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심포니 수석지휘자 안토니오 파파노, 새 사령탑에 오른, 준비된 자의 카리스마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0월 1일 9:00 오전

COVER STORY

 

런던 심포니 수석지휘자 안토니오 파파노

새 사령탑에 오른, 준비된 자의 카리스마

 

 

‘놀랍게도 지휘자께서 하루 만에 답변을 완료했습니다.’ 런던 심포니 홍보 담당자에게 보내놓은 질문지 메일이 이튿날 회신됐다. 지휘자의 음성이 또박또박 담긴 4개의 녹음 파일. 그날은 런던 심포니의 2024/25 시즌 첫 공연, 즉 그의 취임 연주회가 있기 하루 전날이었다. 준비된 자의 면모와 행동이란 이런 것일까? 그가 앞으로 런던 심포니의 수장으로서 보여줄 ‘놀라움’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총괄 이의정 기자

 

INTERVIEW 제17대 수석지휘자 안토니오 파파노

APPENDIX Ⅰ. LSO 역대 수석지휘자

APPENDIX Ⅱ. LSO 화제 탐구

APPENDIX Ⅲ. LSO 한국인 단원 더블베이시스트 임채문

 


INTERVIEW

 

©Mark Allan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감독에서 물러나 2017년 런던 심포니(이하 LSO) 수석지휘자로 부임한 사이먼 래틀은 LSO 전용홀 건립 무산, 브렉시트, 팬데믹이 겹친 복합 위기 끝에 올해 악단을 떠났다.

LSO 새 수장의 행운을 잡은 이는 1959년 영국 동부 에핑 태생의 안토니오 파파노이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 십 대 초반에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음악 경력 내내 영국 음악가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로열 오페라에서 20년 넘게 장기 집권했고 향후 로열 오페라 신작의 객원 지휘 계획이 있지만, 관현악을 중심으로 두는 LSO 감독으로 옮긴 명분은 브렉시트로 나락에 떨어진 영국 클래식 음악 시장의 부흥이다.

파파노의 LSO 감독직 행보는 준비된 CEO의 프레젠테이션을 보는 듯하다. 2027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축제에 참여하여 오페라 지휘로 LSO의 성악 연주력을 강화하고, 바비칸 센터에선 영국 작곡가의 희귀작을 선별해 영국 음악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연차 계획을 발표했다.

리처드 모리슨이 저서 ‘승리와 격변의 세기: 런던 심포니(The LSO: A Century of Triumphs and Turbulence/2004)’에서 정리했듯, LSO가 언제 위기가 아닌 적이 있던가? 브렉시트, 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삼중고를 헤쳐 나갈 LSO의 유일한 대안, 파파노가 LSO와 함께 이달 내한한다. 2018년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오케스트라와의 내한 이래 파파노는 6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이하 기사 속 ‘*’ 표시는 필자의 주)

 

한국 연주자와의 인연

2000년대 초반 첼리스트 장한나의 음반에 피아니스트, LSO 지휘자로 출연했다. 그는 손가락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를 정도로 당신이 열심히 피아노를 치던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는데, 그를 어떤 연주자로 기억하나?

장한나처럼 매혹적이고 강렬하고 뛰어난 젊은 재능을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그는 대단한 첼리스트다.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1번과 첼로 소나타, 프로코피예프 신포니아 콘체르탄테와 첼로 소나타 등 러시아 음악에 함께 집중했는데, 그와 음악을 만드는 경험이 정말 좋았다. 더 이상 첼로를 연주하지 않는 건 아쉽지만, 지휘를 맡게 됐다는 소식에 기뻤다.

로열 오페라에서는 테너 이용훈과 공연했다. 그의 어떤 점이 좋았나?

‘투란도트’(2023)의 칼라프 역을 이용훈이 맡아줬다. 목소리가 청동처럼 청아하고 강인해서 이 레퍼토리에 이상적인 가수이다. 음악적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외모도 훌륭해서 로맨틱한 역할에 제격이다.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정명훈에게 물려받았다. 정명훈이 악단에 남긴 유산과 업적은 무엇인가?

