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작 수상자 인터뷰
김상헌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국민대학교 경제학부 자퇴 후 200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과에 입학, 예술사·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2012년 한국서양음악학회 차세대 음악학자 우수 논문 선정자다.
글쓰기는 어떻게 시작됐나?
음악학적인 글쓰기 연습은 음악학과에 진학하면서부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고, 중학생 시절, PC통신 동호회에서 애니메이션 작품에 대한 다양한 분석 글을 작성하고 회원들과 토론을 나누곤 했다. 어떻게 보면 그 시절 애니메이션을 대상으로 했던 분석ㆍ해석ㆍ토론ㆍ번역ㆍ자료 정리 등의 활동을, 지금은 그 대상을 음악으로 바꾸어 전공으로서 하고 있는 셈이다.
3년 연속 객석예술평론상에 응모했다.
두 번 모두 최종 심사에서 탈락하여 아쉬웠다. 첫 해에는 우리나라의 평론상인 만큼 ‘우리’에 대한 이야기와 ‘현재’에 관한 이야기를 동시에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도 너무 자신 없는 주제를 선택했다. 반면 작년에는 이영조의 오페라 ‘황진이’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음악이론과 분석과 함께 다루었고, 분량 제한도 원고지 50매 이상으로 늘어났기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첫 해보다 한결 나은 평론을 작성할 수 있었다. 올해에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음악분석에 초점을 두어 역사적 의미를 해석하는 작업을 하되, 그 대상을 김세형으로 바꾸어 응모했다.
지금 우리 앞에 김세형을 소환한 이유는?
지금 꼭 김세형을 다루어야 할 ‘시의성’은 없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그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의 ‘뱃노래’ 악보의 첫 페이지를 접했을 때 받았던 강렬한 인상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시대에 벌써 이런 음악을 쓰다니’ 싶었다. 김세형에 관한 평론이나 학술적 연구는 물론 원전연구마저도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이며, 그것이 이번 평론을 작성하는데 가장 힘든 점이기도 했다. 김세형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인지도가 높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어떤 기능을 하길 바랐는가?
김세형과 그의 작품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보다 장기적으로는 우리 창작음악사의 큰 흐름과 의미 속에서 각 작곡가들의 작품이나 활동을 해석하고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탈식민주의 이론을 비롯하여 음악인류학이나 사회학적 관점으로 우리 창작음악사를 다루는 작업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우리의 서양음악 수용 과정을 ‘탈식민주의 이론’에 대입시켰다. ‘오늘’은 어느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나?
세 번째 단계인 ‘민족주의 단계’와 그 이후 단계인 ‘탈식민주의를 벗어(post-post colonial)’ 단계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프란츠 파농의 탈식민주의 이론엔 세 단계만 있을 뿐 그 이후의 단계는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와 프란츠 파농이 활동했던 20세기 중반은 다르다. 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가 언급했듯이 지역과 국가에 고정된 전통적인 문화와 민족 개념은 탈지역화된 맥락 속에서의 문화 현상을 이해하는 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민족 개념에 대한 성찰과 함께 ‘탈식민주의 이론’의 확장, 즉 ‘탈식민주의를 벗어난’ 단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곡을 분석하며 악보를 등장시키진 않았다.
음악학 중에서도 음악이론과 분석 쪽에 특히 관심이 있기에 분석을 다룰 땐 가능한 악보를 함께 첨부하는 일종의 ‘직업병’이 있다. 그러나 ‘신작 음악비평’과 같은 평론을 제외하고, 평론에서 악보를 수록하는 일은 거의 없으므로 일부러 악보를 수록하지 않았다. 물론 평론과 학술논문의 경계가 뚜렷하다고 생각하진 않으나, 그럼에도 악보를 수록한다면 너무 학술논문의 성격이 강해지며 악보에 익숙하지 않은 평론의 독자들을 배려하지 않는 처사가 될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악보를 배재했다.
공연평으로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의 ‘공감II’를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아마추어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평소에 갖고 있었다. 음악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삶을 풍족하게 해주는 데 있다. 그리고 음악적 경험이 반드시 사회적 권위가 인정하는 작품이나 음악가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평론이나 학술활동의 대상을 꼭 프로의 활동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마침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접하게 되었고, 이번 기회에 아마추어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연주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공연평이나 연주평이 연주자가 연주회에서 보여준 기교나 음향적 실체에만 국한되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음악은 시간예술이며 ‘백문이 불여일청(百聞不如一聽)’이기에, 이미 지나간 연주는 아무리 말과 글을 통해 재구성해봐야 극히 일부분밖에 재현할 수 없다. 그러한 연주평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공연을 둘러싸고 만들어지는 모든 의미야말로 진정한 연주평이 다루어야 할 주제라 생각한다.
