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무대의 주인공이 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3월 10일 9:00 오전

SPECIAL

3월 8일은 국제 여성의 날!

여성, 무대의 주인공이 되다

여성 중심 서사의 뮤지컬·창극·클래식 음악 동향

 

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 © Manuel Herlan

과거 예술에서의 여성은 서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비입체적 인물’로서 기능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 현장에서, 여성을 전면에 내세워 새로운 관점을 개발하고자 하는 이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3월이면 ‘국제 여성의 날’이 돌아온다. 1909년을 시작점으로 보며, 여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걸어온 역사와 성취를 기념하는 날이다.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을 맞아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예술계의 동향을 살펴본다.

총괄 허서현 기자

 

Part 1 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 _허서현

Part 2 국립창극단 ‘정년이’ _김옥란

Part 3 작곡가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_박찬미

 


Part 1. MUSICAL

더 이상 우리를 ‘식스(Six)’로 엮지 마!

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

헨리 8세의 불행했던 왕비들, 역사를 재해석하다

3.10~6.25 코엑스 신한카드 아트리움

아라곤 캐서린 © Manuel Harlan

캐서린 파 © Manuel Harlan

앤 불린 © Pamela Raith

캐서린 하워드 © Manuel Harlan

클레페의 앤 © Pamela Raith

제인 시모어 © Pamela Raith

‘이혼하고(Divorced)’, ‘목이 잘리고(Beheaded)’, ‘죽은(Died)’혹은 ‘살아남았다(Survived)’로만 묘사되어 온 여섯 왕비가 무대 위에 섰다. 영국 튜더 왕가에서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헨리 8세의 부인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 머리에는 왕관 대신 뾰족한 징이 박혀있고, 갑옷같이 뻣뻣한 드레스 위에 박힌 화려한 보석은 어딘지 모르게 위협적이다. 언제나 헨리 8세의 ‘식스(Six)’라는 수식어로 불린 이들. 한 남성을 둘러싼 여섯 여성으로만 인식됐던 이들이 역사 속에 숨어 있던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낸다. 사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사실과 그리 다르지도 않은. 역사를 뒤엎는(Histo-remix) 쇼가 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이하 ‘식스’)에 펼쳐진다.

역사를 뒤엎는 쇼에 온 걸 환영해

새로운 수식어를 붙여서 흐름을 바꾸는 거야

우리가 ‘여섯’ 아내(Six-wives)였단 건 모두 알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전- 아내(Ex-wives)일 뿐!

– 뮤지컬 ‘식스’ 중 ‘Ex-wives’

 

대학가의 아이디어, 브로드웨이로 입성

토비

루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영문학 강의실, 수업을 듣던(혹은 듣고 있지 않던) 토비 말로우(1994~)의 머릿속을 한 아이디어가 스쳤다. ‘팝 콘서트 같은 뮤지컬이면 재밌겠는데? 멋진 드레스 입고 춤을 추면서…. 아이돌처럼!’

“그 때 바로 느낌이 왔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오, 마이 갓. 루시, 이건 루시가 필요해!”(토비)

토비가 찾은 루시 모스(1994~)는 같은 대학 뮤지컬 시어터 소사이어티에서 함께 하고 있던 친구다. 토비는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지원했고, 참가 자격이 주어지면서 어떤 작품을 올릴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마침, 루시의 전공은 역사. 그는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이야기를 토비의 ‘팝 콘서트 뮤지컬’ 아이디어에 접목했다.

“처음엔 ‘정말 별로일 수도 있겠는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하지만 저는 토비의 아이디어를, 그리고 작가로서의 토비를 믿었습니다. 여섯 왕비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는, 오히려 ‘창작’보다 ‘선택’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야 하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이 여섯 왕비는 유명했고 정보도 많아서 어떤 역사를 포함할지 골라내야 했죠. 제가 역사를 전공한 게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루시)

그렇게 토비와 말로우가 ‘펜을 들었고’, 여섯 왕비는 ‘마이크를 들게’ 됐다. 2017년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을 위해 탄생한 뮤지컬 ‘식스’는 그해 겨울 오프-웨스트엔드에 데뷔했으며, 2018년 영국 투어를 시작했다. 투어가 몰고 온 반향은 엄청났다. 같은 해 발매된 ‘식스’의 음반은 영국의 음원 차트를 강타했다. 2019년에 웨스트엔드를, 2020년에는 브로드웨이에까지 입성하게 된다. 2022년 토니 상에서 ‘최우수 음악상’ ‘최우수 뮤지컬 의상 디자인상’을 받으며, ‘식스’는 현존하는 영국 뮤지컬 중 가장 고무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처음 이 작품을 올릴 때, 이렇게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죠. 그래서 더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써 내려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루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던 토비와 루시가 실제로 이 작품을 쓰는 데에 들인 시간은 10일 정도. 쓰기 시작한 첫날, 이들은 뮤지컬의 전체적인 구성을 확정했다. 인터미션 없이 80분간 이어지는 이 ‘콘서트 뮤지컬’은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독창적인 것을 쓰고 싶었던 것은 분명해요. 확실히 일반적인 극장 뮤지컬과는 다르게요. 브로드웨이 앨범(2020)이 스튜디오 녹음으로 발매되는 일반적인 뮤지컬 음반과는 달리, 실황을 그대로 담아낸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식스’에 등장하는 이들이 팝 가수라는 설정과도 잘 맞아떨어지죠. 비욘세도 자신의 콘서트를 그대로 담아내는 비디오를 발매하잖아요!”(루시)

“어쩌면 코로나로 인해 공연을 한동안 못했기에 더욱 시기적절했습니다. 그 음반 안에는 수많은 청중의 환호성이 있었고, 우리에게 영감을 준 창작자들이 모두 있었으니까요.”(토비)

 

누가 더 기구한지 겨뤄보자!

