도 많이 되었으나 코로나로 공연이 취소되어 매우 아쉬웠습니다, 그러던 것이 2021년 코로나가 잠시 진정되었을 때 갈라 콘서트로 선보여 호평받았고, 2022년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어요.”
양제경은 2022년 1월 1일 2회에 걸쳐 바덴 시립극장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열리는 신년 독창회에서 1부는 오페라 아리아, 2부는 오페레타의 아리아와 왈츠를 부를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새해의 또 하나의 행운은 1월 29일부터 소망해오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에 정식으로 데뷔하게 되었어요. 더블 캐스팅의 A조로 3월까지 비올레타 역을 6회나 부르게 됩니다.”
애나 모포(1932~2006)의 비올레타를 가장 사랑한다는 양제경은 다른 비올레타와 자신의 것에 대한 차별성을 이어서 말했다.
“비올레타의 우아함과 인간적인 면에 더 집중해서 연기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상류층의 꽃이라 불리며 향락에 젖어 사는 화려한 면이 강조되었던 적도 있지만, 저는 비올레타의 알프레도를 향한 순수한 연심과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 등 화려함 뒤에 가려진 비올레타의 다른 면모를 보여 드릴 생각입니다.”
2026년까지 일정이 잡혀있는 박종민은 벌써 바쁜 공연 일정에 놓여 있다. 12월 5일부터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다니엘 바렌보임(1942~)의 지휘 아래 생상스 ‘삼손과 데릴라’에 아비멜렉 역으로 출연한다고 했다. 2022년 새해 오페라 활동은 1월 18일부터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벨리니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에 줄리에타의 아버지 카펠리오 카풀레티 역으로 출연한다. 2월 23일 빈 콘체르트 하우스에서 빈 방송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드보르자크의 ‘레퀴엠’ Op.89에 솔리스트로 출연한다. 이어서 라 스칼라 극장에서 4월 5일부터 모차르트 ‘돈 조반니’에 돈나 안나의 아버지 기사장으로, 4월 15일부터 R. 슈트라우스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에 트루팔딘으로, 5월에 베르디 ‘가면무도회’에 톰 역으로 각각 출연할 예정이다. 여름에는 다시 빈으로 돌아와 7월 13일부터 8월 14일까지 장크트 마르가레텐의 채석장 오페라 극장(Oper im Steinbruch) 여름 축제에서 베르디 ‘나부코’에 예루살렘 대제사장 자카리아로 출연할 예정이다.
“저희 부부가 새해에 많은 축복을 받은 것 같습니다. 내년에 한·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맞아 저희 부부가 우리 동포들에게 기념 음악회를 열어드리고 싶습니다.” 두 사람은 이만큼 성장하도록 밀어준 모든 동포들과 은인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와 함께 송구영신의 축복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글 김운하(오스트리아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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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에 피가로 역으로 출연한 박종민
모차르트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에 콘스탄체 역으로 출연한 양제경
양제경
박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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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RANCE
파리 오페라 ‘오이디푸스’ 9.20~10.14 &
파리 오페라 발레 ‘적과 흑’ 10.18~11.4
침체기를 깨고 등장 파리 오페라는 2021/22년 시즌을 맞아 제오르제 에네스쿠(1881~1955)의 오페라 ‘오이디푸스’와 피에르 라코트(1932~)가 안무한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을 초연했다. 새 극장장 알렉상드르 니프가 기획한 올 상반기 하이라이트 작품들로, 2019년 말부터 이어진 노조 파업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파리 오페라의 심각한 침체기를 만회하기에 충분한 화제작들이었다.
