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 테너의 계보를 잇는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1월 18일 9:00 오전

COVER STORY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스리 테너의 계보를 이으며 첫 내한

파바로티의 사망 이후 스리 테너는 사실상 플라시도 도밍고(1941~)와 호세 카레라스(1946~)로 구성된 ‘투 테너’ 체재로 활약했다. 이를 이을 21세기 스리 테너는 없는가 묻는 말에 누군가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아직 때가 이르다고 한다. 과연 우린 답을 찾지 못 했을까? 총괄·기획 임원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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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 Hohenberg_ Sony Music Enter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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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대중가수에서 로시니 테너로, 화려한 성공의 이야기

국경 없는 목소리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기념 공연한 것을 계기로 플라시도 도밍고(1941~), 호세 카레라스(1946~),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 2007)는 ‘스리 테너’라는 이름으로 활약했다. 이후 성악가의 세대교체는 기악과 달리 더딘 듯하지만, 이미 그 자리를 꿰찬 테너들은 성악가의 목소리가 가장 무르익는다는 40대와 50대를 나고 있다. 이들은 전 세대인 도밍고, 카레라스, 파바로티의 인정을 받으면서 무대에 올랐고, 더불어 선배들의 추천과 격찬을 발판 삼아 자신만의 특징을 더욱 살리며 위대한 테너들의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1973~)도 그들 중 하나이다.

플로레스가 그간 세간에 주목받은 것은 라 스칼라 극장에서 금기시되던 앙코르를 선보인 사건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20세기 극장에서는 음악의 흐름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오페라 연주 중 한 곡을 반복하는 일을 금기시해 왔다. 특히 라 스칼라 극장의 이탈리아 청중은 더 열성적이었기에 공연을 진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당시 극장을 이끌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앙코르를 금지했다. 플로레스의 앙코르로 무려 74년 만에 그 금기가 깨진 것이다.

그는 오히려 태연히 “금기를 몰랐다”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대중이 원하는 것을 안 할 수는 없다”는 다소 음악가적인 확신에 찬 대답을 내놓는다.

플로레스는 인간적이기도 하다. 멕시코 노래인 ‘쿠쿠루쿠쿠’를 앙코르로 부르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한 여인을 사랑했던 남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 사랑을 못 잊어 비둘기가 되어 여인의 창가에서 ‘쿠쿠루쿠쿠’하고 운다는 가사를 담고 있다. 영상을 보면 그는 굉장히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음악가라는 생각이 든다. 넥타이를 풀고, 기타를 치며 흥을 돋울 줄도 알고, 아리아가 아닌 서정적인 대중가요로도 자신의 감정을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다. 플로레스의 특징이라면, 남미의 민속음악과 대중음악을 유럽의 오페라 무대로 잇고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음악을 통한 봉사 활동도 다양하다. 비영리재단인 ‘플로레스와 친구들’, ‘신포니아 포르 엘 페루’ 등을 설립해 재정적으로 어려운 어린 음악가들을 키워내고 있다. 오는 2월, 플로레스의 첫 내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크리스토퍼 프랭클린/서울 콘서트 필하모닉과 함께 로시니와 도니체티 등의 아리아를 선보이는 시간이다.

 

# 어린 시절. 그의 고향 페루를 찾아서

대중음악 가수인 아버지와 민속춤 마리네라를 즐겼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건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늘 곁에서 아버지가 부르시던 노래와 연주하시던 기타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페루 작곡가 카부차 그란다(1920~1983)의 노래를 주로 부르시곤 했다. 때론 리마 시립극장에서 아버지의 공연이 있는 날이면 아버지를 따라 공연장을 갔던 기억이 난다. 한 공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음악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페루의 전통음악부터 정글음악까지 화려한 무용수들의 공연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나의 첫 번째 음악 경험이다.

클래식 음악의 중심이 유럽이다 보니 페루는 낯설게 다가온다. 지금 생각해볼 때 페루에서 공부하던 시절, 음악적 환경은 어떠했는지 회상해 달라.