타 예술 장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문학과 연극, 그리고 무용에 관심이 있다. 문학과 연극은 이 세상을 치열하게 읽어낸 기록이다. 문학과 연극이 주는 감동이나 울림이란 곧 한 인간이 대상을 온몸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이며 이는 음악이 주는 감동과는 또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무용은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가깝고도 먼 세계’와 같은, 친근함과 동시에 일종의 동경을 갖고 있는 예술 장르다.
음악평론가로 등단했는데, 이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였던 김현과 같은 평론을 쓰고 싶다. 사실 평론을 하는 데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평론을 쓰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좋은 평론가는 평론가인 동시에 어느 정도 예술가ㆍ문학가ㆍ음악학자ㆍ인문학자ㆍ사회학자여야 한다. 음악의 기호를 이해하면서 이를 말로 설명해야 한다. 특수한 현상을 일반적 관점에서 사고해야 하고, 구상(concrete)과 추상(abstract)을 같은 사고의 틀로 건드려야 한다. 의지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무관심한 마음상태에 있어야 하며 예술가처럼 초연하고 청렴하면서도, 어떤 때는 정치가처럼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 또한 겉멋에 치우치거나 가벼운 평론이 아닌, 학술적 연구와 대중적 평론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글을 쓰는 것이 평론가로서 추구하는 방향이다.
상금은 어떻게 쓸 것인가?
현재 유학을 준비 중에 있다. 따라서 주어진 상금은 더욱 훌륭한 음악학자 겸 평론가가 되기 위한 공부에 쓰일 것 같다.
평론이란 무엇인가?
평론이란 어느 대상이나 현상의 의미를 찾는 작업, 또는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어느 대상이나 현상 그 자체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파악하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주변 맥락 속에서 위치를 조명하는 것이 평론이 하는 일이라 믿는다.
우수작 수상자 인터뷰
신예슬
199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계원예술고등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2009년 서울대학교 작곡이론과에 입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
글쓰기는 어떻게 시작됐나?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피아노를 전공하던 시절, 연습을 하다가 문득 저 질문이 떠올랐다. 작곡가의 메시지ㆍ특정 감정의 묘사ㆍ청각적 유희 등 여러 가지 답을 내보았지만 뭔가 더 있을 것 같았다.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하자,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언어로 사고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음악학과에 진학했고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 됐다.
객석예술평론상에 응모한 이유는?
나는 나의 글을 좋아하는 편이고, 음악에 대한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는 게 꿈이라면 꿈이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든지 글쓰기는 계속해나가고 싶은데, 과연 나의 글이 그것이 가능한 수준인지, 다른 사람들의 평을 듣고 판단해보고 싶었다.
지금, 왜, ‘모-노’였나?
시작점은 음악이 아닌 미술이었지만,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 중 하나였다. 작가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의 전시 중 몇몇 작품은 작품 설치의 가이드라인만 있기에 전시 장소에 따라 세부 사항이 바뀐다. 음악 작품의 경우와 유사하지 않은가? 또한 악보는 그 자체로 작품화되어 갤러리에 걸리기도 하며, 사운드아트라는 이름으로 갤러리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런 경우를 볼 때마다 음악과 미술, 양측의 개념이 모호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사실 선을 긋는 일이 촌스러운 것임은 잘 알지만, 스스로 음악적 본질에 관한 정리를 해보고 싶었고, 그에 적격인 작품이 슈네벨의 ‘모-노’였다. ‘모-노’는 시각 매체이지만 그 내용이 음악이라 주장하기에, 매체를 벗어나 음악적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예술 장르의 구분이 모호하고 구분 자체가 딱히 필요하지 않은 현재 상황에서 음악의 영역을 조금은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애초에 악보(오선보)를 읽을 수 없는 사람에게 이 글이 어떤 기능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글을 흥미롭게 읽으려면, 악보를 읽고 음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이 전제되는가?
이를테면 ‘내청’ 능력 같은 것, 그런 것은 불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음악적 능력이 아니라 음악문화에 대한 이해다. 필요한 것은 서양음악계에서 벌어지는 음악 활동 메커니즘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창작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고 따라서 악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오선보와 그래픽 기보가 단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사실 그래픽 기보는 나도 다른 지시사항이 수반되지 않으면 읽지 못하겠다. 볼 수는 있지만. 조금 더 욕심 내자면, 독자들이 ‘모-노’를 보고 ‘이게 악보야 그림이야’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면 좋겠다.
