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내셔널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로열 앨버트홀을 휘감은 격정적 사랑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7월 1일 12:00 오전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의 2013/2014 시즌 런던 마지막 공연에서 타마라 로호는 예술감독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날 줄리엣 역의 알리나 코조카루와 로미오 역의 프리데만 포겔은 빛나는 파트너십을 선보였다


▲ ENB의 무용수 겸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는 타마라 로호 ⓒDave Morgan

지난 시즌부터 영국 로열 발레(이하 RB)의 수석 무용수 출신 타마라 로호를 예술감독으로 맞이한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이하 ENB)가 2013/2014 시즌의 런던 공연을 ‘로미오와 줄리엣’(6월 11~22일)으로 마무리했다. 이번 공연은 1993년부터 2001년까지 ENB 예술감독을 역임한 데릭 딘의 원형무대 프로덕션이다. 주역 캐스트는 타마라 로호-카를로스 아코스타, 알리나 코조카루-프리데만 포겔, 다리아 클리멘토바-바딤 문타기로프 커플 등 일곱 개의 서로 다른 캐스팅으로 열네 번의 무대가 수놓아졌다.

몇몇 주역 무용수들에게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2015년 9월부로 클래식 발레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아코스타가 연기하는 사실상 마지막 로미오였고, 로호는 예술감독을 맡아 주요 공연에서 회당 4천 석이 넘는 유료 판매를 이어가는 성공을 거뒀다. ENB의 고질적인 병폐이자 전임 감독 웨인 이글링이 물러난 직접적인 원인이던 부진한 티켓 판매에서 벗어난 것이다. 특히 이번 공연은 18년 간 ENB에서 활동하며 발레단의 영욕을 함께한 클리멘토바의 은퇴 공연이었으며, 이번 시즌을 끝으로 RB로 이적하는 문타기로프의 마지막 ENB 공연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작품이 주목 받은 건 2013년 여름, RB를 퇴단하고 ENB로 이적한 코조카루의 줄리엣 때문이다. RB의 케네스 맥밀런 버전 줄리엣과는 어떻게 다를지, 데뷔 이후 첫 로열 앨버트홀 무대에서 코조카루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언론과 관객의 주목을 끌었다. 14일 토요일 저녁 공연은 90퍼센트 이상의 유료 판매를 보이며 ENB의 리드 프린시펄(수석 무용수보다 한 단계 위) 코조카루에 대한 런던 관객의 기대치를 증명했다.

공식적으로 코조카루가 RB와 함께 한 마지막 공연은 2013년 7월 10일 동경문화회관에서 열린 RB 갈라 가운데 요한 코보르·리카르도 세르베라와 함께 한 ‘마이얼링’ 3막의 주요 장면이었다. 그해 6월 코번트 가든에서 ‘마이얼링’ 전막으로 공식 고별 공연을 가졌지만, 코조카루는 RB 일본 투어에 참가해 ‘백조의 호수’로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했다. 그러나 파트너였던 코보르의 허리와 자신의 발 상태가 클래식 발레를 소화하기에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캐스팅에서 내려오면서 코조카루는 관객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쓸쓸히 무대를 내려왔다. 단원들이 커튼콜을 위해 모두 고개를 숙인 동안, 끝까지 커튼 밑으로 객석을 바라보며 관객들에게 키스를 전하던 그녀는 처연하고 애처로웠다.

코조카루가 RB 재직 말기에 겪은 험한 경험들에 대한 연민의 기사는 런던의 주요 저널들에 의해 특필 되기도 했다. 무릎과 목의 크고 작은 부상으로 주요 캐스팅에서 제외되기 시작한 2007년 이후, RB의 예술감독 모니카 메이슨이 코조카루를 어떻게 소외시켰는지를 그동안 여러 지면이 다뤄왔고, 지난해 10월 ‘텔레그래프’지의 인터뷰가 정점을 이뤘다. 코조카루는 작심한 듯 친정에서 당한 억울함을 나열하며 ENB로의 이적의 변을 이야기했다. 부상 이후 몇 년간 지속적으로 그녀의 공연 횟수를 줄여나가던 메이슨이 급기야 2011년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공연을 앞두고 “그녀의 춤은 더 이상 로열 발레의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발언하면서 코조카루와 RB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됐다. 지난 인터뷰에서 거론한 실비 기옘·알레산드라 페리·비비아네 두란테처럼 자신도 RB를 떠날 준비를 하던 2013년 봄, 그녀를 찾은 사람이 타마라 로호였다. 세간의 의혹과는 달리 자신은 RB 시절부터 로호와 좋은 관계를 가져왔으며, 무엇보다 로호의 정직하고 솔직한 면모에 끌렸다는 것이 코조카루의 설명이다.

