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마르틴 슈타트펠트, 식상함을 뛰어넘는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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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4월 1일 12:00 오전

©Marco Borggreve

 

 

 

 

 

 

 

 

 

 

 

 

 

독특한 아이디어와 예술가의 영감으로 가득 찬 그의 음악세계

여행의 백미이자 떠나는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하는 순간은 바로 여행 전, 여정의 계획이나 가볼 곳을 미리 상상해 보는 시간이다. 연주자들에게는 이와 비슷하게 한없이 들뜨고 행복해지는 시간이 바로 다음 시즌 프로그램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다.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처음에 떠오른 발상이 연주 무대에 그대로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오히려 내 의지나 생각이 바뀌어 애초의 시도와 정반대의 분위기로 연주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그것 또한 무대를 준비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예상 밖 즐거움이다. 연주자의 입장에서 다른 피아니스트의 음악세계에 대해 논할 때 제일 많이 관심을 갖는 것이 그 음악가의 걸어온 길과 그것에서 유추한 내 나름대로의 미래 전망(연구할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 등인데, 최근 젊은 연주자들 가운데 생각할 거리와 돌발 상황에서 오는 즐거움을 제일 많이 안겨준 인물은 마르틴 슈타트펠트였다.

무대에서 이 정도의 과감한 ‘사고’를 감행한 클래식 연주자가 또 있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16년 내한 공연 당시 슈타트펠트는 예정된 프로그램의 내용을 별다른 예고 없이 바꿔 연주했는데, ‘즉흥’ 에 가까웠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전반부에서 바흐가 남긴 최후의 완성작 ‘음악의 헌정’을 연주하기로 예정돼 있었지만 슈타트펠트는 작품의 기본 틀인 첫 주제를 제시한 후 자유로운 환타지 풍의 악상을 펼쳤는데, 작곡가 사후 나타난 여러 시대 양식과 다양한 건반악기의 특성을 한 대의 피아노에 담아 펼친 흥미로운 결과물이었다. 바흐의 오리지널을 기대했던 청중들은 불만이었겠지만, 정작 원곡에 맞춰 프로그램 노트를 제작했던 필자인 나는 매우 즐거운 ‘멘붕’을 겪었다. 무대 뒤의 연주자를 기다려 ‘왜’ 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정작 주인공은 ‘그냥 똑같이 연주하면 심심하니까’ 라는 예상 외의 답변만 남겼다.

 


‘고통과 우울함을 벗어난 또 다른 정서’의 슈베르트

2년 전 슈타트펠트의 무대를 접했던 이들이라면 이번 내한의 프로그램이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겨질 법하다. 요컨대 나처럼 몇 달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겪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사숙고, 순리를 받아들인 과정이다. 바흐의 ‘샤콘’ 은 이제 바이올린 솔로보다 피아니스트의 무대에서 더 많이 들려지는 부소니의 명품 편곡이 함께 하는데, 여기에 슈타트펠트의 재해석이 어우러질 예정이다. 그의 음악적 터치가 어떤 모양으로, 어떤 비율로 이루어질지 먼저 떠올려 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이어지는 곡인 ’바흐 오마쥬‘ 는 본격적인 작곡가로서의 모습이 나타날 기대작으로, 이미 평균율 모음곡 1권을 섭렵한 그가 원곡과 같은 조성의 순서로 꾸밀 열 두 곡의 모음곡을 통해 바흐에 대한 존경심을 자연스레 그려낼 무대로 기대된다.

이전의 공연에서 바흐의 프로그램을 끝낸 앙코르로 프로코피예프의 ‘토카타’를 연주하는 슈타트펠트에게 경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큰 손과 월등한 신체조건을 갖고 있지만 정확한 타건과 상하좌우 분리가 완벽에 가깝게 이루어진 성부 표현, 무섭게 돌진하는 템포 등에서 지금껏 들었던 ‘토카타’ 라이브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기대 이상의 호연이었던 것이다. 센세이셔널했던 ‘골드베르크’변주곡, 모음곡 등을 포함해 건반 협주곡 등 슈타트펠트의 탁월한 바흐 해석 안에 숨어있는 비르투오시티를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이가 무색한 완성도로 그가 남기고 있는 바흐 앨범들은 즉흥성을 듬뿍 담은 그의 기질이 매력적인 바로크적 악상으로 녹아들었던 호연이었는데, 새삼 젊은 피아니스트의 바흐 탐구의 출처를 맞볼 수 있는 앙코르가 아닐 수 없었다. 정통 로맨틱 레퍼토리의 개성있는 연구 역시 슈타트펠트의 또다른 주 영역인데, 2년 전 내한에서도 연주했던 쇼팽의 연습곡집은 그 후 앨범으로 만들어져 출시되었다. 넉넉한 기교임에도 날카로움보다는 여유로운 음상으로 조절된 프레이즈들이 연주자 특유의 고상하고 지적인 풍모와 연결돼 오래 기억될만한 뉘앙스로 남는 녹음이다. 연주 내용 중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슈타트펠트만이 들려줄 수 있는 즉흥 연주(improvisation)가 24곡의 연습곡 사이사이에 포진돼 있다는 점이다. 단순하면서도 교묘한 아르페지오와 심플한 멜로디라인이 작품 간 적절한 다리 역할을 하는 연주자의 아이디어에는 절제와 재치가 함께 숨어있다.

독특한 아이디어와 예술가의 엉뚱한 기질로 가득 차 있지만, 훤칠한 꽃미남 슈타트펠트의 외양은 늘 차분하고 평온하다. 무엇보다 낙천적인 인물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예의 쇼팽 에튀드에 들어가 있는 즉흥연주에 대해 칭찬했을 때도 “별 것 아니다. 쉬지 않고 연주하면 팔이 아파서 조금 쉬어가는 시간을 내기 위해 꾸몄을 뿐” 이라며 편안한 겸손의 표현으로 연주의 변을 보였다. 그와 처음 만났던 2009년이 떠오른다. 바흐의 평균율 중의 몇 곡을 연주하러 쇼케이스를 준비하던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악보는 의외로 슈베르트의 소나타 D960 이었다. “이것도 연습해야 하는데…” 혼잣말을 하던 그는 이내 “금방 잘 될 것 같아. 바흐 연습을 열심히 하면 이 곡은 저절로 풀릴 것 같거든.” 이라며 느긋한 모습이었다. 모든 것을 순리대로 풀어나갈 것 같은 슈타트펠트의 슈베르트 역시 이번 공연에 함께 한다. 이미 11년 전 이 걸작을 녹음한 바 있는 그는 피아노로 부른 슈베르트의 백조의 노래를 ‘고통과 우울함을 벗어난 또 다른 정서’ 로 들려주고 싶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어떤 것을 기대해도 좋다. 슈타트펠트는 늘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마르틴 슈타트펠트 피아노 리사이틀
4월 24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바흐 파르티타 중 ‘샤콘’ BWV 1004(슈타트펠트 편곡), 슈타트펠트 ‘바흐 오마주’,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960


 

글 김주영(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오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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