내가 페루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음악적 환경이 그렇게 풍부하지 않았다. 페루 국립오케스트라가 있어 공연을 보러 가긴 했지만, 그렇게 인상적인 수준의 연주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페루는 유독 테너에 강한 나라이다. 루이지 알바(1927~)와 에르네스토 팔라치오(1946~) 등을 배출한 나라다.

좋은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들이 있었지만, 주요 무대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로 그란다(1898~1962)로부터 테너 계보가 시작해 루이지 알바와 에르네스토 팔라치오로 이어졌고, 다음 세대였던 내가 이어받았다. 페루의 전 문화부장관이었던 프란치스코 페트로지(1961~)도 독일 레퍼토리에 강했던 테너였다.

대중음악가로서의 꿈을 품고 페루 국립음악원(Peru’s National Conservatory of Music)에 입학했지만, 선생님의 권유로 성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성악가와 대중음악가의 갈림길에서 성악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이었나?

입학할 당시 17세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대중음악가로서 작품 활동과 무대를 만들어오고 있었던 때였기에 노래를 더 잘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하지만 음악원에서 처음 오페라를 접하고 대중가수와 성악가의 길을 모두 갈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발매된 음반 중 가장 인상 깊은 건, ‘베사메 무초(Besame Mucho)’이다. 피아노 대신, 기타리스트 조나탄 볼리바르와 함께 라틴 재즈와 보사노바 등을 담았다. 대중가수를 꿈꿨던 어린 플로레스의 꿈이 이루어진 것인가? 수록된 모든 노래가 어린 시절 흥얼거렸고 사랑했던 노래들이다. 나의 어린 시절이 담겨있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공연이 끝나고 나면, 한두 개의 대중가요를 앙코르로 불렀다. 기타를 가져와 페루와 라틴 노래를 불렀는데, 대중의 반응이 뜨거웠다. 그래서 이러한 음반을 발매하기로 결심했다.

그중에서도 2019년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부른 앙코르 ‘쿠쿠루쿠쿠’가 화제를 낳았다. 페루를 비롯한 남미 음악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페루와 라틴 음악의 선율은 따듯하다. 반면 가사는 정열적이다. 아름다운 곡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쿠바와 멕시코나 페루의 노래들은 다른 라틴 음악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아마 선율이 대중을 사로잡는 게 아닐까? 단순하지만 효과적으로. ‘쿠쿠루쿠쿠’가 좋은 예다. 간단한 노래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모두가 원하는 노래로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할 때가 내 공연의 하이라이트이다. 내 목소리를 대중가요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고, 아름다운 노래를 청중과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행운인가!

한국에서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과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오페라 전용 공연장으로 설립되었다. 페루의 오페라 인프라는 어떤지 궁금하다.

오페라를 연주할 수 있는 공연장은 총 3곳이다. 리마 국립대극장과 리마 시립극장에서는 자주는 아니지만 오페라가 공연되고, 가족 공연과 뮤지컬, 클래식 음악 공연 등이 무대에 오른다. ‘테아트로 세구라(Teatro Segura)’라는 공연장도 있지만 오래되어 보수 중이다. 곧 재개관할 예정이다.

 

# 꿈을 정하며

재학 중 페루 국립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합창단원으로서 오페라와 합창 무대에 서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악가로서의 미래를 그리게 됐을 것 같다.

첫 스승이었던 안드레아스 산타 마리아의 역할이 컸다. 페루 국립합창단원으로 함께할 기회를 주셨던 분이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내가 테너가 되었으면 한다고 이야기하셨다. 그러던 중 합창단원으로 섰던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가 꿈을 정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합창단에서의 경험이 지금의 오페라 가수로서의 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하다.

합창단에서 많은 걸 배웠다. 짧은 시간 안에 큼지막한 음악의 덩어리를 빨리 하나로 모아야 했기 때문에 악보를 빠르게 읽는 법을 배웠다. 또한 서로의 소리를 듣고 함께 음악을 만들어 가는 것과 지휘자를 따라가는 것 등 중요한 음악적 경험을 합창단 활동을 통해 얻었다.