로호 역시 ENB에 티켓 판매 수익을 몰아줄 스타의 존재에 목말라 했고, 행정가로서 투어 때마다 주당 10만 파운드의 손실이 발생하는 발레단의 재정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창의력이 부재한 상업적인 작품만 올린다는 비판을 극복하고 전통에 새로운 전통을 더한다는 ENB의 철학을 구현할 스타는 코조카루뿐이었다. 그녀의 영입을 전후해 ENB의 대외 이미지는 훨씬 밝아졌다. 대중에게 친숙한 프리미어 리그 아스널 소속의 선수들과 CF를 촬영하고, 2013 S/S 시즌부터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함께 발레와 디자인의 협업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스와로브스키와 샤넬에 이어 주얼리 브랜드 ‘벡스 앤 슈트라우스(Backes&Strauss)’를 새로운 스폰서로 유치하면서 켄싱턴에 위치한 ENB 본부는 활기를 찾고 있다. 코조카루 영입 효과는 그렇게 발레단의 브랜드 가치 상승으로 이어졌다.

발레계에서 로호가 무용수 겸 행정가로 변신할 것이라는 예측은 오래전부터 제기됐었다. 1974년생의 로호는 30대에 접어들면서부터 기회가 되면 발레단 감독이 되고 싶다고 인터뷰했고, RB가 메이슨의 후임 감독을 물색할 때도 그녀가 물망에 오른 것은 공공연한 소문이었다. ENB가 파킨슨 환자를 위한 발레 클래스를 열고, 이르지 킬리안의 ‘프티 모르’를 공연할 때는 스포츠 웨어의 협찬을 이끌어내려 노력한 걸 보면 로호가 얼마나 감독직을 준비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코조카루의 ENB 첫 시즌에 제시한 프로그램과 캐스팅 조건을 보면 현역 무용수 겸 예술감독인 로호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코조카루가 RB에서 경험하지 못한 작품 ‘해적’에 흥미를 갖고 있는 점을 감안해 충분한 연습 기회를 부여했고, 지난 4월 컨템퍼러리 작품 ‘Lest We Forget’에선 ‘Second Breath’와 ‘No Man’s Land’에 캐스팅하면서 소속감을 높이고 신작에 몰두하도록 동기를 불어넣었다. ENB가 갖지 못한 드라마 발레에 강점을 보이는 코조카루가 외부 활동에서 그 욕구를 채울 수 있도록 함부르크 발레와 루마니아 국립 발레의 활동도 보장하고 있다. 말 그대로 특급 대우인 셈이다. 1일 한 시간의 점심시간을 보장받기 위해 단원 노조와 매니지먼트가 충돌하고, 발레단의 캐스팅 관리가 형편없다는 비판이 무용수의 퇴단 사유로 불거지는 케빈 오헤어 체재의 RB와는 비교를 이룬다.


▲ 이번 공연에서 호흡을 맞춘 알리나 코조카루와 프리데만 포겔 ⓒLaurent Liotardo

독특한 원형무대를 빛낸 코조카루와 포겔

2012년 4월 코번트 가든에서 공연한 맥밀런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2년 만에 코조카루가 오른 무대는 앨버트홀의 원형무대였다. 데릭 딘의 프로덕션은 1998년에 초연된 것으로, 당시의 주역 캐스팅이 RB로 건너가기 전 ENB에 머물던 타마라 로호였다. 코조카루의 파트너 프리데만 포겔은 슈투트가르트 발레에서 건너와 로미오로 분했고, 카를로스 아코스타의 조카인 요나 아코스타가 머큐쇼를 준비했다. 딘의 또 다른 원형무대 프로덕션 ‘백조의 호수’처럼 ‘로미오와 줄리엣’도 무대 위를 덮는 프로시니엄 아치 없이 앨버트홀의 오르간 앞에 돌출형 톱니 모양의 벽을 세웠다. 그 위에서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맡고, 밑에는 바퀴를 단 무대 장치들의 반출구가 설치됐다. 오르간의 맞은편에는 시장을 구현하는 바퀴 달린 세트가 위치해 있었다. 전체적으로 세트가 차지하는 상징을 줄이면서 작품의 내러티브를 보조할 도구는 바닥에 쏘는 조명으로 대신했다. 무용수들이 1층의 객석 통로에서 무대로 바로 내려오는 장면도 앨버트홀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다. 베로나의 시장을 구현하는 장면에선 무용수들이 시선을 사방으로 나누어 바라보며 앨버트홀의 관객과 교감하려 했다. 기존의 평면형 극장 프로덕션보다 훨씬 많은 에피소드들이 군무의 장면에 개입되었다. ‘백조의 호수’에선 60여 명의 백조들이 군집을 이루며 공간을 동그랗게 채우는 방식이 진부했던 반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메인 캐릭터와 조역 사이에 장면 분할이 적절하게 이뤄지면서 극적 전개로 인한 단절감을 느끼는 정도가 훨씬 덜했다.