레바논 출신 와지디 무아와드(1968~) 연출의 ‘오이디푸스’는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공연됐다(9.20~10.14). 1936년 파리 가르니에 궁에서 초연된 이후 이번이 첫 공연이다. 이 작품은 미분음을 썼다는 점에서 초연 당시 시대를 앞선 명작으로 평가받았지만, 비조성 음악이 많아지면서 구식으로 여겨졌다. 또한 각 막이 고유한 교향곡 구성을 지녀 연주가 어렵고, 전막이 3시간이 넘어서 좀처럼 공연되지 않았다. 이번 프로덕션은 “오이디푸스,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승리하다”(에코), “파리 오페라 신화의 실을 풀다”(피가로), “파리 오페라를 다시 일으킨 오이디푸스”(뉴욕 타임스), “와지디 무아와드, 오이디푸스의 심리를 탐구하다”(르 몽드) 등의 보기 드문 극찬을 받았다.
알렉상드르 니프 극장장은 캐나다 토론토 오페라 극장장 시절, 연출가 무아와드와 함께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탈출’(2016)을 작업한 바 있다. 니프는 당시의 경험을 들어 “가장 보람을 느낀 작업”이었다며 이번 프로덕션에 무아와드를 발탁한 이유를 밝혔다.
에네스쿠의 또다른 자아, 오이디푸스
무아와드는 이번에도 아주 독특했다. 보통 연출가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코러스, 연기 동선의 섬세한 뉘앙스도 명시했다. 현재 파리 테아트르 콜린의 극장장이기도 한 무아와드는 이미 오이디푸스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여러 작품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 그리고 전쟁과 망명으로 한 인간이 겪는 트라우마에 대한 작업도 다수 해왔다. 이는 레바논 출신인 그의 개인적 경험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를 다룬 작품은 많으나, 에네스쿠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다. 이는 무아와드가 탐구해온 위의 문제의식을 잘 반영한다.
이름난 두 메조소프라노 안네 소피 폰 오터(메로페)와 예카테리나 구바노바(이오카스테), 프랑스 오페라계의 두 스타 테너 얀 뵈롱(라이오스)과 바리톤 로랑 나우리(대제사장), 막강한 두 미국 성악가 바리톤 크리스토퍼 말트만(오이디푸스)과 테너 브라이언 뮬리건(크레옹), 그리고 파리 오페라 솔리스트인 노현종이 테베 사람으로 출연했다.
에마뉘엘 클로루의 무대장식과 에마뉘엘 토마의 의상은 꼭 그리스 의복답다고 볼 수 없지만, 아주 오래된 어떤 곳의 향취를 풍겼다. 무대는 테베의 둥근 재단, 임신한 이오카스테의 둥근 배에서 변주된 푸른 달, 그리고 스핑크스가 은신하는 둥근 동굴 등 상징성이 짙었다.
1막은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의 원죄로부터 시작한다. 젊은 시절 그는 친구의 어린 아들을 성희롱했고, 그 아이는 치욕 끝에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 그 죄의 대가로 라이오스는 자식을 가지면 안 되는 저주를 받는다. 이후 테베의 왕이 된 그는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이는 오이디푸스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달처럼 둥근 배를 가진 이오카스테는 출산 후 둥근 재단 위에서 붉은 탯줄을 끊고 이를 땅에 묻는 예식을 진행한다.
이 감동은 제사장의 예언으로 철저히 깨진다. 라이오스의 원죄로 인해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저주를 상기시킨 것이다. 이때 죽은 아이의 망령이 등장한다. 즉시 칼을 빼 들고 오이디푸스를 죽이려는 라이오스. 이를 막으려는 이오카스테의 울부짖음. 라이오스는 끝내 목동을 불러 아들을 키테롱 계곡에 버리라고 명한다.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의 왕인 폴리보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 성인이 된 그는 푸른 밤이 다가오자 몽상에 빠져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 홀로 길을 떠난 그는 불쑥 나타난 무리와 싸우다 우두머리를 죽인다. 생부 라이오스였다. 저주가 현실이 되는 순간으로, 클라이맥스로 처리됨이 마땅하나 작은 사건처럼 지나간다.
반면 스핑크스와의 투쟁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유명한 이집트 피라미드 앞 동상과 달리, 연출은 동굴에 은닉하는 스핑크스를 무서운 음성으로 처리했다. 오이디푸스가 답변에 성공하자 목소리는 희미해지고, 동굴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시민들은 ‘스핑크스를 이긴 코린토스의 오이디푸스!’를 부르고, 이후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이 된다.
