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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하스 현악 4중주단
자국의 음악유산을 지켜가는 악단
현재 체코를 대표하는 실내악단의 20여 년 역사와 체코 음악의 매력에 대하여
체코의 서쪽, 보헤미아를 가로지르는 블타바강은 수 세기 동안 남북으로 유유히 흐르며 체코의 든든한 젖줄이 되었다. 그 보헤미아 음악의 한 축을 지탱하는 체코의 실내악단 역시, 수 세기를 지나며 ‘실내악 강국’의 계보를 이어왔다.
19세기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수크(1874~1935)가 몸담았던 보헤미안 현악 4중주단부터 20세기 체코 음악가들의 이름을 걸고 창단한 스메타나·야나체크·탈리히 현악 4중주단. 그리고 21세기 현재, 이 걸출한 현악 4중주단의 명맥을 이어갈 주자가 바로 파벨 하스 현악 4중주단이다.
2002년 체코 프라하에서 창단한 파벨 하스 현악 4중주단은 선배들이 그러했듯, 앙상블 이름을 동명의 체코 작곡가 파벨 하스(1899~1944)에게서 따왔다. 이들은 창단 초기인 2005년 음반사 수프라폰과의 계약을 통해 인지도를 쌓은 뒤, 그해 이탈리아에서 열린 프레미오 파올로 보르치아니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클래식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7년에는 야나체크와 파벨 하스의 현악 4중주를 녹음한 데뷔 음반으로 그라모폰 최우수 실내악상을 수상했고, 이후 황금디아파종상(2010), 그라모폰 올해의 음반상(2011), 그라모폰 실내악 부문 수상(2014·2015) 등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증명했다. 지난해 보리스 길트버그(피아노)와 함께한 드보르자크의 녹음으로 그라모폰, 프레스토, 황금디아파종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창단 이후 지난 20여년 동안 멤버 교체가 있었다. 현재는 창단 멤버인 베로니카 야루슈코바(바이올린)가 중심을 잡고, 그와 부부지간인 페테르 야루셰크(첼로), 마레크 즈비에벨(제2바이올린), 작년 6월에 합류한 시몬 트루스카(비올라)가 함께하고 있다. 2015년 첫 내한을 앞두고 진행했던 본지와의 런던 현지 인터뷰(2015년 5월호) 이후, 오랜만에 그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답변에는 멤버들과 가족, 그리고 체코 음악에 대한 애정이 가득 묻어났다.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현악 4중주단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창단 초기에 스메타나 현악 4중주단의 비올리스트 밀란 슈캄파(1928~2018)는 “음악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옥에 온 걸 환영한다”며 격려하기도 했죠.
페테르 슈캄파의 말이 옳았어요. 살다 보면 기쁜 날도 있고, 슬픈 날도 있지만, 돌아보니 음악가의 삶은 대체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이렇게 마음이 맞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는 건 큰 축복이에요. 창단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멤버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현악 4중주는 연주의 완성도를 높이고, 정체성을 확립하기까지 많은 연습이 필요한 장르입니다. 멤버 간의 관계 유지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평소 연습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요?
베로니카 현악 4중주는 테크닉과 강한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만큼 연습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함께 연주할 작품을 고를 때, 모두가 좋아하는 작품이 아니면 그 곡을 선택하지 않아요. 우리의 연습 방식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습니다. 모두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뭉쳐있을 뿐이죠.
특히, 두 분은 같은 현악 4중주 멤버이자 부부지간입니다.
베로니카 맞아요. 이 주제만으로도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네요.(웃음) 저와 페테르는 16살에 처음 만나 지금까지 32년을 함께 했어요. 운이 좋은 편이었죠. 오랜 시간 함께 연주하면서 개인적인 삶과 음악적인 삶을 분리하기 어렵다는 약간의 단점도 있지만,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피아니스트 보리스 길트버그(1984~)와도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브람스 피아노 5중주’(2022) ‘드보르자크 피아노 3중주 전곡’(2023) 등의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죠. 그와 함께 연주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페테르 2004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제이스트 페스티벌에서 보리스를 처음 만났어요. 당시 드보르자크 피아노 4중주를 연주했는데, 음악적으로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함께 연주하게 됐죠. 보리스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예요. 우리는 그를 파벨 하스 현악 4중주단의 다섯 번째 멤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현을 타고 흐르는 체코의 선율
올해는 스메타나 탄생 200주년이기도 합니다. 체코 실내악의 역사를 잇는 파벨 하스 현악 4중주단에게 스메타나는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베로니카 스메타나는 늘 제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작곡가예요. 그의 작품은 언제나 우리 연주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죠. 스메타나는 자신의 삶을 반영한 두 개의 현악 4중주를 작곡했는데, 두 작품에서 모두 그의 솔직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현악 4중주 1번 ‘나의 생애로부터’에는 인생에 대한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있죠. 스메타나의 마지막 작품인 현악 4중주 2번은 아르놀트 쇤베르크(1874~1951)가 말했듯 “새로운 시대를 연 현대적인 곡”입니다.