여섯 왕비의 ‘불행 배틀’

뮤지컬의 전체 구성은 여섯 왕비가 부르는 ‘아이엠송(I’m song)’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누가 제일 불행했는지’를 기준으로 최고의 왕비를 뽑아보자며 돌아가며 노래한다. 왕비들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이혼당하거나(아라곤), 혹은 아들을 낳다가 죽었다(제인 시모어). 미리 봤던 초상화와 다르다는 이유로(클레페의 앤), 기대와 달리 문란해서(캐서린 하워드) 어처구니없이 버림도 당했다. 왕이 정치적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손쉽게 생각한 희생양이기도 했다.

자칭 ‘역사광’이었던 루시는 가사 곳곳에 이 맥락을 재치 있게 숨겨놓았다. ‘식스’가 내한도 전에 국내 뮤지컬 팬들의 관심을 끌어모은 이유기도 하다. 왕비들이 풀어낸 서사는 그간 헨리 8세와의 관계 내에서만 정의되던 것과 다르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의 역사적 행보를 근거로, 동시대적 관점을 한 스푼 더하니 ‘그래, 이 왕비들이 실제론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네!’ 하고 수긍하게 된다.

“우리는 가사에 역사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걸 좋아했어요. 특히 역사와 농담이 동시에 흐르는 것을요. 저는 오늘날 여성이 겪고 있는 경험과 유사하다는 걸 공유하고 싶었어요. 학생들이 와서 이 공연을 보며 헨리 8세에 대해 배운다면 좋지 않을까요? 아마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겁니다.”(루시)

 

한국에서 탄생할 새로운 ‘식스’의 모습은?

‘식스’의 매력은 이렇듯 쫀득한 말맛에 있다. 그냥 들어도 유쾌하고, 역사를 알고 들으면 더 통쾌하다. 3월 공연은 오리지널 내한에 연이어, 최초로 라이선스 한국어 공연이 진행된다(오리지널 내한은 3.10~26, 한국어 공연은 3.31~6.25). 말맛이 얼마나 잘 구현될지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식스’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무대에 오르는 것은 최초다.

‘식스’는 한 문장 안에 역사적 사실과 이를 비꼬는 왕비들이 시선이 한꺼번에 담긴 경우가 많고, 수위 높은 문장도 꽤 있다.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이 부르는 ‘Don’t Lose Ur Head’만 봐도 당장에 그 수위를 실감할 수 있다. “lol, say oh well(ㅋㅋㅋ, 신경 꺼)/Or go to hell(아님 꺼지던지)” 번역은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 ‘데드풀’ 번역을 성공시키며 화제에 올랐던 황석희가 맡았다. 그는 최근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번역을 맡는 등, 뮤지컬 번역에도 그 감각을 발휘하고 있다. 어쩌면 이번 한국 공연은 ‘식스’의 타 언어권으로의 진출 가능성을 가늠할 분기점이다.

통쾌한 가사들에 더해, 각 왕비를 모티브로 삼은 다양한 음악적 장르가 작품의 대중성을 끌어올린다. 비욘세·앨리샤 키스·아델과 같은 팝 가수의 대표주자들부터 아리아나 그란데·에이브릴 라빈 같은 시대적 심벌들도 영감이 됐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음악적 공감대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뮤지컬의 또다른 강점이다.

그렇기에 ‘식스’는 배우들의 가창력이 중요한 작품이고, 별다른 무대 효과가 없기에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에도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이번 내한은 현재 영국 투어를 원 캐스팅으로 소화하고 있는 팀이 맡았다. 한국어 버전 공연에는 손승연·김지우·솔지 같은 스타 배우들을 비롯해 이아름솔·박혜나·김지선·김려원 등의 뮤지컬 배우들까지 총 12명의 배우들이 더블 캐스팅됐다. 웨스트엔드 창작진 중 의상 디자이너 가브리엘라, 음악 수퍼바이저 조 베이튼, 무대 디자이너 엠마 베일 리가 직접 참여해 완성도에 힘을 쏟아볼 예정이다.

개성 넘치는 이들의 ‘불행 배틀’로 이어지던 ‘식스’는 헨리 8세의 마지막 부인이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캐서린 파의 외침으로 분위기가 반전된다. 헨리의 ‘무엇’으로 경쟁하지 말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자는 것. 실제 역사에서도 그는 자기 이름으로 책을 출판한 영국 최초의 여성이다. 뮤지컬을 통해 자기만의 서사를 완성한 왕비들은 시원하게 자신들을 속박하던 표현을 걷어낸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여섯 왕비’(Six-wives)가 아닌, ‘식스’(Six)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클립서비스

 

ABOUT Heroine

6인의 배우가

소개하는

‘식스’의 왕비들

장미 전쟁 후 영국이 안정기에 들어선 때, 국왕으로 등극한 헨리 8세(1491~1547)는 강화된 왕권 위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그의 여성 편력은 일찍이 여러 매체에 소재가 되었다. 영화 ‘천일의 앤’ ‘천일의 스캔들’, 드라마 ‘튜더스’ ‘울프 홀’ 등이 대표적이다. ‘식스’는 이 여섯 왕비의 이야기를 알고 보면 재미가 배가 된다. 실제 역사를 뮤지컬은 어떻게 반영하고 있을까? 내한을 앞둔 여섯 배우에게 직접 물었다. “당신의 여왕은 어떤 사람인가요?” 이들의 답변과 역사를 나란히 비교해보길 바란다. “제발, 그 지겨운 초상화 좀 그만 들이대!”라고 외친 ‘식스’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아라곤 캐서린

첫 번째 부인. 훗날 ‘블러드 메리’가 된 외동딸 외에 아들을 낳지 못했다. 헨리가 젊은 시녀 앤 불린과 사랑에 빠져 이혼을 당했지만, 그는 왕의 이혼 요구를 거부했다. 쫓겨난 캐서린은 수녀원에서 생활했으며, 병에 걸려 죽는다.