3막, 이오카스테가 붉은 긴 머리카락으로 오이디푸스의 팔을 묶는 장면은 두 사람의 결합을 상징하기도 하고, 모자(母子)를 상징하는 탯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모든 과거를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거칠게 울부짖으며, 죄인처럼 상의를 벗고 스스로 눈을 빼 버린다. 이 작품에서 반전이 가장 많은 부분이지만, 연기 동선은 감정의 발전과 텍스트 전개의 관점에서 숨 막히게 자연스러운 흐름을 유지했다.
4막, 오이디푸스와 그의 딸 안티고네는 아테네 인근 아티크에 도착한다. 이곳은 신성한 숲으로, 샘과 바위, 대리석 재단이 놓여있다. 바닥엔 금 조각이 수놓아져 있고 햇살이 충만하다. 무대는 푸른 물이 가득한 기하학적인 샘으로 꾸며졌다. 아테네의 노인들과 테세우스는 영혼을 정화하는 연못의 신성함을 노래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딸에게 그물로 자신의 눈을 닦아 달라고 노래한다. 이런 신성한 충만함을 깨고 이오카스테의 형제인 크레옹이 등장한다. 왕권에 눈이 먼 그는 오이디푸스를 잡아가기 위해 이곳까지 따라왔다. 저항하는 안티고네는 테세우스에게 자비를 구한다.
이어지는 크레옹과 오이디푸스의 대립은 가장 큰 긴장감을 조성한다. 크레옹은 오이디푸스를 부친살해와 모친상간의 범인으로 몰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은 운명의 희생자일 뿐이라고 반론한다. 그리고 자신의 무고함을 외치며 “나는 나의 운명을 극복했다”라고 선포한다. 대본상 그는 테세우스의 뒤를 따라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연못으로 들어가 자궁 속 태아처럼 몸을 움츠린 채 죽는다. 이 죽음은 오이디푸스 영혼의 정화로 거듭난다.
독일 출신 잉고 마츠마셔(1957~)의 지휘로 연주된 에네스쿠의 음악은 조성적으로도, 비조성적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구식이지도 않고, 생소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묘사적이지도 않았지만, 긴 이야기의 흐름을 선적으로 풀어간 이번 연출 동선에 꼭 맞게 들렸다.
에네스쿠는 “나의 잠재력, 나의 비극 그리고 나의 모험은 단 3개의 음절 ‘오이-디-푸스’에 담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어려서부터 유럽을 전전하며 예술적 유랑을 하던 자신의 인생과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삶을 오버랩했다. 이는 물론 연출가 무아와드의 유랑과도 맞닿아 있다.
이번 작품은 스펙타클하거나 선정적인 표현은 배격한 채, 이해 가능한 언어로 고대 신화 캐릭터를 해석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인생에 비추어 볼 수 있도록 했다. 트라우마에 가득 찬 인생이었지만, 파토스는 볼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운명을 극복했다”라는 오이디푸스의 선언처럼, 카타르시스만 남았다.
프랑스 문학과 발레의 조우, 적과 흑 피에르
라코트(1932~)가 안무한 ‘적과 흑’(10.18~11.4)은 스탕달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좀처럼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보기 힘들었던 내레이션에 치중한 발레로, 엄청난 크기의 판화를 무대화하고 400여 점의 의상을 새로 제작하는 등 이곳의 창조성을 새삼 과시했다.
올해 89세의 피에르 라코트는 파리 오페라 발레의 에투알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이번 작품에서 라코트는 대본을 직접 완성하고, 안무와 의상에도 참여했다. 음악은 마스네의 여러 작품을 브느와 므뉴(1977~)가 편곡해 완성했고, 지휘는 조나단 달링이 맡았다. 라코트는 “마스네는 발레 작품을 쓰지 않았지만 그의 음악에는 춤곡의 요소가 많다”고 밝혔다.