정명훈은 악단을 환상적인 상태로 만들고 떠났다. 악단에 처음 왔을 때, 그들의 테크닉이 눈부셨다. 오케스트라의 기술적 측면을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마치 대규모 실내악단에 있는 것처럼 모두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전통이 심어졌다. 그 덕분에 내가 새 시대를 열 수 있었으니, 정명훈의 노고에 감사하다.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와도 함께 연주한 기억이 있다. 조성진과는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오케스트라, LSO에서 협연했다. 또한 지난여름 베르비에 페스티벌에서는 임윤찬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함께 하기도 했는데, 앞으로 조성진은 어떻게 발전하고, 임윤찬은 어떻게 변모할까?

조성진은 한국이 낳은 큰 인재이자 사랑스러운 음악가다. 해석이 매우 섬세하고 색채가 풍부하며 친밀감이 넘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만의 방식이 정말 마음에 든다. 임윤찬과는 언급한 대로 베르비에 페스티벌에서 처음 작업했는데, 실로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 어리지만 이미 많은 것을 이해하는 깊이 있는 음악가이기에, 그의 밝은 앞날을 전망한다. (*LSO는 2025년 2월, 20년 만의 카네기홀 공연을 갖는다. 지휘에 파파노, 협연에 임윤찬으로, 협연곡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6년 만의 방문

10월 한국 공연에서 말러 교향곡 1번을 연주한다. 그의 음악을 실연으로 처음 접한 건 언제, 어떤 악단이었나?

솔직히 말하면 어린 시절 말러 교향곡을 직접 들었던 경험이 많지 않다. 여러 작품을 녹음으로 접했으며, 라파엘 쿠벨리크/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레너드 번스타인/뉴욕 필하모닉 혹은 빈 필하모닉의 말러 교향곡이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말러에 관한 두 거장의 접근 방식은 완전히 다르지만, 내겐 똑같이 유용하다.

말러는 위대한 지휘자인 동시에 훌륭한 오페라 지휘자였다. 말러 교향곡은 브루크너 교향곡과 달리, 말러가 직접 지휘하면서 수정할 수 있었기에 최종 버전이 최상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에 동감하는가?

말러와 나는 오페라하우스에서 자란 오페라 지휘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그만큼 훌륭한 오페라 지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코번트 가든에서 22년, 브뤼셀 모네 극장에서 10년, 오슬로(노르웨이 오페라)에서 2년, 도합 34년 동안 오페라하우스 음악감독으로 일하며, 그의 경력에 못지않은 정말 많은 오페라를 경험했다. 그래서 말러 작품의 지휘는 내게 중요한 일이다. 질문대로 브루크너는 아쉽게 직접 듣고 수정할 기회가 없었고, 의견을 제시하는 조수들이 종종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 말러 교향곡은 작곡가가 지휘하고 효과가 어땠는지 직접 확인하고 수정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행운이 함께 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말러 교향곡 1번을 언급할 때 당신은 자연을 자주 언급한다.

말러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과 R. 슈트라우스가 지켜본 자연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나?

자연에 대한 말러의 관점은 흥미롭다. 중요한 사항은 ‘자연이 그에게 어떤 느낌을 선사했는가’이다. 말러는 음악에 자연을 묘사했는데, 새소리를 직접 쓰기도 했지만 베토벤 ‘전원’ 교향곡이 그랬듯, 전반적인 분위기는 ‘신선함’과 ‘발견’이 함께 한다. R. 슈트라우스는 자연을 그리면서 말러보다 더 많은 음표와 기교를 사용했다. 말러가 좀 더 순수하게 접근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내한에서 LSO는 생상스 교향곡 3번 ‘오르간’도 연주한다. 교향곡의 주인공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도입하는 아이디어는 베토벤이나 그의 후대 독일 작곡가 작품에선 실현되지 않았을 일이다. 교회 음악이 아니라 로열 앨버트홀에 건조된 오르간을 위해 작곡된 생상스 교향곡 3번에선 어떤 ‘프랑스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 교향곡이 프란츠 리스트에게 헌정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 헌정이 이미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생상스가 건반을 사용하는 방식은 무척 흥미롭다. 그가 교향곡에 사용하는 건반은 오르간뿐 아니라, 양손을 위한 피아노에서 네 손을 위한 피아노로, 점차 범위가 늘어난다. 이는 건반에 대한 생상스의 찬사가 아닐까? 오르간은 고귀한 악기이고, 조율과 음압이 적절히 조절된다면 관객은 오르간에서 바로 프랑스적인 음색을 알아볼 수 있다. 플루트를 닮은 순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시작해서 피날레에는 장엄하고 압도적이며 극적인 소리, 그것이 이 작품의 ‘프랑스다움’이다.