“아라곤은 의지가 강하고 맹렬한 여성입니다. 그녀가 부르는 ‘No-n-n-n-n-Way’라고 외칠 때마다 공감이 가요. 저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거든요.”(캐서린 역의 클로이 하트)

캐서린의 노래 ‘No Way’ | 이혼을 요구한 헨리 8세를 향해서 당당히 ‘절대 안 될 걸!’이라고 외치는 강렬한 팝. 비욘세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 “넌 분명 날 미쳤다고 하겠지? 날 갈아치우고 싶겠지만, 베이비. 그건 절-대 안 돼”

 

앤 불린

아라곤의 젊고 똑똑한 시녀였던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서, 헨리 8세는 국교까지 바꿨다. 왕비를 끌어내린 ‘악녀’ 이미지가 강했다. 반역을 조장했다는 모함을 받고 참수 당했다.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앤 불린은 훨씬 더 지적이고, 재밌는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겉모습만으로 평가받았다는 것에 가장 공감해요. 저 또한 사람들의 평가를 받는 배우니까요.”(앤 불린 역의 제니퍼 콜드웰)

앤 불린의 노래 ‘Don’t Lose Ur Head’ | 자유롭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앤 불린.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은 극 중에서 재치 있게 표현됐지만, 실제로는 매우 영리한 여성이었다고. 에이브릴 라빈에게서 영감받았다. “그니까 내 말은, 미안하지만 나 별로 안 미안해. 정신 좀 차려”

제인 시모어

헨리 8세가 ‘가장 사랑한 왕비’라고 알려진 그는 아들(에드워드 6세)을 낳던 중 산욕열에 걸려 죽는다. 여섯 부인 중 유일하게 장례식이 치러진 여왕이다.

“시모어는 사려 깊은 여성입니다. 강하고 친절했으며, 똑똑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녀가 가졌던 사랑은, 정말 말 그대로 흔들림 없는 사랑이었다고 생각해요.”(시모어 역의 케이시 알-쉐크시)

시모어의 노래 ‘Hear Of Stone’ | 아델, 시아와 같이 소울 보컬의 노래다. 만약 아들을 낳지 못했다면 왕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사랑을 찾았을 거라고 노래한다. “나는 깨지지 않아요. 당신은 굳건한 돌을 발견할 거예요. 굳건한 내 사랑을요”

클레페의 앤

독일 출신 명문가의 딸이었다. 정치적 이해 관계로 정략 결혼했다가, 그 가치가 떨어져서 이혼을 당했다. 초상화로 봤던 앤의 모습이 실물과 달라서, 실망한 헨리 8세 때문에 제대로 된 결혼 생활도 못했다. 이혼 당시 받은 보상으로 부유하게 잘 살았다고.

“클레페가 가지고 있는 재밌는 분위기가 좋아요! 공연에서 보이는 유쾌한 서사에도 공감이 많이 갑니다. 아름답지만 힘찬 여성이죠. 약간은 건방진 캐릭터 같기도 하고요.”(앤 역의 제시카 나일즈)

클레페 앤의 노래 ‘Get Down’ | 묵직한 힙합 사운드가 귀를 사로잡는다. 래퍼 니키 미나즈에서 영감을 받은 이 역할은 이혼 후 자신의 성에서 당당히 살았던 클레페의 모습을 그린다. “난 모두가 내 초상화를 보라고 걸어놓을 거야. 왜냐면 이 성의 주인공은 나거든. 자세 낮춰, 이 더러운 놈아”

캐서린 하워드

15살에 헨리를 만났지만, 그는 이미 음악 교사와도, 귀족과도 관계를 맺었던 소녀였다. 헨리 8세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실망했고, 그는 가난한 집안으로부터도 외면당한다. 루시는 하워드를 “문란한 여성이 아닌, 학대당한 소녀로 그리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많은 오해를 받는 여성이라고 생각해요. 역사는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지 않죠. 지적이고 친절한 여성이에요. ‘식스’야말로, 진짜 하워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하워드 역의 레베카 위크스)

캐서린 하워드의 노래 ‘All You Wanna Do’ | 아리아나 그란데나 브리트니 스피어스처럼 어린 나이에 ‘섹스 심벌’로 소비된 이들을 모티브로 한다. 그는 진정한 사랑을 꿈꾸지만, 자신을 성적으로만 보는 이들에게 실망한다. “결국 내게 원하는 것은 그저, 날 만지고, 사랑하고, 그리고….”

캐서린 파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비. 이미 두 차례 결혼 후 사별을 경험했고, 헨리와도 결혼 4년 만에 사별했다. 전처의 자식들에게도 잘 대해주었고,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영국 최초로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남긴 여성이며, 여성들의 교육도 지원했다.

“독립적인 리더상이죠. 여성을 가르치고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는 점이 이 역할의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이죠. 아무도 나서지 않았을 때, 세상에 여성들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자기 평생을 바쳤어요.”(파 역의 알라나 마리아 로빈슨)

캐서린 파의 ‘I Don’t Need Your Love’ | 실제로 캐서린 파는 헨리와 결혼했을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에게 살아남기 위해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야한다고 노래한다. 엘리샤 키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역할. “선택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거야. 헨리, 내가 널 돌보겠다고 내 남자, 내 꿈, 내 일을 다 포기할 거라고 생각해?”