이번 공연에는 60명의 무용수가 참여했다. 줄리앙 소렐 역에 휴고 마르샹과 프롤리앙 마뉴에, 마담 레날 역에 도로테 질베르와 아망딘 알비슨, 마틸드 역에 비앙카 스쿠다모르와 레오노르 볼락이 캐스팅됐다. 에투알 휴고 마르샹은 스탕달 원작의 줄리앙 소렐에 비해 너무 잘생기고 자신만만해 캐릭터가 야심과 양심 사이에서 발산하는 모호함이 덜하다는 인상을 줬다면, 에투알은 아니지만 프롤리앙 마뉴에는 이 역할에 더욱 어울린다는 평을 받았다.
3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줄리앙 소렐이 시골에서 파리로 올라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파리의 남녀가 추는 듀오와 트리오 그리고 군무 등은 소렐의 마음을 뒤흔든 것처럼 청중을 동요시켰다. 레날의 집에 도착한 소렐을 보고, 하녀 엘리자는 한눈에 반한다. 붉은 선이 수놓인 하얀 드레스 차림의 마담 레날 또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어느 날 밤, 소렐이 레날 부인의 방에 들어간다. 분홍색 잠옷을 입은 그녀는 망설이다 소렐에게 몸을 준다. 압권은 레날 남편의 등장이다. 그는 질투에 찬 엘리자가 익명으로 남긴 편지를 들고 레날 부인의 부정을 잡고자 들이닥친다. 이때 소렐은 부인을 침대로 과격하게 밀어트리며 회전 도약으로 연결되는 역동적인 안무로 임한다. 뛰어난 기교였다. 물론 소렐은 이미 숨은 뒤다.
이후, 라몰 후작의 집에 방문한 소렐은 후작의 딸 마틸드를 유혹한다. 이곳에서는 거대한 파티가 시작되고 도도한 소렐에게 마틸드는 마음을 빼앗긴다. 군복차림의 장교들이 공중 도약하며 펼치는 군무는 눈을 즐겁게 했다. 3막에서 소렐은 귀족으로 신분 상승하며 마틸드와 결혼식을 앞두지만 레날 부인과의 불륜이 밝혀지며 무산된다. 감옥에 처한 그를 찾아온 레날 부인과의 듀오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끝내 교수형에 처한다.
안무상 이 3막은 너무 길며, 발췌된 대목들의 흐름이 단적으로 튀었다. 더욱이 안무 또한 창의성이 떨어져 어디선가 본 듯한 진부함을 주었다. 존 크랭코의 ‘오네긴’이나 케네스 맥밀런의 ‘마농’의 비해 강도와 밀도가 떨어졌다.
그러나 흥행 성적과 파리 오페라 발레 무용수의 놀라운 퍼포먼스로, 이번 프로덕션은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특히, 평생 프랑스 발레 전통을 전수하는 데 몸담아온 피에르 라코트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헌정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했다.
글 배윤미(프랑스 통신원) 사진 파리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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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Elisa Haberer/OnP
©Elisa Haberer/OnP
©Elisa Haberer/OnP
©Elisa Haberer/OnP
적과 흑 ©Svetlana Loboff/OnP
©Svetlana Loboff/OnP
from GERMANY
대니시 댄스 시어터 ‘세이렌’ 10.30
리드베리의 물결이 향하는 목적지 폰투스 리드베리는 ‘물’을 이미지화하는 데 탁월하다. 푸른 의상을 입은 무용수 10인의 연결된 동작은 서서히 소용돌이로 변모하고(‘흐름’, 2013), 무대 앞쪽까지 걸어 나와 드러눕고, 몸을 굴려 뒤로 이동하는 무용수의 군무로 파도의 흐름을 시적으로 동시에 직관적으로 표현한다(‘세이렌’, 2018). 그에게 물은 ‘수단’이라기보다 ‘목적’에 가깝다. 담기는 그릇에 따라 그 모습을 변화시키고, 경계를 스며들 듯 넘나드는 물성. 리드베리가 전하고자 하는 궁극의 메시지는 물의 ‘가변성’과 ‘유연성’에 맞닿아 있다. 현실과 픽션, 뮤즈와 세이렌, 사랑과 고독, 남성성과 여성성,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동경 등 이분법적으로 존재했던 관념 사이를 그는 흐르듯 넘나든다.