함께 내한하는 유자 왕은 LSO의 단골 파트너다. 당신과 유자 왕이 라흐마니노프의 스위스 세나르 저택을 방문해 라흐마니노프를 함께 논한 영상이 기억난다. 뛰어난 기교 외에 그가 가진 피아니즘의 미덕은 무엇인가?

유자 왕은 매우 자연스러운 음악성을 지니고 있으며, 악기에서 놀라운 불꽃을 만들어내는 대단한 테크닉을 갖추고 있다. 보기 드문 감수성과 함께, 청중과 소통하는 연극적인 감각도 빼놓을 수 없다.

 

악단과 함께 그리는 미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John Davis-min

LSO와 첫 연주는 1996년 푸치니 ‘제비’를 녹음한 EMI 스튜디오였다. 당시 LSO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았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처음 LSO를 만났다. 푸치니 ‘제비’ 녹음 세션은 지금까지도 음악 인생의 즐거운 장면 중 하나로 남아있다. LSO는 에너지가 넘쳤고 음악에 대한 흥분, 낭만적인 정신과 표현력, 청취자가 이 음악을 전혀 모른다고 해도 음악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재빨리 만드는 비범한 능력의 오케스트라였다. 환상적인 관계의 시작인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LSO 수석지휘자 취임 연설에서 당신과 악단의 관계를 단일한 브랜드로 인정받고 싶다고 했다. 오케스트라는 당신 지휘에서 관현악을 넘어 연극적인 환상을 기대하는 게 뚜렷한데, 당신 측에서 이를 대비한 구체적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화학 작용은 매우 신비롭다. 그 작용이 긍정적이면 그 자리의 모두가 그 감각을 느낀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물론이고 관객도 마찬가지다. 나는 LSO와의 호흡이 긍정적이라 생각한다. 1996년부터 항상 그래왔다. 우리는 함께 많은 음악을 연주하고, 녹음하고, 투어를 다녔다. 수석지휘자를 맡으면서 악단을 더 깊게 알게 됐다. 우리는 아마 인정받을 그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낼 것이다. 그 무언가를 ‘브랜드’라 부르고 싶진 않고, 사람을 흥분시키는 ‘접근 방식’으로 칭하고 싶다. 수석지휘자는 악단을 이끌고 악단 얼굴이 되며 악단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될 책임자다. 여러 공연·녹음·투어를 함께 진행하면서 좋은 ‘접근 방식’을 얻는 기쁨을 확인하겠다.

당신과 사이먼 래틀은 영국 클래식 음악계에서 브렉시트 후폭풍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데 선두에 섰다. 래틀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이 되어 뮌헨으로 떠났으니, 이제 런던에선 당신 혼자 목소리를 낼 상황이다. 영국 클래식 음악 시장을 부흥하기 위해 지난 7월 출범한 키어 스타머 내각(노동당)이 해결할 시급한 과제로 무엇을 제시하겠는가?

스타머 정부는 교육기관 커리큘럼에서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 무엇보다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스타머 총리 자신이 음악을 배웠기에 음악을 통한 두뇌 계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정부가 청소년 교육 개선 방안을 추진하면서 이 점을 명확히 하면 좋겠다. 지속해서 음악에 노출되는 것은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에 매우 중요하다. (*스타머 총리는 어려서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런던 길드홀 음대 주니어 과정을 수학했다.)

사이먼 래틀의 주장처럼, 영국의 미래 세대를 위해 LSO 전용 콘서트홀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오래 감독한 영국 로열 오페라는 부유층과 관광객 주머니에서 자금을 조달했지만, LSO는 중산층 관객의 소비를 진작해야 하는데, 적절한 방안이 있을까?

