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예순에도, 김선욱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9월 7일 9:00 오전

FOCUS ON

서른, 예순에도

피아니스트 김선욱

김선욱이 2년 만에 국내에서 독주회를 연다. 또 베토벤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 잘 안 변한다”고

 

음악가의 인터뷰를 준비하며 가장 먼저 찾아보는 자료는 지난간 ‘객석’ 속 기사들이다. 14년 전, 김선욱의 인터뷰가 보인다. 열아홉의 그는 베토벤 소나타 32번을 연주하겠다고 하고는, 2006년 월드컵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소나타 32번은 그해 우승을 거둔 리즈 콩쿠르 준결승에서도 연주됐다. 이듬해 스물을 맞아 첫 ‘객석’ 커버스토리를 장식했을 때에도 김선욱은 베토벤 소나타 1번 연주를 앞두고 있었다. 스물다섯 김선욱이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회를 완주할 때까지 그의 기사에서 베토벤은 빠지는 법이 없다. 이쯤 되니 이런 생각이 든다. 하나, 김선욱은 ‘객석’이 그 성장 과정을 누구보다 착실히 기록해온 연주자다. 둘, 이건 기사라기보다는 김선욱이 베토벤에 보내는 연서(戀書)가 아닐까.

2020년 초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전 세계가 떠들썩했다. 원래대로라면 그 역시 3월 독주회를 열며 축하에 동참할 예정이었다. 한데 아무도 예상 못 한 전염병이 인류를 덮쳤고 독주회는 9월로 연기됐다. 들뜬 분위기가 잦아들 무렵, 김선욱은 이 불행한 작곡가를 슬며시 위로한다. 베토벤의 ‘안단테 파보리’와 후기 피아노 소나타 30·31·32번으로. 김선욱다운 의미심장한 선곡일까. 그건 아니란다. 그런데 “지금 아니면 이렇게 연주할 수 없다”는 느낌에 올해 이 세 곡을 녹음했다고 하니, 이것 참 의미심장하다. 만 32세 김선욱에게 서른두 개 베토벤 소나타가 어떻게 다가왔기에.

 

어제 막 입국한 사람에게 전화 인터뷰를 청하려니, 괜스레 미안했습니다. 아니에요. 아까 낮잠을 좀 잤어요. 괜찮아요.

지금쯤 독일은 오전 9시겠네요. 평소 독일에서 이 시간대에는 무얼 하나요? 코로나로 최근 한 5개월 동안은 아무 데도 못 가고 집에만 있었어요. 오랜만에 한곳에 머무니 좋더라고요. 여태 비행기도 너무 많이 타고, 시차도 자주 바뀌고 그래서 몸이 예전 같지 않았거든요.

입국 며칠 전까지 독일에서 음반 작업을 했다고 알고 있어요. 9월에 발매되는 음반(Accentus Music)이에요. 정명훈/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2019.9.29/예술의전당 콘서트홀)와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실황 연주를 수록했어요. 언제 또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같은 오케스트라와 음반을 해보겠어요. 그리고 정명훈 선생님이 이 곡을 진짜 잘하시거든요. 기록을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컸죠. 앞서 7월에는 라이프치히에서 베토벤 후기 소나타 30·31·32번을 녹음하고, 카메라 4대로 촬영도 했어요. 4K 초고화질의 영상물(Accentus Music)로 내년 즈음 출시될 거예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31·32번이면, 이번 독주회 레퍼토리와 같군요. 그간 무대에서 즐겨 연주했지만, 녹음하기는 처음이죠? 네. 녹음은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이 곡은 지금이 아니면 이렇게 칠 수 없다는, 그런 강력한 이끌림이요. 음반 관계자한테도 “나는 이 세 곡은 앞으로 30년간은 녹음 안 할 거다”라고 했어요. 다시 하게 된다면 아마 예순은 넘어서일 거예요, 그때까지 살아있다면요.

지금껏 연구해온 베토벤인데,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그건 진짜 본능적으로 오는 거라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어요. 달라진 게 있다면, 요즘 들어 부쩍 베토벤이 상상했을 것 같은 소리에 대해 생각한다는 거예요. 귀도 안 들리는 상태에서 이런 경이로운 작품을 썼는데, 과연 이 사람은 이 음표들을 쓰면서 어떤 음을 상상했을까. 예전에는 이런 식의 접근은 안 했거든요. 이번 녹음 때 베토벤의 소리를 현실의 소리로 구현해보고자 노력했어요.

그럼 김선욱에게 녹음과 연주의 차이는 뭔가요. 연주는 딱 한순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에요. 그리고 연주가 끝나는 순간, 그 음악은 생기를 잃죠. 지금처럼 아무리 온라인 음악회가 많아져도 실황 음악은 절대로 대체되지 않을 거예요. 음악이 살아 숨 쉬는 걸 한 번이라도 느껴본 적 있는 사람은 실황 음악의 결핍을 채우려고 할 테니까요.

