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너 클래식스 레이블을 통해 쇼팽 프렐류드 전곡 음반을 발매한 그의 새로운 발걸음을 따라가본다
세상에는 천재들에 대한 전설이 참 많다. 음악가로는 영원한 청년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쇼팽이 그렇다. 피아니스트 임동혁은 우리에게 천재의 얼굴로 기억된다. 7세 때 피아노를 시작해 10세 때 러시아로 건너가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에서 수학한 후 청소년 쇼팽 콩쿠르 1위에 입상하면서 음악계에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이후 명교수 레프 나우모프를 사사했고, 부소니 콩쿠르와 하마마쓰 콩쿠르에서 입상, 롱 티보 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하며 음악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음악 페스티벌에서 임동혁의 연주를 듣고 라 로크 당테롱 페스티벌, 베르비에 페스티벌에 초청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EMI 클래식의 ‘젊은 피아니스트’ 시리즈에 임동혁을 추천해 EMI 클래식 데뷔 음반으로 황금 디아파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르 몽드’지에서 수상하는 쇼크상을 받은 2집에 이어 2008년 출시된 3집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까지 임동혁은 섬세하고 화려한 낭만음악의 매력과 단아하고 깊이 있는 바로크 음악의 정수를 들려주며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눈부신 성공과 함께 그림자도 있었다. 갑자기 어머니를 잃는 슬픔과 함께 이혼의 아픔도 겪었다. 뉴욕 집에 도둑이 들어 아끼던 피아노를 도난당한 일도 있었다. 인생의 깊은 골짜기 속에서 헤맬 때 그래도 그를 견디게 한 건 음악이었다. 좌절 속에서도 그는 꾸준한 음악 활동을 하며 연주자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얼마 전에는 반가운 뉴스도 전해졌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며 유럽·북미·아시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가 11월 워너 클래식스 레이블을 통해 쇼팽 프렐류드 전곡 음반을 발매할 예정이라는 소식이다. 이번 음반에는 쇼팽의 ‘뱃노래’ ‘자장가’ ‘화려한 변주곡’ 등 임동혁만의 피아니즘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이었지만 아직도 미소년의 미소가 매력적인 그를 오랜만에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얼마 전 디토 공연이 있었고, 음반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이번에 음반 작업한 작품은 쇼팽인데, 쇼팽의 곡은 어린 시절부터 연주했던 작품들일 텐데, 지금 동혁 씨에게 쇼팽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글쎄요. 요즘 쇼팽은 예전보다 덜 화려하게 느껴져요. 가냘프고 보호해주고 싶은 느낌이 더 드는 것 같고요. 지난겨울 연주했던 슈베르트가 노래를 피아노로 친다면, 쇼팽은 피아노로 노래를 하는 사람 같아요. 그의 음악이 점점 더 아프게 다가오네요.
이번 음반의 녹음 작업은 어땠나요?
처음에는 컨디션 조절을 잘 못해서 너무 힘들었어요. 한번 막히는 프렐류드는 계속 조바심이 나서 더 안 되거든요. 급기야 이매뉴얼 액스 선생님께 연락해 ‘어떡하면 좋냐’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어요.
그분이 뭐라고 조언해 주셨나요?
너무 완벽하게 모든 걸 하려고 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고요.
이매뉴얼 액스 선생님을 의지하나 봐요?
선생님은 제가 만난 연주자 중 정말 인품이 훌륭한 분이세요. 마음이 따뜻한 분이고요. 무엇보다 연주가 좋은 분이죠. 저를 가족처럼 아껴주세요.
완성된 음반을 들어보니 어떤가요?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것 같아요. 많이 힘들었지만 제게 큰 의미가 있는 음반이거든요.
동혁 씨의 음반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텐데요.
요즘 경제가 어렵다 보니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 공연을 보고 음반을 사는 경우가 많이 줄었어요. 그런 면에서 저의 이번 음반이 긍정적인 모티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미국에 있으면서 해외 활동이 많지 않았고 여러 차례 슬럼프를 겪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도 이번 음반이 새로운 유럽 클래식 음악 시장에서 더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연주자는 연주로 이야기하는 거니까요.
연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가요?
제 진심을 말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진심을 몰라준다고 생각하나 봐요?
제 이미지가 좀 까칠하고, 내 생각만 하는 사람처럼 비치는 게 솔직히 힘들었어요. 그래서 무대에 서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것 같아요. 연주 안에 제 내면의 슬픔과 모두에게 다가서고 싶은 마음과 또 한편으론 굉장히 외로운 심정을 말하고 싶었어요.