런던에 새로운 홀을 짓자는 이야기에 대해 나는 아직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런던에 새 공연장을 건립하자는 의견은 매우 타당하며 아주 중요한 이슈다. 물론 LSO가 상주하는 바비칸 센터를 좋아하고 악단의 고향으로 느끼지만, 이 공간에 적합하지 않은 음악이 너무 많다는 것을 절감한다. 런던은 클래식 음악에 전념하는 장소, 더 현대적이고 더 유연하며 더 교육의 중심이 되는 장소가 필요하다.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꺼내기엔 이른 시기지만, LSO가 금융 중심지인 런던에 근거하는 점을 상기해 보자. 악단과 런던 금융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관계를 발전시킨다면 미래 전략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LSO 재무 위원회는 UBS 은행 부회장 출신 리처드 하디가 의장으로 있다. 하디는 UBS의 LSO 후원에 핵심 역할을 했지만, UBS는 러-우 전쟁 이후 러시아 권역 금융업을 철수하면서 주춤했고, 악단 후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금까지 발매한 당신의 EMI 음반은 워너 뮤직에 인수됐고 앞으로 LSO와 함께한 대부분 음원은 악단 자체 레이블에 남게 될 것이다. LSO도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 서비스처럼 실시간 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 도입이 필요할지 모른다. LSO 수석지휘자 재임 동안 당신이 추구할 악단의 이상적인 아카이빙 형태는 무엇인가?

EMI, 지금은 워너 클래식스가 된 레이블과 나는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여전히 가족으로 느낀다. 이 관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체 레이블인 ‘LSO Live’는 악단 입장에선 환상적인 리코딩 아웃렛으로 LSO는 여기에 여러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나 역시 운 좋게도 몇 장을 녹음했고 앞으로도 몇 장의 음반이 발매될 예정이라 매우 고대 중이다. LSO 전용 비디오 라이브 플랫폼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베를린필의 플랫폼은 잘 알고 있지만, 내가 이를 언급하는 건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우리의 모든 녹음이 현재 자체 레이블(LSO Live)로 제작되고 있으며, 음반이 가져야 하는 감동과 흥분을 선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LSO는 BMW클래식을 유튜브로, 파파노 지휘의 브리튼 ‘전쟁 레퀴엠’ 프롬스 실황을 BBC i플레이어로 중계했지만 자체 유료 플랫폼은 없다. LSO의 주요 정기 연주회 역시 외주 플랫폼 마르퀴에서 중계된다.)

LSO 수석지휘자 중 말러 교향곡을 임기의 중점 레퍼토리로 삼지 않은 이는 없었다. 또한 엘가와 같은 영국 작곡가의 유산을 탐구하는 것 역시 LSO의 오랜 임무인데, 이 두 가지를 실천할 계획인가?

재임 기간 중 말러 전곡 완성 여부는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말러에 관심이 있지만 브루크너에도 똑같이 관심이 있다. 그러나 두 작곡가의 교향곡을 모두 지휘하는 게 목표는 아니다. 나는 좋아하는 레퍼토리가 있고, 향후 몇 시즌 동안 집중할 작품은 바로 이 곡들이 될 것이다. 본 윌리엄스, 윌리엄 월튼, 에드워드 엘가, 토머스 아데스, 마크앤서니 터니지, 엘리자베스 매컨키, 아널드 백스 같은 잉글랜드 음악과 영국 음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런 작곡가의 작품은 그동안 관객이 충분히 즐기지 못한, 무척이나 감성적인 음악이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간다. 본 윌리엄스의 9개 교향곡은 서로 다른 매력을 지녔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에 비견할 수 있다. 본 윌리엄스 교향곡 전곡은 반드시 녹음하고자 하며, 현재 가장 소중히 여기는 프로젝트이다.

팬데믹 동안 작성한 회고록 ‘음악 안의 내 인생(My Life In Music/2024)’이 출판됐다. 이밖에 팬데믹에서 얻은 배움이 있을까? 만일 팬데믹을 다시 맞는다면 클래식 음악의 생태계는 2020~2022년과 어떻게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보는가?

우리 모두의 삶이 거의 멈춘 팬데믹 시기는 여러모로 내게 긍정적인 경험이었다. 물론 음악 업계 입장에선 전반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고 많은 이들이 일자리와 생계, 삶을 잃었다. 하지만 이 강제 중단은 스스로 고민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잠시 멈춰서 지난 몇 년 동안 해온 일을 돌아보고, 몇 가지 조정과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준 귀중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열심히 일해온 지난 30년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에 감사한다. ‘음악 안의 내 인생’은 극장, 오페라하우스의 일에 관한 책으로, 팬데믹 기간에 떠올려 그것이 끝날 무렵에 마무리했다. 또 다른 팬데믹의 대처 방식은 아직 깊이 고민하지 않았고, 여러 교훈은 의료와 기술 분야에서 빛나 언급하기 어렵지만, 실직 음악가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더 체계화되길 바란다.