솔리스트로서의 기량을 닦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커티스 음악원 졸업과 동시에, 1996년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의 개막작이었던 ‘샤브란의 마틸네’ 중 주역 코라디노를 노래할 로시니 전문 테너 브루스 포드가 병으로 출연하지 못해 대신 무대에 오르며 데뷔했다.

코라디노 역을 맡았을 때가 23세 때였다. 참 오래됐다. 브루스 포드를 대신해 무대를 오를 때만 해도 그렇게 어려운 곡일 줄 몰랐다! 길고 어려운 이 오페라를 2주 만에 익혀야 했다. 악보를 안 보고 노래를 불렀을 때 “와, 정말 어렵구나”라고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난다.

 

# 이탈리아를 점령

같은 해 리카르토 무티의 주목을 받아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데뷔도 함께 이뤄냈다.

무티는 아니었지만, 공연관계자가 무티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했고, 무티는 나에게 글루크 오페라 ‘아르미드’의 기사 역을 맡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 뒤로 두 세개의 라 스칼라 시즌 공연 무대에 올랐다.

데뷔했던 라 스칼라 극장에서 2007년 있었던 일로 대서특필 됐던 사건이 있었다. 음악의 흐름을 위해 극장이 금기시해 왔던 ‘앙코르를 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깬 것이다. C6까지 올라가는 악명 높은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의 ‘아 나의 친구들이여’를 완벽하게 불러, 까다롭기로 유명한 라 스칼라 극장의 관객으로부터 ‘앙코르’라는 환호성을 들었다.

라 스칼라 극장의 규칙을 어기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단지 다른 이탈리아 극장에서 허락된 것처럼 관객의 박수에 앙코르로 호응했을 뿐인데, 그다음 날 ‘뉴욕 타임스’,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피가로’ 등에 ‘규칙을 어긴 테너’로 대서특필 되어 있었다.(웃음)

극장 측은 ‘앙코르를 자제해 달라’라고는 이야기를 전달했다고 들었다. 그때의 상황이 궁금하다.

변명하자면,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되었다는 도니체티의 오페라 ‘샤모니의 린다’를 실황 음반으로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솔리스트가 앙코르 하는 것을 듣고 가능한 줄만 알았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진 뒤 음반이 해적판인 걸 알게 되었다. 공연의 장소도 라 스칼라 극장이 아닌 제네바 공연이었다. 그런 줄은 모르고 공연 당일 지휘자에게 관객이 너무 박수를 많이 치면 앙코르를 하겠다고 사전 조율을 했고, 지휘자도 “신호를 줄 테니 그때 노래를 불러라”라고 화답했다.

사실 여전히 나는 그때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대중이 원한다면 못 할 게 무엇인가? 결국 오페라란 사람들이 즐기는 하나의 ‘쇼’이다. 과거에는 솔리스트의 앙코르가 일상이었다.

 

# 사회를 돌아보며

2011년 ‘신포니아 포르 엘 페루(Sinfonía por el Perú)’를 창단하고 2015년 비영리 단체인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와 친구들’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음악 교육을 하고, 음악가로서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있다. 이러한 단체를 설립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아이들의 인생에 함께 경험하고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기쁨을 알려주고 싶었다. 내게는 가장 중요한 삶의 가르침이다. 그중에는 음악가를 양성하기 위한 전문적인 음악교육들도 있다. 현재 6천여 명의 아이들이 페루 각지에서 모여 악단을 이루고 있다. 재단에 소속된 페루 유스 오케스트라는 지난여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루체른 페스티벌 등에 초청받아 연주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세계 유수의 공연장에서 공연한다는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대중과 평론가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기량을 갈고닦던 젊은 음악가에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중견 성악가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역할의 중요도도 함께 커지는 것 같다. 이러한 활동 영역의 확장이 이후 당신의 음악 활동에는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

로시니 페스티벌의 예술감독과 신포니아 포르 엘 페루의 대표직처럼 현재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성악가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정돈되려고 한다. 지금 내가 꾸려나가는 것에 행복을 느끼고 있다.