 


Part 2. TRADITIONAL

21세기 창작자들의 시선에서 본 여성국극은?

웹툰 & 창극 ‘정년이’

웹툰으로 화제를 모은 ‘정년이’의 당찬 인생을 국극으로 만들기까지

3.17~26 국립극장 달오름

© 네이버 웹툰/서이레·나몬/정년이

© 황필주

국립창극단이 웹툰의 창극화에 처음으로 도전했다. 1950년대를 풍미한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다. 이자람이 작창과 음악감독을 맡았고, ‘사천가’ ‘억척가’를 함께 만든 남인우가 연출을 맡았다.

원작은 네이버웹툰 ‘정년이’다. 2019년부터 연재되며 ‘여성 서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들은 웹툰이다. 원작에서는 전남 목포 출신의 소녀 ‘윤정년’이 돈벌이를 위해 당시 인기를 끌던 서울의 매란국극단에 입단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충실한 고증으로 여성국극을 둘러싼 여러 인물을 입체적으로 되살렸다.

소리와 춤, 연기가 어우러진 ‘여성국극’은 국립창극단이 올려온 작품의 형태와 유사하다. 어쩌면 지금의 국립창극단이 가장 잘 만들어낼 수 있을 소재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국립창극단 대표 여배우들이 캐스팅됐다. 주인공 ‘윤정년’은 이소연과 조유아가, 라이벌 ‘허영서’에는 왕윤정이, 정년이의 첫 번째 팬인 ‘권부용’은 김우정이 연기한다. 정년이의 엄마이자 숨어서 세월을 보내는 명창 ‘채공선’은 현재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의 부이사장이자 창극단 단원인 김금미가 맡았다.

한때 많은 팬덤을 보유했던 우리나라 고유의 이 문화는 오늘날 어떻게 다시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또한 이를 21세기의 창작진들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을까?

 

INTERVIEW

웹툰 글 작가 서이레 &

그림 작가 나몬

여성국극만의

인물을 찾아내다

주인공 정년이와 중심 인물이 ‘여성국극의 왕자들’이다. 왜 왕자들인가?

서이레 당시 여성국극에서 남자역을 맡은 배우의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당연히 인기가 가장 많은 배역에 도전했겠지’라고 접근했다. 그런데 당시 기록을 보는데 “여자 역이 어울리는데 남자 역을 자꾸 하고 싶어 하는 연구생이 있었다. 그래서 한 번 시켜봤는데 정말 잘하더라. 아마 혼성창극단에서는 이런 마음이 있어도 도전조차 해보지 못했을 거다”라는 말이 있었다. 여성국극 안에서는 ‘남자’를 연기하고 싶은 욕망, ‘남자’를 연기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었다. 이 점이 정말 재밌었다. ‘왜’ 이들이 남역, 그것도 왕자를 원하는지 상상했고, 여성국극을 소재로 했을 때 만들 수 있는 고유한 인물과 서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자가 되고 싶은, 왕자가 된 여자들에게 더 집중했다.

그림 연출의 방향도 궁금하다.

나몬 1950년대 매란국극단 단원들은 ‘지금으로 치자면 아이돌’이라고 생각하며 그렸다. 다양한 개성의 여성 캐릭터들을 그리는 게 이 작업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정년이’의 캐릭터이면서도 무대 위 캐릭터로도 보여야 했으니 각 캐릭터의 외형적 특징은 살리되 배역의 느낌이 잘 담길 수 있게 했다.

© 네이버 웹툰/서이레·나몬/정년이

‘정년이’는 원래 퀴어 서사에서 점차 성장 서사로 변화했다고 들었다.

서이레 성장의 측면을 키워보자는 의견은 네이버 웹툰 편집팀에서 냈다. 처음에는 퀴어성으로 승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크게 내키진 않았다. 그런데 의견대로 연기 요소를 강화하다 보니 사건이 구체성을 띠고 동시에 커졌다. 정년이가 겪는 감정의 진폭도 따라서 커지고 이야기도 풍부해졌다. 퀴어한 부분이 더 자연스러워지기도 했다. 특히 정년이와 부용이의 로맨스는 정년이의 연기에 대한 고뇌를 이야기 전면으로 끌어올렸을 때 더 강렬해졌다.

서사가 변하면서 분량도 원래 45화에서 137화로 늘어나 3년을 연재했다.

나몬 3년 이상 걸릴 작품이란 걸 알았다면… 아니, 그래도 ‘정년이’는 했을 것 같긴 하다. 70화 정도 진행했을 때 이야기의 절반쯤 왔다는 말씀을 들었고 큰일 났다 싶었다. 그래도 잘 완주하고 싶어서 최대한 버티며 시즌제로 끊어갔다. 각 캐릭터의 서사가 쌓이면서 깊은 감정과 화두를 담은 작품이 되는 것 같아 그게 버팀의 원동력이었다.

“정년이의 팬 1호” 곧 관객이자 작가인 부용 시점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서이레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 팬들의 마음은 가볍게 여겨지곤 한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진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여성국극을 이야기하면 꼭 배우와 팬을 함께 얘기한다. 여성국극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에도, 인기가 사그라들고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을 때도 팬들은 항상 ‘우리 언니’ 곁에 있었다. 팬덤 덕분에 지금 저에게까지 여성국극이 와 닿았다고 생각한다. 부용이가 여성국극 팬덤만을 상징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일부 설명하려 했던 건 맞다. 여성국극을 위기에서 구하는 존재는 한 명의 스타나 거액의 투자자가 아니라 여성국극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부용이가 사랑으로 쓴 대본 한 편이 구심점이 되어 다시 사람들을 모은다. 여성국극은 배우와 팬의 단단한 결속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글 작가 서이레·그림 작가 나몬 캐리커쳐

국립창극단 ‘정년이’

연출가 남인우

“이 작품으로

10년 가고 싶다”

맨 처음 섭외받았을 때 소감은 어땠나.