앙드레 프레빈의 사망 이후, BBC 음악 다큐멘터리에 가장 적합한 음악가는 당신일 것이다. 파파노의 ‘클래식 보이스’ 같은 명작을 BBC에서 다시 진행할 용의가 있는가?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미디어를 이용하는 건 대단한 일이다. BBC와는 더 많은 방송 작업을 하고 싶으며, LSO를 위해 시청각 작업과 스트리밍을 꽤 여럿 진행할 계획이다. 현재 논의 중이며,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클래식 보이스’를 진행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뭐든 가능하다. 그래도 지금은 교향곡과 악단에 대해 더 이야기해야 할 시간이다. 이것이 내 새로운 삶이다.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사진 런던 심포니

 

안토니오 파파노(1959~) 2002년부터 올해까지 로열 오페라 음악감독, 2005년부터 2023년까지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뉴욕 시티 오페라에서 리허설 반주자로 활동하다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발탁되어 그의 조수가 되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안토니오 파파노/런던 심포니(협연 유자 왕)

10월 1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시마노프스키 연주회용 서곡 Op.12,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말러 교향곡 1번

10월 3일 롯데콘서트홀

베를리오즈 ‘로마의 사육제 서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 생상스 교향곡 3번 ‘오르간’

10월 4일 남한산성아트홀 대극장

10월 5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 말러 교향곡 1번

 


 

APPENDIX Ⅰ.

 

역대 LSO의 수석지휘자 120년의 기록,

17명의 지휘자 위기와 전성기를 오가며 세계 최고의 자리로 올라서기까지

 

초대 수석지휘자 1904~1911

한스 리히터 1843~191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작곡가·지휘자였던 리히터는 1904년 6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하며 7년간 수석지휘자로 활동했다. 퀸스홀에서 열린 창단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포함한 바흐·모차르트·엘가·리스트의 작품들.

제2대 수석지휘자 1911~1912

에드워드 엘가 1857~1934 그가 가장 활발하게 작곡하던 시기는 1899~ 1920년이었고, LSO는 엘가의 여러 작품을 연주하며 서로 영감을 나눴다.

제3대 수석지휘자 1912~1914

아르투어 니키슈 1855~1922 1895~1922년 동안 베를린필의 수석지휘자로 활동했던 헝가리 출신의 지휘자로, 당시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까지 맡고 있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영국 교향악단 최초의 미국 투어를 달성했다. 이 미국 투어를 위해 100명의 LSO 단원은 타이타닉(!)의 표를 예약했으나, 투어 일정이 변경되어 다른 배에 탑승했던 일화가 있다.

제4대 수석지휘자 1915~1916

토머스 비첨 1879~1961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의 모든 예술은 축소됐고, LSO의 재정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그때 악단을 구원한 것은 비첨의 어마어마한 기부금이었다.

제5대 수석지휘자 1919~1922

앨버트 코츠 1882~1953 니키슈의 제자인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 영국 지휘자. 그는 오페라와 러시아 레퍼토리에 강했고, LSO의 초기 음반 작업을 이끌었다. 그가 사임한 뒤 LSO는 수석지휘자 없이 여러 객원 지휘자를 두는 방식을 택했다. 당시의 객원 지휘자는 엘가, 비첨, 세르게이 쿠세비츠키(1874~1951), 브루노 발터(1876~1962), 오토 클렘페러(1885~1973), 빌헬름 푸르트뱅글러(1886~1954).

제6대 수석지휘자 1930~1931

빌럼 멩엘베르흐 1871~1951 네덜란드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로, 당시 토스카니니와 함께 뉴욕필의 공동 상임지휘자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 LSO는 BBC 심포니와 같이 정기 급여를 받는 오케스트라에 밀려 여러 단원을 잃었고, 멩엘베르흐는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제7대 수석지휘자 1932~1935

해밀턴 하티 1879~1941 할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던 그는 수석지휘자로 임명되면서 할레 오케스트라의 뛰어난 연주자를 LSO로 데려와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제8대 수석지휘자 1950~1954

요제프 크립스 1902~1974 오스트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길을 헤매던 LSO에게 음악적 길을 선사했다. 그가 취임한 후 LSO 연주에 대한 평이 좋아졌으며, 데카 레이블에서 녹음 작업을 착수하게 됐다.