독주회마다 베토벤 소나타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유명한 ‘베토벤 마니아’죠. 제가 베토벤을 치는 이유는 단순해요. ‘김선욱만의 베토벤’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베토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기를 바라는 거죠. 그게 좋아서 베토벤을 계속하는 것 같아요. 다행히 베토벤은 많은 피아노 작품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아무리 쳐도 끝이 없답니다.

오는 9월 독주회는 특별히 전곡을 베토벤으로 구성했습니다. ‘베토벤 덕후’의 또 하나의 ‘덕(독)주회’이지, 250주년을 기념한다거나 하는 의도는 없었어요.(웃음) 고려한 게 있다면 이때 피아니스트로서 어떤 작품을 연주하면 가장 보람 있을까 정도예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의 정수는 마지막 소나타 세 곡이고, 이 세 곡은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세 작품을 묶어서 연주하는 건 작곡가에 대한 경의를 제 나름대로 표현하는 거죠.

이번 레퍼토리를 보고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에 베토벤 말년의 작품을, 게다가 만 32세의 김선욱이 베토벤 소나타 32번을 연주하는 데엔 무언가 심오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측했어요. 왜 베토벤이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썼던 25세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에 나섰던 전력도 있잖아요. 전혀 아니에요. 굳이 그렇게 끼워 맞추고 싶지는 않아요.(웃음) 세 작품에 애착이 많이 가긴 해요. 특히 32번 소나타는 저하고 인연이 많아요. 2005~2006년 출전했던 콩쿠르의 준결승전에서 매번 연주했고, 2008년 처음 참가했던 안드라스 쉬프의 마스터클래스에서 연주한 곡도 베토벤 소나타 32번이었죠.

그렇다면 세 소나타의 연속성에 대해 말해볼까요. 이번 독주회에서 세 곡을 연달아 연주하죠. 세 작품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서 청중과 공유하고 싶었어요. 기본적으로 화성 자체가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소나타 30번은 E장조지만 그 끝부분은 31번 소나타의 Ab장조로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이렇게 시작한 31번 소나타의 분위기를 32번 소나타는 c단조로 확 바꾸면서 시작하고요. 이때 뭔가 긍정적인 기분이 들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되는 것이죠. 그런 분위기에서 시작된 32번은 결국 베토벤의 신념과 예술이 천상의 나라로 오르는 것처럼 마무리되어요. 저도 그렇지만 청중에게도 굉장한 인내와 집중이 필요할 테니, 첫 곡은 다정하고 수줍은 소곡으로 준비했어요. 특히 ‘안단테 파보리’는 베토벤 프로그램의 첫 곡으로 자주 넣어요. 베토벤으로 청중을 인도하는 듯한 그 분위기가 저는 참 좋더라고요.

베토벤 작품 중 피아노 소나타를 가장 좋아하세요? 사실 저는 후기 현악 4중주를 제일 좋아해요. 피아노로 연주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죠. 이번에 세 소나타를 공부하면서 후기 곡을 많이 들었어요. 후기 현악 4중주나 ‘장엄 미사’ ‘합창’ 교향곡 등에서 베토벤이 중요시한 건 완벽한 구조나 화성이 아니에요. 자신의 신념이죠. 31번 소나타 악보에는 빠르기 기호가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Con Amabilita)’ 같은 추상적인 글귀를 써넣었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쥐고 음악을 끌고 나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람들이 베토벤에 감동한다고 생각해요.

‘김선욱’하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떠올리는 청중도 많은데요. 피아노 독주곡과 오케스트라 협주곡으로 만나는 베토벤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구조적으로 큰 차이는 없어요. 그리고 저는 피아노를 칠 때 제가 피아노를 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오케스트라의 음형을 상상해서 녹여내려고 하죠. 예를 들어 32번 소나타 같은 경우에 저는 베토벤이 2악장의 테마를 작곡할 때 현악 4중주를 염두에 뒀다고 생각해요. 16분음표가 연달아있는 부분은 오케스트라가 짧은 활을 써서 내는 소리를 상상하기도 하죠. 말하자면 피아노 독주곡에서는 피아노를 오케스트라화 시키고, 협연할 때는 오케스트라를 피아노화 시키려고 합니다.

모든 작곡가의 곡을 그렇게 치나요? 이건 작곡가가 베토벤이기 때문에 가능해요. 쇼팽이나 프로코피예프를 칠 때는 완전히 피아노 본연의 것을 생각하죠.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다른 악기로 한다고 하면 이질감이 생기는데, 베토벤의 음악은 그렇지 않아요. 자신이 원한 음악이 악기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그 본질이 사라지지 않는 거예요.

너무 베토벤에 집중해서 발생하는 기회비용 같은 건 없나요? 오케스트라에서 협주곡 제안이 오면 자연스레 베토벤·모차르트·브람스·슈만 이쪽에 몰려요. 저에게 쇼팽을 요청하는 오케스트라는 드물죠. 그래서 협주곡을 선택할 기회가 생기면 최대한 다양하게 하려고 해요. 라흐마니노프나 프로코피예프, 버르토크도 가끔 하고요. 내년 파리에서 하는 독주회 프로그램에는 베토벤이 하나도 없어요.