처음 웹툰을 읽었을 때, 재밌었지만 너무 방대했다. ‘2시간 안에 창극 형식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싶어 고민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정년이’를 좋아하는 젊은 여성 독자들이 많았다. 지금 젊은 여성들이 느끼는 목마름이 내가 20, 30대였을 때와 비슷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한번 다뤄볼까 싶었다. 마침 이자람 씨가 작창가로 함께 하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함께 작업하게 됐는데, 새로운 도전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오동구’ 이후 국립창극단과의 작업은 두 번째고, 둘 다 퀴어 서사다. 10년 만인데, 이 소재에 대한 변화가 느껴지나?

‘내 이름은 오동구’는 제가 먼저 창극단에 하고 싶다고 제안한 것이고, 이번에는 섭외가 들어왔다. 국립창극단에서 해보자고 제안한 것이 큰 변화다. 사회 제도적으로 변화는 크지 않지만, 대중의 태도는 바뀐 것 같다. 그러나 소재의 노출 빈도가 높아졌다고 해서, 소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확대되었느냐는 의심이다. 빈도가 높아질수록 혐오와 차별 수위는 더 강해지는 면도 있다.

여성국극 소재가 흥미롭다. 창극단이 보여줄 게 많은 공연이다. 여성국극 공연 장면도 많다.

‘왜 20, 30대 여성 독자들이 이 작품에 열광할까?’ 하는 것이 각색의 중요한 지점이었다. 여성국극 공연이 장면으로 나오는 것은 2번이다. 그중 하나인 ‘춘향전’의 경우, 당시 여성국극 형태를 띤다. 음악도 그 당시 춘향가이다. 뒤의 ‘낙랑공주’ 공연 장면은 무대팀에게 “그 당시 여성국극을 재현하려고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관객은 여성국극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국극을 보려면 지금도 공연하는 단체의 것을 보러 가면 된다. 그 당시 느꼈을 감각을 지금 재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지금 시대에 맞는 표현 방식을 생각해달라고 했다.

두 미적 감각을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있겠다.

‘낙랑공주’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했으면 했다. 작년에 ‘절창Ⅱ’를 민은경, 이소연 배우와 했었다. 미장센을 같이 만들었던 정민선 디자이너가 이번에도 함께 한다. 당시 “판소리 병풍을 프로시니엄 극장으로 가져온다면, 빛을 사용해 병풍의 개념을 확대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이번에도 두 여성국극 장면에서 그 대조가 보일 것이다.

웹툰 원작에서 마지막 장면은 ‘무영탑’으로 끝나는데, 창극은 ‘자명고’로 끝난다.

저도 처음에 ‘무영탑’으로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무영탑 서사가 계속 맘에 안 들었다. ‘예술혼이 저렇게 다 죽어야 완성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성국극의 규모도 짧게나마 보여주고 싶었는데, ‘무영탑’으로는 생각이 안 났다. 원래의 낙랑은 자신이 북을 찢지만, 저는 ‘자명고’에서 한나라 자객이 찢게 했다. 사랑을 위해 국가를 배신했다는, 여성을 공격할 때 자주 사용하는 감정적인 표현이 싫었다. 혐오와 차별이 이상하게도 점점 많아지는 시기다. ‘정년이’의 서사를 좋아한 이들이라면 이럴 때, 이에 맞서고 평화의 아침을 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뒷부분을 정했다.

채공선 역을 맡은 김금미와 정년이 역의 이소연 © 황필주

웹툰 원작은 임춘앵, 이화중선, 조금앵 등 실제 인물을 모델로 그렸다. 캐스팅은 어떤 기준으로 했나.

창극단 전원 오디션을 봤다. 연출가로서 선택할 수 있는 배우의 폭이 창극단 안에서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다. 음악과 관련된 캐스팅이 주요 조건이었다. ‘정년이’는 많은 곡을 수행할 수 있는 튼튼한 목을 가져야 했다. 정년이 역은 더블 캐스팅이다. 이소연, 조유아 두 배우는 성격이 다르다. 이소연은 철성 같이 얇고, 키도 크다. 조유아는 실제 목포 출신으로 소리를 내는 방식도 완전히 다르다. 웹툰과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이 느낌을 즐겨보자고 생각하고 있다. ‘채공선’ 역 오디션이 어려웠다. ‘추월만정’을 딱 두 소절 부르는데 ‘정말 명창이구나!’하는 느낌을 줘야 했다.

그 대목을 기다리고 있다. ‘추월만정’은 채공선과 정년이가 두 번 부른다.

채공선 역을 맡은 김금미 단원이 “추월은- 만정하고-”를 눈앞에서 부르는데 눈물이 쭉 나더라. ‘트로이의 여인들’ 등 작품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하셨지만, 이번에 짧고 굵게 임팩트 있는 소리를 해주시지 않으실까 싶다.

 

이 작품에는 악인이 없다. 개별적인 여성 인물들이 자기만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드라마적으로 힘이 강했다.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하는 점도 악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여성 연대의 힘을 각각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처음에 이렇게 빨리 매진됐다고 했을 때, 관객도 연대의 힘을 보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캐스팅도 발표되기 전에 매진이 되니까 ‘연출가로서 예술적인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부담이 있었는데 이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들의 연대에 연출가로 함께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10년 뒤에 또 국립창극단에서 퀴어 서사 해야겠다.