‘모-노’는 음악에서 ‘소리’를 분리시킴으로써, ‘음악적인 음악’에의 사유와 음악의 핵심 요소가 ‘시간’이라는 점을 인식시킨다고 결론지었다. 소리 없는 음악이 음악일 수 있나? ‘모-노’는 과연 ‘음악 작품’인가?
글 말미에 ‘모-노’를 (단행본 제목을 표기하는)『』가 아닌 (음악 작품의 제목을 표기하는)《》안에 위치시켰다. 현대음악이 만들어놓은 다양한 작품들, 그리고 그것들이 음악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모-노’ 역시 음악 작품이라고 본다. 우연성 음악이나 노이즈 음악 등이 음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아마도 생각을 바꿔야 하겠지만, 존 케이지나 얼 브라운이 음악사 강의 자료로 등장하는 이상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노’가 흥미로운 것인지, 신예슬의 생각이 흥미로운 것인지, ‘모-노’가 매력적인 것인지, 신예슬의 글이 매력적인 것인지 궁금해졌다.
‘모-노’는 흥미롭고 나의 생각은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글이 매력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스스로 느끼기에는 좀 딱딱하고, 무겁다. 물론 그렇게 읽히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피에르 로랑 에마르 피아노 독주회를 평했다. 소리를, 연주를, 순간을 ‘글’로 재현하는 것은 정말 어렵지 않나?
정말 어렵다. 그런데 에마르의 연주는 한 순간이 만들어내는 섬광 같은 이미지들의 연속이라기보다는, 한 작품이 만들어내는 정교하고 커다란 이미지로 느껴졌다. 그래서 음표들이 만들어내는 순간순간에 대해 쓰지 않고 에마르가 만든 커다란 작품의 이미지에 대해 썼다.
타 예술 장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어떠한지 궁금하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 단순히 좋기도 하지만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요즘은 프랑스 감독 자크 타티의 영화들을 가장 좋아하는데, 이 감독의 영화들을 보며 매체의 본질에 대한 아이디어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좋아하는 감독들을 마구 열거하고 싶지만 참겠다. 친한 친구들이 모두 소설ㆍ디자인ㆍ회화ㆍ패션 디자인 등 예술계에 종사한다. 그래서 전시도 꼬박꼬박 보러 가고 문학도 끊임없이 읽고, 재미있는 그림들도 많이 소개받는다. 그렇지만 이 모든 관심과 애정은 다 합쳐도 음악만큼은 못 된다. 하루에 최소 4~5시간 이상은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다.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찾고 듣는 것이 가장 즐겁다. 마음에 쏙 드는 음악을 찾으면 아침에도 기분 좋게 잘 일어난다. 일어나서 빨리 음악 들어야 되니까.
음악평론가로 등단했는데, 이제 어떤 글을 쓰고 싶나?
이제까지는 나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나의 질문에 답하고, 그 답을 파헤치는 식으로 다소 개념적으로 글을 써왔다. 지금은 자동피아노에 대한 글을 쓰려 구상 중인데, 이 역시 다소 개념적으로 접근하게 될 것 같다. 이 글만 완성시키고 당분간은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이 나의 귀를 어떻게 즐겁게 했는지 조금은 가볍게 써보고 싶다. 당장 써보고 싶은 글감이 많아서 아직은 “평론가로서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글을 쓰겠다”처럼 커다란 목표는 정하지 못하겠다.
상금은 어떻게 쓸 것인가?
한동안 좀더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볼 것 같다. 사는 것을 미뤄놓았던 CD나 DVD도 한꺼번에 구매할 생각이다.
평론이란 무엇인가?
음악평론임을 전제하고 말하겠다. 음악평론은 음악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 말은 말로 말을 넘어가려 한다(최정우 ‘사유의 악보’ 307쪽). 음악은 음악으로 음악을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음악평론은 말로 음악을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에 대한 묘사나 기술도 좋지만, 표면적인 음악 그 이상의 해석적인 것을 글로써 보여줘야 하는 것이 평론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연구 기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흥미를 동반하는 글이어야 한다. 좋은 평론은 깊이와 흥미라는 굉장히 다른 두 면을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 글이다.
진행 박용완 기자(spirate@) 사진 심규태(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