사실 베토벤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굉장한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 알려졌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음악 없이는 못 사는 인간’이라고 결론 내리게 돼요. 음악을 정말 사랑해요. 온종일 클래식 음악을 듣고요. 스스로는 내 직업이 음악가가 아니라 클래식 음악 애호가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게 불행할 때도 있지 않나요? 저는 기사 안 쓰고 그냥 공연에 빠져들고 싶을 때도 있는데.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표현할 수 있다니 얼마나 행운이에요. 가끔 그럴 때는 있어요. 테크닉적으로 너무너무 어려운 곡을 칠 때 ‘아, 이건 내가 안 치고 남이 쳐줬으면 좋겠다.’(웃음) 아니면, 제 새끼손가락이 조금 짧은데 ‘이 한 음은 그냥 다른 손 하나가 쳐줬으면 좋겠다.’ 이런 것 말고는 딱히 없네요. 이번에 코로나19로 연주가 없는 동안 했던 일도 ‘1일 1오페라’ 보는 거였어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온라인 공연인 ‘나이틀리 메트 오페라 스트림스’ 말인가요. 맞아요. 온갖 오페라를 한 달에 12불 주고 볼 수 있다니, 정말 행복했어요. 베르크의 ‘보체크’는 한 몇 번 봤고요, R.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도 시대별로 작품이 다 올라와 있더라고요. 200년, 300년 전 작곡가가 쓴 작품이 연출가·가수에 따라 색깔이 확 변하는 걸 보면서 재창조·재해석의 매력을 다시금 느꼈어요.

음악적 영감도 얻었을 것 같아요. 오페라는 종합예술이라 시각적·청각적 효과를 모두 주잖아요. R.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바뀔 때 장면도 신비롭게 바뀌는데, 피아노 한 대로도 그런 효과를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는 청각적 효과밖에 제시할 수 없잖아요.

저는 김선욱의 무대를 ‘보는 재미’도 있던데요. 특히 영상으로 볼 때요. 연주에 몰입한 표정이라든가 열정적인 연주에 땀 한 방울이 건반 위로 툭 떨어지는 그런 부분이요. 제가요? 정말 신기하네. 무대에서 어떻게 연기를 하겠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꼭 해명(?)하고 넘어가고 싶은 게, 저는 원래 몸에 땀이 많아요. 1분만 쳐도 땀이 그렇게 나요. 열정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알겠습니다. 혹시 이참에 또 해명하고 싶은 게 있나요? 억울한 거는 있어요. 언제부턴가 제게 계획적이고 이성적인 이미지가 생겼는데, 전혀 아니에요. 즉흥적이고, 구속받는 것 싫어하고, 뭔가에 꽂히면 거기에만 몰두하는 성향이죠. 천성이 이러니 혼자만의 틀과 규칙을 세워서 좀 다스려보려고 애썼어요. 철저한 부점 연습도 이것마저 안 하면 템포가 통제가 안 될까 봐, 그래서 한 거죠.

그럼 지금, 30대의 김선욱을 스스로 단평해본다면요. 질풍노도. 사람은 안 바뀌잖아요. 그리고 저에게는 불치의 긍정병이 있어요. 힘들어도 힘들다는 생각 잘 안 해요. 글 박서정 기자 사진 빈체로

 

김선욱(1988~)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김대진을 사사했고, 런던 왕립음악원 지휘과에서 콜린 매터스를 사사했다. 2006년 리즈 콩쿠르에서 최연소·아시아 출신 최초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런던 심포니·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베를린 방송교향악단·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2020/21 시즌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데뷔 무대를 가질 예정이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14·23번

김선욱(피아노)

Accentus Music ACC30409

 

 

브람스의 ‘6개의 소품’ op.118 &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김선욱(피아노)/정명훈(지휘)/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Accentus Music ACC30501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2019/20시즌 정명훈이 이끄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아시아 투어에 함께했다. 음반에는 2019년 9월 29일 예술의전당에서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실황 연주가 수록됐다. 김선욱은 “정명훈 선생님은 항상 최고의 영감을 준다. 수세기를 거쳐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 음악을 만드는 것은 압도적인 경험이었다”라고 밝혔다. 브람스가 말년에 작곡한 ‘6개의 소품’ op.118을 같은 음반에 실은 이유에 대해서는 “젊은 브람스와 나이든 브람스를 대조시켜보고 싶었다”고 전했다. 9월 11일 발매 예정.

 

김선욱 피아노 독주회

9월 8일 오후 7시 30분 대구 수성아트피아 용지홀

9월 10일 오후 7시 30분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

9월 11일 오후 7시 30분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9월 13일 오후 7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베토벤 ‘안단테 파보리’ WoO57, 소나타 30·31·3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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