 

# 분신, 로시니와 함께!

당신의 이름 앞에는 ‘로시니 전문 성악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미국 출신 테너 록웰 블레이크(1951~)와 같이 좋은 로시니 전문 테너들이 있었지만 내가 처음 활동할 당시에만 해도 경쟁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좋은 성악가들의 세대교체가 있은 뒤, 한동안 거의 혼자 그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붙은 수식어인 듯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말 좋은 테너들이 많아졌다.

때론 대중의 이러한 시선이 당신의 음악적 폭을 제한한다고 느낀 적은 없는가?

나는 로시니 스페셜리스트라는 말에 언제나 기분이 좋다. 로시니의 작품을 많이 부르지 않고 ‘라 보엠’이나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작품을 주로 부르고 있는 현재로서는 로시니 페스티벌에서 부르는 로시니 작품이 더욱 반갑다. 하지만 목소리도 변했고, 더 많은 것을 부를 준비가 됐다.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로시니 테너가 갖추어야 할 면모는 무엇인가?

로시니의 작품은 마치 격렬한 스포츠를 하는 것 같다. 항상 절벽에 놓이고, 떨어질 것 같기도 하다. 그걸 즐기는가 못 즐기는가가 로시니 테너와 다른 테너와의 차이인 것 같다. 또한 로시니 테너의 가장 기본은 ‘노래하는 것’ 그 이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스럽거나, 죽을 것 같은 소리가 아닐 때, 즉 어려운 것이 쉬워질 때 로시니의 작품은 신이 날 것이다.

성악가는 때론 리사이틀을 통해 오페라의 아리아를 한데 모아 무대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한 작품 속 인물의 감정을 끝까지 끌어가는 오페라와 달리, 순간 각기 다른 배역에 몰입해야 하는 아리아 모음 공연은 성악가에게는 늘 어려운 일이다. 아리아들로 공연을 채울 때, 순간순간 인물에 몰입하기 위한 당신만의 노하우가 있는가?

물론 순간적으로 그 배역에 몰입해야 하는 건 어렵지만, 그러한 공연형식에 매우 익숙하다. 보통 로시니로 시작해 도니체티, 벨리니, 베르디를 거쳐 푸치니로 공연을 끝낸다. 이러한 공연이 해마다 수없이 많지만 모두 즐기고 있다. 나만의 노하우라면 더 가사에 집중하려고 하고, 아리아 전후로 인물에게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배역에 나를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2022년부터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으로도 재직 중인데,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여러 감정이 든다. 축제가 열리는 이탈리아의 페사로로 인해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찍었다. 현재 집도 페사로에 있고 나의 딸도 페사로의 집에서 태어났다.

 

#노래와 함께 깨닫고, 성장하고 변화하다

흔히 가볍고 날쌘 목소리 때문에 로시니 테너는 레제로(가볍고 경쾌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테너라고도 한다. 많은 사람이 하이 C 이상 고음을 내는 테너에게 붙여지는 이름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음역이 아닌, 음색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벼운 목소리를 가진 테너를 레제로 테너라고 한다. 테너를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이기도 하지만, 단어 안에는 어떤 테너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지 힌트를 주지 않고 있다. 그래서 레제로 테너는 모차르트를 부르는 일반적인 테너가 되기도, 바로크 테너나 로시니 테너처럼 빠른 노래를 부르는 테너가 될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목소리도 악기와 같이 여물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벼운 레제로 테너의 기량을 무대에서 선보이고 있는데, 본인의 음색특성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지금은 나 자신을 리릭 테너(Lyric Tenor)라고 생각한다. 가볍지만 너무 가볍지 않은 목소리이다. 로시니부터 푸치니의 ‘라 보엠’까지 다른 스타일의 작품들을 오가면서 목소리가 조금은 무거워졌다.

