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객석’ 기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1) 클래식 음악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3월 2일 9:00 오전

REVIEW

 

벤스케/서울시향 협연 스타그·모리슨

믿음직한 약속

2월 14·15일

올해 1월부터 서울시향을 이끄는 새 음악감독 오스모 벤스케(1953~)의 취임 연주회장에 말러 교향곡 2번 ‘부활’(롯데콘서트홀)이 울려 퍼졌다. “지휘할 때면 이야기꾼이 되어 작품이 품은 감정을 무대 위로 끌어 올리려 한다”는 벤스케는 말러 교향곡 2번으로 국내 관객들에게 신고식을 치렀다. 베를린 도이치 오퍼의 수석 소프라노 시오반 스타그, 네덜란드 성악 콩쿠르 오라토리오 부문에서 우승한 메조소프라노 카트리오니 모리슨이 협연했다. 국립합창단과 서울모테트합창단, 그리고 정명훈/서울시향 말러 교향곡 2번 음반(DG) 녹음에도 참여했던 그란데오페라합창단이 함께 했다.

이번 공연을 비롯해 말러의 ‘부활’은 중요한 이벤트가 되는 연주회에서 선호되는 레퍼토리로 어느 순간 자리 잡았다. 대규모 오케스트라 편성, 웅장함을 극대화하는 합창단, 극적인 곡의 구성으로 설사 혹평일지라도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곤 한다. 국내에선 2014년 성시연이 경기필 예술단장 취임연주회에서 연주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총 5악장의 ‘부활’. 벤스케는 악장별로 죽음·회상·일상·근원·부활이라는 주제가 뚜렷한 이 곡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여나갔다. 앞으로 3년간 함께할 서울시향과 만들어갈 비전의 밑그림 같이 느껴졌다. 오케스트라 중 한 파트의 음량을 키우기 위해 ‘해당 파트의 소리를 키우는 방식’이 아닌, ‘그 외의 악기의 음량을 줄이는 방식’을 취한다는 그는 현악기와 관악기, 타악기군의 전체적인 조화를 중시하며 음량을 조정해나갔다. 무엇하나 튀지 않고 적절한 때에 꺼내 제 역할을 다한 소리는 오케스트라라는 음향체를 안정적으로 가져갔다. 모든 악기의 거대한 울림이 아닌 우주적인 균형에서 오는 감동이었다.

“나의 목표는 우리 모두가 모두 한 팀으로서 마치 하나의 악기처럼 한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것”이라 밝혔던 그는 ‘객석’과의 취임 기념 인터뷰(2019년 6월호)에서도 다음과 같이 포부를 밝힌 바가 있다.

“성공적인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음악적 재능과 기교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함께 일하는 단원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므로 기교를 넘어 많은 시간의 지휘와 헌신이 필요한 일이다. 지휘하면서 오케스트라가 마치 큰 실내악 앙상블과 같이 느껴질 때 가장 성공적이라고 느낀다.” 서울시향 음악감독으로서 그가 추구해나갈 방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다시 꺼내본다.

한편, 벤스케의 기교는 목격한 시간이었지만, 서울시향이 일체화된 오케스트라라는 평을 받기에는 아쉬운 지점도 보였다. 1악장 도입부의 현악기의 움직임, 종종 등장하는 피치카토 부분에서 ‘하나의 활’을 사용하는 듯한 통일감을 기대하기엔 어려웠다. 춤곡 성격의 2악장에서도 리듬감이 아쉬웠다. 3악장까지 접어들었을 때 즈음 벤스케의 의도대로 연주되는 것 같았다. 단원들과 눈을 맞추고 팔을 크게 휘젓는 벤스케의 모습은 더 날아오르라는 듯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과장된 몸동작에도 흥분감보다 안정감이 느껴진 것은 그와 서울시향이 만들어내는 믿음직스러운 연주 덕이었다.