코조카루는 말들이 뛰노는 행가가 개최될 만큼 넓은 앨버트홀 무대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사랑스런 느낌의 줄리엣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보다는 특유의 표정 연기가 필요할 때 사방으로 시선을 적절히 분산시키면서 관객의 집중을 유도했다. 순진한 10대 소녀가 사랑의 느낌을 알고 싶어 하는 가녀린 몸부림이 무대 정중앙에서 펼쳐졌고, 모든 중심이 그녀를 향했다. 원치 않는 상대와 정략결혼을 시키려는 부모에 저항하는 몸부림은 마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처절했고, 맥밀런 버전과 비교해 과장이 더해졌다. 보통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혹한 체력을 요구하는 스토리 중심의 발레에서 극 중반 체력과 집중력의 부족으로 리프팅과 홀딩에 난조를 보이는 로미오가 종종 있지만,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줄리엣이 그립다고 넋을 잃은 표정을 짓는 포겔의 노련함은 연기의 진수를 보여줬다. 포겔은 2005년 앨버트홀에서 알리시아 아마트리아인과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한 적이 있어 공간 활용과 작품의 이해도가 남달랐다.

코조카루와 포겔의 케미스트리는 발코니 파드되에서 빛을 발했다. 이동식 세트로 무대 중앙까지 진출한 계단식 발코니에 서 있던 코조카루는 포겔의 유혹에 바로 바닥으로 내려가 진한 입맞춤을 나눴다. 짧은 미소와 함께 아찔한 키스를 안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크랭코 버전이 익숙한 슈투트가르트의 로미오에게 두 손으로 파트너의 목을 감고 자신의 뜻대로 사랑을 움직이겠다는 코조카루는 또 다른 줄리엣으로 다가섰다.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버전과 상관없이 코조카루에게 특별하다. 2001년 RB 3년 차의 코조카루가 처음 코보르와 만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코번트 가든뿐 아니라 발레 역사에 길이 남을 파트너십이 여기서 시작됐다.

딘의 원형무대 프로덕션이 흥미로웠던 순간은 지하실 장면이었다. 수도승들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들고 나온 28개의 큰 양초가 바닥에 놓이면 아레나가 빛을 내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원형무대의 윤곽이 또렷이 드러났다. 딘이 의도한 스펙터클이 관객과 소통하는 순간이었다. 퍼레이드나 바닥을 뚫고 나오는 스펙터클 없이도 원형무대를 채울 수 있는 안무가의 존재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두 다리를 격렬하게 떨면서 격정적인 스텝으로 자신을 떠나지 말라는 심정을 절절하게 구현하는 크랭코 버전의 줄리엣과 달리, 딘 버전의 무덤 장면에서 코조카루는 로미오의 몸을 들어서 옮기려다 실패하고는 좌절해서 탄식하는 모습 하나만으로 사랑의 무게를 증명할 수 있었다. 가족 발레를 지향하는 작품의 의도에 따라 선정적인 장면은 배제되었으며, 조역 캐릭터의 의상은 희극적이었다. 알리나 코조카루-프리데만 포겔 커플의 연기에 대해 ‘데일리 익스프레스’지는 ★★★★을 부여한 반면, 타마라 로호-카를로스 아코스타 커플의 공연은 ‘파이낸셜 타임스’지와 ‘가디언’지가 ★★★을 주었다.

코조카루는 7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유포트 홀에서 ‘알리나 코조카루 드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갈라 공연을 갖는다. 함부르크 발레에서 카르스텐 융과 함께 찬사를 받았던 존 노이마이어의 ‘릴리옴’, 요한 코보르와는 ‘백조의 호수’ 2막을 공연한다. ENB는 7월 스페인 그라나다 투어에 이어 영국 서포크에서 열리는 래티튜드 페스티벌에 제임스 스트리터 안무의 ‘인 리빙 메모리(In Living Memory)’와 반 르 옥 안무의 ’사계‘를 공연한다.

사진 English National Bal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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