제9대 수석지휘자 1961~1964

피에르 몽퇴 1875~1964 취임 당시 86세였던 프랑스의 지휘자로, 1911~1914년에 디아길레프와 함께 했으며,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를 초연하고 ‘봄의 제전’ ‘다프니스와 클로에’ 등을 지휘했다. 덕분에 LSO는 그의 재임 기간에 여러 프랑스 레퍼토리를 추가했고, 그의 명성에 힘입어 도약했다.

제10대 수석지휘자 1965~1968

이슈트반 케르테스 1929~1973 헝가리의 지휘자로 그의 재임 기간에는 드보르자크 9개 교향곡을 비롯해 버르토크의 ‘푸른 수염 영주의 성’을 녹음했다.

제11대 수석지휘자 1968~1979

앙드레 프레빈 1929~2019 클래식 음악은 물론 할리우드 영화음악과 재즈 분야까지 폭넓은 성공을 쌓던 그는 휴스턴 심포니의 음악감독에 이어 LSO를 맡게 됐다. 11년간 재임하며 당시 LSO의 최장기 수석지휘자로 기록됐고, 악단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BBC에서 진행한 ‘앙드레 프레빈과 음악의 밤’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LSO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승리와 격변의 세기: 런던 심포니’의 저자 리처드 모리슨은 “65년 동안 LSO 공연을 본 관객보다 이번 주 ‘음악의 밤’의 시청자가 더 많다”라고 기록했다.

제12대 수석지휘자 1979~1988

클라우디오 아바도 1933~2014 1971년부터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전임자와 너무나 대조적인 해석과 러퍼토리, 그리고 강경한 규율로 인해 악단의 사기가 꺾이곤 했다. 그는 이 당시 보스턴 심포니·시카고 심포니·빈필과 자주 녹음했는데, 이런 바쁜 일정이 악단에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제13대 수석지휘자 1988~1995

마이클 틸슨 토머스 1944~ LSO 디스커버리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LSO는 1966년부터 객원 지휘를 해온 레너드 번스타인과 더욱 긴밀한 사이가 됐으며, 틸슨 토머스는 그와 함께 퍼시픽 음악 축제를 창립하는 등 좋은 시너지를 냈다. 또한 전임자의 기간에 침체되어 있던 LSO의 방송활동도 다시 활성화 됐다.

제14대 수석지휘자 1995~2006

콜린 데이비스 1927~2013 1959년부터 LSO를 지휘해왔다. 보다 일찍 수석지휘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만큼, 그는 좋은 평을 받았다. 2003년 UBS의 지원을 얻어내 바비칸 센터 근처에 LSO 성 루카 교육 센터를 개관하게 됐다. 데이비스는 지금까지의 LSO 역사상 최장기 수석 지휘자로 남아있으며, 임기가 끝나고 LSO의 회장직을 맡았다.

제15대 수석지휘자 2006~2015

발레리 게르기예프 1953~ 수석지휘자로 임명되기 전, 그는 LSO와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전곡을 녹음했다. 이외에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으며, 해외 투어를 적극적으로 임했다. 바비칸 센터에서 진행된 말러 교향곡 전곡 시리즈는 모든 공연이 매진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자랑했다.

제16대 음악감독 2017~2024

사이먼 래틀 1955~ 1977년, 22세 때부터 LSO를 지휘했던 그는 40년 만에 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됐다. 2012년 런던 올릭픽 개막식에서 LSO와 함께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독특하게 그의 이전에는 모두 ‘수석지휘자’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오직 래틀만이 ‘음악감독’이라는 직책으로 임명됐다. 그의 첫 계약 기간은 5년이었으며, 2021년에 2023/24시즌까지 계약을 갱신하여 임기를 마쳤다. 이후 래틀은 LSO 명예 지휘자 칭호를 얻었다.

제17대 수석지휘자 2024~

안토니오 파파노 1959~

이의정 기자

 


 

APPENDIX Ⅱ.

