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ET THE ARTIST 9
플루티스트 최나경이 만난 세계의 음악인 ⑨
바이올리니스트 노아 벤딕스 밸글리
소년의 꿈, 현실이 되다
어렸을 때부터 ‘객석’을 보며 자랐지만, 지난달 커버스토리에 소개된 악장들의 이야기는 이전에 접한 적 없던 신선한 아이디어였다. ‘교향악축제’라고 하면 주로 악단 이름과 지휘자, 협연자가 소개되었기에, 그 뒤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악장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간 것은 참으로 따듯하고도 흥미로웠다. 같이 연주했던 음악감독, 악장, 부악장을 비롯해 예원학교 동창인 조가현과 최지웅까지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덕분에 해외에서 활동하는 친구들 중 ‘악장’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이들을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그중 베를린 필하모닉 제1악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노아 벤딕스 밸글리(1984~)가 떠올랐다. 그에게 최근 ‘객석’이 ‘악장’의 존재와 역할에 주목했다고 전하니 그는 눈을 반짝였다. 미국과 유럽의 악단에서 악장으로 연주해온 노아에게 한국의 악장들과는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다.
10대 시절, 미국에서 잘 알려진 실내악 축제인 사라소타 페스티벌에서 노아를 처음 만났다. 다들 연주력도 성격도 좋은 노아와 실내악 그룹을 하려고 안달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내 친구이기도 한 중국계 바이올리니스트 샨샨 야오와 결혼해 곧 두 살이 되는 귀여운 아들을 둔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하모닉을 믿음직스럽게 리드하고 있는, 우리 시대가 사랑하는 모범적인 악장이기도 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정말 바쁜 스케줄을 소화했다. 베를린 필의 연주가 처음 취소되자마자 이때다 싶어서 온 가족이 그리스로 휴가를 떠났다. 휴가를 다녀오면 코로나가 지나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휴가 동안에 유럽에 도시봉쇄가 시작되어 돌아오는데 고생을 좀 했다.
팬데믹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다! 팬데믹과 함께한 지난 열세 달 동안에 일어난 변화가 있다면. 베를린 필은 소규모의 실내악을 비롯한 스트리밍 공연을 정기적으로 했고 얼마 전에는 관객 전원이 코로나 테스트를 받고 입장한 라이브 콘서트도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이 정말 복잡했고 오케스트라로서는 예산도 많이 드는 일이었지만 관객과 연주자가 직접 만나는 경험은 그야말로 감격 그 자체였다.
미국과 유럽 교향악단에서의 경험
미국과 유럽의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으로 활동했는데 어떤 점이 가장 달랐는지. 사실 미국 인디애나 음대와 독일 뮌헨 음대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이미 그들의 음악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물론 인터넷으로 인해 요즘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스타일이 대체로 비슷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피츠버그 심포니에 악장으로 있을 때는 빈 필에서 바이올린 단원으로 활동했던 지휘자 만프레드 호네크가 음악감독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유럽의 현악 사운드를 익힐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금관악기의 사운드는 미국과 유럽이 정말 많이 다르다. 유럽은 좀 더 진하고 따듯한 소리를 추구하는 반면 미국은 더 깨끗하고 쭉 뻗어 나가는 느낌을 좋아한다.
오디션을 통해 악장을 뽑는 과정도 두 대륙 간 차이가 상당히 클 것 같다. 피츠버그 심포니에서는 며칠에 걸쳐 오디션을 하고, 이를 통해 뽑힌 사람들이 몇 차례 객원악장으로서 함께 연주한다. 그 후 몇 달 뒤에 다시 와서 두 번째 오디션을 치른다. 결국, 한 시즌에 걸쳐 오디션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반면 베를린 필의 오디션은 하루 만에 진행됐다. 또 다른 점이라면, 피츠버그 심포니의 심사위원단이 수석 연주자들로 구성되는 데 비해, 베를린 필은 모든 단원이 심사한다.
단 한 명의 악장을 두는 미국에 비해 베를린 필에는 세 명의 악장이 있다. 어떤 장단점이 있을지 궁금하다. 피츠버그 심포니에서는 유일한 악장이라, 나의 해석과 내게 가장 편한 핑거링과 보잉으로 이끌면 되었다. 하지만 베를린 필에서는 나 외에도 두 명의 제1악장(다이신 카시모토, 다니엘 스타브라바)이 함께하기 때문에 유연성이 더 필요하다. 두 시스템 모두 장점을 가지고 있다. 악장이 한 명씩인 미국 악단에서는 같은 이유에서 그 악단의 색깔이 더 강해질 수 있고, 나아가 악단 특유의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악장을 비롯한 모든 멤버가 돌아가면서 연주하는 베를린의 시스템에서는 연주자들의 과로도 방지할 수 있고, 오케스트라 활동 이외에 독주나 실내악을 하다가 돌아와 새로운 마음으로 단체 연주에 임할 수 있다.