백여 명의 합창이 만들어낸 벅참이 잦아들고 남겨진 여운을 청중이 박수 소리로 채웠다. 근래 어느 공연장에서보다 많은 기립박수가 있었다. 2015년 정명훈 사퇴 이후, 수석객원지휘자 티에리 피셔와 마르쿠스 슈텐츠 체제를 지나 5년 만에 임명된 음악감독을 향한 기대와 응원의 박수였다. 벤스케는 그 환호를 혼자 차지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둘러싼 파트별 수석들과 친근하게 주먹을 맞댔다. 성공리에 끝난 공연의 공을 단원들에게 돌리는 모습에서 그가 중시하는 ‘단원들의 존경’이 어떻게 쌓이게 될지 짐작됐다. 이번 시즌 남아있는 벤스케와 서울시향의 공연은 다섯 번. 그들의 호흡이 얼마나 더 좋아질지 지켜볼 일만 남았다.

글 박서정 기자 사진 서울시향

 

 

 

베토벤 트리오 본 대관령겨울음악제

겨울날의 여운

2월 10일

피아니스트 이진상과 바이올리니스트 미카엘 오브러츠키, 첼리스트 그리고리 알럼얀으로 구성된 베토벤 트리오 본은 2005년 결성 이래 독일 본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대관령겨울음악제(2.9~25, 강원도·서울 일대)의 서울 무대에서 베토벤 트리오 본이 연주했다.

정동1928 아트센터는 아늑했다. 옛 구세군중앙회관 건물인 이곳은 대관령음악제 초창기 메인 무대였던 용평리조트 눈마을홀을 연상시켰다. 높은 천장으로 인해 어쿠스틱은 좀 더 음악적이었다.

베토벤 3중주 ‘유령’은 빠른 템포로 시작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듯 첼로의 저음이 인상적이었다. 바이올린의 굵직한 중음역이 잘 전달됐다. 곡은 격렬함과 서정성 사이를 지옥과 천국처럼 오갔다. 제목 ‘유령’의 유래가 된 2악장답게 바이올린이 음산했다. 반면 이진상의 피아노는 맑았다. 바이올린이 불을 켠 듯 명확한 리드를 잡았고, 세 연주가는 영적인 내공을 노출했다. 3악장은 세 악기의 불꽃 튀는 각축전이었다. 경쾌하고 호쾌한 소리의 덩어리가 지붕에 부딪혀 흩어졌다.

피아노 덮개를 높게 열고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3중주 1번 연주를 시작했다. 음악원 졸업 작품이었던 교향곡 1번보다도 먼저 쓴 16세 쇼스타코비치의 곡이다. 낭만과 격정으로 오가다가 고즈넉한 뒤안길이 펼쳐졌다. 곧이어 신랄한 표현을 뚜렷하게 전달하다가 다시 고요한 순간들을 마주했다.

2부는 로디온 셰드린의 ‘세 개의 유쾌한 소품’으로 시작했다. 첫 곡 ‘대화’는 제목 그대로 바이올린과 첼로가 대화를 하거나 논쟁을 하는 듯했다. 이후 피아노가 슬쩍 끼어 들어갔다. 이어진 ‘로시니 오페라를 해보자!’는 바이올린과 첼로의 낭만적 악구 사이에 피아노가 가세했다. 밝고 활기찬 바이올린이 인상적이었다. 탱고풍의 악구도 등장하고 집중력이 돋보이는 순간들이 지나갔다. ‘유모레스크’에서는 세 연주자가 노래도 함께 부르며 능청스러움을 노출했다.

메인 프로그램의 무게를 지닌 프로그램 마지막 곡은 멘델스존 피아노 3중주 2번이었다. 피아노가 깔아주는 숙명적인 선율 위로 바이올린과 첼로가 노래했다. 단아하던 서정미가 폭발하고 이진상의 비르투오시티가 빛났다. 끓어 넘치는 에너지 속에 거친 입자가 느껴지는 과감한 연주였다. 2악장 안단테 에스프레시보는 쓰다듬는 손길처럼 사랑스러운 느린 악장이었다. 바이올린의 자연스러운 비브라토와 첼로의 민첩한 왼손이 귀와 눈을 잡아끌었다. 3악장은 약동하는 스케르초다웠다. 피아노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아찔하고 예각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4악장 피날레는 첼로가 중후하게 근사한 주제를 연주하며 시작됐다. 바흐 칸타타에서 사용한 코랄 선율이 도톰하게 도드라졌고, 세 악기의 노래가 아름다웠다.