 

LSO 이모저모

키워드로 알아보는 런던 심포니

교육·전용홀·영화음악 이야기

 

KEYWORD 1. LSO 디스커버리

아이부터 노인, 비전공자와 전공자까지 ‘LSO 디스커버리’는 악단이 1988년부터 시행해 온 프로젝트의 명칭으로,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매년 1,000개의 워크숍과 강연을 통해 6만 명의 사람에게 ‘음악을 직접 만드는 경험(Music-Making)’을 선사하고 있다.

프로그램은 대상자마다 다르게 나눠져있다. 어린이·청소년이 참여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합창단 아카데미, 학교의 학급이 단체로 참여하는 학교 콘서트, 학생을 가르치는 초등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 5세 미만 아동과 부모가 함께 악기를 연주하는 가족 공연, 장애인과 노인이 신체를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연주 프로그램까지 마련되어 있다. 또한 전문 음악가로 나아가려는 신진 아티스트를 교육하는 워크숍도 있다. 연주자를 위한 LSO 단원과의 멘토링, 마스터클래스, 대학원 장학금 사업이 있으며, 작곡가를 위한 창작품 실연 프로그램, 오케스트라 작곡법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또한 매년 젊은 지휘자를 선발하는 도나텔라 플리크 지휘 콩쿠르를 개최 중이다.

 

KEYWORD 2. 전용홀 건립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LSO의 고민 LSO는 1982년 바비칸 센터의 완공부터 지금까지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있다. 문제는 이곳을 상주홀로 삼고 있는 것은 BBC 심포니도 마찬가지라는 점. 또한 바비칸 센터의 고질적인 음향 문제는 연주자, 평론가, 관객을 막론하고 모두가 지적하는 단점이다. 제16대 음악감독인 사이먼 래틀은 초기부터 이 문제를 지적하며 악단을 위한 전용홀 건설을 주장했고, 런던시와 이를 진지하게 대화했지만 확답을 얻어내지 못하고 임기를 마쳤다. 물론 ‘가디언’지가 적은 것처럼 래틀이 “홀 때문에 런던에 온 것이 아니고, 홀 때문에 런던을 떠나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시기 동안 브렉시트-팬데믹이 연속되면서 전용홀에 대한 전망이 어두워진 것은 LSO에게 아쉬운 일이다. 새 시대를 맞은 LSO가 120년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런던 심포니

 

KEYWORD 3. 영화음악

경영의 돌파구가 악단의 개성으로!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영국에는 BBC 심포니·런던 필하모닉을 비롯한 여러 오케스트라가 창단되기 시작했고,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재정 문제와 급여 문제를 겪고 있던 LSO는 새로 등장하는 경쟁 악단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수석지휘자의 공백기로 1935~1950년의 악단은 객원 지휘자로 유지됐다. 이 어려운 상황에도 악단이 해체되지 않았던 것은 LSO가 1935년부터 영화음악을 녹음하며 돌파구를 찾았기 때문이다.

LSO의 첫 영화음악 녹음은 윌리엄 캐머런 멘지스(1896~1957)의 SF 영화 ‘다가올 세상(Things To Come)’이다. 당시 정통 클래식 오케스트라가 영화음악을 녹음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기에, LSO의 녹음은 영화음악 산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935년부터 2024년까지 LSO가 녹음한 사운드트랙은 280여 편이며, 그중 70편은 악단이 어려웠던 시절인 1940~1955년 사이의 작업이다.

기념비적인 녹음은 단연 1977년 존 윌리엄스와 함께한 ‘스타워즈’ 사운드트랙이다. ‘빰-밤, 빠라라 빠-밤’과 ‘딴, 딴, 딴, 딴따단, 딴따단-’하면 모두가 아는 그 사운드트랙은 지금도 LSO가 영화음악 녹음과 콘서트를 지속하게 한 중요한 이정표였다. 그외에 잘 알려진 사운드트랙으로는 역시 존 윌리엄스와 함께한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2002)을 꼽을 수 있다. 나아가 LSO는 최근 새로운 문화예술로 꼽히는 게임음악 녹음에도 다수 참여하고 있다.

 


 

APPENDIX Ⅲ.