미래를 결정해 준 동화책
어떻게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되었나. 집에 ‘백다섯 명의 오케스트라(The Philharmonic Gets Dressed)’라는 동화책이 있었는데, 부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그 책을 너무 좋아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내 아들에게 그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를 준비하며 턱시도를 입고 무대에 오르는 모습이 굉장히 좋아 보였나 보다. 그 길로 네 살 때 스즈키 교본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여덟 살 무렵 본격적으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신시내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신시내티 유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면서 꿈을 키웠다.
신시내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니! 그걸 내가 왜 이제 알았을까. 나경 씨가 신시내티 심포니에 들어갔다고 들었을 때 정말 반가웠다(웃음). 고등학교 재학 중,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인디애나 음대로 매주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대학과 대학원을 거치면서는 더 나은 연주자가 되기 위해 콩쿠르도 많이 나갔고 여러 방면에서 열심히 실력을 쌓았다.
어릴 때와 지금은 연주 스타일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그렇다. 불과 몇 년 전 연주만 보아도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다. 의도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연주 스타일은 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연주회 횟수가 줄어들면서 실력을 유지하는 데 더 도움이 될 수도 혹은 반대일 수도 있는데, 당신의 경우는 어떤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몇 주 전 베토벤의 협주곡을 협연했는데, 첫 리허설 때는 내 실력이 살짝 녹이 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금방 그 감각을 되찾긴 했지만. 팬데믹 이후 시간이 더 많아진 덕분에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진정한 ‘연습을 위한 연습’을 할 수 있게 됐다.
빈 필과 베를린 필 단원들로 구성된 필하모닉스는 여러 장르를 연주한다. 베를린 필의 첼로 단원이자 편곡자이기도 한 슈테판 콘츠의 초청으로 4년 전에 합류했다. 이미 두 장의 앨범을 냈고, 3년 전에는 한국에서도 연주회를 가졌다. 우리는 클래식 음악은 물론이고 클레즈머(동유럽 유대인 지역사회의 전통음악), 집시, 살사 등의 다양한 장르는 물론 스팅의 노래까지 우리만의 스타일로 연주한다. 나의 경우에는 동유럽의 전통음악으로 춤을 가르치시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클레즈머 음악에 많이 노출되어 있었고, 바이올린을 하면서부터는 클레즈머 음악도 자연스럽게 연주하게 되었다. (노아는 클레즈머 협주곡인 ‘피들 판타지(Fidl-Fantazye)’를 작곡해 피츠버그 심포니와 초연하기도 했다.)
긍정적인 악장의 비결
늘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당신에게도 화가 나는 일이 생기는지 궁금하다. 물론 기분이 좋은 날이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대체로 연습할 때 내 마음대로 안 되면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또, 뉴스를 좀 집착적으로 보는 편인데, 정치가들이 나를 자주 화나게 한다!(웃음)
짜증날 때가 있다니 정감이 간다! 그럼 어떻게 마음을 다시 진정시키는지. 우선 자연을 찾는 것을 좋아하고 산책도 즐긴다. 그리고 ‘알렉산더 테크닉(몸의 긴장을 알아차리고 이를 통해 이완의 과정으로 가는 움직임 학습법)’을 하면서 몸과 마음의 중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많은 이가 우리를 음악하고만 연관 짓지만, 사실 연주자는 운동선수와도 같아서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아빠가 되고 나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시간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빠가 되기 전의 나는 시간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웃음) 연습 시간을 찾는 것 자체가 도전이고, 따라서 연습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는 법도 익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들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팬데믹 덕분에 아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감사하다.
4년 전인 2017년,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협연 조성진) 투어로, 그리고 3년 전 필하모닉스와의 공연으로 한국을 찾았던 노아는 한국의 열정적이고 똑똑한 팬들이 그립다고 전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회를 준비하고 무대에 오르는 과정이 담겼던 동화책을 마르고 닳도록 읽으며 꿈을 품었던 한 소년. 시간이 흐른 지금 그는, 바로 그 동화책 속의 삶을 현실로 살아가고 있다.
노아 벤딕스 밸글리(1984~)는 인디애나 음대와 뮌헨 음대를 졸업하고 피츠버그 심포니에서 악장으로 활동한 뒤 2014년부터 베를린 필하모닉의 제1악장으로 재직 중이다.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 외에도 빈 필과 베를린 필의 멤버로 구성된 필하모닉스의 멤버로, 로버트 레빈(피아노)과 피터 와일리(첼로)가 함께하는 피아노 트리오의 멤버, 그리고 뉴욕 필의 바이올린 단원이기도 했던 그의 아내 샨샨 야오를 포함한 로자문데 콰르텟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클레즈머 연주의 전문가로서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가 작곡한 클레즈머 협주곡은 2016년 만프레드 호네크의 지휘로 피츠버그 심포니에 의해 초연된 바 있다.
글 최나경
동양인 최초, 여성 최초로 빈 심포니의 플루트 수석을 역임하고, 현재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며 솔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유튜브 채널 ‘Jasmine Choi 최나경’에서 연주·인터뷰 영상, 플루트 전공자들을 위한 영상으로 팬들과 소통하고 있으며, 지난해 9월부터 월간객석 ‘Meet the Artist’ 시리즈를 통해 글과 영상으로 세계 음악인들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