이 작품을 10년간 하면 좋겠다.(웃음)

글 김옥란(연극 평론가) 사진 네이버웹툰·국립창극단

ABOUT History

여성국극의 역사

시대를 풍미했던

우리 문화를 재발견하다

1995년 ‘황진이’(김경수, 김금미)

조금앵

임춘앵

여성국극(女性國劇)은 여성 소리꾼만 출연하는 창극 공연을 뜻한다. 1948년 9월 1일 여성국악동호회 결성을 계기로 여성들만의 창극 공연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회장 박녹주, 부회장 김연수와 임유앵 등 당시 국악계 중진 여성 소리꾼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1940년을 전후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여성 소리꾼들의 작곡 등 전문적 기량이 축적되어 있었고 수적으로도 증가하여 여성들만의 단체를 결성할 자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창단공연은 ‘옥중화’(1948)였고, 당시 남자 주인공 이몽룡 역을 임춘앵이 맡았다. 제2회 공연은 ‘햇님과 달님’(1949)이었고, 남자 주인공 햇님왕자 역은 박귀희가 맡았다. 달님공주 역은 김소희였다. 특히 ‘햇님과 달님’의 인기가 높아 후속편인 ‘햇님과 달님 후편’, ‘황금돼지’가 나올 정도였다.

여성국극단의 전성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기와 전후 복구기, 곧 1950년대였다. 1952년 전쟁기 피난지 부산에서 김주전에 의해 여성국악동호회가 재건되어 햇님국극단이 창단됐고, 부산극장에서 ‘가야금’(유치진 작, 김소희·박귀희 작곡)을 공연하였다. 1952년 11월 광주에서 여성국극동지사도 재창단되었다. 임춘앵은 여성국극동지사를 인수하여 부산에서 ‘공주궁의 비밀’, ‘황금돼지’, ‘반달’, ‘청실홍실’ 등을 공연했다.

당시 피난지 부산은 전국에서 활동하던 공연단체들이 모여드는 흥행의 승부처였다. 임춘앵의 여성국극동지사와 김주전의 햇님국극단이 최고의 극단으로 활동하였다. 여성국극단은 당대 대중의 취향을 반영하여 경쟁할 수밖에 없었고, 판소리의 아니리와 창 대신 일상 대화체에 가까운 대사 전달 위주의 연극성을 강화해갔다. 연기자의 능력 또한 소리보다는 외모, 연기, 춤 실력이 중요해졌다.

1950년대 여성국극 스타는 임춘앵(1923 ~1975)이었다. 임춘앵(임유앵의 동생)은 1953년 서울로 올라온 후 ‘임춘앵과 그 일행’이란 이름으로 ‘바우와 진주목거리’, ‘산호팔찌’, ‘백호와 여장부’ 등을 공연했다. 임춘앵이 출연했던 ‘목동과 공주’ 국도극장 공연 당시 관중이 몰려들어 을지로 4가 일대 교통이 마비되고 기마경찰까지 동원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뒤를 잇는 여성국극 스타는 조금앵(1930~2012)이었다. 햇님국극단에서 ‘쌍동왕자’, ‘바보온달’, ‘마의태자’ 등에 출연하였고, 1954년 햇님국극단 대표 김주전이 사망하자 햇님국극단에서 분리하여 신라여성국극단을 창단하였다. 조금앵은 여성 팬과 가상결혼식을 올린 일화로도 유명하다. 여성국극 스타들은 주로 왕자였고, 여성국극 왕자들은 무대 위에서뿐만 아니라 무대 밖에서도 기존 젠더 규범을 뛰어넘는 상징적인 장면들을 보여주었다. 웹툰 ‘정년이’에서 매란국극단 단장 강소복은 임춘앵을, ‘매란의 스타’ 문옥경은 조금앵을 모델로 하고 있다. 여성국극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환기한 다큐멘터리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김혜정 감독, 2012)도 조금앵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후반 부흥한 한국 영화에 밀리고, 1962년 국립국극단(국립창극단 전신) 창단 및 정부 주도 전통문화 보호사업에서 배제되면서 여성국극은 점차 쇠퇴해갔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여성국극은 “여자들끼리의 사이비 예술”이라고 폄하되고 정치적으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자료 발굴과 연구가 진행되면서 여성국극의 젠더 전복성은 적극적인 재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대 퀴어-페미니스트 공연 예술가들의 오랜 역사적 뿌리로 재인식되고, 새로운 상상력의 영토로 재전유되고 있다.

김옥란(연극 평론가) 사진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Part 3. CLASSICAL Music

도르트문트 콘체르트하우스 ‘시간의 섬’ 2.2~5

작곡가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현대음악의 대모’로 불리는 그녀의 음악 인생 & 축제 리뷰

소피아 구바이둘리나(1931~)는 ‘현대음악의 대모’로 통한다. 지난해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된 현대 작곡가로 아르보 패르트(1935~), 존 윌리엄스(1932~) 등에 이어 7위에 이름을 올렸다.(‘바흐트랙’ 통계조사) 여성 작곡가로서는 최고 순위다.

 

방대한 세계를 짜임새 있게 소개

독일 도르트문트 콘체르트하우스는 지난 10여 년간 이어진 축제 ‘시간의 섬’의 올해 주인공으로 구바이둘리나를 택했다. 20세기 이후 작곡가를 조명하는 축제는 최근 온드레이 아다멕(1979~), 죄르지 쿠르탁(1926~) 등 현존 작곡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시간의 섬’의 특별함은 여기서 나온다. 작곡가가 직접 프로그래밍에 참여하고, 작곡가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음악가들이 연주를 맡는다.