 

LSO 더블베이스 단원 임채문

수평적 구조가 만드는 전율

한국인 최초로 종신 단원이 된 그가 전하는 악단 이야기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에 한국인 연주자가 입단하는 소식은 이따금 들려오곤 했지만, 한 손에 꼽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입단 소식은 무척이나 귀했다. 그러던 중 2023년, 더블베이시스트 임채문이 LSO 입단 오디션에 통과했다는 낭보를 알렸다. 이어진 수습 기간을 마치고 1년 뒤인 올해 1월, 모든 심사 끝에 그는 종신 단원으로 임명됐다. 그의 입을 빌려, LSO 단원의 생활을 살펴보자.

단원 오디션을 보기 전에는 영국 악단 경험이 전혀 없어서 걱정했다고. 현재는 영국 방식의 연주에 적응했나?

영국 악단들은 대개 프렌치 보우(활)를 쓰는 편인데, 이를 내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악단과 단원들은 각자의 방식을 상당히 존중하고 인정해 주면서 새로운 단원이 편하게 녹아들 수 있도록 한다. 리허설 중 가끔은 수석 또는 다른 단원이 내게 ‘독일에선 이 악구를 어떻게 연주하나’ 등 의견을 묻기도 한다. 내가 어떤 연주 방식을 보고 모사하는 것은 이를 이해하고 연주하는 것과 다르며, 때마다 타인에게 연주법을 맞추는 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입단 이후 2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다양한 지휘자를 겪었다. 기억나는 공연을 꼽는다면?

안토니오 파파노가 2023년 수석지휘자 후임으로 지명된 후 펼친 첫 프로그램, 그 스페인 투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프로그램은 R.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고, 나는 이 작품을 한국에서도, 독일에서도 연주했지만 가장 와닿은 것은 그 10월의 연주였다.

파파노 지휘의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9월 11일, 2024/25 시즌 첫 연주에서 받은 느낌과 인상이 있다. 파파노는 우리와 함께할 때 지휘봉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유려한 두 손짓으로 가끔은 아주 예민하고 섬세하게, 때로는 직설적으로 과감하게 선을 그리듯 음악을 펼친다. 단원들은 이를 보면서 다양한 색과 인물을 만들어내니, 함께 그림을 그리는 듯하다.

무대 밖에서 파파노는 어떤 사람인가?

매우 친근한 사람이다. 보통 영미권에서는 격식의 의미로 성을 부르곤 하는데, 파파노는 스스로 우리에게 자신을 별칭인 ‘토니’라고 부르라 한다. 무게를 잡는 성격이 아닌데, 무대에 오르면 그의 카리스마가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오히려 평소에 거리감 없이 지내는 것 같다. 수평적인 문화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LSO의 관객인 런던 시민의 관심과 반응은 어떠한가?

공연은 대부분 매진이거나 매진에 가깝다. 사람들이 말하길 런던 관객은 매우 열광적이어서 공연이 별로면 객석에서 야유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또한 LSO는 전통 클래식 외의 프로그램이나 어린이 음악회도 진행하기 때문에 내가 겪어본 독일과 비교하여 관객층이 비교적 젊은 편이었다.

이 악단의 단원으로 활동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이 있을까?

세계적인 지휘자와 협연자를 꾸준히 겪을 수 있다는 점. 지난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재닌 얀센과 함께 투어 공연이 있었는데, 앙코르곡으로 바이올린 소나타를 준비하여 파파노의 피아노와 함께 연주하였다. 그때 피아노가 내 바로 옆 1미터 거리에 놓여 있었고, 얀센의 운지법과 보잉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어서 많은 공부가 되었다. 이런 기회가 참 감사했다.

정식 단원이 된 후 한국으로 투어를 오게 됐다. 공연에 관한 짧은 소개를 부탁한다.

내한 때 연주하는 말러 1번의 3악장은 더블베이스 솔로 시작한다. 내가 연주하는 것은 아니지만(웃음), 기대해달라. 마지막에 폭발할 것 같은 호른도 매우 멋지고, 흥미진진한 요소가 무척 많을 것이다.

이의정 기자

 

임채문(1995~) 울산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베를린 국립음대와 쾰른 음대에서 수학했다. 안톤 루빈스타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 2위를 달성했으며,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아카데미를 거쳐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NDR 엘프필하모니 등에서 객원 연주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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