앙코르 첫 곡은 피아졸라의 ‘망각’이었다. 백 년 가까이 된 공연장의 어둠 속에서 각별한 분위기로 빛나는 연주였다. 이어서 이들은 엘가 ‘사랑의 인사’와 멘델스존 피아노 3중주 1번 1악장을 연주했다. 고음과 저음을 오가는 비르투오시티가 홀의 어쿠스틱과 만들어낸 음향적 장면들이, 거기서 멈추는 게 아쉬웠다. 베토벤 트리오 본의 연주로 피아노 트리오 명곡을 더 듣고 싶었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대관령평창음악제

 

 

 

정상희 리사이틀

겨울의 끝자락에서의, 봄

2월 13일

신종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세로 공연계의 시계가 잠시 멈췄다. 아예 2월 공연 전체를 취소한 공연장도 있고, 공연을 하더라도 불안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정상희 바이올린 리사이틀이 열린 티엘아이 아트센터는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관객 전원에게 마스크를 나눠주며 착용토록 했다. 공연은 생각보다 부드럽게 진행됐다.

정상희(1989~)는 오스트리아에서 첼암제 음악제를 기획·주최하고, 빈 국립음대에 출강하며 활동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다. 슈베르트·비에니아프스키·포레 등 정통 낭만주의 바이올린 레퍼토리로 리사이틀을 열었다. 피아노를 연주한 베로니카 코프요바는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정상희와 마찬가지로 빈 국립음대에 출강한다.

노랑 드레스를 입은 정상희와 빨강 드레스의 코프요바는 봄을 연상시켰다. 첫 곡인 슈베르트 소나티네 1번 D137은 이날 프로그램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연주다. 정상희는 1악장 도입부에서 서두르지 않고 여유를 보이면서 연주를 전개해 나갔다. 정상희의 바이올린 음색은 날카롭지 않고 끝이 둥글었다. 코프요바의 피아노 음은 튕겨나가지 않고 바이올린 음에 달라붙는 듯했다. 페이지 터너가 없이 씩씩하게 악보를 넘기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따금 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여러 개의 직선과 점선으로 단절되는 느낌도 있었다.

2악장에서 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담담하게 하강하는 바이올린 선율은 마음을 움직였다. 마법에 걸린 듯했던 악장이었다. 반면 3악장에 들어서는 마법이 풀린 듯 평범하게 다가왔다.

비에니아프스키의 ‘구노 파우스트 주제에 의한 판타지 브릴란테’는 기교를 내세운 화려한 작품이었다. 정상희의 해석은 강한 드라이브 없이 담백했다. 오케스트라가 아닌 피아노 반주였기 때문에 그렇게 다가왔을 수 있다. 고음에서 빛나는 순간들이 몇 있었지만 긴장감을 자아내지는 않았다.

2부는 메인디시 같은 포레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연주했다. 연주 도입부에서는 소극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는데 점차 대담하게 변해갔다. 적극적인 부분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한 소리가 났다. 뚜렷한 이쪽 세계와 모호한 환상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자주 넘나드는 연주였다.

2악장에서 바이올린은 홍조 띤 볼을 하고 들뜬 듯했다. 21세기의 콘서트홀에서 듣는 연주였는데 이따금 과거 연주자들의 오래된 연주처럼 느껴졌다. 정상희의 바이올린은 점차 안정감을 찾고 궤도에 접어들었다. 연주회 당일은 겨울임에도 유난히 따뜻했다. 포레의 색채같이 봄을 재촉하는 날씨였다. 코프요바의 피아노는 유리창에 부딪히고 대지를 적시는 봄비처럼 바이올린에 닿았다.

3악장은 부산하게 연주되며 약동하는 장난기가 느껴졌다. 피치카토는 이따금 불안했다. 4악장은 이번 포레 소나타의 백미였다. 전 악장 중 가장 뜨거운 연소를 보여주며 청중을 매료시켰다. 피아노 반주는 굵은 물방울이 튀는 듯했다. 봄날 같은 겨울날 정상희의 연주는 겨울의 끝자락에 가불한 봄 같은 이미지로 남았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이동화(포토종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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