이번 무대에는 앙투안 타메스티트(비올라)·나레크 하크나자리안(첼로)·라스 슈바츠(오르간)·엘스베트 모서(바얀)·포터 퍼커션 듀오·루르 합창단 등이 올랐고, 데이비드 로버트슨/WDR 심포니, 덩컨 워드/빈 ORF 방송교향악단이 각각 개·폐막을 장식했다.

91세의 구바이둘리나는 건강상 자리를 빛내지 못했지만, 대신 1980년대부터 그의 대부분의 작품을 출간한 시코르스키의 전 대표 한스 울리히 뒤펙이 함께했다. 시코르스키는 20세기 중후반, 쇼스타코비치·하차투리안·프로코피예프 등 구소련 작곡가들의 작품을 서유럽에 배급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러시아 타타르스탄 공화국 출신의 구바이둘리나 역시 그렇게 빛을 봤다.

다섯 차례의 공연과 한 차례의 토크 살롱으로 구성된 축제는 구바이둘리나의 방대한 작품세계를 짜임새 있게 소개했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1970년대 작품부터 2019년 완성된 신작까지 아울렀다. 특히, 구바이둘리나의 곡과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효과적으로 엮은 덕분에 그의 고유의 음악적 DNA가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고, 각 무대가 던지는 메시지도 한층 분명해졌다. 젊은 작곡가의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오늘날 창작계에 연료를 주입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잘못된 길, 잘못된 음악

구바이둘리나의 졸업 작품을 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너만의 그 잘못된 길을 계속 걸어 나가라”라고 조언했다. 구바이둘리나는 이를 삶의 정신으로 삼았지만, 곧 구소련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만화 및 영화음악을 쓰며 생계를 이어야 했다.

축제의 첫 작품인 구바이둘리나의 ‘동화시’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 방송물을 위해 작곡된 이 곡은 이후 관현악으로 재탄생되었다. 동화의 주인공은 분필이다. 아름다운 성과 정원을 그리기도, 지루한 단어를 나열하기도 하는 분필의 이야기는 구바이둘리나에게 예술가의 운명이자 위로로 다가왔다. 이와 병치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도 스탈린 정권의 검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작품이다. 두 작품은 억압 아래에서도 음악의 순수한 즐거움을 추구한 두 작곡가의 분투를 보여줬다.

3일 토크 살롱에서는 구바이둘리나가 수집해온 세계 전통악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축제에 참여한 음악가들은 전통악기로 즉흥연주를 선보였고, 구바이둘리나가 직접 악기를 연주하거나 작곡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도 곁들여졌다. 악기를 향한 작곡가의 실험 정신이 엿보이는 자리였다.

이어진 공연에서 연주된 오르간과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 ‘Detto Ⅰ’와 오르간 독주의 ‘빛과 어둠’이 이를 잘 드러냈다. 정도를 벗어나는 연주법, 한곳에 머무르길 거부하듯 글리산도로 솟아나거나 흩어져버리는 음뭉치가 특징적이었다. 포터 퍼커션 듀오가 증언한 것처럼 “구바이둘리나의 어린아이 같은 무한한 호기심”이 발휘된 결과물이었다. 함께 연주된 바네사 포터, 로베르트 마리노의 작품은 반복 음형과 손에 잡히는 기승전결로 구바이둘리나의 언어와 극적인 대조를 이뤘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타악기 버전의 바흐 판타지와 푸가 BWV944는 ‘빛과 어둠’이 분출해놓은 에너지를 정돈하고, 관객을 다음 여정으로 이끌었다.

 

하늘과 땅의 목소리

바흐와 구바이둘리나에게 음악의 궁극적 목적은 신을 섬기는 것이었다. 4일 오전 공연은 이러한 두 작곡가의 교집합을 들여다보는 자리였다. 바흐 첼로 모음곡 4번 BWV 1010의 느린 악장과 구바이둘리나의 세 작품이 씨실과 날실로 엮였다.

그가 ‘숨 쉬는 악기’라고 칭하며 특히 애정을 보인 바얀(러시아에서 개발된 버튼식 아코디언) 독주의 ‘심연으로부터’, 바얀·첼로·바이올린을 위한 ‘고요’ 등이 무대 위에 영적인 세계를 지었다. 특히 ‘고요’의 정적이고 미세한 소리의 흐름은 청중의 주의를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저녁 공연에는 한층 청명한 기운이 감돌았다. 신의 창조를 찬양하는 세 합창곡이 나란히 연주됐다. 후기 르네상스 작곡가 오를란드 디 라소(1532~1594)의 미사곡, 구바이둘리나의 첼로·타악기·합창을 위한 ‘태양의 찬가’가 무대에 올랐으며, 이어 같은 악기 구성 및 같은 제목으로 위촉된 마틴 비스팅하우젠(1979~)의 신작이 초연됐다.