이번 공연에서 스메타나·야냐체크·수크 등 체코 레퍼토리를 선보입니다. 특별히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페테르 우선, 한국 관객에게 체코 레퍼토리를 선보일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이들은 모두 체코 음악을 상징하는 작곡가입니다. 특히 요제프 수크의 ‘옛 체코 성가 성 벤체슬라스에 대한 명상‘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가 오스트리아의 통치 아래 있을 때 널리 연주되었던 작품이죠. 민족 정체성의 상징으로 이 곡이 자주 연주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체코 음악 역사상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총 10장의 음반을 녹음했습니다. 가장 애정이 가는 음반이나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음반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베로니카 음반마다 각각의 사연이 담겨있어서 하나만 고르기가 어렵네요. 모든 음반이 직접 낳은 아이들처럼 소중하게 느껴져요. 가장 애정이 가는 음반을 꼽아 본다면 2013년에 발매한 ‘슈베르트: 죽음과 소녀’입니다. 이 음반을 녹음하던 당시, 딸 안나를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연주는 지금까지도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페테르 모든 음반이 특별하게 느껴진다는 베로니카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해요. 제가 추천하는 음반은 ‘프로코피예프’(2010)입니다. 프로코피예프의 현악 4중주 1·2번과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가 담겨있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베로니카 2025년에 보후슬라프 마르티누의 현악 4중주 작품을 녹음하고, 그 후에는 드보르자크의 주요 작품 두 개를 녹음할 예정입니다. 여러분에게 잊지 못할 공연을 선사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 기대해 주세요!
글 홍예원 기자 사진 아트센터인천
Performance information
파벨 하스 현악 4중주단 리사이틀
5월 18일 오후 5시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단독 공연)
수크 ‘옛 체코 성가 성 벤체슬라스에 대한 명상’, 스메타나 현악 4중주 1번, 야나체크 현악 4중주 2번
DISCOGRAPHY
음반으로 살펴보는 파벨 하스 현악 4중주단
조화로운 음향, 그 음악 예술의 기록
2007년 그라모폰 최우수 실내악상 수상을 시작으로, 체코 음악의 강자로 떠오른 그들의 데뷔 음반부터 최근 신보까지
2006년 8월 수프라폰에서 발매한 데뷔 음반에는 파벨 하스(1899~1944)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현악 4중주 2번과 야나체크(1854~1928)의 현악 4중주 2번이 수록됐다. 그리고 이듬해 2007년 9월에 발매한 두 번째 음반은 야나체크 현악 4중주 1번과 파벨 하스의 현악 4중주 1·3번으로 채웠다. 이들은 파벨 하스와 그의 스승인 야나체크를 조합한 자기소개로 디스코그라피를 쌓아나갔다.
파벨 하스 현악 4중주단은 야나체크의 급격한 장면 전환에 맞춰 각 제스처의 특징을 부각하며, 극적이기보다는 조화로운 음향을 지향하고, 음악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유도한다. 하스의 작품도 독특한 제스처들이 강렬한 인상을 주지만, 곡의 전개는 비교적 유기적이어서 극적인 표현을 통해 감상자들의 감각적 이해를 돕는다. 특히, 현악 4중주 2번 4악장에서는 선택으로 지정된 타악기를 사용해 흥미를 더한다.
2010년 1월에 내놓은 세 번째 음반은 프로코피예프였다. 프로코피예프의 현악 4중주 작품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널리 알려진 다른 작품들에 비해 불협화적이고, 짜임새가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작품을 친절하게 풀어준 파벨 하스 현악 4중주단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 친절함의 비밀은 명료한 선율과 효과적인 강약 배분에 있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드보르자크의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카’와 13번을 녹음하며 다시 체코 레퍼토리로 돌아왔다. 첫 트랙부터 ‘체코 음악의 강자’라는 자신감이 강하게 전달된다. 그럼에도 과장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이는 조화로운 음향이 우선에 있기 때문이다.
2013년 9월에는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로 고전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하이든과 베토벤을 비정규 음반으로 녹음했던 이들에게 이 정규 음반은 각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지난 음반과 달리 제2바이올린이 마레크 즈비에벨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앞선 음반에서 들었던 그들만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5중주 작품을 수록하며 레퍼토리를 4중주 너머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하스·야나체크·드보르자크를 섭렵했다면 다음 차례는 스메타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기대는 2015년 4월에 현실이 되었다. 파벨 하스 현악 4중주단은 삶의 행복과 운명적인 고통을 그리는 스메타나의 작품을 템포의 완급으로 풀어간다. 이는 조화로운 음향을 유지하는 동시에 극적 내러티브를 만드는 전략이다.
2017년 10월에는 다시 드보르자크로 돌아와 피아노 5중주와 현악 5중주를 선보였다. 피아니스트 보리스 길트버그와 녹음한 피아노 5중주 2번은 피아노가 전면에 있어 보이지만, 현악 5중주는 기대한 만큼 현악 앙상블의 조화를 들려준다. 다만, 과거와 달리 표현이 거칠게 느껴졌는데, 공교롭게도 이 음반부터 비올리스트의 얼굴이 매번 바뀌는 불안의 시기를 맞는다. 2년 후인 2019년 10월에 내놓은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2·7·8번에서도 표현적인 보잉을 들려준다. 이는 개성을 잃어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몰두한다고 볼 수도 있다.
팬데믹을 지나 2022년 5월, 이들은 브람스에 도전했다. 슈베르트와 드보르자크를 잇는 피아노 5중주와 현악 5중주다. 보리스 길트버그와 2016년까지 비올라 주자로 활동했던 파벨 니클이 객원으로 함께했다. 피아노 5중주는 피아노와 현악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일체감을 보이고, 현악 5중주 2번은 다섯 악기의 어우러짐이 매우 정교하고, 유기적이어서 마치 음향 카펫을 짜듯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
지난해 9월에는 베로니카 야루슈코바(제1바이올린)와 페테르 야루셰크(첼로) 부부가 보리스 길트버그와 함께 드보르자크 피아노 3중주 전곡을 녹음했다. 이들의 연주는 오랜 시간 맞춰온 호흡으로 강약 배분과 템포 설정 등이 알맞게 조율되어 있다. 계산과 전략이 아닌, 완숙한 연주자들의 몸과 정신에서 나오는 음악 예술이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