이러한 구분이 테너의 음악적 활동에 미치는 장단점이 있는가?

좋은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자신이 사랑하는 레퍼토리를 노래한다면 구분에 크게 부여받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실력까지 좋다면 다른 레퍼토리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언제든지 여러 파트를 옮겨갈 수 있다. 어떤 형태이든 좋다.

레제로 테너는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의 알마비바 백작이나,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모노스타토스 역과 같이 희극적 성격을 띤 인물을 맡기도 한다. 때론, 완전히 다른 배역과 역할로 무대에 서고 싶을 때가 있을 것 같은데.

감사하게도 내가 원하는 배역을 맡아 노래해오고 있다. 푸치니의 ‘라 보엠’, 마스네의 ‘마농’, 구노의 ‘파우스트’,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 등은 현재까지 내가 맡아 온 배역의 작품들이다. 그래서 굉장히 행운으로 생각한다.

오페라 가수로서 오케스트라 반주에 더 익숙할 것 같다. 그럼에도 피아노 반주만으로 연주할 때 더욱 성악가의 음색과 가사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어느 것을 더 선호하는가?

두 가지 모두 장단점이 있다. 피아노랑 할 때는 원하는 만큼 앙코르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또한 관객에게는 피아노가 친밀하다. 그래서 대중에게 더 익숙하고 표현적인 아리아를 선곡할 수도 있다. 한편, 오케스트라와 연주할 때 관객은 작품이 원래 쓰인 그대로를 들을 수 있고, 웅장한 음향에 압도되기도 한다.

바이올리니스트나 지휘자, 피아니스트와 달리, 성악가의 악기는 목소리이다. 그러한 만큼 세월이 지나며 무용수와 마찬가지로 다른 음악가들보다 은퇴 시기가 더 빨리 찾아오기도 한다. 성악가에게 가장 음악이 무르익는 때는 언제이고, 이를 위한 알맞은 준비는 무엇이 될까?

만약 목소리를 잘 관리해왔다면 70대가 되더라도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많은 관리가 필요하지만. 목소리는 악기와 다르다.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는 6시간 이상 연습이 가능하지만, 성악가는 불가능하다. 그만큼 예민한 게 목소리이다. 그래서 목소리에 맞는 레퍼토리와 시간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일례로 나는 공연과 공연 사이에는 노래를 전혀 부르지 않는다. 성악가들의 목소리가 꺾이는 시점을 보통 30~40대로 본다. 하지만 말했듯이 당신이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렸다.

 

# 내한을 앞두고

이번 내한 무대에서는 크리스토퍼 프랭클린/서울 콘서트 필하모닉과 함께 무대에 선다. 꾸준히 함께 하고 있는 앙상블 피아니스트 빈첸초 스칼레라가 아닌, 새로운 지휘자/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출 때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무엇인가?

프랭클린은 함께 많은 무대에서 호흡을 맞춘 지휘자이다. 함께 해온 시간만큼 그와의 작업은 쉽다. 하지만 만약 새로운 지휘자랑 함께한다면 리허설에 공을 더 들여야 할 거고 지휘자를 이해시켜야 한다.

피아니스트 빈첸초 스칼레라와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 오랜 세월만큼 음악적 이견이 있을 때 두 사람이 해결하는 방식에도 노하우가 있을 것 같다.

우린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내가 어떻게 숨을 쉬는지,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를 알고, 나는 그가 어떻게 연주할 것인지를 안다. 어떤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는 내 조언을 잘 받아들인다. 보통 공연 한 시간 전 딱 한 번 맞춰보는 것으로 리허설을 끝낸다. 속전속결이다.

2023/24 시즌에 예정된 주요 공연들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에서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 출연한다. 또한 빈 슈타츠오퍼와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 등에서 연주가 있다. 또한 내년에는 미주 내 큰 투어가 있다. LA, 뉴욕, 워싱턴, 시카고 등을 투어 한다.