동혁 씨의 음악을 사랑하는 팬도 많고, 지켜봐주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분들에게 정말 감사해요. 제 음악을,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분들이니까요. 저를 사랑해주시는 분이 많았지만 연주를 하고 방에 혼자 남겨지면 외롭고 힘들 때가 많았거든요. 예전엔 모든 사람에게 제 음악을 공감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또 인정해요. 그래서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너무 완벽주의였나 봐요.
음악은 제게 위안을 주면서도 한편으론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 동반되는 정신적인 작업들로 인해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꾸 누군가에게 의지하려 하고, 그러면서 상처도 받게 되고, 그런 어려움이 계속 쌓여 근래에는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시기를 겪었어요.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서 정신적인 작업을 하려다 보니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지금은 평안해 보이는데요.(웃음)
마치 터널에 갇혀 빛이 안 보이는 것같이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는 음식도 잘 못 먹어서 살이 많이 빠졌었죠. 그래도 주변에서 저를 아껴주고 챙겨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요즘은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어느 정도 평화로운 일상도 찾았어요. 그리고 이제 점점 나의 이 외로움을 스스로 내 안에서 채워야 한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어요. 서른을 넘기며 소중한 것을 잃는 상실감을 겪으면서 더 간절해진 것이 ‘행복’이에요. 지금 이렇게 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해요.
무엇인가에 감사한다는 것은 소중한 감정이죠.
네. 예전에는 감사보다 두려움이 더 많았어요. 그래서 겉으로 더 강해 보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음악을 통해 행복한 삶을 꿈꾸는 건가요?
예전부터 평범하게 행복해지는 꿈을 꾸곤 했어요. 그런데 제 성격이 워낙 예민하고 섬세하다 보니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어요.(웃음) 행복한 가정에서 단란하게 사는 것, 무엇보다 제 삶 속에서 음악이 함께 있는 것.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행복이에요.
언제 가장 행복한가요?
연주할 때요. 그때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지금까지 삶의 여정에 만족하나요?
앞으로도 더 좋은 음악가로의 여정을 꿈꾸죠. 그러려면 연습을 더 많이 해야 할 텐데. 전 음악은 좋아하지만 연습은 싫어하거든요.(웃음)
성공한 예술가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예술가의 성공은 다른 분야에서의 성공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예술가는 스타가 아니잖아요. 유명해지는 것보다는 나만의 음악 세계를 갖는 사람이 되고 싶은, 그래서 내 연주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공연장에 찾아오고, 그 음악을 듣고 감동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혹시 이번에 연주한 쇼팽을 나이가 들어서 다시 연주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나요?
모차르트 같은 음악은 어린 시절 연주할 때와 지금 느낌이 정말 많이 달라요. 그 밑에 깔려 있는 슬픔의 미학이 더 많이 느껴져요. 쇼팽도 마찬가지고요. 나중에 다시 연주한다면 시간이 흘렀으니 또 지금과는 다르게 다가오겠죠.
언젠가는 베토벤 연주 음반도 들어보고 싶어요.
좋은 연주자는 결국 모든 곡을 다 잘 쳐야 하겠지만, 자기에게 잘 맞는 작곡가가 따로 있긴 해요. 전 슈베르트나 쇼팽,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들이 잘 맞아요. 바흐 음악도 좋아해요. 베토벤은 무척 좋아하지만 제가 머릿속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베토벤 연주와 제가 하는 연주 스타일이 너무 다르다는 걸 알기에 전곡 연주 같은 건 도전할 생각이 없어요.
삼십 대에 접어들면서 음악가로서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요?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해질수록 테크닉이 녹슬지 않도록 최대한 유지하고 싶어요. 한 편으로는 기대감도 있어요. 나이와 함께 더해지는 감정들을 실제로 겪어본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연주 속에 제가 겪었던 경험들이 잘 녹아서 좋은 음악으로 표현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나이가 더 들면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960을 연주를 해보고 싶어요.
그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제 인생의 이야기요. 단순히 유명한 스타가 아니라 진짜 예술가로서 오직 음악으로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었으면, 그리고 제 연주를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제 음악이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면 깊은 곳의 상처를 표면으로 끌어올리면 더 깊고 넒은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다고 한다. 예술이 아름다운 건 빛과 어둠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임동혁의 음악에는 더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 바로 거기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때로는 부서질 것 같이 연약해 보이는 그지만, 그의 음악은 언제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눈부신 그 빛을 결코 꺼뜨리지 말길.
사진 심규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