구바이둘리나의 ‘태양의 찬가’에서 글로켄슈필은 햇빛을 흐트러뜨리고, 글라스 하프는 영적인 공기를 조성하는 한편, 합창단은 태양과도 같은 신의 창조 에너지를 노래했다. 그 앞으로 첼로 독주가 펼쳐졌다. 첼리스트는 곡의 말미에서는 첼로를 내려놓고 징을 울리거나, 타악기 플렉사톤을 활로 그으며 합창단과 관중을 향해 소리를 흩뿌렸다. 구바이둘리나는 독주자의 역할을 재정의하며 창조적 에너지를 또 한 번 드러냈다. 마지막 공연은 다시 반전을 이뤘다. 구바이둘리나의 비올라 협주곡은 쇼스타코비치를 상징하는 D음과 E플랫음의 외롭고 처절한 비올라 독백으로 시작했다. 압도적인 금관은 비올라를 삼키고 다시 뱉었다. 더블베이스와 팀파니, 독주 비올라가 팽팽한 대립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비올라는 힘없는 읊조림을 겨우 토해내고 조용히 잠들었다. 이어 구소련 작곡가 미치슬라프 바인베르크(1919~1996)의 교향곡 16번이 연주됐다. 1953년, 그가 시온주의 선동 혐의로 체포된 이후에 작곡한 이 작품은 당시의 상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축제의 마지막 작품에서 구바이둘리나는 격렬한 분노를 표했다. 교향곡 ‘신의 분노’는 으르렁거리는 금관의 목소리를 입은 신의 진노가 이 땅에 내리꽂히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구바이둘리나는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 4중주곡 중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의 음악적 모티브를 차용했지만, 베토벤과 달리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고 답하는 용기도 보여줬다.

“음악은 영적 타락에 맞서기 위한 중요한 저항 수단입니다.” 지난 70여 년간 구바이둘리나는 이를 실천해왔다. 그는 지금도 ‘신의 분노’ 앞에 덧붙일 작품을 작업 중이다. 도르트문트 콘체르트하우스는 축제 이후에도 이 작곡가의 정신을 기린다. 지난 9일 열린 조성진 피아노 독주회에서도 ‘샤콘’이 연주됐으며, 오는 4월 오르간 콘서트를 비롯한 이후 공연에서도 구바이둘리나의 작품을 올릴 계획이다.

글 박찬미(독일 통신원) 사진 도르트문트 콘체르트하우스

나레크 하크나자리안 © Petra Coddington

엘스베트 모서 © Petra Coddington

포터 퍼커션 듀오 © Petra Coddington

ABOUT Event

국제 여성의 날(3.8)을

기념하는 음악계

공연과 방송,

음원 플랫폼까지

총출동!

라파엘라 그롬스 ‘Femmes’ ©Sony Classical

여성 음악가를 위한 자리가 확대되고 있다. 실력 있는 인재를 발견하기 위한 환경이 다져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노력은 지난해에도 빛을 봤다. 예컨대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된 현대음악 작곡가 스무 명 중 아홉 명이 여성이었다. 또한, 가장 많은 공연 횟수를 기록한 지휘자 백 명 중 열두 명이 여성이었는데, 이는 지난 2013년 단 한 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분명한 성과다.(‘바흐트랙’ 통계조사) 오는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을 맞아 클래식 음악계는 이 긍정적인 변화에 다시 한 번 힘을 싣는다.

파리 오데옹 극장은 지휘자 시몬 메네제스(1977~)가 기획한 공연 ‘여러 가지 여성성’을 올린다. “여성적인 음악이라는 것은 정의하기 불가능하다”라고 말한 드뷔시로부터 영감을 받은 메네제스는 감각적인 20세기 프랑스 음악을 엮었다. 관능적이고, 본능적이며, 강하고, 여린 특성을 동시에 지닌 라벨·풀랑크·나디아 불랑제의 음악을 선보인다. 연주에는 음악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해온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파질 사이(1970~)가 함께한다.

영국 위그모어홀은 소프라노이자 작곡가 헤로이제 베르너(1991~)에게 위촉한 신작을 초연하고, 캐롤라인 쇼·프레야 웨일리 코헨·케이트 휘틀리 등 젊은 여성 작곡가의 작품을 올린다. 베를린 필하모니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의 연주로 다양한 시대와 문화의 여성 작곡가들을 소개한다. 18세기 이탈리아의 마달레나 라우라 시르멘(1745~1818)부터 19세기 영국의 에설 스마이스(1858~1944)를 거쳐 현재 활동하고 있는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 에벨리나 노비츠카(1982~) 등에 이른다.

호주 멜버른 심포니도 3월 1일 ‘기회의 평등’을 주제로 한 토론회를 시작으로, 그래미 어워즈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는 영국 작곡가 안나 클라인(1980~)과 호주를 대표하는 여성 작곡가 마가렛 서덜랜드(1897~1984) 등을 조명하는 공연을 연다. 방송계도 분주하다. BBC의 라디오3은 9년 연속 국제 여성의 날 특별 프로그램을 편성해왔다. 오는 8일에도 24시간 동안 여성 작곡가의 작품이 흐를 예정이다. 그중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은 ‘우먼 오브 엑설런스’다. 여성 단원으로만 이루어진 시대악기 연주단체 앙상블 몰리에르가 엘리자베스 자케 드 라 게르(1665~1729) 등 17~18세기 프랑스 여성 작곡가를 발굴한다. BBC가 위촉한 작곡가 사라 캐틀리의 신작 초연이 그 뒤를 잇는다.

독일의 바이에른 라디오(BR Klassik)에는 현대음악에 대한 특별한 애정으로 모험적인 커리어를 밟아온 비올리스트 타베아 치머만(1966~)이 출연한다. 치머만은 음악의 사회적 과제와 여전히 남성이 지배적인 음악계에서 여성의 위치에 관해 논할 예정이다. 자를란트 문화라디오(SR2 KulturRadio)에서는 첼리스트 라파엘라 그롬스(1991~)가 지난 2월 발매한 신보 ‘Femmes’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음반에는 9세기를 관통하는 여성 음악가 23인의 작품이 담겼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 1179)부터 클라라 슈만(1819~1896)을 거쳐 팝 가수 빌리 아일리시(2001~)로 흐른다. 이외에 스포티파이·애플뮤직·이다지오 등 각종 음원 플랫폼도 여성 음악가를 중심으로 구성한 플레이리스트를 내세워 국제 여성의 날에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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