글 임원빈 기자 사진 서울콘서트매니지먼트

|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디스코그라피

로시니 2001

칸타타 vol.2

Decca E4663282

리카르도 샤이(지휘)/

라 스칼라 필하모닉·합창단/

엘리자베타 스카노(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메조소프라노)/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테너) 외

 

 

로시니 2001

아리아

Decca 4700242

리카르도 샤이(지휘)/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교향악단/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테너)

 

 

로시니 2004

‘오리 백작’

DG E4775020

첫 오페라 주연 음반·첫 DG 음반

헤수스 로페즈 코보스(지휘)/

테아트로 코무날레 디 볼로냐 오케스트라/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오리 백작)/

스테파니아 본파델리(백작부인) 외

 

로시니 2006

‘샤브란의 마틸데’

Decca 4757688

리카르도 프리차(지휘)/

갈라시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프라하 체임버 합창단/

아니크 마시스(마틸데) 외

 

 

 

 

베사메 무초 2018

Sony 19075822942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테너)

 

 

 

Performance information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내한 공연

2월 1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로시니 ‘볼레로’, ‘신포니아’, 도니체티 ‘사랑의 묘약’ 중 ‘남 몰래 흘리는 눈물’ 외

(*프로그램은 연주자의 사정에 의해 변경될 수 있음)

 

Portrait Juan Diego Florez for Sony Classical Intl. 

 

 

©Gregor Hohenberg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Juan Diego Flórez, 1973~) 

– 페루 리마 출신

– 페루 국립음악원 졸업

– 커티스 음악원 졸업

– 1996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 데뷔

– 1999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 알마비바 백작 역으로 빈 슈타츠오퍼 데뷔

– 2002 같은 역으로 메트 오페라 데뷔

– 2022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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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의 플로레스 ©Juan Diego Florez

 

 

 

 

 

 


©Juan Diego Flórez

 

 

 

 

 

 


©Juan Diego Flórez

 

 

 

 

 

 

 

 

 

 

 

 


©Juan Diego Flórez

 

 

 

 

 

 

 

 


©Juan Diego Flórez

©Juan Diego Flórez

 

 

 

 

 

 


©Juan Diego Flórez

 

 

 

 

 

 

 

 

➊ 1996년 로시니 페스티벌 데뷔 무대를 앞두고 분장 중인 플로레스

➋ 1996년 로시니 페스티벌 데뷔

➌ 1987년 대중가수로 활동할 때의 플로레스

➍ 2002년 페사로에서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만나다

➎ 1994년 페루의 테너 에르네스토 팔라치오와 플로레스

➏ 2007년 라 스칼라 극장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 화제의 무대

 

 

화제의 앙코르 영상 ‘쿠쿠루쿠쿠’

 

 

 

 

도니체티 ‘연대의 딸’ 중 ‘아 나의 친구들이여’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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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Diego Flórez performs accompanied by Vincenzo Scalera at Carnegie Hall, 11/19/18. Photo by Chris Lee


©Chris Lee

 

 

 

 

 

 

 

 

 

 

 

 

 

 

 


©Juan Diego Flórez

 

 

 

 

 

 

 

➊ 기타와 함께 앙코르를 장식하기도 한다

➋ 재단 ‘플로레스와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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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Diego Flórez Tenor
Sinfonía por el Perú Youth Orchestra
Roberto González-Monjas Dirigent


©Juan Diego Florez

 

 

 

 

 

 

 

 

 

 

 

 

 

 

 

 

 

Pesaro – Italy – 09-14-2019: Foutain called “La Pupilla” in Piazza del Popolo square

 

 

 

 

 

 

 

 

 

 

 

➊ 지난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페루 유스 오케스트라는 플로레스와 협연 무대를 꾸몄다

➋ 2023년 로시니 페스티벌 프리뷰 기자 간담회에서의 플로레스

➌ 로시니 페스티벌이 열리는 이탈리아 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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