폰투스 리드베리(1977~)는 바다에 면한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나고 자랐다. 로열 스웨덴 발레학교와 파리 국립음악무용 콘서바토리에서 수학한 그는 2018년부터 대니시 댄스 시어터의 예술감독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파리 오페라 발레, 뉴욕 시티 발레, 마사 그레이엄 컴퍼니, 빈 슈타츠오퍼 발레, 몬테카를로 발레 등에서 작품을 선보여 왔다.
댄스필름 ‘비(The Rain)’(2007)로 런던 국제 댄스필름 페스티벌의 ‘베스트 필름·시네마토그래피’상 등을 거머쥐면서 영화감독으로도 입지를 굳혔다. ‘미로 속에서(Labyrinth Within)’(2010)는 링컨 센터가 주관하는 댄스 온 카메라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고, 최근에는 ‘물 위에 쓰다(Written on Water)’(2020)를 발표했다. 한국에서는 제2회 서울국제무용영화제 개막작으로 오른 ‘잉마르 베리만: 안무가의 눈으로 바라보다’(2016)를 통해 리드베리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삶의 두 얼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진짜 예술작품, 단 하나의 오류도 없는 순수한 완벽한 예술 작품 등은 모두가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부드럽게 웃음 짓지만 그 의미를 헤아리기 어려운 이중의 얼굴을 갖고 있었고, 남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인 얼굴처럼 본능적 충동과 순수한 정신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헤르만 헤세 ‘지와 사랑’)
리드베리와 대니시 댄스 시어터의 대표작이자, ‘물’에 대한 그의 철학을 함축하는 ‘세이렌’이 지난 10월 31일, 독일 시어터 본(Theater Bonn)에 상륙했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고객을 사로잡겠다는 의미로 ‘스타벅스’가 로고로 삼기도 한 세이렌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바다의 님프이다. 세이렌은 지나가는 뱃사람들을 노래로 유혹해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지게 했다.
세이렌 출몰 지대를 항해하던 오디세우스는 위험에 대비해 동료들에게 밀랍을 주어 귀를 막게 했지만, 스스로는 그 대신 돛에 몸을 묶었다. 아름다운 노래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힌 것이다. 리드베리의 ‘세이렌’은 이 신화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는 춤으로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나의 춤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관람객은 자신의 경험을 그림에 투영하며 작품과 대화를 나눈다. 진짜 ‘이야기’는 그 대화 속에 나타난다. 물론 각 작품에 특정 주제를 심기는 하지만, 관객이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할 필요는 없다.”
대신, 리드베리는 세이렌에 ‘영감’, 오디세우스에 ‘영감을 쫓는 예술가’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신화에서는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유혹을 뿌리치고 무사히 바다를 빠져나가지만, 리드베리의 ‘세이렌’은 오디세우스가 물에 빠지며 막을 내린다.
“세이렌과 오디세우스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갈망은 늘 고독과 고통을 수반한다. 우리는 모두 이런 양면성을 한데 지니고 있다. 이러한 미묘함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다.”
‘양면성’은 리드베리가 오랫동안 탐구하고 있는 주제다. 특히 연인 사이의 감정을 해부해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보편적 양면성을 드러낸다. 지난해 발표한 댄스필름 ‘물 위에 쓰다’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 편의 드라마이기도 한 이 댄스필름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던 안무가 앨리샤는 자신의 기억들을 그러모아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이야기하는 작품 ‘세이렌’을 만든다.
그 과정에서 메인 무용수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자신이 만든 작품 속에 허구로 존재했던 ‘세이렌’, 즉 치명적 유혹이 앨리샤의 실제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현실과 픽션의 경계는 힘없이 무너진다. ‘뮤즈’였던 동료 무용수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세이렌’이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예술가(앨리샤)가 허구를 창조하고 그 속에서 길을 잃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사는지를 은유한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 속에 살고, 이를 현실에 투영한다. 현실을 재창조하려는 추진력을 지닌 ‘감정’이 ‘이성’과 균형을 맞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하는 리드베리만의 힘은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파리 오페라 발레와 만든 ‘결혼(Les Noces)’(2019)에서도 그랬다. 18명 무용수는 끊임없이 파트너를 바꾸어가며 사랑을 갈망하고, 취하고, 실험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꼭 남녀가 파트너가 되는 법도 없고, 파트너를 바꾼다 해서 꼭 나은 결과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며, 모든 관계의 시작과 끝은 모호하기만 하다. 두 무용수의 신체가 결합하는 동작들은 격정적이기보다는 섬세하고 조심스럽다. 부드럽게 동작을 나누는 무용수들과, 그 사이 긴장감을 더하거나 연결성을 높이는 ‘물’의 소재는 리드베리의 시그니처가 됐다. 이는 녹아내리는 종이 빨대처럼, 단단하게만 보였던 관념들을 금세 허물어뜨린다.
또 다른 경계를 넘어
1980년대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무용’이라는 의미의 누벨 당스로 일컬어지는 현대무용의 흐름이 피어났다. 안무가들은 무용을 단순히 움직임이라는 개념에 국한하지 않고, 영화, 문학과 연계하거나 대본을 바탕으로 하는 연극적 작업을 추진했다. 리드베리는 무용에 영화는 물론 애니메이션, AI를 끌어들임으로써 21세기 현대무용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세이렌’에서는 배의 돛으로 형상화됐던 희고 큰 천이 애니메이션이 투사되는 스크린으로도 활용된다. 뉴욕 시티 발레와 선보인 ‘일렁이는 아스팔트(The Shimmering Asphalt)’(2017)의 트레일러 영상에서는 실제 무용수가 드로잉 선으로 구현된 가상의 무용수와 춤춘다.
뉴욕대 발레 예술 센터(CBA)의 상주 아티스트를 지내면서는 AI(인공지능)를 활용한 작품 ‘켄타우루스(Centaurs)’를 완성했다. 이 작품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데이비드’라는 이름의 AI 프로그램은 공동창작자이자 참여자로 역할 했다. 창작 과정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추적해 데이터화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안무 구성에 기여했다. 이로써 질문을 던진다. 기술이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삶을 기술에 반영하는 것일 뿐인가. 경계가 불분명한 그리스 신화 속 반인반수 켄타우루스를 작품명으로 삼은 것도 이 질문을 은유하기 위함이다.
한편, ‘켄타우루스’ ‘세이렌’ ‘여름의 겨울 그림자(The Summer’s Winter Shadow)’ 등에서 리드베리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줄곧 활용해왔다. 이를 그대로 사용하기보다는 동시대 작곡가의 전자음악을 가미한다. 작곡가 데이비드 랑, 스테판 레빈 등이 리드베리의 ‘큰 그림’을 구현하는 데 함께해왔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부드러움과 예민한 감각이다. 음악은 우리가 무언가를 감각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스웨덴의 영화감독이자 극작가, 연극 연출가인 잉마르 베르만(1918~2007)은 ‘말은 현실을 가리는 데 쓰이는 한편, 음악은 소통을 위한 보다 신뢰할 만한 수단’이라고 했다. 그러한 음악 중에서도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은 특히 나의 내면세계와 자주 공명한다. 이에 새로운 음악을 덧대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중간지대를 형성하기 위함이다.”
경계를 허무는 작업에 공들여온 그에게 지난 한 해는 더욱 특별한 도전이었다. 도시봉쇄령이 예술과 관객 사이를 단절시켰기 때문이다. 지금 폰투스 리드베리는 그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전했다. “상처 입은 무대”라는 그의 표현에서 다시 한번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글 박찬미(독일 통신원) —
©Paul Kolnik
©Peter lueder
©Sarah Melchiori
폰투스 리드베리 ©Henrik Stenbe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